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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45
1월24일[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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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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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4keKCgyTRk
[의정부교구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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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1567~1622)는 프랑스 남동쪽과 스위스 서쪽에 위치한 사부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영재였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던 아버지의 뒷받침도 제대로 받았습니다. 12살부터 파리로 유학을 떠났으며, 소르본 대학,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불과 25세 나이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따냈습니다. 그 젊은 나이에 변호사 자격도 취득했으며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이 창창하던 살레시오는 아버지의 큰 반대를 무릅쓰고 26세의 나이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아버지였지만, 아들 살레시오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되었기에 차선책을 찾았습니다. 이왕 사제가 되었으니, 고위층 성직자가 될 수 있도록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살레시오는 그런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칼뱅교도가 득세한 샤블레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2만 5천명이나 되는 주민들 거의 모두가 칼뱅교로 넘어가고 가톨릭 신자 수는 백 명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종교적 적대감정이 가득한 샤블레 지역에서 살레시오가 보여준 선교 방식은 오늘 우리가 눈여겨 볼만 합니다. 살레시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개심과 반발심으로 가득한 주민들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합니다.
지역 주민에게 친근감을 주려고 어려운 사투리를 힘겹게 배웠습니다. 선교 효과가 미미하자 작은 전단지를 만들어 일일이 대문 밑으로 밀어 넣거나 거리의 기둥이나 벽에 붙였습니다.
결국 살레시오가 샤블레 지역 선교를 성공하게 된 비결은 한 명 한 명과의 성실한 대화, 무엇보다도 진지한 경청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 특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 안에 선함을 존중했습니다. 살레시오가 지닌 무한한 인내심과 온유함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시켰으며, 그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살레시오와 함께 방문 수녀회를 창립한 프란치스코 요안나 드 샹탈의 증언은 수시로 분노하는 우리에게 큰 성찰거리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살레시오 주교님이 화를 내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분에게 방문 수녀회에서 겪고 있는 어떤 난관에 대해 왜 분노하지 않으셨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힘들게 이룬 절제의 덕을 단 15분 만에 포기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진정으로 인내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된 운명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동정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받아들입니다. 절대로 중얼거리거나 불평하거나 확대해석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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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wVZeq_J_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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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이 반드시 가진 세 가지는?>
오늘은 연중 제3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 무엇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은총과 진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은총과 진리가 떨어지면 믿음의 씨앗이 자라나서 그 믿는 대로 우리 삶이 이루어지게 되겠죠. 열매를 맺게 되겠죠.
씨가 뿌려지는데 땅에서 똑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씨는 같지만, 땅의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 열매를 맺더라도 차이가 30배 60배 100배도 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는 씨를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자세, 곧 의지의 문제일 것입니다. 길가는 교만을, 돌밭은 육욕을, 가시밭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삼구를 이기지 못한 밭에 떨어진 하느님의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국의 마윈이라고 하는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이 포레스트 검프 보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윈은 뭐를 해도 항상 떨어졌는데, 인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도 IQ가 70밖에 안 되는데 엄마가 “초콜릿을 먹을 때 무슨 맛이 안에 들어있을지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뭐라도 끝까지 해봐라. 한 번 할 때는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 성공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이 마윈에게도 떨어졌고 그도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자녀들에게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서 세속, 육신, 마귀를 없애서 내가 하는 말이 단 한 톨이라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먼저 길과 같은 마음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길은 사탄이고 교만입니다. 모든 인간의 선택은 행복을 기준으로 하기에 사탄은 행복의 방향만 틀어놓습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자기 연민에 빠진 이들은 그 씨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부터 행복하여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에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해야 합니다. 연예인이 관객에게 행복을 주어야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당신 자신과 싸우신 것처럼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돌밭처럼 쉽게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철봉을 잡으면서 고운 손바닥을 바라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밭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탐욕에 깃든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투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먼저 자기에 대한 투자를 아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양팔 없는 파일럿 제시카 콕스가 있죠. 이 사람은 양 팔이 없이 태어났지만, 20대 때에 이미 경비행기를 조종사가 됐습니다. 물론 자동차 운전하고 요리하고 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수영하고 피아노를 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엄마가 뿌린 “할 수 있다.”라는 씨앗을 잘 키웠습니다.
자이온 클락이라는 허리 밑부분이 없이 태어난 사람도 카일 메이나드라는 손발이 없이 태어났지만, 엄청난 성취를 이룬 사람의 책 ‘변명은 없다’를 읽고는 크게 변했습니다. 처음엔 자기 연민에 쌓여 살았지만, 자신도 메이나드처럼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벌써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다음은 육체와의 싸움이 기다립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두세 배는 더 고생해야 했습니다. 그는 돌밭도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였습니다. 가시밭도 극복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워런 버핏도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라 그러면 누구도 그거 빼앗아 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모든 사람도 1. 이웃 사랑이 행복임을 알고, 2. 자기를 죽여야 함을 알며, 3. 탐욕에서 자유로워야 함을 압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우리 안에서 이뤄지는 법칙이나 같습니다.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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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성지미사를 많이 봉헌했습니다. 여행사와 현지 안내를 맡은 분이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성당을 미리 예약하였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가 많았습니다. 성당은 규모만큼이나 이야기도 많이 간직하였습니다. 그 성당에서 살던 분들이 성인이 되었고, 그 성당에서 기도하였을 때 많은 치유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은 성당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순례의 의미를 돌아보았습니다. 순례 중에 예기치 못하게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 버스 안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버스가 성전이 되었고, 버스의 좌석이 신자석이 되었고, 운전석 옆에 임시로 세워든 박스는 제단이 되었습니다. 해가 지는 오후에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광야에 있던 바위가 제단이 되었습니다. 햇살을 머금은 언덕은 감실의 등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산의 정상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둠을 밝히며 떠오르는 태양은 제단을 환하게 비추는 성당의 조명같았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주님의 사랑은 미사가 봉헌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일지라도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정성과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의 진심이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곳에 투자하면 높은 수익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몫이 좋은 노른자 땅에 투자를 하면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노른자 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개발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맹지에 투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수익이 떨어지게 됩니다. 싼 맛에 손님이 없는 가게를 인수하면 더 큰 손해를 감수하고 되팔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였는지 모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의 수가 늘어나면 좋은 씨가 뿌려져 열매 맺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교님은 성당 분할계획을 발표하기도 하고, 성전 신축을 잘 하는 사제를 능력 있는 사제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을 밝히는 붉은 빛의 십자가와 예배드리고 나오는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선포하기도 하셨습니다. 2020년에는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20%가 되게 하자는 취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본당 사제의 인수인계에도 숫자는 중요합니다. 영성체 수, 세례자 수, 교우 수, 교무금, 헌금, 본당 재정도 모두 숫자로 표기됩니다. 많으면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예수님의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문제는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사라지고 있기에 위기가 생기고, 기도와 전례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선교를 등한시 합니다. 참된 개혁은 내적인 각성, 불타오르는 마음에 관한 문제로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은 그리스도께 대해 확실히 깨닫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각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는 것은 밀물과 썰물처럼 변하기 마련입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 교회가 사라진 것 같이 보였지만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다시 세워지고, 공동체는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계몽주의와 자본주의가 우리 시대를 압도할지라도 말씀에 변화된 사람들이 있을 때는 교회는 여전히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해서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면 그만큼 세상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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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1-20: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3절) 그분은 믿음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나오셨다. 당신의 가르침은 씨요, 인간은 밭이며, 당신 자신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 하신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3절) 씨 뿌리는 사람은 골고루 구별 없이 밭에 씨를 뿌리듯 주님께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말씀이라는 선물을 주신다.(로마 5,15 참조) 그런데 인간은 그 씨앗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 곧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탓이다. 인간이라는 밭이 어떠냐에 그 결실이 달려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씨 뿌리는 분 탓이 아니라,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탓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은 돋았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뿌리가 없어 말라버렸다고 한다. 싹이 말라버린 것은 뜨거운 열 때문이 아니라,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6절) 이런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씨처럼 마음이 거칠고 무심하고 부주의하다. 돌밭에 떨어진 사람들은 나약함 때문에 실패한 사람들이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7절) 하느님의 말씀이 숨 막혀 버렸다면, 그것은 가시 때문이 아니라, 가시덤불을 그냥 내버려 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가시덤불이 자라지 못하게 막고, 우리의 재물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 걱정이라 했고, 재물의 유혹이라 했다(19절). 세상과 재물을 탓하지 말고 타락한 의지를 탓해야 한다.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8절) 땅도 좋고, 씨 뿌리는 분도 한 분이시고, 씨도 같은데, 어찌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의 열매를 맺은 것인가? 이것은 땅의 준비 상태에 달려있다. 좋은 땅이라고 해도 땅의 준비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잘못은 농부나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는 땅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의 밭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고 있는가? 내 마음의 굳은 땅은 쟁기로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걷어 내야 한다. 사랑의 뿌리가 내릴 수 없는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결실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며 말씀의 씨앗을 잘 가꾸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은총의 삶을 주님께 청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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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좋은 땅’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은 모두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뒤에 그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간직하느냐에 따라 길,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으로 구분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을 가진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마태오 복음서는 ‘받아들이다’의 의미를 ‘깨닫는다’로 이해하였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13,23) 그 반면 루카 복음서는 ‘받아들이다’를 ‘간직하다’로 이해하였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8,15)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마음에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55,11)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만 끝내지 마십시오. 말씀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힘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변화시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구원의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복음 말씀을 한 구절씩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복음의 한 구절을 여러분의 주머니에 넣거나 지갑에 넣어 둡시다. 어떤 구절이든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될 때마다 꺼내 보는 것이죠.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열어 두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프란치스코, 사순 제2주일 삼종 기도 때의 말씀, 20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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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마르 4,15-20)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은 말씀을(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즉 신앙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이미 다른 종교에 빠져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비유에는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탄의 유혹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나자렛 사람들’을 ‘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르 6,1-6) 그들은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랬는데, 사탄이 그 편견을 부추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돌밭’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는 받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뿌리’가 없다는 말은,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삶으로’ 실천하지는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돌밭’인 사람들은 박해 때에 금방 배교합니다. 말로만 믿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옛날의 박해와 같은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마치 취미생활처럼 하다가 어떤 위기를 만나면 금방 떨어져 나갑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만 하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하고......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고, 적극적이지도 않고...>
‘가시덤불’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고,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 즉 먹고사는 문제나 세상일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고, 믿음으로 극복하기에는 걱정거리가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조금씩이라도 ‘가시덤불’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속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하면서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데마스’ 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가시덤불’의 예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크레스켄스는 갈라티아로, 티토는 달마티아로 갔습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티키코스는 내가 에페소로 보냈습니다"(2티모 4,9-12)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 또는 동료들로서 바오로 사도와 함께 선교활동을 했던 사람들인데, ‘데마스’ 라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는지, 믿음이 식어서 그랬는지, 바오로 사도를 ‘버리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그의 마음이 세속 쪽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꺾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좋은 땅’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좋은 땅’의 경우에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다.”라는 말은,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태오복음에는 ‘깨닫는다.’라고 표현되어 있고(마태 13,23), 루카복음에는 ‘간직하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루카 8,15), ‘받아들이다.’라고 표현하든지, ‘깨닫는다.’라고 표현하든지, 또는 ‘간직하다.’라고 표현하든지 간에 이 말들은 모두 ‘실천하는 믿음’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26)
받아들인다, 깨닫는다, 간직한다, 라는 말들을 표현 그대로만 생각하고 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실천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 주지도 않고, 그저 간직하기만 하는 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5,15) 감추어진 말씀은 생명력을 잃어서 아무런 힘도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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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유학시절 집에 보관해 놓은 짐을 찾으러 본가에 다녀왔을 때입니다 짐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다가 오셔서는 저에게 유품으로 보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낡은 신약성경과 준주성범을 건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70년대 후반에 출판된 이 작은 책들은 아버지의 손때를 가득 담고 있었고 누렇게 바래져 있었습니다. 책자의 중간 중간에는 신학교에서 찍은 저와 아버지의 사진, 자녀들의 어린 시절 사진 등이 있었고 각양각색의 밑줄을 비롯해 언제 어느 부분을 읽었는지 날짜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신약성경과 준주성범 모두, 다섯 번 여섯 번씩 읽으셨음을 알 수 있었고 얼마나 반복해서 읽으셨는지 표지가 뜯어져 이제는 너덜너덜할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에는,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장 16절)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방 가브리엘입니다 주님.”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아버지께서 얼마나 깊은 신앙을 가지고 사셨는지,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시고자 노력하셨는지 감히 추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강론을 통해서 말씀드린 바 있듯이, 해외에서 활동하시던 저의 아버지는 제가 이태리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외국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유품을 수령하던 때에도 아버지의 가방에서는 제일 먼저 묵주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제가 보다 좋은 환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제의 길을 선택한 것은 전적인 부모님의 신앙교육 덕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양한 종류의 땅에 비유하십니다.
제 경우를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신앙을 키워 나갈 수 있는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아버지의 신앙과 어머니의 교육과 같은 영양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러한 신앙교육을 받아들이는 저 자신의 자세입니다. 여기서 부모님의 교육은 좋은 땅을 조성하는 태양, 물, 거름과 같은 영양소라 할 수 있고 제 자신은 처음에는 척박했을지라도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땅 그 자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어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비옥한 땅에 씨앗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돌보지 않는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씨앗에 관심을 가지고 돌봄으로써 땅을 얼마나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가에 있습니다.
씨가 떨어진 곳이 지금은 비옥한 땅이 아니더라도 관심을 갖고 돌본다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고 많은 소출을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뿌려진 씨가 싹을 틔우고 잘 자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돌을 걸러내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그 씨가 잘 자라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비유는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이며 이를 잘 어떻게 가꿔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의 내면의 모습을 얼마나 잘 가꾸고 관심을 기울이는지에 따라 말씀은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마음의 밭을 가꾸면서 미움과 불신을 걸러내고 사랑과 믿음이라는 거름을 줄 때에 우리는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열매는 더욱 풍성해져서 우리와 함께하는 모든 공동체로 그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널리 퍼져나간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서로를 사랑하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힘이 들 때나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주거나 행복을 전해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의 가족들이나 친구들로부터 받는 사랑일 수도 있고, 또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느끼는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풍경이 좋은 곳을 산책하면서, 자연을 마주하며 느끼는 평화로움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성사를 통해 주어지는 은총이 명백히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사해 주는 진정한 씨앗, ‘하느님의 말씀’ 혹은 ‘하느님의 섭리’ 입니다.
이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해지며 이를 우리가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는 어떠한 씨앗이 있고, 어떻게 그 씨앗을 잘 키워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상기해 보고, 이를 실천하는 시간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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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알로이시오 신부님]
<욕심이 차지한 공간>
학위 논문을 쓸 때 평소 아껴주셨던 교수 신부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좋은 논문을 위해서는 과감히 버려야 한다”고 충고해주셨습니다. 잘 알겠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지신 신부님이야 버릴 것이 많겠지만 한 문장 적어 나가기도 힘든 제게는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논문을 반 정도 쓴 이후에야 그 충고를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잘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삶에서도 유효함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는 것은 어떻게 하여야 나 자신이 좋은 땅이 될 수 있느냐,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생각이 악마로 변할 때 말씀은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고, 세상 재물에 걸려 넘어질 때 말씀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내 명예를 추구할 때 하느님의 영광은 꽃피울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욕심의 크기만큼 마음속에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 공간은 더 줄어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논문을 위해 버려야 하듯 하느님과 말씀을 위해 욕심을 버릴 때 좋은 삶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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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이민족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자신의 도성으로 삼고, 왕궁까지 건축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굳혔다. 이제 그는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족장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에 정착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그는 힘들게 떠돌아다니기보다 예루살렘에 영원히 안주하고자 했다. 신심 깊은 다윗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도성이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도성이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축복과 보호를 받는 도성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계약의 궤를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성전을 짓고자 했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는 성막이 아니라 예루살렘 도성에 고정된 성전을 지음으로써 하느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오직 예루살렘에만 영원히 머무르시기를 원했다.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심이 드러난다. “나는 이렇게 송백으로 지은 궁에서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모셔 둔 채 그대로 있소.”(2사무 7,2).....
다윗은 좋은 집에 살면서도 하느님께서는 성막에 머무르신 다는 점이 죄송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에는 인간적인 욕심도 담겨져 있다. 이동할 수 없는 고정된 성전,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떠나시지 못하게 하려는 인간적인 욕심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신심 깊은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생각과 욕심만으로 하느님의 성전을 건축하지는 않았다. 예언자 나단에게 하느님의 뜻을 구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사시지 않는다. 하늘은 나의 옥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어떤 집을 지어 줄 것이며 내가 쉴 곳이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만든 것 아니냐?”(사도 7,48-50)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결코 인간이 만든 집에 사시는 분도 아니시고, 예루살렘이란 한정된 곳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신심과 속내를 너무도 잘 아신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이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시고, 더불어 그와 그의 자손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나아가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신다. 하느 님께서는 다윗의 신심을 보시고, 그의 후손 가운데 영원한 왕위를 누릴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내를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시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사람의 욕심과 이기심을, 너무 잘 아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비록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더라도, 비록 사람이 자신의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다만 하느님과 우리를 잇는 끈을 놓지 않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를 막지 않으면, 신앙이란 끈과 통로를 잃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베푸시는 아버지이시다.
다윗이 하느님의 성전을 예루살렘에 짓고자 한 까닭 안에는 자신의 욕심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고, 자신의 도성을 지켜주시기를 바라는 욕심이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욕심을 잘 알고 계시지만, 다윗을 나무라시지 않고, 그와 그의 가문을 축복하신다.
나아가 영원한 왕위를 누릴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속하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마치 어머니가 품에 안은 갓난아이를 사랑하듯이, - 울거나 웃어도, 젖을 먹거나 젖을 흘려도, 어머니 품에 오줌과 똥을 싸도, 오직 제 입밖에 몰라도,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너무 잘 아신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의 울음 소리만 들어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베풀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하기보다 자신만을 생각하더라도, 비록 죄와 잘못에 빠질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처럼 잘 알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축복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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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씨앗과 밭>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 4,3.8-9)
모든 농부는 씨를 뿌리고 난 후 그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많은 열매 맺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입니다.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당신 자신이 말씀의 씨앗입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요한 1,1)
당신은 이 세상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씨앗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씨앗 안에는 푸른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들어있습니다. 진리와 생명, 부활과 하느님 나라가 들어있습니다.
그 씨앗에서 생명의 싹이 돋으려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요한 12,24) 당신은 한 알 씨앗처럼 죽었습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세상은 씨앗인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탐욕의 길바닥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모질고 사나운 돌멩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 시기 질투와 이기심의 잡초가 무성한 마음 밭을 지닌 사람들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0-12)
말씀이신 당신을 믿고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 저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말씀이신 당신께 歸依하게 하시고, 잘 가꾸어진 부드러운 마음 밭으로 당신을 받아들여 하늘나라를 열매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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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4,20)
어느 분의 표현에 의하면 성경의 상당 부분은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유식자가 썼다기보다는 친자연적인 환경, 시골의 자연과 환경에서 생활하던 분들이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붓을 들었다, 는 표현이 공감이 가더군요. 그런데 현재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도시의 인위적 환경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도시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가축이나 농작물, 땅, 과실과 같은 성경 주제를 접할 때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많은 부분을 놓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늘 깨어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란 우리의 마음에 영원히 거룩한 어떤 그 무엇이 심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씨앗이 내 마음에 뿌려질 것이며 거기서 어떤 수확이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의 밭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토마스 머튼’의 경고처럼, 그 씨앗은 대부분 죽어 없어질 것입니다. 지난 세월 우리 마음에 무수한 씨앗을 주님께서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수한 씨앗이 죽고 일부분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점을 성찰하면서 결국 우리 마음의 경직성도 문제이지만 때론 우리 마음의 편식성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잘 아는 것처럼 모든 농부는 씨를 뿌리고 난 후 그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서 많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바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밭의 농부이신 예수님 또한 여타의 다른 농부와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말씀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그 말씀의 씨앗이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뿌려진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1,1) 그렇습니다.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강생, 육화를 통해서 세상이란 밭에 뿌려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씨앗 안에는 생명이 내재 되어 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시베리아의 동토에서 찾은 씨앗을 적당한 환경을 조성해 주었더니 싹이 돋아났다는 기사가 가끔 보도됩니다. 이처럼 모든 씨앗 안에는 이미 잎과 가지, 꽃과 열매 등이 내재된 DNA가 있습니다. 모든 씨앗에는 이렇게 이미 그것이 그것으로 될 생명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진리와 생명,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내포하고 내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 씨앗은 먼저 처절하게 죽어야 하며, 자기 포기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생명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12,24) 결국 씨앗처럼 예수님 당신 또한 자연의 섭리,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이루기 위해 죽으셨고, 당신 죽음으로서 우리가 거듭나서 당신과 부활의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씨앗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씨앗이 아니라 바로 그 씨앗이 뿌려질 밭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 가운데 사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씨앗 곧 당신 자신을 뿌렸지만, 세상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세상은 오늘 복음의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씨앗은 길바닥 곧 딱딱하게 굳어진 영혼에, 돌밭 곧 깨달음이 얕은 영혼에, 가시덤불 곧 지나치게 산만한 영혼에 뿌려지다 보니 그들은 그 생명의 씨앗과 같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하신 분이신지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1,10-12) 그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는 까닭을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라고 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신 주님을 믿고 받아들인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 맺는 삶과 존재가 되기 위해서 늘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마음의 밭을 잘 가꾸고 충분한 영향과 수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이런 삶은 ‘C.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피조물인 우리의 존엄성은 주도권이 아닌 응답하는 삶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듣습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면 우리는 엽니다. 주님께서 씨를 뿌리시면 우리는 받습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씨를 뿌리는 것은 광야 같은 인간의 마음에 잃었던 에덴의 낙원을 복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십니다. 그래서 씨를 받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협조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실행해 나갑시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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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힘들어집니다. 물론 손짓과 발짓, 그림을 그리거나 몸짓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표현하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겠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잘 맞는 부부도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부부보다도 금실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니까요.”
이 부부에게 언어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사랑의 언어로는 일치했던 것입니다. 사실 맞지 않는 이유를 계속해서 찾았던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상대와 맞는 이유만을 찾으며, 또 이 안에서 상대에게 감사를 자주 표현합니다. 단순히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일치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같은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용하셨던 아람어를 우리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써야 할까요? 그런 언어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 주셨던 사랑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셔서, 당신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언어를 우리 역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로 자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깊은 뜻을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 돌밭에 떨어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있습니다. 모두 좋은 씨앗이지만, 어떤 땅에 떨어지는가가 중요함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이라는 좋은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하려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좋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언어를 쓰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가 되어야,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들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일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관계가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과 가까운 관계가 될 수 있었어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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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하느님 하느님의 우리>
마르코 4,1-20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하느님 하느님의 우리>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3)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마르 4,8)
열매를 거두려면
땅을 믿고
씨를 뿌려야지요
열매를 거두기까지
땅을 믿고
씨를 뿌리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가
좋은 농부랍니다
말씀을 뿌리시는
우리의 하느님은
늘 좋은 농부시지요
열매를 맺으려면
농부를 믿고
씨를 품어야지요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를 믿고
씨를 품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땅이
좋은 땅이랍니다
말씀을 품는
하느님의 우리는
늘 좋은 땅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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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의 열매>
어떤 열매이든 얻으려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가꾸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습니다. 혹 씨를 뿌리더라도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햇볕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안배가 없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살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는 맺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희망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수고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은들 그 씨앗이 떨어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토양이 좋다고 해도 씨앗이 좋지 않으면 역시 기대하는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풍요롭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좋은 씨앗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토양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더없이 좋은 밭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풍성히 맺어지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말씀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씨앗이 길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은 부와 권력,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의 방식에 매달리기 때문에 자비와 용서, 나눔을 추구하는 하느님의 방식이 전혀 스며들지 못함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만, 말씀 안에 꾸준히 머무르면서 그 말씀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다른 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수능이나 혼사 등 여러 일이 다가올 때 성당을 찾지 않고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밖의 여러 가지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온갖 종류의 가시덤불, 진학, 결혼, 명예, 더 좋은 것, 미래에 대한 여러 걱정 등 욕심의 가시덤불은 말씀을 따르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때만 좋은 것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가시덤불은 걱정과 욕심,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늘 최우선에 두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믿음, 희망,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등경 위의 등불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깨닫게 되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자신과 다른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말씀의 열매를 맺는 삶이 이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결코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씨앗의 법칙 7가지
1. 먼저 뿌리고 나중에 거둔다. 거두려면 먼저 씨를 뿌려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2.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야 한다. 씨가 뿌리를 내리려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것과 제공시기 및 방법을 파악하라.
3. 시간이 지나야 거둘 수 있다. 곧바로 거둘 수 없다. 제공 했다고 해서 즉각 그 결과를 기대하지 마라.
4. 뿌린 씨 전부 열매가 될 수는 없다. 10개를 뿌렸다고 10개 모두를 수확할 수는 없다. 모든 일에 성공만 있기를 기대하지 마라.
5.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모든 씨앗에서 수확을 못해도 결국 뿌린 것보다 많아 거둔다. 너무 이해타산에 급급하지 마라.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 손해를, 이익을 주면 이익을 얻는다. 심는 대로 거둔다.
7. 종자는 남겨 두어야 한다. 수확한 씨앗 중 일부는 다시 뿌릴 수 있게 종자로 남겨 두어야 한다. 받았으면 다시 되갚아라. 유비무환, 고진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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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하기-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결국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대서사시인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의 궁극목표는 오늘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어떻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명실공히 믿는이들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 인간은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둠의 혼란 중에 길을, 희망을 잃고 방황할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영어 한 문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하느님은, 예수님은 행복한 삶의 암호, 즉 열쇠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없이, 예수님 없이 참 행복은 없다는 것이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오늘 사무엘 하권의 다윗과 복음의 예수님에게, 그리고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을 배우게 됩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세상에서 ‘기도는 믿음의 호흡(Prayer is breath of faith)’ 이라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위해 간절히 항구히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삶의 좌표이자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은 성인들의 삶을 대하면 늘 감동하게 됩니다. 성인들의 삶 역시 한결같이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말그대로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한평생 순교적 삶을 산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55세로 뇌일혈로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마지막 임종어 역시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수,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
임종어가 성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의 삶에 주인공은 자신임을 밝히며 그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을 통해 우리는 다윗의 생애를 렉시오 디비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장의 주어가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그 문장의 일부만 인용합니다.
“이제 너는 나의 종 다윗에게 말하여라.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결코 믿는 이들의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서 하느님이 해주신 섭리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 참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주면서 다윗의 무지를 밝혀주시는 나탄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원해서 요셉 수도원에 온 듯 하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 주신 하나하나 수도형제들이 하느님 섭리의 역사임을, 모두가 대체 불가능한 “신(神)의 한 수(手)” 같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인 요셉수도공동체요, 믿는 모든 이들 역시 깊이 들여다 보면 이와 똑같이 신의 한수같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해설은 늘 읽어도 새로운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삶을 엿볼수 있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길을 환히 밝혀주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외치시며 깊이 경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앞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그대로 예수님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를 밝혀줍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명언도 생각납니다. 환경이든, 누구든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신망애(信望愛) 삶의 자세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우보천리(牛步千里) 한결같이, 묵묵히 씨뿌리는 삶에 전력해온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보여주는 예수님입니다.
말그대로 정주영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결국은 어떻습니까? 짧은 안목으로 실패인 듯하지만 주님의 긴 안목으로보면 성공인생임을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저 역시 날마다 묵묵히 말씀을 씨뿌리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참 많이도 뿌렸네요.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내고 수확될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날마다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때 어디선가, 언젠가는 열매를 낼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좌절함이, 절망함이 없이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씨뿌리는 삶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절망은 없다!”입니다. 지성이며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느자를 돕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후반부 내용은 우의적 해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말씀이 아니라 토양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길바닥 같은 마음밭입니까, 혹은 돌밭, 가시덤불 같는 마음밭입니까? 이런 마음밭들이라면 오늘 복음의 후반부 해설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수확은 어불성설입니다. 참으로 “말씀의 평생 학인”이 되어 말씀수행과 실천에 항구했던 참 좋은땅의 마음밭을 지닌자들의 수확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말씀을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이는 예순 배, 어떤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정말 이런 이들이 렉시오디비나의 달인들이자 대가들이요, 예수님을 위시한 성인들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특히 오늘 기념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공부하면서 저는 놀랐습니다.
17세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중 가장 위대한 최고의 성인이라 합니다. 그는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성인품에 올렸고 187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성인은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온유함의 성인’, ‘신사성인’이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탁월한 평온과 온유는 본래 타고난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여준 온화함과 밝은 마음, 그리고 친절함이 일상적 행동 양식이 되기까지 하느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인고의 수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인은 “나는 내 과격한 성격을 극복하는데 20년이 걸렸다” 고백하는데, 말그대로 은총에 협력하여 지칠줄 모르는 항구한 노력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척박한 마음밭을 20년동안의 노력으로 옥토의 마음밭으로 바꿨다는 것이니 정주영성을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경청해야할 성인의 삶입니다.
그의 불후의 작품이 ‘신심생활 입문’, ‘신애론’, ‘영적담화’중 평신도들을 위한 신심생활입문은 수도자들이 애독했던 준주성범과 쌍벽을 이룬 작품이라 합니다. 성인은 무엇보다 성성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모든 이가 성인으로 불리었다는 보편적 성소는 400년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됩니다. 성인의 영적 가르침이 참 유익하고 심오합니다.
첫째는 애덕입니다. 완덕에 이르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사랑입니다.
둘째는 온유의 덕입니다. 성인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세마디로 남겨주신 중요한 교훈을 잊지 마십시오. 즉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를 본받으시오. 이것이 모두입니다. 이웃에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경건한 생활입니다. 참된 신심은, 영성은 비상한 은총이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준엄한 생활을, 절식을, 자선을, 묵상기도를 덕행이라 생각하고, 어떤이들은 수동적이고 탁월한 관상기도에, 무상으로 받은 특은을 덕행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결과를 원인으로, 개울을 샘으로, 가지를 뿌리로 그림자를 실물로 착각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완덕을 알지 못한다.”
넷째는 영성의 다양성입니다. 영성의 다양성이 신심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완덕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하고 하느님께 가는 길도 여러 가지라 했습니다.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세상을 떠난 수덕하는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달성해야할 목표임을 강조했습니다.
다섯째, 성인은 감정을 다시 일깨움으로 지성에 치우친 신심행위가 좀더 따뜻한 정감을 되찾도록 노력했습니다.
여섯째, 경건한 인문주의 신심운동의 고취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실재에 대하여 과도한 엄격함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엄격함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영적발전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성대가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이요 성인의 영성을 계승한 요한 돈 보스코 성인이 설립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수도회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인들처럼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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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4,3)
<평화의 땅!>
오늘 복음(마르4,1-20)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의 설명'입니다.
'말씀의 씨'가 길과 돌밭과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비유를 통해,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실행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길에 떨어진 말씀'은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를...
'돌밭에 떨어진 말씀'은 환난과 박해 앞에서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태를...
'가시덤불에 떨어진 말씀'은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한 상태를...
'좋은 땅에 떨어진 말씀'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여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어떤 상태인가?
어제는 오전에 나가사키 평화 공원과 원자폭탄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폭 피해 박물관을 방문했고, 점심 때부터는 테마공원인 하우스텐보스를 다녀왔습니다.
1945년 8월9일(목) 오전 11시02분에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27만 명 가량의 원폭 피해자가 생겨났고, 7만 명이 희생되고, 이 중에서 2만 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원폭 투하 근처에 우라카미 성당이 있었는데, 성당에서 성모승천대축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신부님 두 분과 신자들 2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우라카미 성당 전체 신자 12,000명 중에서 8,500명이 원폭으로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핵 전쟁은 절대로 안 됩니다. 핵 전쟁의 도발을 자극하는 행위도 절대로 안 됩니다. 핵 전쟁은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평화는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입니다.
'평화가 넘치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평화를 지켜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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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vuO5T4YD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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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르 4, 3)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의 정성에서
참된 희망을
만납니다.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우리에겐
시들지 않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희망입니다.
하느님의 희망은
우리를 향한
확고한 믿음에서
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밭을
버리시는 일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은
이 모든 것은
가능한
희망의 자리입니다.
씨앗을 뿌리신
하느님만이
아시는 기쁨이며
행복입니다.
농사를
지으시는 분은
언제나
씨를 뿌리시는
씨앗의
하느님이십니다.
씨를 뿌리지
않고서는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삶의 보람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인
우리 마음의 자리에
하느님께서는
씨를 뿌리십니다.
농부의 지혜는
기다림의
지혜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농사의
시작입니다.
정성을 쏟으시는
하느님의 힘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씨앗을
받아들이는
겸양의
마음입니다.
마음을 살리는
하느님의 씨앗이며
하느님을 알게하는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씨를 뿌리시는
하느님께서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진실로
믿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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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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