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계신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ia), 1654-1656, 159*142cm, Scottish National Gallery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하늘을 나는 새처럼 길을 가라 하셨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라 하셨다(눅 10:9). 예수의 명령은 무모하고 위험하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눅 10:4)고 하신 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럼에도 예수의 불가능한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이유는 예수 자신도 아무 소유 없이 길을 가셨기 때문이다. 길이 되셨기 때문이다. 누군가 예수와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는다면, 길은 이슬을 피할 수 없다.
마르다가 예수를 초대했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가 마르다의 식탁 옆에 앉으신 예수를 그렸다.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기도하셨을 예수를 마르다는 잘 대접하고 싶었을 게다(눅 10:5). 예수를 초대했을 땐, 다른 제자들도 함께 있어서, 마르다는 몹시 분주했겠다.
바쁜데, 동생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 고개를 숙이면 예수의 무릎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이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듣는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게 희년이 선포되고, 포로는 해방을 맞이하고, 눈 먼 사람은 보게 되고, 억눌린 사람은 자유를 얻는 시간이다(눅 4:18-19). 이런 하나님 나라의 시간이 우리 사는 공간을 덮친다면 얼마나 좋은가. 마리아는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어,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말씀을 곱씹고 있다. 바빠 죽겠는데 말이다.
상을 차리면서 기어이 마르다가 예수에게 이르고 만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일을 도우라 말하지 않고 예수께 대신 말해 달라고 한 것은 이전에도 마리아는 일 하기보다 말 듣기를 좋아했기 때문일 거다. 집 밖으로 난 길에 관심이 많았을 마리아는 ‘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러 가는 예수의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르다는 이런 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걱정했다. 도대체 마리아는 왜 집이 아니라 길에 관심을 두는가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집 밖으로 난 길에 관심을 갖는 마리아를 손으로 가리키며 오히려 두둔하신다. 마리아의 선택이 옳다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마르다를 책망하시는 건 아니다. 마르다에겐 마르다가 지켜야 할 집이 있고, 마리아에겐 마리아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다만, 집안 일로 바쁜 마르다에게 염려하지 말고 일을 줄이라 하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새번역, 눅 10:41-42).
너무 많은 일 때문에 분주하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勤勞者)여야 했다. 열심히 일하나 염려가 그치지 않는다면, 길 위에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새들도 아는 하늘 길을 나도 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