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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 이사야 65장 17-25절, 요한계시록 21장 1-8절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장 17절)
올여름은 정말 너무 더웠습니다. 여름을 난다는 게, 이게 그야말로 진을 빼는 일이 되어버렸지요. 그런데 이제부터는 40도를 넘나드는 暴炎이 우리의 日常이 될지도 모른다니,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그래도 멈출 것 같지 않던 무더위도 ‘立秋’를 지나고 ‘處暑’를 지나면서 시나브로 누그러지고, 이제 낮과 밤의 기온 차로 하얀 이슬이 맺힌다는 ‘白露’를 앞두고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24절기는 참 신통합니다. 그 지독한 폭염도 결국에는 절기 앞에, 자연의 순리 앞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 24절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흔히 ‘입춘’ ‘입추’ 하면, 들어갈 入 자로 생각해서, 우리가 봄으로 들어가고, 인간이 가을로 들어간다고 착각합니다. 우리 중심으로,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추’는 들어갈 入이 아니라 설 立 자지요. 가을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움직이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24절기는 인간이 자연을 앞서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돌아가는 자연의 順理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때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의 순리를 알고, 그 순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24절기가 가르쳐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때, 인간의 삶도 역사도 어그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에서 창조절 첫 주일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희망의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구약성서에는 많은 예언자가 있는데, 각 예언자의 특징을 따라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로,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로, 호세아는 ‘사랑의 예언자’로, 하박국은 ‘항변의 예언자’로 부릅니다. 이런 이름들은 그 예언자가 어떤 예언자인지, 예언자의 특징을 잘 보여 줍니다. 특별히 이사야를 ‘희망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 보면, ‘희망’을 선포했다는 것은, 그 시대가 ‘절망적인 시대’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두 다 희망에 들떠 있는데, 거기다 희망을 선포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희망은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절실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희망을 선포한 때는 이른바 ‘바빌론 포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었던 거룩한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읍은 들짐승이 뛰노는 황무지가 되어버렸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막강한 힘 앞에서 자신들의 꼴은 지렁이 같고 벌레 같았습니다. 그렇게 바빌론 포로기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때였습니다. 이사야는 그 역사의 암흑기에 ‘희망’을 선포하고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그 절망의 시대에 어디서 희망을 발견하였을까요? 이사야가 선포하고 노래하는 그 희망의 根據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사야는 ‘창조 세계’, 곧 ‘自然’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거기서 ‘희망’을 찾았습니다. 사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는 바빌론 포로 전에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본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이사야에게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바빌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버렸고, 전쟁 포로가 되어 낯선 땅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바빌론은 무엇보다 성전이 없는 곳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없으니, 이제 부정한 이방인의 땅에서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뵐 수 있을까요? 어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희망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 세계, 자연입니다. 이사야는 ‘성전 안에서 행하는 장엄한 의례’가 아니라, 온 누리에 가득한 생명의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인간이 돌로 만든 신전 안에 칩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누리 온 생명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앞에 인간의 영화란 한 포기 풀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서 다시 돋아나는 연한 새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땅을 일구는 농부의 인내에서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을 보았고, 때를 따라 비가 내리고, 싹이 돋고 자라 열매를 맺는 자연의 순리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역사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온 땅에 가득하신 하나님, 이미 가까이 계신 하나님, 하늘을 두르시고 땅을 펼치신 하나님,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회개했습니다.
이사야가 만난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물어물어 찾아가서 만나 뵙는 신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우리를 끝내 찾아오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니지요.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그 안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시편 시인(139편)이 노래했듯이,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거기에 계시고, 스올/지옥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거기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빌론 포로기는, 인간이 만든 ‘神殿’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生命의 自然’에서 자연의 순리와 창조의 섭리를 배우는 학습의 시간이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바빌론에서도 변함없이 살아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받은 이사야 65장 17~25절 말씀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창조 신앙’, 그 ‘희망의 노래’의 절정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바빌론에서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백성들에게, 친히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이전 것들을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다시 창조하시겠다는 것일까요? ‘예루살렘’과 그곳에 사는 ‘주민’입니다. ‘예루살렘’이 새로워졌는데, 그 ‘주민’은 그 모양 그대로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루묵이 되고 말겠지요. 아무리 환상적인 ‘천국’을 만들어도 사람들은 그 꼴 그대로라면, 그 천국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고 말겠지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을 다시 창조하겠다 하십니다. 기쁨으로 가득한 도성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창조하시겠다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로 창조하시겠다는 것일까요? 행복을 누리는 백성입니다.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20절을 보면, 거기에는 몇 날을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고,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랍니다. 백 살에 죽으면 젊은이라 하고, 백 살을 채우지 못하면 저주받았다고 한다지요.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빌론에서 노예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에게 절실했던 소망이 그것이었습니다.
21절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살고, 자기가 기른 포도나무 열매를 자기가 먹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고, 자기가 심은 걸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라고, 뒤집어서 재차 강조하지요.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을 빼앗겼던 사람들에게는 이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이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23절에서는, 거기서는 헛되이 수고하지 않고, 그 자식이 대를 이어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그런 무참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나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 말씀입니다.
25절에서는, 이사야가 바라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꿈, 그 희망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산이지요. 그런데 이 평화의 꿈,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꿈은, 이사야 11장에 있는 ‘메시아의 노래’에서 그렸던 바로 그 장면입니다. 이사야 11장 6~9절입니다.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명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그 일은, 또한 하나님의 종 메시아가 해야 할 그 일이기도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일은 메시아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일이요,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일이기도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이 계획하고, 인간이 도모하고, 인간의 지식과 기술로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인간으로서는, 어리석은 인간으로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건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혼자서 이루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을 내려 주신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기도하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꿈꾸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함께 읽었습니다. 바빌론에서 이사야가 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밧모섬에 갇혀 있던 요한에게로 이어졌지요. 요한은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바라보니,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거기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목마른 사람과 이기는 사람입니다. 목마른 사람, 갈망하는 사람이지요. 이기는 사람, 견디어낸 사람, 포기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악에 굴복하지 않고,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생명수 샘물을 마시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반면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는커녕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바다에 던져질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굽니까? 비겁한 자들, 신실하지 못한 자들, 가증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마술쟁이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삭빠르게 잘 적응하고, 비굴하게 타협하고, 악에 굴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차지할 몫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불타는 바다뿐이었습니다.
지난여름 끝자락, 8월 26일에 네팔에 난데없는 대홍수가 났습니다. 사망자가 1,200명이 넘었고, 실종자가 수천 명에 이르는 참담한 재앙이지요. 그런데 이 끔찍한 홍수는 참 이상합니다. 그 인근에는 무슨 폭우가 내리지도 않았는데, 피할 겨를도 없이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쳐서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습니다. 이 황망한 재앙은 왜 일어났을까요? 그게 기후 변화 때문이랍니다. 지구 온난화로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아 토석류와 함께 무너져 내리면서 재앙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끔찍한 일입니다. 지구 온난화는 결국 이산화탄소 때문인데, 네팔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08% 정도로 아주 미미합니다. 중국이 34%, 미국이 12%, 인도가 7%로 세계 배출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요. 강대국들이 배출한 이산화탄소 때문에 정작 힘없고 가난한 나라가 먼저 참혹하게 희생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가 희생당하면,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우리는 안전할까요? 아니지요.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나면, 그 후에는 홍수가 아니라 지독한 가뭄이 아시아와 유럽까지 휩쓸어버릴 것이 뻔하답니다. 사실 이미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극한의 폭염과 엄청난 홍수와 가뭄과 태풍과 허리케인, 게다가 전쟁과 걷잡을 수 없는 산불로 난리를 치르고 있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빌론에서 이사야가 보았던, 밧모섬에서 요한이 바라보았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순리를 즐겨 배우고, 하나님의 섭리를 기뻐하며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집을 탐하지 않고, 남의 포도를 훔치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지은 집에서 자기가 기른 열매를 기뻐하며 나누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대단히 특별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는 동산,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동산”을 꿈꾸고, 기도하고,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바울이 말했던, 진통하는 피조물이 간절히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창조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일상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먹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꿈꾸고, 기도하고, 노래하며 살아가도록, 주의 성령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