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 본문은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25절과 같은 형태의 문장구조를 가졌다. 즉 '겉'과 '안'을 대칭적으로 묘사하면서 비판하고 있으며 특별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드러나지 않은 악한 영향력들을 집중 공박(功駁)하고 있다. 회칠한 무덤 - 무덤은 들판이나 길 옆에 있는 가난한 자들의 무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무덤은 겔 39:15에 근거한 랍비들의 명령에 따라 우기(雨期)가 지난 유월절 전 아달월 15일에 회가루를 뿌려 하얗게 칠한다. 그 이유는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길가는 사람들(특히 유월절 순례자들)이 쉽게 식별하여 피해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 시체나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동안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행 23:3에서 바울은 이와 유사하게 대제사장을 '회칠한 벽'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 당시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대제사장의 위선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는 상징어법으로 나타내려한 의도를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회칠한 무덤'이란 그들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죄악성은 뒤로 하더라도 사람만을 의식하는 그들의 허영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형태에 대한 극히 독설적인 책망이다. (2)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는 것은 그들이 의식적으로 극히 부정하다고 단죄)하는 율법 조항에 의해 비판받게 하여 그들에게 지독한 모욕감과 수치감을 주고자 함이었다.
실로 그들은 회칠한 '무덤'에 비교될 만한 무가치하고 반신앙적 인물들이었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칠한 무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곧이어 함으로써 이해를 보충시키고 있다. 즉 '겉'과 '안'을 대조(對照)시키고 다시 '아름답게'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대조시켜 위선자의 양면성을 밝힌다. 27절의 내용은 사실 25절의 저주 선언문에 대한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 -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로 인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따라서 주검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누구든지 그것과 접촉하면 역시 부정에 전염(傳染)된다고 규정하였다. 한편 그러한 주검이 안장되어 있는 유대인의 무덤 속에는 송장의 뼈와 시체의 악취와 기타 오물로 가득하여 의식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위생학적으로도 더럽고 추한 몰골을 형성하였다.
실로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실체요 내면의 부정이었던 것이다(행 23:3). 한편 인위적이고 과도한 경건은 독선과 가식의 겉포장일 수 있다.
[마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안으로는 - 여기서도 '겉'과 '안'으로 나누어 27절에서 상징적으로 비유했던 위선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한다. '겉으로 옳게 보이되'가 27절의 '아름답게 보이나'와 대응되고 의식과 불법이 가득하다'가 27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로 대응된다. 이것은 마태 특유의 묘사 방법으로써, 강조적 표현이다.
[마 23: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이 본문은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도 역시 저주 대상이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지만 그 전체 내용상 그릇된 율법주의에 심취(心醉)한 모든 유대인들이라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 추앙(推仰)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유대교의 전통적 관습이었다. 더욱이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국민의 관심사였다.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 예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 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 흔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를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마 23: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아니하였으리라 -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보강(補强)하는 것이 34절에 나온다. 여기서는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조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는 점이다. 즉 자신들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결코 선지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간접적으로 자신들이 조상보다 도덕적(道德的)으로나 종교적(宗敎的)으로나 우월하다는 것을 말한다. (2) 자신이 선지자들의 활동을 조상들과는 달리 용납하고 따르겠다는 말이거나, 지금 선지자들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고백일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려 하였고 미화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그 당시 선지자들의 무덤과 묘비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든 이유도 역시 여섯번째 저주 선언문과 같이(26, 27절) 묘비와 무덤을 세우는데 관심갖는 그릇된 종교인을 비판하기 위함이다. 또 한가지 이유는 그들의 자랑이라고 할수 있는 그들의 업적을 통해 비판을 가하여 비판효과를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영예를 통해 자신들이 이득(利得)을 보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멀리 있는 일일수록 자신있게 말할 수있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과 같지 않다고 호언장담(濠言壯談)한 것이다.
[마 23: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 조상을 비난하는 자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을 가리켜 '우리가 조상의 때에'라고 말함으로써 그 조상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실로 셈족 언어에서는 누구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과 본질적(本質的)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조상의 죄를 이어 받아 같이 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원죄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죄의 유전적인 전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필시 운명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신 '죽은 자의 자손됨'에 대한 증거는 선지자를 죽인 자들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자신들이 스스로 말한 점이다.
따라서 십계명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通念)에 따라서 그 가문의 죄과(罪過)에 대한 책임은 대(代)를 이어 져야했다(. 진정 이러한 사실은 죄가 한개인의 돌발적 사고나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영향력과 함께 전달됨을 뜻한다. 즉 죄의 사회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실로 죄악된 환경에서는 죄인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상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자손들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인의 자손이라면 더욱 자숙(自肅)하고 남보다 선행에 힘쓰며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일곱가지의 저주문을 통해 폭로한 바 처럼 도리어 위선이 절정에 다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조상의 죄까지 소급(溯及)하며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이미 간파하신 바 있듯이, 당신을 모살(謨殺)하려는 그들의 음모가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마 23: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 이 구절은 매우 도전적이고 역설적이면서 '화 있을진저'와 같은 암시적 저주가 담겨있는 문장이다. 여기서 조상의 양(量)은 30, 31절의 내용을 참고하며 이해해야 한다. 즉 조상이 저질렀던 죄의 양(量)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은 분량을 재는 척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본문은 결국 그 채우는 양에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여하튼 본문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했던 죄의 잔을 채우는 일을, 너희들이 그 충만한 데까지 채우라는 냉소적인 명령이다 한편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서는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로 번역하고 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조상들이 저질러온 죄악을 이어받아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죄의 포화상태까지 채워 보라는 말이다. 물론 이 포화상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마지막 한 방울 물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일이다. 이러한 어투에서 몇가지 의미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선지자를 죽였던 자들의 자손들이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조상들과 똑같이 살아가는데 대한 탄식이다. (2) 그들에 대한 희망의 포기이다. 즉 아무리 권면하여도 듣지않는 그들에게 너희 멋대로 해보라는 투의 말이다. 물론 채워진 이후에는 곧 징벌(徵罰)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3) 역설적 의미이다.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 말라고 말리면 더 하려고 하다가 해보라고 포기해 버리면 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처럼 저주섞인 포기 선언을 통해 그들이 돌아서기를 바라는 충격 요법적인 어투이다. 이러한 의미를 통해 예수를 바라볼 때 예수께서 얼마나 죄인들에 대하여 연민(憐憫)의 정을 갖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연민의 정에서 무서운 저주 선언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이 악에 대하여 단호하고, 분노하며 경멸적언어를 사용하게 한다. 사랑에 바탕이 되지 못한 비판과 저주는 분쟁만 낳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바탕을 둔 비판은 회개의 촉구가 되고 양심에 감동을 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