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화가, 1916~1956 |
서귀포 항과 천지연 폭포가 내려다 뵈는 서귀포시 서귀동에는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을 기리는 이중섭 거리가 있다. 1996년 3월 서귀포시는 6·25전쟁 때 화가 이중섭이 아내와 두자녀를 데리고 잠시 피난살이를 했던 서귀동 512번지 일대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하면서 서귀포 70경중 한 곳으로 삼았는데, 이중섭 거리는 도로에서 약간 비탈진 약360m가량 되는 골목이다.
골목 중간에서 왼쪽 샛길은 이중섭의 뒤를 좇으려고 하는 젊은 예술인들의 공방거리이고, 오른쪽에는 그가 살았던 초가집이 있는데, 골목의 가로등은 그가 즐겨 그렸던 어린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보도블록도 그가 즐겨 새겼던 판화들을 주제로 한 것이 인상적이다. 초가집 담장너머로 그가 거닐었을 골목은 ‘이중섭 산책로’라 이름 붙였고, 그 오른편에는 양복차림의 이중섭이 앉아있는 동상이 있는 ‘이중섭 공원’이 있다. 그 위편에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데,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면 이중섭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뿐만 아니라 그가 그렸던 섶섬도 보인다.
이중섭 거리에 조성된 서귀포문화예술인디자인시장은 젊은 예술인들이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관광객들이 직접 작품을 그려보는 등 시민과 예술인의 문화소통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우리에게 가난과 절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화가 이중섭은 사실 1916년 평남 평원군의 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22세 때인 1937년 일본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유학 갈 만큼의 재력과 능력이 있었다. 1941년 이중섭은 학생 신분으로는 최고상인 협회상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고, 이후 각종 상을 휩쓸면서 ‘천재’라는 타이틀을 획득한 촉망받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1943년 귀국했다.
1945년 원산에서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李南德)와 결혼한 뒤
원산에서 살던 이중섭은 사상의 혼란기이던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했으며, 또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 그림을 그린 후
이른바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다가 1950년 겨울 국군을 따라 월남했다.
부산·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하던
이중섭은 36세 되던 1951년 1월 부산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서 그해 12월까지 서귀포에서 살았는데, 제주도에서는 그가 살던 집에
기념표석을 세우고 이중섭 미술관 건립을 추진한 것이다.
부두노동을 하며 화선지가 없어서 양담배갑을 모아서 은지화(銀紙畵)를 그리던 이중섭의 생활이 곤궁해지자, 1952년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이듬해 이중섭은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갔지만, 홀로 귀국한 이후 궁핍과 고독한 나날을 보내며 술로 연명했다. 1955년 7월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은 그는 가난과 극심한 영양실조, 신경쇠약 등으로 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이중섭 미술관. |
피난살이 하던
이중섭은 서귀포의 초가집의 방 한 칸을 빌어서 다섯 식구가 살았는데, 최근 복원된 초가집에서 당시 곤궁했던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2평도 채
안 되는 길쭉하고 허름한 방 한 칸과 부엌이 전부인 집은 방문만 열면 바다가 내다뵈는데, 이중섭은 이 집에서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가 살던 때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부엌 앞에는 아직 잎새도 만들지 못한
옥매화가 만발했다.
초가집 담장사이의 샛문을 나서면 고단했던 이중섭의 고뇌를 지켜보았을 고목이 서있는 ‘이중섭 산책로’이고, 그 옆에는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이중섭을 그린 청동상이 있는 이중섭공원이 있다. 과연 하늘의 이중섭은 힘겹게 살았던 서귀포에서의 생활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공원에서 좁은 계단 위에 있는 현대식 3층 건물의 이중섭 미술관은 서귀포시가 1997년 이중섭거주지 복원사업을 하면서 2002년
이중섭 전시관을 개관한 것을 모체로 했는데, 2003년 가나 아트로부터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 65점의 작품을 기증 받으면서 2종 미술관이
되었다가 2004년 갤러리 현대로부터 ‘파란 게와 어린이’ 등 53점의 작품을 기증 받으면서 1종 미술관이 되었다.
미술관은 1층 상설전시실과 2층 기획전시실, 2008년 별도로 지은 창작 스튜디오로 나뉘는데, 상설전시실에는 이중섭의 예술과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과 연표 등이 전시되어 있고, 기획전시실에서는 이중섭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서귀포의 환상', '나의 벗, 이중섭', '섬에 사는 호랑이'와 같은 주제로 기획전시회를 열고 있다. 그리고 창작 스튜디오는 젊은 미술작가들에게 편리하고 안정된 작업여건을 제공하고, 지역주민에게는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6개의 작업실과 편의시설이 있다. 3층 옥상에 올라가면 그가 살던 집을 비롯한 ‘이중섭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일뿐만 아니라, 이중섭이 그렸던 섶섬도 맨눈으로 보인다.
이중섭이 그린 어린이를 형상화한 가로등(왼쪽), 물고기를 안고 게를 탄 오린이. |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이중섭은 소(牛) 그림과 1950년부터 1952년
사이에 그린 ‘은지화’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가 소를 즐겨 그린 것은 어려서부터 보아온 농촌의 우직한 소를 좋아해서 소를 통하여
우리의 강한 민족성을 표현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반항적인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가난에 허덕이던 말년에
그린 소 그림에서는 분노와 좌절이 물씬 풍기는데, 그가 죽기 2년 전인 1954년경에 그린 그의 대표작 ‘흰 소’의 회색 빛 배경에 검고 흰
붓으로 그린 거칠고 굵은 붓질은 거의 울분에 가깝다. 이 작품은 현재 서울 홍익대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
그러나 이중섭이 소보다 더 자주
그리고 애착을 보인 것은 은지화에 그린 아이들 그림이다. 그림을 그릴 화선지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이중섭은 당시 담뱃갑의 포장지 안에 담배를
감싸는 은박종이에서 막을 긁어 새긴 뒤 그 공간을 연필로 메운 일종의 상감기법을 즐겨 썼는데, 은지화에서 벌거벗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밖에도 일본으로 떠난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수채화와 펜으로 그린 편지들에서 순진무구한 어린이에 대한 이중섭의
사랑과 삶의 사연들을 진득하게 느낄 수 있지만, 반면에 자신이 살아야 했던 혼탁한 현실에서 판치던 변절과 거짓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망의 표현도
깃들어 있다.
이중섭의 작품은 1956년 그가 죽기 직전까지 약5년 정도 사이에 그린 것이 대부분인데, 그는 1952년 한 해 동안만 무려 80점을 그려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냈다. 그에게 삶의 희망은 오로지 가족뿐이어서 그가 남긴 작품들은 물론 아내와 자녀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와 엽서들을 통해서 얼마나 가족을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중섭이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남덕 군에게”라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읽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흰소(왼쪽)과 황소. |
이중섭 거리에서 이중섭이 살던 집 건너편 샛길은 서귀포문화예술인디자인시장이라는 긴 이름의 간판이 붙은 젊은 예술인들의 공방거리인데,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직접 조각하거나 작품을 그려보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또, 공방 건너편에는 예술인의 혼이 담긴 듯한 '서귀포 환상'이라는 전통찻집이며 중섭식당 등이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곳에 잠시 앉아서 화가 이중섭을 추억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난한 천재화가 이중섭의 짧은 머묾을 이용해서 테마공원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발길을 모으려고 시도한 서귀포시의 기발한 착상이 놀랍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