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청소년에게 해도 가장 의미 없는 충고는 공부 걱정하지 말라는 충고와 인간관계 걱정하지 말라는 충고이다. 이 두가지는 교회 설교에서 참으로 많이 건드리는 주제이자 그만큼 학생들이 지겨워하는 주제이다. 어른들이 보기에 학생들이 느끼는 공부와 인간관계를 향한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필요 이상으로, 사실 이상으로 민감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 만큼 복잡한 생각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 중 인간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적어도 공부는 내가 해결하는 것이지만 인간관계는 결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에서의 관계는 적어도 내가 아닌 20명 이상의 다른 인간들이 해결에 포함된다. 학생 때 겪는 수많은 공동체(동아리, 학원, 친구 그룹)와 심지어 가족안에서까지 청소년기 학생들은 처음으로 내가 아닌 인간을 상대하고 교감하는 것에서 이질감과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강한 욕망을 가지는데 친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기는 두려운 역설적인 상황이 된다. 이에는 이성도 포함이 되는데 이성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타인이면서 동시에 성도 다르기 때문이다. 두렵지만 더욱 다가가고 싶다. 어찌어찌 다가가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타인을 상대함에서 오는 여러가지 맛들을 보게 된다. 불편함, 분노, 슬픔, 공허함. 기쁨, 즐거움, 사랑 등등 이런 감정은 타인과의 이별, 만남, 나눔, 싸움, 등의 사건을 통해 느낀다. 물론 인간관계는 중요하다. 청소년기이던 유년기이던 중년, 노년기 상관없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만나는 여러 상황과 감정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나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처음 겪는 청소년기에서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다른 시기와 비교해서 판단하기 힘들다.
요즘 세상의 여러가지 이야기들로 많은 관계의 형태가 전해진다. 절친, 반 친구, 남사친, 여사친, 남친, 여친, 동거자, 인터넷 친구, 랜선 연애. 신조어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간관계의 형태가 정의된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인간관계의 종류를 나눔과 동시에 단계를 나눈다는 것이다. 제일 친한 친구인 절친과 그냥 오고 가고 보면서 가끔씩 무리에 껴 대화하는 반친구의 단계를 나누고, 연인관계인 이성 친구와 그냥 친구인 이성친구의 종류를 나누어 남자친구와 남자 사람 친구라는 말장난 인 듯싶은 단어를 만들어 냈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연령은 낮다. 2030를 비롯하여 특히 10대 학생들에게 이렇게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자신의 인간관계, 친구관계를 정리하는 표이고, 기준이다. 처음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어떤 기준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다양한 인간관계에 관한 정의들은 당연한 사실이며 자신의 인간관계의 기준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약 청소년들이 인터넷을 키기전에 논어를 읽었더라면 분명 여러 매체에서 떠드는 인간관계에 대한 여러 단어들과 기준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내 관계에 대한 기준이 아닌 검토하고 검증해야 할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논어 공야장편 16장에서 공자는 안평중이라는 사랑을 소개한다.
“안평중은 사람들과 잘 사귀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를 공경한다.”
정이천은 이를 “사람은 사귀기를 오래하면 공경이 쇠해지니, 오래되어도 공경함은 사귀기를 잘함이 되는 것”이라 했고 형병은 “보통 사람들은 쉽게 사귀고, 쉽게 끊어버리는데, 안평중은 오래될수록 더욱 공경하였다.”고 해석했다.
인간관계는 개인과 타인의 교류이다. 하지만 현재 여러 매체들이 말하는 인간관계의 정의는 좀 다른 듯하다. ‘개인을 위한 타인 이용’. 인간관계의 모든 기준은 나이다. 내가 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가? 내가 즐겁기 위해, 나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저 사람하고 친해지고 싶다.’ ‘나 요즘 외로워서’ 그렇기에 사람들은 친구를 만들고 연애를 시작한다. 물론 시작은 나에 대한 기준에서 나올 수 있다. 한국이 미국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일단 미국과 교류하기 위한 동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관계는 일반적인 요구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의 동기만을 위해 상대를 이용한다. 가끔씩 비위를 맞출 수는 있겠지만 결코 상대방을 공경하는데 까지는 가지 않는다.
반친구와 절친. 사람들은 인간관계의 단계를 구분하는 것을 당연하다 생각한다. 이 단계는 깊이의 차이이다. 내 비밀이라던지 좋지 않은 면을 공유한 사람은 절친이 되고 나의 비밀스럽거나 나쁜 면을 공유할 수 없는. 공유하기 조심스러운 상대는 반친구로 분류된다.
최근 한 친구가 내게 자신의 좋지 않은 면이 무엇이 있냐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학교로 치면 반친구야 그래서 안 좋은 점이 뭔지 몰라. 더 친한 사람이면 잘 알겠지.” 덧붙여 나의 이야기를 했다. “나도 친한 친구들의 안 좋은 모습이 잘 보여. 근데 어쩌겠어? 사람은 다 안 좋은 부분 다 가지고 있는데 인정하면서 좋은 부분보고 가야지.” 맞는 말 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은 동일하다. 하지만 내 말에 내가 의문이 든다. 이 대화에서 나는 덜 친한 친구는 나의 안 좋은 점을 못 보고 친한 친구는 나의 안 좋은 점을 본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왜 그럴까? 왜 덜 친하면 나쁜 점을 볼 수 없고, 친하면 나쁜 점을 볼 수 있나? 나의 나쁜 점을 볼 수 있는지, 없는지가 왜 친하고 친하지 않는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친하면 친할 수록 많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라 생각할 것이다.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좋지 않은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보내며 좋지 않은 모습을 왜 보일까? 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나의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나, 나쁜 모습이 없는 나를 연기하다가 많은 시간이 지나며 긴장을 놓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면의 면적은 줄어든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잘 보이기 위해. 어떻게 보면 안평중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면을 쓰는 사람들은 남을 공경(공손이 받들어 모시는 것)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그저 비위를 맞출 뿐이다. 그 이유는 개인적이다. 나의 나쁜 모습을 보여주어 나에게 좋을 것이 없기에 그냥 비위 맞추며 좋은 점을 어필하는 것이다. 그렇게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어도 원수가 되는 것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관계라 말할 수 없다. 이건 그냥 나를 위해 하는 연기이다. 이 연기를 통해 타인을 속이는데 성공했다면 그 타인은 나랑 놀고먹고 마시며 나의 감정을 채워주는 도구가 된다. 물론 타인을 대하면서 오는 개인적이지 않은 감정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인간관계를 맺은 그 기반은 개인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인간관계가 아닌 관계를 그저 절친이 되기 위한 한 단계로 설명하여 정당화한다. 이제 그 다음 단계인 절친은 정반대로 타인을 이용한다.
반 친구 단계에서 절친으로 넘어오면서 사람들은 가면을 벗어 던지며 동시에 양심도 벗어 던진다. 가면을 쓰며 있지도 않은 좋은 면으로 상대의 비위를 맞췄던 사람들은 이제 새로 태어나 완전히 상대를 이용한다. 절친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관계의 정의인 개인과 타인의 교류를 완전히 무시한다.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욕하고, 싸우고, 막대한다. 사회는 이를 보고 “야 너네 절친이구나!” 하면서 그런 절친이 있는 것에 대해 부러워한다. 왜 이렇게 양 극단으로 갈렸을까? 생각해 보면 그 범인은 논어에게 있다.
공야장 16편에서도 등장하듯 공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경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공경은 모시는 것이며 간단하게 생각하면 배려와 존중이다. 한국 사회는 누가 뭐라 해도 유교 사상의 바탕에서 새워졌다. 존댓말을 쓰며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말에서부터 들어 냈다. 하지만 어느새 존댓말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아닌 관계가 먼 사람들끼리 쓰는 선 긋는 단어가 됐고 반말을 써야지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올바른 관계를 위한 존댓말이 없어야 비로소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공자가 그토록 경계했던 형식주의의 덫에 유교 사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공경이 관계의 기본이라는 생각은 형식적인 법이 되어 버렸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오히려 이 형식에서 벗어난 관계를 더 끈끈한 우정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개인과 타인의 교류인 인간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공경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에서 벗어난 것은 끈끈한 우정도 아닐뿐더러 인간관계라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절친이라는 말로 정당화되었다.
공자는 인간관계에서의 배려와 존중, 공경과 예의도 언급하지만 정직함도 언급한다.
“누가 미생고가 정직하다고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러 갔더니, 자기 집에 없다 하지 않고 그 이웃집에서 빌려가다 그 사람에게 주었더라(공야장 23)”
아이러니하게도 유교 사상의 대한민국은 공자님의 말씀을 한편으로 실천하고 한편으로 완전히 부정함으로 이상한 인간관계 단계 표를 만들었다. 반 친구라는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 있지만 정직함이 없고, 절친이라는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정직함은 있지만 배려와 존중이 없다. 그렇기에 이 두 관계모두 틀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 사람들이 관계에 회의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 친구적인 관계는 배려 있고 예의 있어 보이지만 정직하지 않게 모두 가면을 쓰고 대하니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고 가면들 간에 억지 웃음만을 만들 뿐이고, 절친 같은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예의도 없어 관계가 성립하지를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진실된 인간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개인을 위해 가면을 쓰고 개인을 위해 가면을 벗는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이다. 그렇게 전부 가면을 쓴 사람들을 가면을 쓴 체 만나 진실된 관계를 맺지 못하니 인간관계는 다 거짓되다는 사실에 회의적이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 없이 똑 같은 상대방을 만나 여러 트러블이 생겨 회의적이게 된다.
요즘은 연애와 결혼 사이에 동거기간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 이유는 연애를 하던 때 잘 좋아 보이던 사람이 결혼을 하면 원래 보이지 않던 좋지 않은 모습이 있으니 동거를 하며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참으로 바보같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이 말은 은연중에 연애할 때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가면을 벗을 생각을 해야지 굳이 동거라는 많은 시간을 두어 자연스럽게 가면을 벗어지기를 바란다. 왜 일까?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반 친구와 절친이라는 개념으로 나의 가식적이고 개인적인 가면은 부정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몰랐던 사실이 자연스럽게 들어 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결혼 생활에서도 들어 난다. 요즘 미디어를 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여가시간을 빼앗기고 오로지 가장으로 써만 살며 아내는 남편에게 손지검을 당하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고 현실에서도 많이 일어난다. 마치 절친의 관계와 같다. ‘가족은 편하니까.’ 가족도 인간관계이다 존중과 배려와 공경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결혼했다는 이유로,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존중과 배려와 공경을 버린다.
친함의 기준이 막대하는 것인 현대에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해져 간다.”는 말은 곧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막대한다.”로 이해된다. 이것이 인간관계인가?
“안평중은 사람들과 잘 사귀어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를 공경한다.” 이것이 인간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