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시 대통령의 연초 국정연설의 내용이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것을 놓고 당사자 국가들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반발도 만만치 않다. 한반도 평화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이러한 부시 정부의 대외정책 자세와 관련하여 김대중 정부는 현재까지 아무런 공식적 발언과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입장 되풀이일 뿐' 내지는 '대화노력 운운'으로, 상황이 그다지 긴장되지 않은 듯 호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국의 이같은 강경 군사주의 노선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이자 최대 장애물로 등장하고 있다. 이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미국의 전쟁 정책에 휘말려 들어가는 순간, 한반도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폭력적 대결상태로 인한 희생제물이 되고 만다.
미국에게는 단지 정책의 차원에 그칠지 모르나 우리에게는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점을 우리는 명확히 꿰뚫어봐야 한다. 이는 정치의 차원을 넘어선, 인류의 생명과 직결된 사안이다. 따라서 생명의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진다고 공언하고 고백하는 기독교는 이에 대해 결코 침묵해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미국의 대북 정책과 관련해서 한국의 기독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 '모르쇠' 속에 있는 민족의 운명에 대한 무관심과 강대국에 대한 종속의식을 깨지 않고서 이 나라의 기독교는 민족사의 현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될 것이다. 엄청난 생명의 희생이 있게 될 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리고 막대한 비용으로 무기구입을 강요당하여 민족 자원의 억울한 탕진을 감당해야 하는데도, 한국의 기독교는 '나 몰라라'이며,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지 뭐 별 일이 있겠어 하는 식이다. 강자에게는 별 일이 아닐 지 모르나 약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것을 애써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여 언급하건데, 오늘날 우리의 민족 안보는 다른 어디에서가 아니라 이른바 혈맹이라는 바로 미국에 의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는 미국 부시정권의 극단적 대북 적대정책에 대하여 강력한 유감과 항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생명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 끊임없이 '조율 당하는' 전리품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표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개념이 결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과정에서 나치 독일, 이태리 파시즘, 일본 제국주의의 동맹을 주축국(Axis)이라고 불렀던 것과, 레이건 대통령이 구 소련을 '악의 제국(Empire of Evil)'이라고 했던 것이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둘 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뜻과, 이들을 상대하는 선(善)의 대표자로서의 미국이 유지하려는 세계적 패권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표현은 과거 이들 나라를 '불량국가(Rogue State)'라고 했던 것을 보다 극단적으로 몰고 간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 부시정권이 이들 나라와의 대결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의 강화가 강조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번 부시 대통령의 국정 연설 대부분이 미국이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가, 이런 미국의 안보가 최우선의 과제이다, 이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이들 '악의 축'이다, 그런 고로 국방예산의 대폭 증액이 필요하다, '불량국가'라는 과거의 개념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부적으로는 국방예산 증액에 대한 의회의 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절차로서도 필요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 부시 대통령이 의회에 요구한 국방예산 증액 규모가 지난 20년이래 최대의 규모인 480억 달러이다. 이와 함께 <조국안보국>의 예산도 190억 달라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군사와 정보, 경찰 기능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것으로서, 바야흐로 명실상부한 전쟁국가의 체제를 확실히 갖추어 가겠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시 대통령이 이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북한 등을 거론하자 연설을 듣고 있던 의회의 정치인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한 모습이었다. 의회가 부시 정권의 이러한 군사주의 노선과 전쟁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실로 우리로서는 버거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문제를 평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군사주의적 접근을 하겠다는 미국 앞에서 우리는 아예 협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전쟁국가 강화 박차
미국 언론들은 이러한 부시 대통령의 군사주의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반면에, 유럽 언론들은 "부시 대통령이 국내적인 지지는 얻었는지 모르나 국제적인 반발을 더욱 강력하게 사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엔론 스캔들이 부시 정권을 압박해 들어갈 때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이러한 국내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보다 강력한 군사주의 노선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는데, 그러한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란은 이번 연설을 통해서 미국이 자신의 세계적 패권의 야망을 드러냈다고 비판하면서, 부시 정권이 매우 호전적이며 남의 나라의 주권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결국 미국은 세계 무기시장의 확대를 노리는 무기상인의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공박했다. 이라크는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운 '국가 테러'를 자행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자신의 패권적 질서에 굴복하지 않는 나라는 모조리 겨냥해서 테러국가로 몰아 공격하는 숫법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에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의 대 테러 전쟁 2차 단계 내지는 확전의 전략에 우려를 표시했다. 이와 함께, 만일 미국이 이들 나라에 대한 확전을 시도할 경우,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동맹관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무튼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논란은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에 대한 국제적인 반발을 깊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국제적인 동맹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지는 좀더 주시해봐야 할 사안이다.
세계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 우선 정책의 근간에는 사실상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미국 경제의 침체와 이에 따른 미국의 패권질서가 동요할 기미를 보이면서 미국의 지배층들은 위기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 위기의 돌파를 군사주의 노선 선택으로 풀려고 해온 것이다. 국제적인 반발이 극심함에도 불구하고 군수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미사일 방어망 추진의 강행은 그러한 움직임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엔론 스캔들과 아르헨티나 경제위기가 터졌다. 이것은 그 동안 미국이 주도해왔던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의 모순이 폭발적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하겠다. 이것은 미국의 세계자본주의 주도력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는 사안이다. 뉴욕 맨해탄에서 1월 31일부터 2월 4일까지 열리게 되는 <세계경제 회의(World Economic Forum)>는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를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렇지만, 이 회의를 반대하는 반 세계화 운동세력은 미국이 중심이 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세계화는 결국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빈곤을 낳을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 반세계화 운동세력은 만일 이 회의가 테러 전쟁 직후 그리고 지난해에 열렸다면 사태는 달랐겠지만 지금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와 엔론사 스캔들, 그리고 미국의 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에 대한 비판이 있고,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미국의 대외적 움직임을 비판적으로 거론하는 일이 훨씬 용이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국제적 입지는 미국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유리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한반도 전체의 평화 열기 과시해야
따라서, 이런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우선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것에 대해 명백한 표현으로 외교적 이견을 밝혀야 한다. 이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그리고 민족의 평화적 통일의 기반 조성을 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는 우리의 태도 표명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한 미국의 한반도 지배전략에 대해 강력한 거부의지를 밝히는 용기 없이 민족의 생명은 지켜낼 수 없으며, 민족의 미래를 폐허로 만들 수 있는 미국의 전쟁정책과 대북 적대정책을 그대로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야만적인 경제봉쇄를 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자체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온갖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는 미국의 오만과 일방적 패권주의가 한반도에서는 반드시 무력(無力)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의 살길을 뚫어내는 근본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의 <월드컵> 행사와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한반도 전체에 평화의 제전이 펼쳐지는 것을 국제적으로 과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남과 북이 활발한 접촉과 교류, 협력을 이룩하게 되면 상황은 변해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단결을 통해 분위기 전환에 성공하게 되면, 한반도는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훨씬 안전해질 것이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정책에 압도당하지 않는 돌파구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오늘날 진정 인류에게 전쟁과 빈곤의 재앙을 몰아오고 있는 세력이 누구인지 안다면, 우리 민족의 선택은 너무도 자명해질 것이다. 반 외세 자주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반 패권적 민족주의는 결코 낡은 수구적 개념이 아니며, 인류사회의 진보를 위해서 반드시 요청되는 역사적 양심이라는 점을 우리는 투철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종교이다. 생명은 사랑과 평화를 그 본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대북 정책은 이 생명의 근본을 겨냥하여 폭력을 동원하려는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부디 절절한 심정으로, 민족의 명운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며 행동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