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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성의 본명은 장구사(張九四)로 태주(泰州)에 인근한 향리 백구장(白駒場, 지금의 장쑤성 다펑 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강소성 태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원래 소금을 운반하던 공인 출신이었다. 소금 맡은 관리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지정(至正) 13년(1353년)에 동생 장사의(張士義), 장사덕(張士德), 장사신(張士信), 소금 장사꾼 이백승(李伯升) 18인과 함께 원나라에 맞서 거병하였으며, 얼마 뒤 태주(泰州), 흥화(興化), 고우(高郵) 등 양쯔 강 북쪽의 주요 진들을 차지하였다.
지정 14년(1354년) 정월에 고우에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대주(大周)라 하고 스스로 성왕(誠王)을 칭하였으며, 연호를 천우(天祐)로 삼았다. 원에서는 태사 겸 우승상 타타르(脫脫)의 주도 하에 장사성 진압에 나섰고, 이때 고려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 타타르는 지정 15년(1355년) 9월에 2만 3천의 고려에서 징발한 군사까지 동원한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고우를 쳤으나, 11월에 장사성은 물러나 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고 이어 원 순제(元順帝)가 참소를 받아 병권을 잃고 원의 진압군은 퇴각하여야 했고, 장사성의 무리는 이들을 추격해 대패시켰다.
지정 16년(1356년)에 장사성은 남쪽으로 세력을 넓혔고, 평강로(平江路, 지금의 쑤저우 시)를 쳐서 차지하고 아울러 평강로를 융평부(隆平府)로 삼았다.
지정 17년(1357년)에 원 조정의 강절행성평장(江浙行省平章) 달식첩목이(達識帖睦邇)가 양완자(楊完者)를 보내 장사성을 공격했고, 장사성은 원군이 자신과 가까이 있던 방국진(方國珍)과 함께 공격하는 것에 불리함을 느끼고 원에 투항해 태위(太尉)로 봉해졌다. 지정 18년(1358년)에 달식첩목이와 연합해 병사를 일으켜 양완자를 공격했고 양완자는 자살하였다.
장사성은 주원장(朱元璋)과 진우량(陳友諒)이 크게 싸우는 틈을 타서 북쪽으로 서주(徐州)와 남지(南至) 소흥(紹興)에 할거하며 병사 수십 만을 거느리고, 군량 10만 석을 원의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까지 운반했다. 23년(1363년) 3월, 여진(呂珍)을 보내 홍건적 유복통(劉福通)의 무리를 안풍(安豐)에서 쳤고, 유복통과 한림아(韓林兒)는 주원장에게 투항하였다. 9월에 장사성은 스스로 오왕(吳王)을 칭하고 동생 사신을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황경부(黃敬夫), 채언문(蔡彥文), 엽덕신(葉德新) 세 사람을 참군(參軍)으로 임명해, 다시 원에 맞섰다. 이듬해 주원장 또한 「오왕」을 칭했다. 《삼국지연의》의 저자로 유명한 나관중(羅貫中)이 당시 장사성의 처소에서 직무를 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사성은 주원장의 세력과는 교전을 피했고, 고기잡이와 소금의 이익을 통해 근해 교통로에서 교역하며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이때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의 왜구(倭寇) 세력과도 몰래 제휴하고 있었으며, 이는 훗날 명(明) 왕조가 「해금정책」을 실시하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주원장은 「먼저 태주 군현들을 차지해 서로 통하게 해서 사성의 날개를 제거하고 난 다음에 절서(浙西)를 모두 아우르겠다.」며 차츰 장사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진우량의 세력을 궤멸시킨 뒤인 지원 25년(1366년)에 주원장은 장사성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고, 장사성의 동생으로 명장으로 이름높던 장사덕(張士德)이[1] 타고 있던 말이 날뛰다 그만 서달의 선봉장인 조덕승(趙德勝)에게 잡혔고, 장사덕은 금릉(金陵)에서 굶어 죽었다. 장사덕의 죽음은 장사성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지정 26년(1367년) 9월에 장사성의 거점인 평강(平江)이 장사성에게 포위되었다.12월에 평강성이 함락되어 장사성은 포로로 잡혔고, 응천(應天, 지금의 난징)으로 압송되는 길에 살해되었다. 《명사》(明史)에는 「금릉(金陵)에 이르러 마침내 목을 매어 죽으니 나이 47세요, 명을 내려 관곽을 갖추어 장사지내 주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다른 설로는 주원장이 장사성을 심문하는데 장사성이 먼산을 보며 「하늘의 해가 밝으나 나에게는 비치지 않았다」고 했고, 주원장은 그를 활줄로 목졸라 죽이고 성루에 효수해 관민에 보였다고 한다.
장사성의 무덤은 쑤저우 시 사당진(斜塘鎭)에 있다. 장사성의 양자 오태자(五太子)가 있었는데, 주원장에게 투항하였다
1362년 신축년 덕흥군 사건 때에도 왜구.장사성.나하추.최유가 같이 공격한거네요
1367년 12월 오왕 장사성은 죽었어야함에도 태연히 고려사신 장자온을 접대하고요.
1385년 오왕 장사성은 아직도 고려의 주.현을 약탈하고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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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상위고 제14권 / 요혜(妖彗)
혜성점〔彗星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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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년 6월 신사일. 혜성이 자미원(紫微垣)의 화개(華盖) 아래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1척 남짓으로 모두 3일 동안 이어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천하가 혁명(革命)하리라. 덕이 있는 자는 창성하고 덕이 없는 자는 쇠망하리라.”라고 하였다. 7월.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이곳 홍원(洪原) 땅의 달단동(韃靼洞)에 들이닥치니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출전하여 대파하였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무척 많았다.
12년 계묘년 4월 병인일. 객성(客星) 일곱 개가 한꺼번에 나타나 세 개의 작은 별이 서로 다투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병란이 일어나 크게 싸우리라.”라고 하였다. 그 당시의 왜구(倭寇)ㆍ홍적(紅賊)ㆍ장사성(張士誠)ㆍ납합출(納哈出)과 최유(崔濡)가 원나라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주둔하고, 또 평택현(平澤縣) 사람 어량대(於良大) 등이 정역(征役)을 피하려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반란을 모의하여 성문에 들이닥쳤다가 날이 밝자 스스로 궤멸되니 그 괴수 8명을 추격하여 붙잡아 목을 벤 것 등은 모두 객성이 서로 싸운 것을 입증한다. (공민12년 1362년)
13년 갑진년 2월 신유일. 혜성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태미원의 남쪽에 있고, 하나는 대각(大角) 멀리에 있고, 하나는 북두(北斗)의 동북쪽에 있고, 하나는 저성(氐星)의 북쪽에 있었는데, 빛깔이 붉고 길이는 1자 남짓이었다. 이것은 모두 병란이 일어나고 가뭄이 들 조짐이었다. 3월 기사일. 왜(倭)의 선박 200여 척이 갈도(葛島)에 정박하였다. 임신일. 하동(河東)에 침입하였다. 을해일. 고성(固城)과 사천(泗川)에 침입하였다. 갑신일. 왜가 김해(金海)에 침입하였다. 을유일. 밀성(密城)에 침입하였다. 병술일. 양주(梁州)에 침입하여 200여 가구에 불을 질렀다. 4월 갑진일. 장사성(張士誠)이 장수를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갑인일. 회양(淮陽)의 주평장(朱平章)이 사신을 보내 개초(鎧稍 갑옷과 창)를 바쳤다. 6월. 왜가 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다. 7월. 장사성이 또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원나라 사신이 또 와서 왕을 책봉하였다. 이것은 병란을 입증한 것이리라.
15년 병오년 9월 신축일. 어떤 별이 방성(房星)과 허성(虛星)의 상성(上星)에서 패(孛)하였다. 임인일. 또 남쪽에서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천하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혜성이 남방에서 나타나니 천하에 병란이 일어나리라.”라고 하였다.
16년 정미년 정월 무술일. 혜성이 땅에 떨어지며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펼치리라.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17년 무신년 2월 기미일.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새북(塞北)에서 병란이 일어나 중국(中國)에 들이닥치리라.”라고 하였다. 3월 갑신일.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나 경술일에 대릉(大陵)과 적시(積尸) 사이로 들어갔다. 신묘일. 대릉과 적시 사이에서 나와 천선(天船)의 제9성을 비추었다. 병신일. 권설성(卷舌星)의 위쪽에서 나와 기해일에 대릉의 위쪽으로 들어갔다. 4월 신축일. 또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죽는 자가 생기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7월.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이해 대명(大明)의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청(淸)을 소탕하였다. 중화(中華)는 곧 황제의 자리이다. 이것은 아마도 묵은 것을 뒤집어 새로운 것에 나아간다〔革舊就新〕는 것을 입증한 것이리라.(공민왕17년 1368년)
19년 경술년 정월 갑오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장군이 왕이 되려고 하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키는 자가 패자가 되리라. 이적(夷狄)이 침입하리라.”라고 하였다. 갑진일. 저녁에 서북쪽에서 자기(紫氣)가 허공을 가득 메웠는데 그림자는 모두 남쪽에 생겼다. 그 당시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고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사람들은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말하였다.
23년 갑인년 2월 무술일.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다. 45일 만에 사라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장군이 왕이 되려고 하리라.”라고 하였다. 9월. 홍륜(洪倫) 등이 왕을 시해하고, 이인임(李仁任)이 신우(辛禑 우왕(禑王))를 세웠다. 또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동사강목 제14상 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갑오년 공민왕 3년(원 순제 지정 14, 1354)
하4월 왜구가 전라도의 조선(漕船)을 약탈하였다.
왜구가 해마다 침략하여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전라도의 조운선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 원에서 노책(盧𩑠)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삼았다.
책(𩑠)이 딸을 원주에게 들어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책(𩑠)은 본디 탈(頉)이라 하였는데, 음은 책(策)이니 바르다[正]는 것으로 훈고(訓詁)한다.
○ 원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다.
이때에 원의 정사가 쇠퇴해져서 하남(河南)의 요망(妖妄)한 도적 한산동(韓山童)ㆍ한교아(韓咬兒) 등이 처음 난을 일으키고, 영천(頴川)의 요인(妖人) 유복통(劉復通)이 또 군사를 일으키어 홍건(紅巾)으로 명호를 삼고 그 무리 관선생(關先生)ㆍ사유이(沙劉二)ㆍ장사성(張士誠) 등과 같이 중원(中原)을 노략질하여 산동(山東)에 나누어 웅거하니, 그 세력이 크게 떨치고 도적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도적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고 남정(南征)하려 하는데, 이 당시 마침 채하중(蔡河中)이 왕명을 받들고 원에 사신으로 가 있다가 다시 재상이 되려고 꾀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내어 정벌을 돕기를 청하고, 이어 정승 유탁과 염제신 등이 용맹과 지략이 있다고 천거하므로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유탁과 염제신 및 권겸ㆍ원호ㆍ나영걸(羅英傑)ㆍ인당(印璫)ㆍ김용(金鏞)ㆍ이권(李權)ㆍ강윤충(康允忠)ㆍ정세운(鄭世雲)ㆍ최영(崔瑩)ㆍ이방실(李芳實)ㆍ안우(安祐) 등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백 명을 징발하고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집합하여 장사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동사강목 제14하계묘년 공민왕 12년(원 순제 지정 23, 1363)
하4월 별이 하늘 복판에서 서로 싸웠다.
○ 장사성(張士誠)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홍두적 평정한 것을 축하하여 채단(綵段)ㆍ양(羊)ㆍ공작을 바쳤다.
동사강목 제15하기유년 공민왕 18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 1369)
하4월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사신을 보내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려왔다.
대명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바닷길로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어, 왕에게 새서(璽書 천자의 옥새를 찍은 조서(詔書))를 내리고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렸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대명 황제는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내노라. 송(宋)이 통어(統馭)하기를 상실하고부터 하늘이 그 제사를 끊었다. 원(元)은 우리 족류(族類)도 아닌데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한 지 1백여 년에 하늘이 그 혼음(昏淫)함을 미워하여 또한 그 천명을 끊어버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요란하게 된 지 18년이다. 군웅(群雄)이 처음 일어나던 때에 짐(朕)은 회서(淮西) 지방의 한 포의(布衣 평민)였는데 홀연히 포악한 군대가 들이닥쳐 잘못 그 가운데 들어갔다가 그 성공의 가망이 없음을 보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하지 못하였었다. 이에 하늘의 신령(神靈)이 문무(文武)를 부하(負荷)시켜주어 동쪽의 강좌(江左 강남)로 건너가 백성을 기르는 도를 익힌지 14년 만에 서쪽으로는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을 토평하고, 동쪽으로는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을 고소(姑蘇)에서 결박하고, 남쪽으로는 민월(閩越)을 토평하여 팔번(八蕃)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호군(胡君 원 순제(元順帝))을 축출하여 화하(華夏)를 숙청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금년 정월에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황제의 위에 나아가 국호(國號)를 대명(大明)이라 정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세웠다. 사이(四夷)가 복속해오므로 국서(國書)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어가 왕에게 통보하여 이를 알게 하노라.
설사는 양 2마리를 왕에게 바쳤다. 설사는 설손(偰遜)의 아우였다.
그가 돌아가게 되자 왕이 안장마와 의복을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사신을 보내어 원(元)의 회왕(淮王)에게 빙문하였다.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수적점〔水赤占
공민왕(恭愍王)
16년 정미년 5월 병자일 삭일. 이현(泥峴)에 혈우(血雨)가 내렸다. 6월 경오일. 연주(漣州) 징파도(澄波島)의 물이 3일 동안 붉어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병란이 일어나리라.”라고 하였다.
이듬해(17년 1368년) 정월. 원(元)나라 사신이 와서 대명(大明)의 군사가 세력이 무척 강성하다고 일러주며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라고 요청하였다. 8월.왕이 대명의 군사가 황성을 포위하여 몹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민수(曺敏修)를 의주안위사로 삼고, 임견미(林堅味)를 안주순무사로 삼았다. 9월. 대명의 주사(舟師 수군(水軍)) 1만여 척이 통주(通州 중국 북경 동쪽에 있는 지명)에 정박하였다가 경성(京城 원나라 도성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으로 들이닥쳤다. 원나라 황제는 상도(上都)로 달아나 대명에 사신을 보냈다. 11월. 오왕(吳王 원나라 말기의 무장 장사성(張士誠))에게 사신을 보냈다. 또 원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고전번역서 > 천동상위고 > 천동상위고 제11권 > 경위성변점 > 최종정보16년 정미년 8월 신해일.
화성이 방성(房星)을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죽는 임금이 생기리라. 장수와 재상이 근심하리라. 후비(后妃)에게 재앙이 닥치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삭(正朔)을 개정하리라. 천하가 두려워하여 근심하리라.”라고 하였다. 정유일. 화성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군사가 패배하여 장수를 죽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면령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경자일. 달이 태미원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궁중이 어지러워지리라.”라고 하였다. 11월 갑오일. 달이 태미원의 병성(屛星)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가 예를 잃어버리리라. 보신(輔臣) 가운데 주벌 당하거나 쫓겨나는 자가 나오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3월. 왜가 강화부(江華府)에 침입하였다. 이해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7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죽었다〔卒〕. 그 당시에 원나라가 망하였다. 형혹(熒惑)의 변고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년 (1368년)무신년 5월 무인일. 달이 태미원으로 들어갔다. 8월 갑오일. 화성이 태미원의 상장을 침범하였다. 달이 태미원의 상장(上將)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대장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이해는 대명(大明)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원년이다. 원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대명의 군사가 세력이 무척 강성하다고 일러주고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라고 요청하였다. 8월. 왕이 대명의 군사가 황성을 포위하여 몹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좌상시 조민수(曺敏修)를 의주(義州)와 정주(靜州) 등지의 안위사로 삼고, 전(前) 전리판서 임견미(林堅味)를 안주순무사로 삼았다. 9월. 대명의 주사(舟師) 1만 여 척이 통주(通州)에 정박하고 경성(京城)으로 들이닥쳤다. 원나라 황제와 황후는 상도(上都)로 달아나고 태자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역시 상도로 달아났다. 정사일. 백관들에게 대명과 사신을 통할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12월. 예의판서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오왕(吳王)을 방문하였는데, 오왕 장사성(張士誠)이 무척 예로써 대우하였다.
18년 기유년 8월 계미일. 화성이 남두를 2일 동안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군사가 패배하여 장수를 죽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면령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9월 무술일. 달이 남두를 가렸다. 점사에 이르기를 “신하가 배반하리라.”라고 하였다. 11월 경술일. 목성과 화성이 서로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기근이 들리라. 가뭄이 들리라. 신하가 자신의 임금을 해치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4월. 대명(大明)의 황제가 사신을 보내 국서(國書)와 사라(紗羅) 단필(段匹)을 내렸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숭인문(崇仁門)에서 영접하였다. 5월.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받들고 금릉(金陵)으로 가서 등극을 경하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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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辛禑 우왕(禑王)) 2년 병진년 2월 기축일.
유성이 두괴(斗魁)에서 나왔다. 점사에 이르기를 “대신이 임금의 명을 거스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병란이 일어나 장수가 출전하리라.”라고 하였다. 5월 계미일. 유성이 크기가 단지〔壺〕만 하였는데 헌원(軒轅)에서 나와 동쪽을 가리키며 사라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궁중의 여자가 많이 참소하여 어지럽히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3월. 반야(般若)가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에 들어가 울부짖기를 “제가 실제로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하여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합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반야를 쫓아내니 이인임(李仁任)이 반야를 옥에 가두었고 대간(臺諫)과 순위부(巡衛府)가 함께 죄를 다스렸다. 반야는 새로 만든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울부짖기를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저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이 잠시 후에 저절로 무너지니 사람들이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臨津江)에 던져 죽이고 그 친족인 용거실(龍居實)을 참살하였다.
7년 신유년 3월 임자일. 유성이 남쪽에서 나와 동북쪽 모서리에 이르렀다.
11년(1385년) 을축년 3월 기축일. 유성이 남쪽에서 발생하여 서쪽을 가리켰다. “대개 유성이 간혹 탁(濁)의 사이에 드나들면 반드시 색깔이 있고 소리가 난다.”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유성은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크기와 걸맞으나 지금은 출발하여 향한 방향을 기록하면서 소리와 색깔 그리고 크기의 형상을 밝히지 않았으니, 어찌 거기에 담긴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비밀스러운 사정을 더듬어낼 수 있겠는가? 기록한 의도도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남쪽에서는 도이(島夷 왜(倭))의 잦은 침략에 패배하였고, 북쪽에서는 새호(塞胡 북쪽 변방의 야만인)가 서로 싸우는 것에 대응하였고, 서쪽에서는 홍적(紅賊)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싸움을 벌였다. 장사성(張士誠)은 또 대장을 보내 주(州)ㆍ현(縣)을 위협하여 약탈하였으니 생령(生靈)이 도탄에 빠진 것이 이 무렵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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