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변宿便
김 귀 선
배를 움켜잡고 버티던 친정 옆집 아재가 다급히 삽을 들고는 집 뒤 밭으로 향했다. 고르지 않는 삽질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조용했다. 삼매경에 들어간 모양이다. 적당한 곳에서 해결하라는 주위의 채근에도 손을 내저으며, 변기를 고칠 동안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자신했던 아재다. 누구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분이 아니던가. 그런 아재가 죽을상을 하고 집 뒤 밭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지인에게 들었던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양병원 치매 병실, 구순의 할머니를 태운 휠체어가 병실 문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복도로 나온다. 요양보호사의 손에 끌린 휠체어는 화장실 가까이에서 잠깐 멈추더니 다시 휴게소로 향한다. 휴게소 앞에서 서성이다가 이내 복도 끝의 베란다로 간다. 몰래 할 말이 있다는 할머니를 위해 요양보호사가 자리를 물색하느라 며칠 째 돌아다니는 중이다.
사람들이 있어 곤란하다는 병실을 피해 밖으로 나왔지만, 복도마저도 오가는 사람들이 있다며 할머니는 불편해한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 가도 할머니는 주위만 살필 뿐 당최 그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녀는 복도 끝의 작은 공간에 휠체어를 밀어 넣는다. 허리를 숙여 할머니의 귀에 입을 대고 얘기해 보라 한다. 혹시라도 창문 너머 병실 사람들이 들을 수 있다면서 할머니는 또 못 하겠단다. 치매를 앓는 분의 투정이겠거니 하기엔 너무도 신중하다. 그녀는 점점 궁금증이 인다. 이야기의 물꼬를 터 주려 이것저것 짚어가며 물어보았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병실 사람들이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고 자식이 속상하게 한 것은 더욱 아니란다. 도대체 할 얘기가 무엇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당신도 답답한지 이번에는 건물 아래 조용한 잔디밭으로 가보자고 한다. 휠체어를 앞세운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원으로 간다. 나무 그늘에 휠체어를 고정하고 할머니의 눈치부터 살핀다. 이쯤에서는 말하겠거니 기대하면서. 그런데 할머니는 또 못하겠단다.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두 명의 남자를 손짓하며 그 사람들이 들을 것 같아 안 된단다. 참으로 그녀를 궁금하게 하는 노인네다.
할머니는 이십 대 후반에 청상이 되었다. 거친 세월에 홀로 오 남매를 키웠다. 하지만, ‘공주할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모습이 고와 고생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단정한 쪽머리며 수저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조심 식사하는 등 누구보다 예의에 민감한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이토록 하고 싶으면서도 못 하는 말이 무엇인지.
할 수 없이 그녀는 어둑할 때를 기다렸다. 외등을 켤 때 쯤 병원 건물 뒤쪽의 으슥한 곳에 모시고 간다. 할머니는 주위부터 휘둘러본다. 사방이 조용하자 할머니는 쪽머리가 살짝 흔들릴 정도로 한숨을 푹 쉰다. 두어 번 더 한숨을 푹 쉬더니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아이고 씹하고 시퍼라. 아이고 씹하고 시퍼레이. 아이고 하고 시퍼라”
높아지려는 음성을 억누르며 마치 오르가슴을 느끼듯 흥분된 목소리로 할머니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런 뒤 홀가분한 음성으로 몇 마디를 더 뱉는다.
“아이구 아이구. 시원해라. 답답하던 쇅이 시원하데이.”
박장대소하며 들었던 요양병원 할머니이야기는 생각할수록 가슴 밑바닥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인, 언젠가 읽었던 신문기사 한 대목이 진득하게 밀려왔다.
‘사고로 척추를 다쳐 '남성'을 잃은 그는 광부였다. 그의 아내는 독일에서 그를 간호하던 파독 간호사였다. 정신적 사랑을 믿고 결혼한 두 사람의 '플라토닉 러브'가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남자가 심한 의처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의 설득으로 광부는 수술대에 올랐다. 회복실을 찾은 아내가 처음으로 당당하게 선 남편의 남성을 봤다. 그녀는 그걸 움켜쥐고 울었다.’
“하이구 시원해라. 답답하던 속이 시원해져 이제야 살 것 같데이!”
통쾌한 목소리에 밭쪽으로 돌아보니 삽자루를 쥔 아재가 집 모퉁이를 성큼성큼 돌아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첫댓글 '마음의 정원' 방에
정임표회장님의 '문학과 순수 이성'
을 읽고 이 작품을 올려봅니다.
기성의 수필가들은 이런 글을 쓰면 "얄굿데이"라고 평합니다. ^^
내가 김귀선 작가의 <푸른 외출>을 읽고 청하지도 않는 서평을 쓴 것은 뛰어난 여류문사 한 사람을 보호해야 겟다는 마음에서 내 스스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나는 우리 수필가님들이 동료 수필가님들의 작품을 읽고 제대로 된 서평이나 독후감을 쓴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점도 많이 개선해야 할 수필인들의 자세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욕구 중 최하위라 생각하는
생리적인 욕구가 충족되었으니
얼마나 만족했겠습니까.
좋은 작품 감사합니다. ^^
긴가민가 알쏭달쏭 헷갈리는 요소가 있습니다.
*이미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아직도 욕정의 대상으로 남자가 좋을 수 있을까?
으이그, 저 남자라는 종자들은 전혀 쓸데없다.
오로지 성가시기만 하다!
저는 이게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이게 오래 묵은 미련으로 남은 심리현상이 아닐까?
그러니까 예전에 학교에 가지 못한 아쉬움으로 할머니가 되어서
여고생 교복을 맞춰 입고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 부르는 그런 것.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의 귀!'
이런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과 비슷하죠.
'이미 욕정은 사라졌으나 응어리로 맺힌 한은 남았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저는 역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알쏭달쏭.
ㅎ선생님 반가워요
맞아요~~~^^알송달송~~
그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고 했는데
그기 그렇게 되는 게 인간인가 봐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지~~
사회적 통념으로 인간을 말하기란 무리인듯요
글 살아있네, 살아있어!
언젠가 이야기로 들려 주셨지요. 글로 읽으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부터
나는 나중에 어떤 숙변을 쏟아놓을까 두렵기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