•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염화실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 문서자료실 스크랩 선의 풍토 -숲의 종교. 사막의 종교- / 《불교수행의 길》7
subori1004 추천 0 조회 226 18.01.19 14: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불교수행의 길》7



선의 풍토

-숲의 종교. 사막의 종교-



『선의 풍토 -숲의 종교. 사막의 종교-』를 펴내면서


요가나 명상과 같은 독특한 종교 문화가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여러 가지 무수한 이유들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인도의 지리적‧기후적인 조건과 같은 풍토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풍토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이나 기후 그 모두를 의미한다.

오늘날 세계 종교들을 이러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동양에서 발생한 숲의 사고적인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발생한 사막의 사고적인 종교이다. 서로 다른 이 두 종교 문화의 비교를 통해서 인간 사고의 본질과 삶의 지혜를 더욱 분명하게 살펴 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각원에서 펴내는《불교수행의 길》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인 선의 풍토 지리적인 위치나 기후적인 변화의 총체인 풍토를 바탕으로한 인간의 종교 문화 형성의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만든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풍토를 일구어 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자각적인 사고에 의한 것임을 염두해 두길 바란다.


불기 2545년 3월 1일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각원장 정 성본 합장



차 례

1. 인도의 기후와 풍토

2. 숲의 사고와 사막의 사고

3. 원환적인 사고와 직선적인 사고

4. 행위에 대한 판단의 기준

5. 길의 문화와 개척과 정복의 문화

6. 인간 중심과 신 중심의 윤리관

7. 시간성과 공간성의 인식구조

8. 숲의 사고와 사막의 사고와의 차이

    1) 절대성과 상대성

    2) 정적 내향성과 동적 외향성

    3) 동서양 종교의 구원론

# <도표> 숲의 종교와 사막의 종교



1. 인도의 기후와 풍토


세계문화를 유형별(類型別)로 그 특징을 살펴 볼 때, 그리스의 문화는 철학적이고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을 비롯하여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의 고대 건축이나 조각, 음악이나 미술 등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인도의 문화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요가나 명상을 통하여 이룩한 종교 철학이며, 인간의 현실적인 세계를 괴로움(苦)의 세계인 사바(saha, 裟婆, 忍土 ; 참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계)세계라고 보고 이러한 괴로움의 세계에서 해탈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사상과 수행(요가나 고행)을 하고 있다.

중국의 문화를 살펴보면 상당히 정치적이며, 세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忠孝의 정신을 바탕으로한 현실을 긍정하는 인간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문화를 이룩하고 있다. 따라서 유교에서 말하는 교(敎)는 종교적인 의미의 교가 아니라, 교육적인 교이며 도덕적인 의미의 교이다. 말하자면 유교의 교는 인간의 도덕적인 행실과 윤리적인 예의를 가르치고 배우는 예교(禮敎)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 혹은 문명이라고 하면 인간이 사유(思惟)하고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언어나 문자를 비롯하여 생활의 지혜로 만든 지식이나 생활도구, 예술 등을 말한다.

세계의 문명이나 문화를 통해서 살펴 볼 때, 어느 종교문화나 철학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인도의 독창적인 문화의 하나가 사유와 명상의 문화이다. 인도에서 발생한 요가의 사유 문화는 인도의 종교와 철학, 예술, 사상 등 모든 문화를 배양시킨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기원전 3000­~2500년경에 성립된 고대 인더스(Indus)문명의 유적지인 모헨조다로(Mohenjo- daro)나 하라파(Harappa)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 요가(Yoga)를 하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인장(印章)과 성자(聖者)의 흉상에서도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요가 명상의 문화는 기원전 1500년경에 인도를 침입한 아리아인(Aryan)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인도 고대의 토착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진 독창적인 사유의 문화이다.

특히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의 인더스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활석제(滑石製)로 만들어진 인장에는 신의 모습과 환상적인 그림, 성스러운 나무 등 반상형 문자와 400여종에 달하는 음절문자(音節文字)와 표의문자(表意文字)의 기호가 새겨져 있으나 아직 이를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3개의 인장 가운데 수주(獸主)의 모양과 요가의 좌선상(坐禪像)의 모양이 새겨진 문양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원주민에 의해 실천된 요가라는 사유와, 종교적인 실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요가상이 새겨진 인장을 살펴보면 좌선상 위에 양다리를 벌리고 앉아 두 손을 양쪽의 무릎 위에 가볍게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실제로 요가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제(石製)의 흉상(胸像)이 있었다. 이 흉상은 기원전 20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 수행승들이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오른쪽 어깨의 맨살을 들어내 보이고 있는 의상을 걸치고 있으며, 눈은 반쯤 뜨고 코는 높고, 입은 꼭 다문 표정은 바로 요가 聖者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원주민(토착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독창적인 사유법인 요가가 인도라는 지역에서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서 요가, 선이 인도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조건이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자는 그 중요한 요인의 하나를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인 조건과 기후 등으로 인한 풍토적인 입장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풍토란 인간이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이나 기후 그 모두를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생활 환경 속에서 사유하고 노력하며 보다 나은 생활의 지혜와 종교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다. 요가의 명상도 고대 인도의 토착인들이 인도의 지리적, 기후적 생활 환경 속에서 생활의 지혜로서 이룩한 종교 문화이기에 그러한 요가 명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환경 조건 등 선의 풍토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지형적으로 북쪽에는 세계의 설산(雪山) 히말라야산이 우뚝 가로질러 솟아 있고, 왼쪽에는 인더스강이 오른쪽에는 갠지스강이 흐르고 있으며, 기후적으로는 서남(西南) 계절풍이 부는 몬순(monsoon)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몬순지대는 약 반년을 주기로 겨울에는 대륙에서 대양으로, 여름에는 이와 반대로 대양에서 대륙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대륙 변방 지대이다.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도 몬순 지대에 속하지만 비바람과 강우량은 인도와 비교도 안될 만큼 적다.

인도에서 이러한 계절풍이 부는 4월에서 7, 8월까지의 우기 철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많은 비가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밖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다닐 수도 없다. 대개의 동양인들은 집을 짓고 농사일을 하면서, 가정을 가꾸는 안정되고 정착된 생활을 영위하는 농경문화 생활을 한다. 따라서 대지나 흙, 비바람 등 모든 자연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가 있다. 인도인들도 몬순이란 계절풍과 더불어 몰려오는 비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을 하였다.

사막에서의 빗물은 그야말로 생명수이며, 감로수이다. 마찬가지로 농경생활에 있어서 비는 생명수임과 동시에 대지의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를 양육시키고 있다. 때문에 인도인들은 대지의 생명수와 자연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조용히 집에서 명상을 하며 몬순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이처럼 고대 인도인들은 거센 몬순의 우기철에는 외부의 출입을 자제하고, 가만히 집에서 안주하여 신을 생각하거나 자기 자신의 존재를 관찰하는 요가의 선정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불교에서도 부처님 당시부터 이 기간에는 유행(遊行)을 하지말고 정사(精舍)에 머물면서 안주(安住)하며 선정(禪定)을 닦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 기간을 하안거(夏安居)라고 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 까뮤의 스승인 그르니에(Grenier, Jean)의 『섬(孤島)』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을 전하고 있다.


"오늘날 사상으로 볼 때 지리적인 연구는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시론을 쓰는 것이 오히려 적절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간디를 방문하기 위해 찾아온 유바르 무게르지는 간디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들의 인도민족은 환경과 풍토 때문에 명상의 문화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 말은 지형학적인 결정론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간디는 곧 바로 이와 같은 조급한 결론을 부정했다.

“이것이 똑같은 환경과 풍토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게도 이러한 사실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형학적인 결정론이 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 민족은 우리 인도와 아주 비슷한 기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명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스러운 인도사람들은 히말라야의 눈이 덮인 동굴 속에 앉아 신에 대하여 명상을 한다. 따라서 자네도 풍토가 정신(魂)을 만들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정신이 풍토를 이용한 것이다.” "


지극히 지당한 말이다. 몬순의 계절풍이 불어닥치는 인도의 풍토가 인도인의 정신인 요가 명상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도인들의 예지와 정신이 그러한 풍토를 이용해서 신을 명상하는 종교적인 인생과 지혜로운 생활의 삶을 창조한 것이다.

일본의 철학자인 와쯔지 데쯔로(和哲郞)는 『풍토(風土)』에서 “인간은 과거를 짊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수한 풍토적인 과거를 짊어지고 있다. 풍토는 가끔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 이외에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 토지의 특유한 추위에 견딜 수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집을 만드는 관습과 같이 그 민족의 정신 구조 가운데 깊이 박혀져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日本 岩波書店, 1935년)

인도의 몬순이라는 계절풍과 기후적인 풍토에서 요가와 사유의 문화가 만들어 진 것처럼, 풍토는 인간의 생활 문화와 습관에 있어서 중요한 환경을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숲의 사고와 사막의 사고


오늘날의 세계 종교의 형성을 풍토적인 입장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인도나 중국 등 동양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나 철학은 숲(森, 森林)의 사고적인 종교로 이스라엘과 아랍 등 서양에서 발생한 유태교(猶太敎), 기독교(基督敎), 이슬람교 등의 일신교(一神敎)를 사막의 사고적인 종교로 구분할 수가 있다.

여기서 숲의 사고와 사막적인 사고를 비교하여 동서양에서 각기 형성되고 발전된 인간적인 사상과 종교문화의 근원을 풍토적인 입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어느 한 지역에서 형성된 사상이나 문화, 종교 등의 본질과 특성을 서로 다른 문화의 입장에서 비교하여 인간 사고의 본질과 삶의 지혜를 더욱 분명하게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숲 속의 길과 이정표


먼저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형성된 동양의 종교를〈숲의 사고적인 숲의 종교〉라고 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집(家)을 중심으로 농경지인 대자연(숲)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면서 삶의 지혜와 종교문화를 형성하는 생활환경과 풍토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역시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오의서(奧義書) 혹은 삼림서(森林書)라고 하는 것은 우파니샤드 철학가와 종교가들이 숲 속에 들어가서 깊은 명상에 잠겨 요가의 수행을 하기 때문이다.

붓다 역시 출가하여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깊은 명상에 잠겨 깨달음(正覺)을 이룬 사실을 비롯하여, 『유마경』에도 숲 속에서 선정에 들어있는 사리불(舍利弗)을 유마가 비판한 이야기나, 『열반경』의 유명한 설산동자(雪山童子)의 구법(求法)이야기는 숲의 종교적인 환경과 풍토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불교는 숲의 사고에서 이루어진 종교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산스크리트본(梵本)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 다음과 같은 일절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수행자들이여! 여기에 오백유순(五百由旬)이나 되는 넓고 사람의 자취마저 끊어진 밀림(密林)이 있는데,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고 하자.

진귀하고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가기 위해서는 현명한 학식과 민첩한 정신력이 있으며, 밀림의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잘 알고 있어, 여러 사람들(隊商)을 거느리고 인도하여 그 험난하고 거친 밀림을 통과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안내인(導師)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거느린 많은 사람들이 피곤함에 지치고 밀림의 두려움과 불안 공포에 떨면서 안내인에게 말하길, “안내인이여! 우리들은 극도로 피곤하고, 밀림에서 겁도 나고 두려워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도저히 나아갈 수 없으니 되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적이 없는 이 밀림은 너무나도 아득히 멀리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이때에 그 안내인은 사람들이 지치고 불안해서 모두 되돌아가려고 하고 있음을 알고,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참으로 불쌍한 이 사람들을 이대로는 보물이 있는 곳(寶所)까지 데리고 갈 수가 없겠구나!’ 그래서 그 안내인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교묘한 수단 방편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밀림의 한 가운데 백유순(百由旬), 혹은 이백유순(二百由旬), 내지 삼백유순(三百由旬) 저 쪽에 신통력으로 하나의 성(城)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두려워하지 마시오. 저곳에는 커다란 마을이 있으니 저곳에 가서 쉬도록 합시다. 자 여러분들! 안심하고 저곳에서 쉬는 것이 좋겠소. 저곳에서 일단 쉬었다가 일이 있는 사람은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밀림에 들어간 사람들은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우리들은 인적이 없었던 밀림을 통과한 것이다. 안심하고 여기에 머물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신통력으로 만든 성(城)에 들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 안심이다. 기분이 상쾌하다.”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안내인은 사람들의 지친 피곤함이 없어진 후에 신통력으로 만든 도성(都城)을 없애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 여러분! 이곳으로 오시오. 보물이 있는 곳은 이제 가깝습니다. 이 성(城)은 여러분들을 휴식시키기 위해 내가 임시로 만든 것입니다.”라고.(『법화경』岩波文庫本, 中卷, pp. 73­75)"


여기서 말하는 안내인(導師)은 여래(如來)이며 붓다(경전에는 여래를 도사(導師), 의사(醫師)로 비유하는 경우는 많다.)이고, 그가 인도하는 많은 사람들은 중생이다. 그리고 밀림은 생노병사(生老病死)와 번뇌, 고뇌에 허덕이는 사바세계이며, 인생의 험난한 길을 다양한 방편으로 인도하여 깨달음의 세계, 해탈 열반의 세계, 일불승(一佛乘)(寶所)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붓다의 중생교화의 자비정신을 비유로 제시하고 있는 일단이다.

또 『상응부경전』1265의 「도성(都城)」이라는 제목의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팔정도(八正道)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길이 없는 숲 속(森林)을 헤매고 있을 때 우연히 옛사람(古人)이 지나간 흔적이 있는 듯한 옛 길(古道)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 사람은 그 길의 흔적을 따라서 걸어가다가 고인이 안주(居住)한 듯한 고성(古城)이나 정원, 연못 등이 있는 옛 도시를 발견했다. 그 사람은 뒤에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서 왕과 대신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왕과 대신들은 그곳에다 도성(都城)을 다시 만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성은 번창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번영을 이루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여! 나는 과거에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이 더듬은 옛 길(古道, 古俓)을 발견한 것이다. 과거의 성자들, 즉 제불(諸佛)이 거쳐간 옛 길(古俓)이란 다름 아닌 팔정도(八正道)인 것이다.

나는 이 길(道)을 따라서 가는 도중에 늙고 죽음(老死)의 괴로움(苦)을 알고, 늙고 죽음(老死)의 원인을 알았고, 늙고 죽음에 대한 괴로움의 소멸(苦의 滅)을 깨닫고 불타(佛陀)가 되었다. 이것을 선남자(善男子), 선남녀(善女人)들에게 가르친 것이며, 이 팔정도가 점차로 확대되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계속해서 설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누구에 의해서 만든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도 옛 사람이 닦고 거쳐간 행리(行履, 道跡)에 따라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법이 모두 있었던 것을 직접 수행하고 깨달음을 통해서 발견하고 그것을 믿고 잘 따라서(隨順)하여 실천한 것이다.

팔정도도 석존의 독창이 아니라 불교이전의 많은 종교가들에 의해 주장되고 실행되었던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주술적인 요소(呪術性)가 없으며, 스스로 몸과 마음을 제어(制御)하고 자제할 수 있는 실천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팔정도는 이상적인 불교의 인간상을 실현 할 수 있도록 일상생활에서 실행할 수 있는 실천법만을 모아서 묶은 구체적인 실천 덕목이다.

석존은 자신이 제시한 팔정도의 실천체계를 처음으로 창조한 수행의 자취(道跡)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숲에서는 흙과 바위, 나무와 풀 등 많은 생명체가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똑같은 것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정표를 남길 수가 있다. 따라서 왔던 길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과 정력을 소모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숲에서는 먼저 그 숲의 어디에 새겨져있는 선배들이 남긴 이정표를 따라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이 숲의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정표를 만들어 갈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그 숲에서 미아가 된 사람도 자신이 만든 그 이정표를 만나면 무사히 그 숲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조당집』 제9권에도 "부처와 조사는 옛길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의『경전』은 부처님이 미아가 되어 살고 있는 중생들을 사바세계의 숲에서 안전하게 빠져 나와 편안한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제시된 길과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형성된 동양의 거의 모든 종교는 대자연인 숲의 환경과 풍토적인 사고에서 형성된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숲이라는 환경과 풍토적인 사고의 기반은 대지성(大地性)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연환경의 대지 위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종교를 이루고 있다. 즉 인간이 자기 집(家)을 중심으로 대자연의 환경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농경 문화의 생활 풍토를 근거로 하는 사유에서 성립된 생활의 종교이다.

인간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농토는 물론 산과 강물, 나무와 풀이 무성한 자연 환경 속에서 마을을 형성하고 집단적인 부족사회를 구성하며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 중심의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평화스러운 농경 생활의 촌락사회에서 인간 각자가 안정된 요가 명상과 사유를 통하여 참된 삶의 가치와 인격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적인 종교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숲의 종교에서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일체의 모든 존재는 본래 하나이다라고 하는 『신심명』의 만법일여(萬法一如)나 신토불이(身土不二), 혹은 만물일체적(萬物一體的)이라는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인간도 대자연의 하나일 뿐만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대화하며, 자연과 더불어 동화되는 삶으로 인간의 생활을 가꾸며 살아왔다.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형성된 노장(老莊)사상도 "하늘과 땅이 같은 뿌리요, 만물의 모든 근본은 하나(天地同根, 萬物一體)."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생활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숲의 종교는 인간이 숲이라는 대자연을 떠나서 형성될 수 없는 사상이며, 인간이 자연환경이라는 생활토대를 통해서 익힌 가장 현실적인 인간생활의 지혜로 이루어진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 (건괘, 上 九)에 "亢龍有悔"라는 해석이 있다. 이는 최고로 좋은 점괘(占卦)의 설명으로 "하늘에 오른 용(龍)은 반드시 후회한다."는 의미이다. 용이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승천으로 이보다 더 좋은 일이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늘에 오른 용은 다시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별달리 갈 수 있는 길이 없기에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정말 대지와 자연을 토대로 하여 숲의 생활풍토에 살고 있는 동양인들의 사유로 체득된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대지의 자연은 숲의 환경과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터전이며, 고향이다. 대지는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생명체의 근거가 되는 모체(母體)인 것이다. 이 대지를 떠나서는 어떤 존재라도 살아 갈 수가 없다. 인간도 이 대지(숲)를 근거로 하여 각자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지와 더불어 자기의 삶을 가꾸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생활의 종교가 불교인 것이다.

하늘(天上)이 좋은 곳처럼 보이지만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안정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동양인들에게 천당이나 극락, 하늘(天上)은 단지 희망사항이나 동경의 대상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 이상의 세계인 극락이나 정토도 각자의 마음에서 깨달아 체득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극락이나 정토의 세계가 머무름의 종착지가 아니라, 다시 중생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로 되돌아와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이다.


사막의 길과 이정표


사막의 종교에서는 하늘(天日性)을 바탕으로 하는 절대 창조자인 신 중심의 종교가 형성되었다. 천지 만물의 창조자이며 전지 전능한 절대 초월자인 유일신만을 믿고 따르며 다른 어떤 신이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사고 방식이다.

사막에서 성립된 종교가 한결같이 자기들이 주장하는 신만이 절대자이며, 다른 부족들이 주장하는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을 신봉하는 성격으로 만들어 진 것은 사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사고 방식과 생활환경에 따른 풍토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대표적인 종교가 유태교라고 할 수 있다. 천주교나 기독교나 이슬람교도 유태교에서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유태교는 사막형 종교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들이 사막이라는 환경 풍토 속에서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를 종교적인 삶의 토대로 만들고 있음은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마빈 토케이어(Marvin Tokayer)의 『유태인의 발상』에는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유태교의 랍비(牧者) 사카이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하늘의 별을 이정표로 하여 별을 향해 걸어간다. 별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별에 가까이 가게 됨으로서 목적지인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사람들이 각기 내걸고 있는 理想은 별과 같은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유태인의 처세술』에도 다음과 같이 보인다. (마빈 토케이어‧신기선 역, 1993년, p.193)


“인간이 완전무결하게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한 이상이다. 그리고 그 이상은 넓은 바다에 있는 뱃사람을 이끌어 주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것이다. 선원이라면 알고 있는 것처럼, 별을 아무리 쫓아간다 하더라도 바다를 항해하여 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별을 쫓고 별에 가까이 가려고 함으로써 바른 길을 갈 수가 있다. 인간에게 있어 이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별을 이정표로 하여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사막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유태인들이 생활의 지혜를 인간의 이상으로 하여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신앙화하게 된 것이 일신교(一神敎)의 사막형 종교이다.

그렇다. 사막의 길을 갈 때, 뜨거운 낮보다도 밤에 걷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낮에는 태양의 뜨거운 열 때문에 뜨거워서 제대로 사막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사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밤에 여행을 하게 되는 되는데, 밤에 사막의 길을 걸어 갈 때에는 하늘의 별을 향해서, 즉 별을 이정표로 삼고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늘(天上)의 별(星)은 사막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이정표이며, 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임과 동시에 이상향의 세계인 것이다. 별은 또한 사막에 사는 인간에게는 삶의 좌표와 생활의 기준이 되고 있고, 인간의 종교적인 안식처로서 영혼의 이상향(天堂)이 되고 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밤하늘의 별은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의 세계이며 절대자(絶對者)인 신이 존재하는 신의 나라, 내지 신 그 자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막에서 형성된 종교는 한결같이 유일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인간이 절대로 신이 될 수가 없는 영원한 이상의 절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오로지 가능한 것은 인간이 목적지인 별에 가까이 가려고 함으로써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것처럼, 인간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것뿐이다. 신에게 좀더 가까이 나아가고 다가감으로써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신을 믿는 신앙과 찬양, 구원의 기도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된다.

사막에 살고 있는 인간은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로 인해서 신에게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신앙을 갖게 되고, 그래서 신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게 됨으로써 절대타자(絶對他者)인 신에 의해 구원되는 사막형 종교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사막의 오아시스


사막에서 길을 갈 때 마실 물이 없으면 목마름에 허덕이게 되고, 죽기 직전의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살수가 없다. 사실 물은 사막에서 뿐만이 아니라 숲에서도 모든 존재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숲이라는 대자연의 풍토에서보다도 사막에서의 물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사막에 불시착하여 며칠동안 헤맨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물은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물의 은혜로 우리 안에는 말라붙었던 마음의 모든 샘물이 다시 솟아난다.”


특히 사막에서 물은 인간의 육체적인 생사(生死)를 결정짓는 생명수이기에 무엇보다도 귀중하다. 사막에서 죽게 된 절박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인간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자인 신을 의존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마음으로 스스로 인정한 그 신으로부터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자신을 신이 구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또한 사막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생명 그 자체가 되고 있기에 하늘에 있는 어떤 절대 신이 나를 위해 생명수를 내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신의 은총인 것처럼 생각하고 감사히 여긴다.

황량한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하늘에 있을 것으로 간주되는 전지전능한 신의 은총과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신에 대한 반항이 있을 때는 신의 가혹한 저주와 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막에서 인간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 자신이 구제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이나, 어떤 외부 사람의 도움이나 요행을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구원해 줄 대상자를 자기 밖에서, 또 밖으로 향해 나아가며 끊임없이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막에서의 인간은 자신을 생명이 있는 존재로 존재할 수 있게 하고, 또 생사의 절박하고 극한상황의 어려움에서 구제해 주는 어떤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자를 하늘(天)이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외향성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막에서 형성된 종교는 유일신의 종교이며, 신에 절대 복종하는 종교관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사막에서는 물(비)을 하늘에서 신이 내려 주는 생명수라고 생각하고, 신이 내려주는 그 생명수와 신의 은혜를 입은 좋은 생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부족간의 쉼이 없는 투쟁과 싸움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사막에서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늘(天)에 그 모든 삶의 기준을 삼게 되고 의존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막적인 인간의 사고를 천일성(天日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天)은 신성한 곳, 신이 계시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사막은 저주받은 땅이기에 당연히 죄인이 사는 곳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생활할 수 없는 황량한 사막에서 인간이 살다보니까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막은 인간이 살 수 없는 황량한 불모지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은 모두 죄인(原罪)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죄인이 신의 구원을 받아 신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하늘나라(天國), 즉 천당에 가는 길만이 유일한 구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3. 원환적인 사고와 직선적인 사고


원환적인 숲의 사고


그러면 숲의 사고(종교)와 사막적인 사고(종교)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숲의 사고(종교)에서는 원환적(圓環的)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서 사막의 종교에서는 직선적(直線的)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를 토대로 하고 있는 동양의 모든 생활이 자기의 집(家)을 중심으로 대자연의 만물과 더불어 살고 있으며, 아침에는 집을 떠나 농토와 대지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또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매일 똑같이 반복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막의 풍토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들의 생활은 광활한 사막이나 초원에서 가축을 데리고 목초를 찾아다니며, 또한 여름과 겨울에는 그들의 거주지를 이동하며 생활하고 있다 . 말하자면 삶의 터전 전부를 가지고 다니면서 보다 새롭고 나은 생활환경과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집은 물론 소, 말, 양과 같은 가축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생활 공간과 도구, 터전까지도 가지고 돌아다니지 않을 수가 없다. 천막이나 텐트, 혹은 포장마차와 같은 이동성 집의 생활이 몸에 베여있는 사막적인 풍토의 인간은 헤어짐과 이별에 대한 의식은 지극히 당연한 생활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막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족은 농경민족들처럼 좁은 토지에서 속박된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 넓고 높은 하늘(天上)은 항상 그들의 머리 위에 있으면서 그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천상(天上)에 있으리라고 간주하는 아버지(父)인 유일신에의 절대적인 신앙과 부계적(父系的)인 부권적(父權的) 사회조직이란 대개 유목민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목민들은 대개 전사(戰士)가 되었으며, 인간과의 처절한 생존권 싸움을 했다. 원시시대에 농경민족들은 식물에 대한 생명력의 개발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사냥을 하면서 살았던 수렵(狩獵)민족들은 인간과 야수(野獸)들과의 싸움이었으며 나아가 야수와 식물과는 양상이 다른 싸움의 대상을 인간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살기 좋은 생활환경과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생존권 투쟁인 것이었다.

자연환경을 토대로 정착된 농경민족이 자연의 존재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의로 신비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유목민들은 침략적 전사부대(戰士部隊)로 그 구성 자체가 인위적이며, 승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합리적인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인도를 침입한 아리아인들이 만든 『리그 베다』의 신화나 북방에서 그리스를 침입한 호메로스찬가에 나타난 신들의 모습에는 이러한 현세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동양은 자기의 생활공간인 집을 중심으로 숲과 대지, 대자연 그 모두가 삶의 터전이며, 대지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다. 집(家)과 삶의 터전인 농토를 짊어지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숲의 풍토에서 대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정된 삶의 생활공간을 버리고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자기 집과 의식주의 삶을 전개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이 그대로 지상의 낙원이며 고향인 것이다. 그러한 삶의 터전과 집을 떠나는 나그네의 신세가 되는 것은 괴로운 고행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인들은 가족 간의 이별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크게 느끼고 있다. 이별은 괴로운 일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팔고(八苦)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괴로움(愛別離苦)"인 것이다.

인간의 삶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다름 아닌 자기의 집인 것이다. 동양인들은 자기의 집을 나서면 긴장을 하게 되고 불안하며, 방황, 두려움, 초조,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반대로 밖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면 일체의 긴장 불안이 없어지게 되며 평안하고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래서 숲이라는 대자연을 토대로 살고있는 인간은 생활의 자원(衣食住)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 집을 나서서 일터로 가지만 반드시 저녁때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생활 습관이 있다. 인간이 집을 떠나면 긴장하게 되고 불안해지는 이유는 불편하고 불안한 숲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벗어나 불안한 외부세계(숲)로 떠나 보내는 이별을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인들의 농경생활 구조 그 자체가 집을 중심으로 한 숲과 대지라는 똑같은 공간 속에서 시간적인 흐름에 따른 반복성의 원환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집과 농토를 가지고 농경을 경영하는 민족들의 정착된 생활은 쌀, 보리, 밀을 재배하며, 채소나 식물의 생장과 가축의 번식 등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 식물이 열매 맺고 죽은 뒤에 또다시 되살아나는 신비스러운 생명력에 경탄하는 찬가나 숭경은 그들의 신화적인 세계관이나 종교의례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숲의 종교에 모체가 되고 있는 대지와 지모신(地母神)의 관념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계적(母系的), 모권적(母權的) 사회조직은 정착된 많은 농경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경생활을 토대로 하고 있는 인간은 논과 밭에 곡식의 씨앗(종자)을 뿌리고 이를 재배하여 번식되는 생명체 존재의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를 관찰하게 된다. 그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고 인연의 결합에 따라서 전개되는 탄생 - 성숙 - 번식 - 노쇠(老衰) - 고사(枯死) 등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단계를 거치고 또다시 근원인 대지로 되돌아가는 존재의 실상을 보게 되면서 원환(圓環)적인 환원(還源)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도 태어나 죽고,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져 죽어버린 듯한 나무들의 가지에서도 봄이 되면 다시 푸른 잎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간의 유한성의 관념은 자연의 모든 존재들의 생명에 대하여 겸허한 생각을 갖게 하였고, 신비적인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신앙은 그들의 생활에 버팀목(支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전변설(轉變說)과 윤회사상(輪廻思想)과 같은 사고도 춘하추동의 사계절 변화가 분명하고, 씨를 뿌리고 가꾸며 열매를 수확하는 농경 생활의 풍토 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진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지나 자연의 소중함이나 이러한 윤회설이 사막의 종교에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직선적인 사막의 사고


그러면 사막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세계관을 살펴보자.

사막에서 길을 갈 때는 자기가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가 없다. 즉 사막에서는 발자국이 곧바로 지워지고 바람에 날려가기 때문에 발자국이나 흔적을 남길 수 가 없다. 지나온 길에 흔적을 남겨 이정표를 설정할 수 가 없기 때문에 별을 이정표로 하여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왔던 길을 되돌아 갈 방향을 알 수가 없고, 또한 출발점을 가르치는 별이 없기 때문에 목적지인 별을 향해서 오로지 앞으로 전진하여 나아갈 뿐이다.

『신약성서』에 예수가 어린양들을 데리고 사막의 길을 가는 이야기나 요세가 이집트를 탈출할 때 명령어로"나를 따르라!","잠자코 따라와!"라고 말하고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마호메트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대중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처럼, 사막에서는 별을 향해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막에서는 어느 출발점에서 어떤 목적지를 향해 오로지 앞으로 일직선의 길을 전진해야하는 생활에서 유태인들의 직선적인 세계관과 종말론(終末論)적인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 것이다.

사막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세계관은 이 우주가 절대자인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어떤 종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고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처럼 창조가 있으면 반드시 종말이 있기 마련이다.

서기 몇 년이나 기원전, 혹은 기원후라는 연대 표기는 모두 이러한 사막적인 풍토에서 형성된 직선적인 세계관에서 이루어진 연대 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종말론, 종말관은 원래 망국의 국민이라고 하는 유태인들이 예부터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식의 구조를 계승한 것이다. 유태인들의 종말관은 사막의 길을 가면서 살고 있는 생활환경 풍토에서 비롯된 역사관이었다.

이 유태인들의 역사관인 종말관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최후의 심판에 의한『신의 나라(國)』, 즉 그리스도(Christ ; 구세주, 예수)만의 신앙에 의해 결합되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최종목표에 이르는 구도가 역사철학의 하나인 고전적인 모델로서 완성되었다. 이러한 구도를 처음 포괄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신의 나라』이다.

현재 그리스도교나 유태교의 신학적인 이론 중에 전개되고 있는 종말론은 포괄적인 역사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현대의 신앙이라는 입장에서의 주체적인 자각에 의거하여 지극히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사변(思辨)에 의해 구성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인 이론이다.

우리들 인간도 예외의 존재가 아님은 물론 신의 절대적인 섭리와 뜻에 따라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사고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신에 대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으면 무서운 저주와 형벌이 내려진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직선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종말론은 사막의 풍토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행동과 판단에 근거를 둔 사고에서 자연스럽게 주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막에서 인간이 길을 갈 때는 태양이 내리 쬐는 더운 낮보다는 밤에 길을 가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밤에 사막의 길을 갈 때는 어떤 지상의 물건을 이정표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의 별을 이정표로 삼고 길을 간다.

인간이 사막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생명수 뿐만 아니라, 시원한 밤중에 목적지를 향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정표인 별도 모두 하늘에 있다. 즉 사막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과 삶의 모든 기준이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늘에 있기 때문에 사막적인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연히 하늘에 어떤 절대적인 신의 존재자가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사막이라는 불모의 땅에서 극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늘에 절대자이며 창조자인 신이 있어 인간에게 생명수를 내려주고, 길을 안내해 주며, 어려운 상황에서 언제나 나를 구제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간절한 소망으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왔고, 또한 자기를 구제해 줄 신이 있다고 믿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신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사실 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적인 환경에서 절박하고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또 의존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와 기대, 희망이 만들어낸 인간 의식의 소산물인 것이다. 신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


 

4. 행위에 대한 판단의 기준


판단중지적인 사고


숲의 종교적인 풍토에서 원환적인 사고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숲에 들어갔을 때를 상상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숲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은 사막의 경우처럼,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거나, 먹을 음식이 없어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 계곡엔 언제나 개울물이 흐르고 나무의 열매나 과일, 식물과 뿌리, 짐승이나 물고기 등 먹을 것은 얼마든지 있다.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에게 가장 절박한 현실문제는 사실 사막에서와 같은 생명에 대한 위험의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 초조, 근심, 걱정 등의 불안(苦)이다.

인간은 집(家)을 중심으로 안정된 일상생활을 하고 있기에 인간은 자기의 편안한 생활의 근거지인 집을 떠나면 불편하고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안식처인 집을 잠시 떠나 숲이나 들에 외출한 상태에 있으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며 이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 자기의 편안한 집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의식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잠시 의식주의 생활자원을 구하기 위해 숲이나 논밭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숲 속이 내가 살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닌 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일을 마치고는 그 숲을 벗어나 편안한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환원적인 사고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 숲에서 빠져나갈 방법과 길은 다양하며 조급히 서둘러 엉뚱한 곳으로 가는 수고와 고생을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여유 있는 사유를 하면서 자기가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

또한 사막에서처럼 A쪽이냐 B쪽이냐 어느 쪽 길을 선택할 것인가 대한 빠른 판단이나, 순간적이고 가벼운 판단과 선과 악이라는 분별을 보류하는 여유가 있는 사고이다. 동양적인 사상에서 볼 때 사막에서의 판단은 단편적인 편견이며, 일우(一隅)의 견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졸속한 판단은 좁고 천박한 범부의 행동인 것이며, 절대적인 선도 없으며 절대적인 악도 없다. 선악에 대한 판단의 기준과 보는 시각이나 관점을 달리 해 볼 때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적인 사상에서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주장은 설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숲 속에 다양한 길이 수없이 많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숲 속에서 졸속하게 선과 악을 판단하고 어떤 한 길을 설정해서 이 길로만 가야 한다는 성급한 범부적인 결단보다는 그 숲 속의 길을 여러 번 다녀온 체험자로서 길을 잘 알고 있는 안내자(先覺者)의 인도와 가르침을 배우고, 그 안내자가 제시한 이정표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믿음직하며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된다.

그리고 각자가 스스로 이정표를 따라 그 길을 직접 걸어가면서 자신의 체험으로 삶의 터전으로 만들고 생활의 지혜로 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된다는 현명한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각자인 부처님이 사바세계의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제시한 것이『經典』이며『語錄』인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과 어록을 배우고 익혀서 자신이 직접 불법을 깨닫고 진리를 관찰하는 힘을 얻어 일상생활의 지혜로 삼고 인격적인 삶을 만들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번뇌의 숲 속에서 벗어나는 길


숲 속에서 길을 가면서 이러한 선각자의 안내와 이정표를 따르는 현명한 사고의 성립적인 배경이 되는 점은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숲 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고 하자. 사실 숲 속에서는 사막에서처럼 반드시 어느 한쪽 길을 선택하여 일직선으로 가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아무리 오래 헤맨다고 할 지라도 물이나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기 때문에 발길이 닿는 대로 어디를 향해 가도 길을 찾아 갈 수가 있다.

그리고 나무나 바위 등 어떤 곳에라도 자기가 지나온 길에 표시를 할 수가 있기에 두 번 다시 그 길에서 헤매지 않을 수가 있다. 어쩌면 헤매다가도 뜻하지 않게 노다지를 만날 수도 있으며, 혹은 자기가 노력하여 무사히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안전한 길을 개척 할 수도 있고, 선각자가 표시해 둔 고마운 이정표를 만나서 무사히 빠져 나올 수도 있다.

도대체 인간이 이 숲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동양적인 종교의 사고에서 숲(밀림)이란 불안한 곳이며, 두려움, 공포, 초조,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苦)의 세계이며 사바세계인 것이다.

원래 인도에서 사바세계는 모든 중생들이 사는 곳으로 근심 걱정 두려움과 공포 즉 불안 등의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하는 곳이란 의미이다. 그래서 사바세계에 사는 중생은 이러한 괴로움의 고통을 받는 곳이란 의미로 고해(苦海)라고 하며, 또 이러한 괴로움을 참고 살아야 하는 세계라는 의미로 인토(忍土)라고도 번역한다.

그래서 숲의 자연환경의 풍토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은 이러한 괴로움의 세계인 숲(사바세계)을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괴로움의 사바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해탈의 길을 제시한 이정표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인 것이다.

숲 속에서 졸속한 판단과 경박한 자기 주장은 차별적인 견해와 편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현명한 처신이라고 할 수 없다. 성급한 선이나 악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천박한 범부인간의 행동과 결정이 될 수 있다.

숲 속에서 길을 갈 때에 가장 현명한 방법은 먼저 그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표시해 놓은 체험자(선각자, 경험자 ; 안내인)의 가르침과 이정표에 의지하여 그 숲을 빠져 나오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일이며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숲을 토대로 한 동양의 종교는 각자가 자기의 편안하고 안락한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이정표와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각자의 가르침에 따라 본인이 직접 그 길을 쫓아가면서 직접 체험하고 깨달아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와 평안한 삶을 구현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숲의 종교는 선각자인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이 제시해 주신 이정표인 가르침(法)을 믿으며, 사바세계를 벗어나 해탈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들을 믿고 신뢰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선불교의 가르침과 실천구조도 이와 똑같다.

자기의 근원적인 불성(本來心)을 각자의 편안한 자기의 집(家)으로 가정해 보자. 그리고 숲속에 빠져 미아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번뇌 망상과 사량분별과 차별심에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들이 불안, 근심, 걱정과 초조 등 마음속에서 느끼는 괴로움(苦)이라는 것은 각자가 자기의 근본인 불성(本來心)을 잃어버리고, 평상심(平常心)을 상실한 뒤 번뇌 망상의 숲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을 때 느끼고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숲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에 불안 ,근심, 걱정, 초조나 공포를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선각자의 가르침인 이정표(경전, 어록)를 따라 곧바로 번뇌의 숲에서 빠져나와 자기의 편안한 집의 근원적인 불성으로 되돌아간다면 더 이상 번뇌의 숲에서 쓸데없이 괴로워하며 허덕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선불교의 사상과 실천도 이러한 숲의 종교적인 풍토에서 체험을 통하여 체득된 지혜인 것이다.


양자택일의 결단성


사막에서 길을 갈 때는 반드시 일직선으로 길을 가야 짧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사막에서 머뭇거리거나 길을 잃어버리면 물이 없어 죽게 된다.

그리고 사막에서 길을 갈 때에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되면 즉시 A쪽이나, B쪽의 어느 한쪽의 길을 선택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빠른 판단과 선택을 하지 않으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느 한 종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절박한 갈림길에서의 인간은 어느 한 쪽의 길을 선택하여 나아가야 할 빠른 결단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사막의 풍토에서 성립된 인간의 사고는 순간 순간의 선택과 판단이 확실해야 한다. 선과 악의 구분과 결정을 명확히 선택하고 판단하여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살아갈 수가 있다. 사막에서의 판단중지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인 것이다. 사막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은 일직선이며, 갈림길에서의 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어느 길로 가야만이 물이 있는 곳으로 갈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슬람교에서 마호메트가 주장하고 있는 행위의 기준이 되는 이상적인 의무론을〈샤리아! (Shariah)〉라고 하는데, 이 말의 본래 의미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이 인간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와 가치기준이 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는 물이 된다. A나 B, 어느 한쪽의 길을 선택해야 할 경우 당연히 물이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한 쪽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직선적인 사막의 생활풍토에서 선악(善惡), 미추(美醜), 장단(長短), 범성(凡聖) 등에 대한 상대적 차별적 사고와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빠른 판단을 결정하는 서구인들의 사고가 자연스럽게 발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길의 문화와 개척과 정복의 문화


숲과 자연이라는 환경풍토를 토대로 생활하고 있는 동양인의 사고는 집을 중심으로 한 원환적(圓環的)이며,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적 회귀성(回歸性)과 이정표에 의한 길(道, 法)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사막적인 환경풍토에는 어떠한 이정표를 표시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고정된 길이 없기에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새로운 삶의 생활터전을 찾아 도전하고 모험하는 개척(開拓)과 정복(征服)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씨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동서양의 사고적인 구조의 성격을 축소지향과 확대지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숲의 풍토적인 사고와 사막의 풍토적인 사고를 토대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숲의 풍토적인 사고에서 이루어진 동양적인 길(道)의 문화는 매일 매일 이정표에 의해 반복되는 길(생활)을 거듭하고 있으며, 근원(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적 회귀성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숲의 사고에서의 집은 인간생활의 근거지로서 각자 삶의 근원지이기도 하며, 고향이기도 하다. 불안한 자기에서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전개할 수 있는 생활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에는 집에서 들로 밭으로 산(田, 森林)으로 자연(自然)으로 나아가, 저녁에는 생활의 터전인 숲에서 안식처인 집으로 되돌아오는 농경생활 환경의 구조적인 풍토 속에서 살고 있는 환원적인 회귀인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숲의 사고에 젖은 동양인은 이러한 원환적인 구조와 근원적인 집으로의 환원적인 회귀성이 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이나 마음의 안정 내지 인간의 자유 해탈의 문제도 집을 중심으로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내향적인 성향이다.


길은 가까운 곳에


『논어』 「술이편(述而篇)」에 공자가 "仁(道)이 멀리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仁을 구하면 仁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맹자? 「이루장구(離婁章句)」에 맹자가 "도는 가까이 있다. 그런데 이 도를 먼 곳에서 찾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또 『장자』 「지북유편(知北遊篇)」에도 "일체의 모든 곳에 도가 없는 곳이 없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의 여러 고전에서는 한결같이〈진리(道)는 가까이에 있다〉는 중국적인 현실 긍정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적인 현실긍정사상의 토양 위에 형성된 선불교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은 현실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적인 각자의 마음이 깨달음(道)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조사선의 정의를 제시했다. 또한 임제(臨濟)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주인이 되어 살 때, 자신이 있는 그 곳이 바로 진실된 깨달음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하는〈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명구를 주장하고 있다.

송대 나대경(羅大經;1195­1252)이 편찬한 『학림옥로』 제6권에 「도불원인(道不遠人)」이란 항목에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한 고전의 내용들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어느 비구니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전하고 있다.


盡日尋春不見春

芒鞵踏遍隴頭雲

歸來笑撚梅花嗅

春在枝頭已十分

종일 봄을 찾아 헤매었지만 봄을 찾을 수 없어라.

짚신이 다 닳고, 롱두산 구름이 덮인 곳까지 헤매었네.

지쳐서 집으로 되돌아와 보니 매화 가지에 매화꽃이 방긋 웃네.

이제 봄이 온 시방에 두루 와 있음을 알았네.


봄(진리)을 찾아 롱두산 꼭대기 구름이 뒤덮인 곳까지 짚신이 다 닿도록 봄을 찾아 헤매었지만 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치고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와서 자기 집 뒤뜰의 매화나무가지에 매화꽃이 피어 있음을 보고서 봄이 시방세계에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진리가 멀리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멀리 밖을 향해서 찾아다니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자기 집으로 되돌아와서 찾게 되었다는 비구니스님의 오도송은 진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구조로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서는 찌루찌루와 미찌루 자매의 이야기인 마테를링크(Maeterlink, Maurice-Polydore-Marie-Bernard;1862­1949)의 희곡 『파랑새(LOiseau Bleu)』도 마찬가지로 자기 집에 되돌아 와서 그 파랑새를 보게되는 내용의 희곡이다. 이 작품은 아마 동양적인 사고를 기초로한 구상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근세 일본의 유명한 작가인 아꾸다가와(芥川)의 『광차(鑛車)(とろっこ)』(탄광이나 광산에서 손으로 미는 차)도 이와 같은 숲의 풍토적인 사고인 원환적인 회귀성의 정신을 잘 묘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밖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리를 "자기 집에서 봄(진리)을 찾았다." , "진리는 가까이 있다." 라고 하는 주장은 번뇌의 숲에서 깨달음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구조처럼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환원적인 내향성의 종교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진리나 도를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자기의 가까운 곳에서 찾고 있다. 즉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법신이 항상 상주하고 계시며(法身常住),곳곳에 법신이 안 계시는 곳이 없다(處處法身)고 주장하고 있으며, 혹은 눈에 닿는 모든 것이 깨달음의 경지(觸目菩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곳이 진리의 당처(當處)이며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화엄경』 제3권 「노사나품」에도 "법신은 법계(法界)에 충만하여, 온갖 중생들 앞에서 두루 나투신다. 인연에 따라 응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항상 이 깨달음(菩提)의 그 자리를 여의지 않는다.(法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라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진리를 멀리 외부나 다른 곳 혹은 어떤 절대자인 신에게 기대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이 자기의 마음에서 자각하여 스스로 찾아보고 확인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 이외에 외부의 어떤 절대자나 신 또는 신비로운 세계로부터 새로운 신비와 신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법칙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가야할 길(道),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법계에 가득찬 진실된 그 세계를 재발견하고 재확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한 깨달음의 체험으로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의심이나 혼란‧미혹 등이 없어지고 확고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양 종교의 구조를 잃어버렸던 옛길(古道)을 재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함경』 제12권(287)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열반에 이르는 길은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잊혀져버렸던 길을 부처님이 다시 재발견한 것이다."(『大正藏』 2권, 80쪽 下와 718쪽 中)


『아함경』등에서는 이것을 옛길(古道)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 놀면서 거친 곳을 헤치고 길을 찾다가 문득 옛사람이 다니던 고도(古道)를 만나서 그는 곧 그 길을 따라 갔다. 점점 앞으로 나아가 옛날의 도읍(都邑)과 옛날의 궁전과 동산, 목욕하는 연못, 청정한 숲 등을 보았다." (『大正藏』2권, 80쪽 下와 718쪽 中)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발견한 길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고, 옛 도읍(城)이나 궁전은 열반의 세계(집 ; 家)를 상징한 것이다. 마치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 옛날 어떤 사람이 표시해놓은 이정표(古道)를 발견하여 그 길을 따라 무사히 숲에서 빠져나와 무사히 안전하고 평안한 자기의 집(열반의 세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 것과 똑같은 구조인 것이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개척과 정복


이에 반해서 사막적인 환경풍토에서 형성된 종교는 자기를 구제해줄 신이나 구원자를 밖에서 추구하고 있는 외향성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막이라는 환경은 인간이 살기 힘든 불모의 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좋은 환경을 끊임없이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언제나 멀리 밖을 향해서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확대지향적인 의식과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사막적인 풍토나 의식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는 서양인들은 외향적인 성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막에서는 이정표를 설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앞을 향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사막에서 길을 갈 때에 유일한 이정표는 하늘의 별이며 신의 계시나 섭리, 운명의 전개로 오로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모험하고 개척하며, 인간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생활 환경의 가능성이 있는 유토피아(Utopia)를 찾아 나서 자기들이 살 수 있는 곳으로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소련의 남부 오세티아 코카사스(caucasus)지방을 원산지로 하고 있는 백인종 아리아인(Aryan)들이 힌두쿠스 산맥을 넘어 인도를 침입하여 정복한 일을 비롯하여,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유럽인들의 탐험과 동남아시아 등지의 정복 등은 그러한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막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보다 좋은 생활 환경을 찾아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면서 모험하고 개척하며 정복하려고 하는 사고가 작용하고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가다가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게되는 절박한 상황을 직면했을 때, 지금의 자기를 구제해 줄 수 있는 어떤 사람(구원자)이나 절대자(神)를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막에서는 자신의 혼자 힘으로 절박한 상황을 극복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저 멀리 이상적인 천국 하늘(天上)에는 어떤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신이 나를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외부에 있는 신의 나라에 나아가려는 의식이 작용하여 자기의 구원해 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이나 유일한 존재(神)를 하늘(天國)이나 외부의 세계, 즉 자기 자신의 밖을 향해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은 지금 이곳 사막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고 불행한 곳이며, 또한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사막은 죄인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있는 보다 좋은 생활 환경 즉 신이 있는 이상향의 세계를 향해 미지에의 세계로 가능성을 추구하는 확대 지향의 사고가 작용하게 된 것이다.

사막은 인간이 살기 어려운 곳이기에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미지에의 세계를 향해서, 불확실한 세계를 인간이 살 수 있는 가능한 세계로 만들기 위해 모험과 투쟁을 하며 정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허클베리핀의 모험』이나 『톰소여의 모험』은 사막의 풍토에서 형성된 확대지향의 사고에서 추구하는 미지에의 세계를 모험하고 정복하여 가능성의 세계로 만들어 가는 전형적인 사막적인 사고의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진 소산물이라고 하겠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이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산은 많은 인간들의 정복의 대상이다. 1953년 5월 29일 인간으로는 최초로 이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영국인 히라리(뉴질랜드 사람)와 히말리야 주민인 셀파 텐신이라는 사람이 등산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 영화가 「에베레스트 정복(conquest)」이다.

문제는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도착한 이 두 사람의 행동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영국인 히라리는 산을 정복한 기쁨에 좋아 어쩔 줄 모르고 고함을 쳤고, 셀파 텐신은 빙설에 구멍을 파서 가지고 있던 식량을 그곳에 묻고 산신에게 공물을 올리며 경건하게 깊은 신심으로 합장하여 기도하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산을 정복했다고 기뻐하고 고함친 영국인 히라리의 태도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한 쪽은 신에게 감사하고 기도 드리는 경건한 행동에 비해, 한쪽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한 승리자의 자만을 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숲의 풍토에서 살아온 동양인은 자연을 벗과 스승 내지는 신으로 생각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데 비해, 사막의 풍토에서 생활해온 서구인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하인 내지 종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그래서 셀파는 산을 우러러 합장 기도 하지만, 영국인은 산에 도전하고 싸우고 이기는 승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柳宗悅, 『柳宗悅수필집』, 岩波文庫本, p.193)

이러한 두 사람의 행동에서 숲의 환경과 풍토에서 살고 있는 동양인의 숲의 종교와 사막의 풀을 배경으로 한 서양인의 사막의 종교와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6. 인간 중심과 신 중심의 윤리관


숲의 사고에서 형성된 종교는 인간 중심의 종교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따라서 범신론(pantheism) 혹은 다신교(polytheism)의 종교문화이다.

인도 최고의 종교서적인 리그베다(Rig-Veda)에 자연의 모든 사물 그 하나 하나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많은 신이 등장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이상적인 인격으로 수많은 부처(多佛)와 보살과 수호신들이 경전에 등장하고 있음은 이러한 범신론, 내지 다신론적인 숲의 사고, 종교적인 풍토의 성향을 읽어 볼 수 있다.

숲의 사고에서 이루어진 종교는 인간이 인간의 생활환경과 삶에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이 되고, 서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자연의 유익한 모든 존재에 대하여 고마움과 신비스러움, 그리고 경의심을 가지고 신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많은 신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어떤 신이나 어떤 길을 선택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것처럼, 모든 가치판단과 삶의 기준을 인간 각자가 자각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숲의 미로에서는 선각자의 많은 이정표를 만날 수 있지만 어떤 길로 가느냐는 각자의 인연과 자각적인 판단에 의한 선택인 것이다.


숲의 종교 윤리관


숲의 종교는 인간 각자가 자기의 도덕적인 행위와 삶의 가치 기준을 설정하고 살아가는 자각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적인 관계나 행동은 물론 각자의 자기 의지와 서원과 원력으로 인격적인 향상을 추구하며 자기의 새로운 삶을 창조하도록 하고 있다.

즉 각 개인의 사회적인 윤리관이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명예나 부끄러움의 자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인간 각자가 자기 의지와 자각적인 인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말한다.

인간 각자는 자기의 행동과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자각으로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행위와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한 자아완성의 인격적인 윤리관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과 인간과의 종속적인 관계의 윤리관이 아니라, 서로 협동하고 의지하는 상호상관관계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윤리관이며, 인간 서로간의 신뢰와 명예에 가치기준을 두고 있는 자각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완성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름 아닌 인간 상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실천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각자의 인격적인 향상을 위한 의지가 불교에서는 보살의 서원과 원력인 것이며,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 중생과 인류전체를 위한 보살도의 구현이 바로 인간을 위한 헌신적인 길이며, 또한 무한한 가능성을 향한 자기 자신을 위한 인간애의 실천인 것이다. 그것을 자비의 실천이라고 한다.

서원과 원력은 결코 신이나 남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들 각자 스스로 자기 향상과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공익을 위한 자발적인 자기 의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숭고한 약속이며 맹세인 것이다.

따라서 숲의 종교의 윤리관은 인간과 인간, 나와 이웃, 타인, 일체 중생, 일체의 모든 만법(萬法)과의 인간적인 신뢰와 믿음, 그리고 상부상의(相扶相依)의 관계를 중시하는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관인 것이다.


사막의 종교 윤리관


사막적인 사고에서 발생한 종교에서는 신중심의 종교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또한 절대 유일신(monotheism), 절대신, 창조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 절대타자로 추앙하고 있다.

유태교나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사막형 종교에서는 인간이 신을 선택한다는 교만한 태도는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신에게 절대 복종만이 있을 수 있으며, 신의 섭리에 불복하고 거역하면 신의 저주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베네딕트(Benedict, Ruth Fulton)는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d, 1946년)』에서 숲의 종교인 동양의 윤리적인 인간 중심의 입장을『명예(名)와 부끄러움(恥)의 문화』라고 정의하면서, 사막의 종교인 서양에서의 신중심의 입장을 『죄와 벌의 문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막적인 환경풍토에서 형성된 종교적인 사고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신 중심의 윤리관이 주장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서구에서 많이 쓰고 있는 계약(契約)이나 서약(誓約)이란 말은 인간이 신에 대하여 맹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나쁜 행위를 한 죄는 반드시 신이 벌을 내리게 된다고 하는 사고가 다름 아닌 사막적인 사고에서 발생한 죄와 벌의 문화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죄와 벌』이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인간이 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신이 벌을 내린다는 사고이다.

인간의 행위와 가치기준이 모두 신에 의해 심판되고, 인간이 지은 그 죄에 대한 대가로 신이 벌을 내린다고 한 사고인 것이다.

말하자면 신의 의지에 의해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이며, 신의 은총과 신의 섭리와 신의 은혜를 받기 위해 무조건 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사고는 운명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간이 타고난 천부적인 능력도 신이 부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모든 것을 신에 의한 운명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성의 존재와 독창성을 부정하는 위험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사막적인 생활환경과 풍토에서 형성된 종교는 인간이 신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의식의 사고와 윤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다.



7. 시간성과 공간성의 인식구조


숲의 종교는 시간성에 중요한 인식구조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숲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적인 흐름 속에서 초목이 생성하고 성장하게 된다. 일출, 일몰, 월출, 월몰하는 모습은 대자연의 환경 속에서 자연의 진실한 모습, 실상으로 볼 수 있다.

즉 숲의 종교는 자연의 모든 존재가 생성하고 무상하게 변화하는 불변의 법칙성인 시간성에 중요한 인식구조를 두고, 생활 가운데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자아의 발견과 자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며, 불안의 극복을 위한 해탈의 문제를 자기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고 있는 문화이다.

일출의 주기, 달의 크고 작음(生成)주기, 계절의 주기와 같은 순환적 관념이 중요한 인식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즉 자연의 변화 생성의 순환성은 너무나 완벽하며, 불변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일출, 일몰, 강물의 흐름, 초목의 생성(生老病死, 生住異滅의 無常) 등 일체의 존재가 그러하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의 주체자를 절대신이 아닌 자연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란 본래의 상태로 이루어지고 전개되고 있는 존재의 실상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즉 외부에 의한 힘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만법의 주체를 불교에서는 불성(佛性), 도교에서는 도성(道性, 道, 自然, 無爲)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종교화하고 철학화하였다.

즉 인간의 본래적 생성과 환귀(還歸)는 자연의 주기성과 순환성의 사실을 인식하고 응시하면서, 절대적이며 평범한 자연의 법칙인 진실(道)을 깨닫고, 일체의 모든 존재가 본래의 자연 그대로의 법칙과 하나가 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법의 주체인 불성과 도는 대자연 그 자체의 생명체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사막의 종교에서는 공간성을 중요한 인식틀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끝없이 넓은 사막(초원)에서 길을 가거나, 가축을 사육하기 위해서는 초목지를 찾아 나서거나, 생수를 구하기 위해 사막인들은 끝없는 공간의 여행을 한다.

처음 여행에 완전하지 못한 많은 시간과 경험 뒤에 목표성과 계획성을 띄고, 공간과 공간을 잇는 자기 여행을 하게 된다. 이 여행은 직선적이고 단선적(單線的)이며, 계획적이고 규칙적이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인식의 틀을 이룬다.

하늘에는 일월(日月)과 별(星)들이 있고, 그것을 이정표로 하여 길의 목적지로 삼고 이상향을 두고 정신적인 종교적인 세계를 살아간다. 이러한 천일성의 사고와 의식이 유일신을 만들어 냈고, 인간이 마음속으로 어떤 존재자인 신에게 자기의 나약함을 의지하려고 하는 기대와 함께 신을 상정(想定)하여 절대적으로 믿고, 그 신앙에 의한 구원으로 신의 나라인 천당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사막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공간이지만, 신의 나라인 천당은 사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이상향인 것이다. 이러한 이상향과 지금 여기에서 어렵고 힘든 나를 저 멀리 하늘에 있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신이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사막에서는 하늘(天堂)로의 이상향을 향한 공간적인 이동을 추구하는 종교문화를 만들고, 그러한 공간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원자를 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또 그 천당에 나아가려고 하는 외향적인 구원의 신앙이나, 확대 지향의 사고가 사막이라는 풍토에 살고 있는 인간이 사막을 벗어나 외부로 향한 탈출적인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 문화임을 알 수 있다.



8. 숲의 사고와 사막의 사고와의 차이


(1) 절대성과 상대성


숲과 자연의 풍토 속에서 형성된 동양의 문화와 사막적인 풍토에서 형성된 서양적 문화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해본다면 동양은 전체적, 종합적, 평등적이라고 한다면, 서양은 부분적, 차별적, 분석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양의 절대 평등주의 정신은 불교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모두 불성이 있다." 라고 설한 불성사상과, 인간 각자는 모두 절대 유일의 존재임과 동시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는〈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 대표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일체의 모든 중생은 모두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덕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화엄경』의 주장을 비롯하여 『법화경』에서도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일체개성(一切皆成)〉은 이러한 불교의 절대 평등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일체의 유정(有情), 무정(無情)에도 불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노자나 장자도,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일체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도 가지고 있다하여 모든 존재에 대한 절대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

불교의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주장과 도가의 만물일체의 자연관은 일체의 분별, 차별, 편견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현실적인 왜곡에서 초월하여 이를 극복하였을 때, 붓다(覺者)나 조사(祖師), 불보살(佛菩薩), 지인(至人), 신인(神人), 진인(無位眞人), 성자(聖者)가 될 수 있음을 긍정하는 인식론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도 『맹자』(고자, 卷下)에서 "요순(堯舜)과 같은 聖人도 人間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절대 평등의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평등사상이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인간확장론 및 불교의 성불론(成佛論), 도교의 신선사상(神仙思想), 유교의 성인론(聖人論)은 바로 인간의 연속적인 무한 가능성의 세계를 절대 긍정하는 동양적 인식론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는 숲과 자연, 만물과 더불어 살면서 동화하며 상의상관 관계를 지속하며 살고 있는 동양적인 사고의 풍토에서 이루어진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 존재의 절대평등과 존귀함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진 동양사상이 가지고 있는 연속적인 사고는 사막적인 풍토를 토대로 해서 이루어진 서구 사상의 인식론에 뿌리박혀져있는 기독교적 비연속적, 차별적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구약성서』 (창세기 9 : 16)에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위를 기어다니는 길짐승들과 바닷고기가 다 두려워 떨며, 너희의 지배를 받으리라! 살아 움직이는 모든 짐승들이 너희의 양식이 되리라! 내가 전에 풀과 곡식을 양식으로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 이외의 모든 생명은 인간이 이를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일용의 양식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밝히고 있다.

즉 인간이 자연의 존재를 죽이고 자기를 살게 하는 존재의 차별적 분별적인 입장은 먹을 것이 없는 사막적인 풍토에서 살아야 했던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구의 문화는 인간과 동식물과의 대립과 차별, 대항하는 문화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사막에서 길을 갈 때 어느 한 쪽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양자택일의 의식적인 사고가 밑바탕에 작용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풀과 곡식, 들짐승, 나는 새, 길짐승, 바다 고기가 모두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음식물로서의 존재이며 이러한 자연의 존재를 신이 내려 준 양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의 언어적인 구조에서도 쉽게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동양에서는 인간, 사람을 가르칠 때 「인(人)」이라고 하는데 「인(人)」은 남녀 모두를 포함한 말이지만 서구에서는 남녀 모두를 포함한 단어는 없다. 서구(영어)에서 사람이라고 하면 보통 man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남성을 말하고, 여성은 woman이다.

이처럼 사람도 남과 여로 나누고 구분하며 분석하고,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상대적인 대립의 언어문화를 나타내고 있다.

개(犬, 狗)라고 하면 동양에서는 암컷과 수컷을 모두 포함한 말인데, 영어에서는 암컷은 bitch 수컷은 dog으로 나누고 있다.

또 동양에서 하루를 날 일(日)로 표현하여 밤과 낮을 포함한 하루전체를 나타내고 있지만, 영어에서는 밤과 낮을 포함한 하루라는 단어(말)가 없고 밤(night)과 낮(day)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분석적이고 대립(상대)적인 사고는 의학의 치료법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다.

즉 동양의학의 치료법은 몸 전체를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근원적인 치료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병이든 나쁜 부위만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기능을 모두 다 활성화시키고 작용하여 병이든 나쁜 부분을 보완하여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도록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장시간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서구의학의 치료법은 몸에 병이든 부분만 치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세브란스(severance) 병원이라는 말에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sever는 잘라내다, 수술하다라는 의미로 신체 가운데 병이든 나쁜 부분만 잘라내고 떼어버리는 치료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치료 기간은 짧지만 잘라버리고 떼어내 버린 것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화적인 차이를 이어령씨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보자기 문화』와『책가방 문화』라고 말하고 있다.

동양의 보자기는 언제 어디서고 무엇이나 전체를 모두 쌀 수 있으며, 사용할 필요가 없으면 접어 호주머니에도 넣을 수가 있는 것처럼, 접으면 보이지도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서양의 책가방은 책 이외에 다른 것을 넣을 수 없고, 책만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부에는 공간적인 구분이 되어 있으며, 외부적으로도 어떤 형태의 모습과 모양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으며, 일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서구의 생활용품이 모두 어떤 한가지 사물만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적인 것임에 비하여 동양의 보자기 문화는 언제 어디서고 다양한 물건을 필요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전체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층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승강기는 올라가고 내려 올 때에 타는 기계이지만, 영어로 엘리베이터(elevator) 라는 말은 올라가는 기계라는 말이지 내려온다는 의미는 없다. 또한 외출을 「나들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옴을 의미하는 말인데 비해, 서양인들은 외출이나 가출로 집을 나간다는 의미의 말뿐이다. (이어령, 『축소지향의 일본인』, 기린원, 1993.)

이와 같이 동양인들은 평소에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집(뿌리. 근원)을 중심으로 반드시 본래로 되돌아오는 왕복과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생활 문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즉 한마디의 말이라도 서구의 생활 언어처럼, 한쪽이나 부분(구분)을 나타내는 분할적이고 대립적인 사유의 언어가 아니라 반드시 전체적이고 본래적인 상태로 되돌아가는 사유적인 생활과 언어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식사의 생활풍습을 통해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는 동양인들은 젓가락으로 쌀밥을 모아 뭉쳐서 합심하여 입으로 넣고 있는데, 서양인들은 나이프(칼)와 포크로 빵이나 고기를 찢고 자르고, 잘게 쪼개고 썰어서 입에 넣는다. 동양의 식사는 낱알의 쌀이나 음식물을 젓가락이나 숟갈로 잘 뭉치고 말아서 전체를 묶어서 먹는데 비해, 서양인들은 나누고 쪼개어서 먹고 있는 생활 습관에서도 전체성과 부분성을 대조적으로 살펴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전체적인 보자기 문화는 상대적이고 차별, 분별적인 사고를 초월하여 전체적이고 본래의 상태인 절대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숲이라는 환경풍토에서 형성된 원환적인 사고에서 이루어진 정신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서구의 상대적인 대립, 부분, 분석, 나눔의 문화는 사막적인 풍토의 사고에서 형성된 문화이다. 즉 천지와 인간을 그리고 인간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인 동식물까지 모두 신이 창조했다는 천지창조의 세계관이며, 시간과 공간도 신이 창조한 피조물(被造物)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존재란 있을 수가 없다. 절대적인 존재란 오직 신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유태교의 교도로서 이러한 사막적 풍토의 세계에 태어나 사막적인 사고와, 천지 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상대적인 세계관의 사고가 작용했기 때문에 그는 상대성원리의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대성과 대립적인 사막의 풍토적인 사고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생기며 상대적이고 대립과 대항, 투쟁과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사막적인 사고의 정신과 사상은 오늘날까지 전쟁과 투쟁, 선과 악의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대립과 대항, 정복과 투쟁을 유발하는 사막적인 사고의 상대적인 문화로는 인류의 평화와 안정, 안녕을 이루게 하는 합리적인 세계평화의 이론이 될 수가 없다.

모든 존재의 존귀함과 상의상관관계의 만물일체적인 동양사상의 전체성과 절대성의 정신이 인간 각자와 인류의 안정과 우주의 평화를 이룰 수가 있다.

『열반경』에서 설하고 있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 라는 평등 존엄의 사상이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에게까지 위대한 인류의 평화정신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과 평등 평화 사상만이 미래의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2) 정적 내향성과 동적 외향성


또한 동양은 좁은 공간인 집(家)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정적(靜的)이고 내향적(內向的)이라고 한다면, 서양은 집(家) 밖을 향한 광활한 공간을 활동무대로 하고 있는 동적(動的)이며 외향적(外向的)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양은 인간의 내면적, 정신적(心的) 세계를 중시하고 있는데 반하여 서양은 육체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겠다. 이 점은 동양의 자유가 정신적 자유임에 비해 서구의 자유가 육체적인 자유인 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는 서구의 광장문화와 일본의 4조반 다다미방 문화의 생활 공간의 의식 차이를 어린아이의 벌주는 방법을 예로 들어 잘 지적하고 있다. 서양사람들의 애들 벌주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애들을 좁은 공간(방)에 가두는 일이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말을 안들으면 "클로제트(closet;다락같은 붙박이 장)에 가둔다!" 라고 위협하고 겁을 준다. 또 어린 아이들에게 "네 방으로 들어가라!(Go to your room!)" 라고 명령하고, 10대 소년 소녀들에게는 "밖에 나가서 네 맘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 외출금지! (You are grounded!) " 라고 명령한다고 한다.

클로제트(closet)나 방과 같은 좁은 공간이나 한정된 장소는 인간의 육체적인 자유와 활동을 제한하게 하고 구속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육체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서구인들에게는 엄중한 벌을 내리는 것이 된다.

죄를 지은 사람을 형무소에 가두는 것도 그 사람의 육체적인 활동의 제한과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육체적인 자유를 구속하는 것인데, 형무소 가운데서도 중죄를 지은 사람은 독방에 가둔다. 빠삐용이라는 영화에 보면 형무소 안에서 싸움을 하고 말썽을 일으키거나 탈출에 실패한 사람은 특별히 몸을 간신히 움직일 수 있는 좁은 공간의 독방(closet)에 가두는 것은 이러한 사막적인 생활풍토가 깊숙이 베여있는 서양인의 형벌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한국, 일본, 중국 등)에서는 어린애가 말을 안들으면 "집에서 썩 나가라!" 고 외치며 회초리를 들고서 야단치며 어린애를 집 밖으로 내쫓아 버린다. 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경우에도 상대방의 머리채를 붙잡고 집 밖으로 끌어내거나, 쫓아낸다. "나가라!" 는 말은 집에서 집 밖의 넓은 숲 속으로 내쫓는 형벌의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서양의 어린아이들에게 죄의 대가로 부여하는〈외출금지!〉라는 최고의 형벌이 동양의 어린아이들에게는 반대로 도리어 평안과 안정을 부여하는 구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막적인 생활풍토에 젖어 있는 유목민적인 사고가 뿌리박혀있는 서양인들에게는 사막이나 광장에서 생활하던 사막적인 환경풍토에서 익힌 외향적인 사고가 몸에 깊숙이 푹 베여 있기 때문에 좁은 공간은 자유를 구속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며, 불편하고 불안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은 우선 육체적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마실 물이 없으면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시킬 수가 없다는 절박한 생명의 보존 문제에 대한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의 보존을 위해 마실 물이 있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찾아서 끊임없이 공간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막의 한곳에서 머문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생명의 보존을 위해 밖을 향해 생명수와 삶의 터전을 찾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육체적인 생명의 보존을 위한 물이 있는 새로운 장소(세계)를 향한 이동을 위해서 언제나 모험적인 여행을 하게 되며, 또한 그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족과 투쟁을 해야 하고 정복해야 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막적인 환경에 사는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한 공간적인 이동을 하면서 육체적인 생명의 보존과 연장을 절박한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육체를 어떤 한정된 공간이나 장소에 구금하고 구속시켜서 공간이동의 활동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사막에서 죽도록 하는 형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존을 위한 원초적인 본능을 박탈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자유를 빼앗는 형벌은 곧 생명을 죽이는 일과 같은 처벌인 것이다.

그러나 집(家)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동양인들은 집을 벗어나 숲이나 들, 넓은 곳에 나가면 괜히 불안해하는 사고(생활풍토)가 있기 때문에 집(家)에 있어야 편안하며 안심이 된다.

즉 숲 속에 빠져서 미아(迷兒)가 되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자. 숲에서는 흐르는 개울물도 있고, 나무의 열매와 과실(果實), 약초가 되는 풀과 나무, 버섯이나 감자나 고구마와 같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 할 수 있는 식량은 얼마든지 있다. 말하자면 사막에 살고 있는 인간들처럼 육체적 생명의 보존을 위한 절박한 위험성은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이 숲이다.

숲 속에서의 문제는 안정된 삶의 터전인 집(家)을 떠난 불안의 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점이다. 불안은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이다. 육체적인 안전(安全)과 생명의 보존에 대한 절박성에서 벗어난 이후의 단계에서 정신적인 불안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교를 비롯한 동양의 종교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苦)을 극복하고, 괴로움(不安)에서 해탈하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자유와 해탈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평온한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는 정신적인 자유와 해탈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물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 파악하고 지혜가 구족된 그 경지에 만족하지 않고, 그 지혜의 안목으로 각자의 평온하고 적정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를 증득하여 근원적인 불안(苦)을 극복하여 해탈 자유의 경지를 터득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밖으로 외출하여 들이나 숲 속에 다니다 집으로 되돌아갔을 때 인간은 여러 가지 불안과 초조, 근심 걱정, 두려움과 공포 등에서 벗어나게 되고, 또 집에서도 자기의 안방에 들어갔을 때 더욱 편안함과 자유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선불교의 목적을 한마디로 말하면〈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도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편안히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편안함은 불안(苦)에서 벗어난 해탈의 입장이고 그러한 편안함으로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입명이다. 이것은 집에서 외출했다가 집으로 되돌아와서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집안에서의 생활과 같은 구조이다.

선의 십우도(十牛圖)나 심우도(尋牛圖)는 동양적인 사고와 생활풍토의 구조적인 사유를 토대로하여 만들어진 도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동양의 자유는 좁은 공간인 집을 중심으로 가장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전개할 수 있는 생활구조적인 사유에 토대를 둔 정신적인 자유와 편안함이다. 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자유에서만 가능한데, 이러한 자유를 걸림없는 자유(無碍自在)라고 하며, 그러한 경지를 체득한 사람을 임제(臨濟)는 진정한 자유인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넓은 사막과 광장을 생활공간으로 익힌 유목적인 공간 이동의 생활 습관에 젖어 있는 서양인들에게는 육체적‧물질적인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자유, 물리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좁은 공간이나 클로제트에서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좁은 공간 붙박이장에서 더욱 자기만의 편안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 좁은 공간에서 자유스러움을 찾는다. 서양에서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토끼집과 같은 작은 공간인 일인용 숙박시설인 일본의 캡슐호텔은 이러한 동양적인 사고에 의한 공간이며 쉼터로서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동서양 종교의 구원론


삼림(森林)에 살고 있는 인간은 한 지역의 공간에 정착하여 집을 짓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주위의 대지와 농토, 숲과 자연 등의 모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비나 바람, 사계절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자연의 현상에 순응하고 자연의 모든 조화를 참고 받아들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인수(忍受), 인종(忍從), 수순(隨順), 순리(順理), 수연(隨緣) 등은 이러한 사실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리고 신이나 부처나 어떤 객관적인 존재로부터 계시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계시하고 자각하게 하며 확신을 가지고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있다.

즉 밖의 어떤 절대자나 신에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내심을 향한 자각적인 구원이다. 육체에서 정신으로,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나아가는 내향성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집에서 밖으로 나왔다가 외출에서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원성(還元性) 내지 귀환성(歸還性)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집을 벗어난 인간의 불안과 공포‧두려움과 같은 괴로움(苦)의 해소는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본래의 집인 근원으로 돌아갈 때 육체적인 안정과 정신적인 평안을 회복할 수가 있고, 일체의 불안(苦)을 집이라는 근원에서 해소시킬 수가 있다. 육체적인 안전과 평안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정신적인 안정과 평안에서 근원적인 불안을 해소하며, 진정한 해탈과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선불교에서는 자기의 근원인 본래심(本來心)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귀본처(還歸本處)〉라고 하며,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에서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것을〈안심입명〉이라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건립한 서방 십만 억 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하는 극락세계나 정토(淨土)도 각자의 본래심에서 찾도록 한다. 『육조단경』에도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念佛)해서 정토에 왕생하려고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깨끗이 한다.(迷人念佛生彼, 悟者自淨其心)" 라고 설하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나옹선사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을 읊고 있다.


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고,

마음으로 간절히 잊지 않으면,

생각이 다하여 무념(無念)의 경지에 이르면,

여섯 문에서 언제나 자금광명(紫金光明)이 발하리라.


아미타불은 멀고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있다. 극락정토도 각자의 본래심에 있으며, 청정한 그 마음이 정토의 세계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은 목축업을 하는 유목민들이 많다. 그들은 양떼들과 가축들을 몰고 다니며 보다 나은 생활 환경을 찾아다닌다. 즉 목축업을 경제 생활의 수단으로 하고 있기에 항상 생명선과 같은 물과 초원을 찾아 이주하는 유랑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지니고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숲의 종교의 풍토와는 다른 안정성이 없는 생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사막에서는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하면서 살아 갈 수가 없다. 사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살인적인 더위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막을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육체적인 생명을 보존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물이 있고 초원이 있는 보다 좋은 새로운 생활환경과 낙원의 공간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살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막에 살고 있는 인간의 의식에는 항상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높은 곳에서 넓은 곳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가 새로 옮겨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 좋은 생활 환경 장소를 찾아, 공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이동해야만 한다.

여기보다 더 좋은 생활 공간을 찾기 위해서는 높은 곳에서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天上)에서 지상의 세계를 보다 넓고 멀리 볼 수 있는 곳에서 선택한 새로운 공간을 그들은 신이 계시하고 지정해 준 곳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살고 있는 것이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같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모험과 새로운 생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과 정복이 계속되고 있는 도전적인 의식구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주받은 이 사막의 대지를 도전하고 정복해야 인간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막적인 사고의 인간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는 모험적인 삶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있으며, 『톰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핀의 모험』등과 같은 동화책은 이러한 사막적인 인간의 사고에서 나온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숲에서 사는 인간의 시점은 밑에서 위로 즉 대지(大地)에서 하늘(天)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사막에 사는 인간의 시점은 위에서 아래로 즉 하늘에서 대지로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막적인 사고의 종교에서는 절대신에 의한 인간의 구원론(救援論)을 주장하고 있는데 반하여, 숲의 사고인 동양 종교의 구원은 오로지 인간 중심이며 인간 각자가 자각을 통한 깨달음의 지혜로 자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특히 선불교에서는 부처나 보살, 혹은 신 등의 객관적인 어떤 존재로부터 계시되는 것을 여의고 결국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자각적으로 계시한다. 이를 자각, 혹은 자기 확인 자기 확신이라 말한다.

계시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무언가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막의 종교인 유태교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말하면 객관적 세계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여 그래서 우선 극한상황인 경우에 신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신이 무언가 어떤 계시를 자신에게 주려하고 있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에서는 그와 같이 그 계시를 밖에서 찾아보려고 하지 않고 부처가 곧 자기의 마음이고 오히려 주관의 방향으로 계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의 구원과 계시를 유태교와 기독교는 밖에서 또 밖으로 향하여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고, 불교는 밖에서 안에서 다시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막에서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생활 공간을 찾기 위해 항상 멀리 밖을 향해서 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 저 하늘 멀리 천국(天上)으로부터 신의 계시와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밖에서 또 밖을 향해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는 구원론이다.

그러나 숲의 종교는 인간 생활의 경제적인 기반이 되고 있는 삶의 터전인 숲에서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생활의 구조처럼(還歸 ; 본래로 되돌아가는 구조), 밖에서 안으로 다시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으로 되돌아가는 자각적인 구원론이다.

『임제록』에 "밖을 향해 진실을 추구하는 놈은 쓸개빠진 녀석" 이라고 설하며, 밖을 향해서 도(道)를 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마음으로, 각자의 마음을 자각하여 깨달음을 통한 확신이 불교 내지 선불교의 구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각자가 스스로 자각을 통한 체험으로서만이 불안(苦)한 사바세계(숲)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각자의 직관적인 지혜로 체득되는 것이기에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고,〈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라고 말하고 있다.



<도표> ***** 숲의 종교와 사막의 종교 ********


         숲의 종교(密林과 寶所)

        사막의 종교(사막과 별)

Orientis. Solis partes(日出地域)

인간 중심. 無神論 내지 汎神論

大地性. 자연. 森林.

농경문화. 촌락을 형성. 安定性.

정착된 안정성.

자연과의 화합, 동화, 일체성.

만물일체의 자연과 본성.

장자의 天地同根 만물일체. 자연개조의 不可(불필요성)

  <Roma>    Occidentis. Solis partes

神 중심. 唯一神, 創造神.

 天日性. 달과 별. 砂漠 .

유목과 목축의 이주생활

 이동적인 유동성.

자연과의 투쟁, 정복.

불편한 생활환경을 改造해야할 필요성.

자연(사막)을 정복하고 개조함.

원환적인 세계관.

생명의 순환적 시간의 이미지.

존재의 생성과 생로병사의 무상.

종자의 생성과 변화. 윤회설의 성립.

사계절의 변화.

낮과 밤의 순환.

숲(森林)에서의 다양한 길, 만남의 인연.

판단중지의 사고.

직선적인 세계관.

물리적 공간의 이미지.

출발점(시작, 기원)과 목적지.

랍비(牧者)들의 공간이동과 행로.

종말론적인 역사관. 종말론과 신국.

사막로상의 방향(A, B)선택과 결단성.

방향선택과 인간행위의 기준.

 이슬람교의 Shariah.(물이 있는 곳)

인간 중심의 윤리관.

인간 각자가 자기의 행위에 대한

가치 기준과 책임을 가짐.

자기 향상을 위한 서원과 원력. 자기 의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타인에 대한 윤리.

인간행위의 가치기준(명예와 수치)

각자의 인격과 가문의 명예를 중시함.

- 名과 恥의 문화.

인간과 인간과의 윤리.

신중심의 윤리관.

신에 의한 인간의 행위와 가치 기준.  

서약, 계약은 신에 대한 인간의 행위.

신의 의지, 신의 뜻 - 운명론적인 사고.

신의 은총과 섭리, 은혜, 저주로 간주함.

인간의 행위(죄)가 신에 의해 심판(벌)을 

받음 - 죄와 벌의 문화.

신과 인간과의 관계.

신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윤리적인 사고.

각자 스스로 수행과 자각으로 진리를 체득함.

깨달음의 체험과 해탈. 직관적인 지혜.

言語道斷, 不立文字의 세계(경지).

Lemma의 논리

언어와 문자로 표현. 언어로 전달.

Logos의 논리.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