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속담에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고 잘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특히 선한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시간은 없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모본을 근거로 3:13에서 시작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겪는 고난에 대해 계속 권면합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독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권면합니다. 특별히 세상에 있는 믿지 않는 이전 동료들의 압박에 견딜 것을 요청합니다. 둘째, 7-11절은 성도 개인과 함께 고난 받는 동료 성도들을 향한 태도를 다룹니다. 정신차려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권면합니다.
예수 메시아로 인한 세 삶과 고난(1-6)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봉사하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면, 자칫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원망없이 서로 대접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고 대접하라는 사도의 권면 가운데 스스로 좀 더 힘서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1-6)
실제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던 방탕한 삶의 방식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살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악을 더 들어나기 때문에 같이 죄악을 범함으로 동류의식 속에서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것은 세상을 깨끗함의 평범함이 아니라 죄악의 보편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자로서 새 삶을 살라(1-3)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독자와 연결시켜 새로운 삶을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로 그 연결을 표현합니다. ① 인과 접속사 ‘그러므로’와 ② 등장인물 예수님과 ‘너희’, 그리고 ③ 분사구문과 그것의 꾸밈을 받는 주절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육체의 고난을 받았기에[분사구문] ‘너희’는 무장하라[주절]’입니다(1a). 메시아의 고난은 3:18에 언급했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무장하라’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세상에 맞설 신자의 바른 삶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목할 것은 준비의 내용입니다. 인지 영역을 의미하는 ‘엔노이아(ἔννοια)’를 써서 예수님과 같은 생각 혹은 의도를 무장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신자 삶에 대한 베드로 권면의 특징을 다시 보여줍니다.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이나 모본, 독자의 사고 영역 무장(내면 요소) - 삶의 외적 표현(외면 요소) 순서입니다. 1b-2절에는 신자 삶의 ‘어떻게’ 요소를 설명합니다.
육체로 고난 받은 자가 죄를 그쳤기 때문인데, 육체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 뜻에 따라 살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육계로 고난 받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la절에 언급한 예수님입니다. 육계와 고난 당함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고난 받았기에 죄 짓는 것을 멈췄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입니다. 후자가 좋은 듯합니다.
둘째, 육체로 고난 받은 사람이 죄를 그쳤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고난 받는다고 죄가 멈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쇠는 앞에서 다룬 고난과 관련한 문맥입니다. 이 고난은 일반적 어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기에 받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그쳤다는 것도 모든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따르지 않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선을 행함으로 세상에서 고난 받는 자는 세상 따르는 것을 멈추었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셋째, 고난의 목적입니다(2).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이전 삶의 모습과 단절하고 다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자는 3절에서 과거 세상속 모습(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의 추함은 과거로 족하다는 표현을 부연함으로 새로운 삶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면 더 고난 받습니다(4).
그럼에도 그렇게 살라고 한 것은 고난을 피하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신자는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신자를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4-6)
1-3절이 예수 믿는 독자에 대한 것이라면, 4-6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독자들이 버렸다는 3절 죄의 모습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고 당황해합니다. 어제까지 자기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삶을 살았는데, 갑자기 그 모든 일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신자들을 비난하기까지 합니다(4). 세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자기들처럼 살다가 하나님/예수 때문에 갑자기 그런 삶을 악한 것으로 여기면, 계속 그 삶을 추구하는 자기들은 악한 자들이 됩니다. 말로 비난하든 그렇지 않는 삶이 대조되고 옳고 그름의 구분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신자의 삶을 따라 자신을 바꾸는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삶의 방식이 옳고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득권과 힘이 있으니 자연스레 신자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3:19-20처럼 빛(예수)이 세상에 왔지만 자기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빛을 겁박하고 제거하려는 세상 모습과 유사합니다.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세상과 신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들 목소리가 우세하고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된 모습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5; 참조. 2:12). 이런 면에서 그들의 태도는 세상을 주관하는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신이며, 어떤 것이 실제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6).
특별히 믿고 죽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어리석은 것을 믿고 아무 유익 없이 자기들과 똑같이 죽었다고 판단 받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전에 자신들에게 증거된 복음을 믿었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을 따라 산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누가 실제로 웃는 삶을 살지 판명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이면의 실제는 다릅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의 진실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비난과 겁박에 기죽거나 동화되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와 무엇이 실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개인과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들 향한 태도(7-11)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림을 받기 전에, 즉 세상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들도 세상의 쾌락을 즐거웠습니다. 정욕적인 쾌락이 즐거웠고, 세속적인 영광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고 난 후에 천국이 얼마나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그런 일들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7-11)
베드로는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 관해서 말합니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1) 고난 중에 있는 신자의 태도 정신 차려 기도하라(7)
화제를 다시 신자에게로 옮겨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룬다. 11절까지 지속된다. 먼저, 신자 삶에 대한 명령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 언급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선악 간에 모든 사람을 판단할 시간이다.
세상은 주님께 자기 일을 고하고 멸망의 심판을 받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 완성이 시작되었기에 그 마지막 과정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에 세상 위세도 곧 끝날 것입니다.
이런 전제로 저자가 신자 삶에 대해 다루는 첫 요소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 기능은 유한자(有限者) 사람이 무한자(無限者)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저자가 특별히 염두에 둔 기도 내용이 있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 뜻을 위한 선행과 그로 인한 고난과 관련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대한 제사장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기도하라’를 명령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명령법은 정신 차리라는 것과 근신하라는 것이고, 기도는 목적 전치사구로 표현됩니다. 즉, 기도를 위해서 정신 차리고 맨 정신으로 있으라는 말입니다. 신자 삶에 대한 일반 권면을 제시하는 1:13과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 소리에 휩쓸리지 말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도록 바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에 대한 태도 여러 권면들(8-11)
동료 신자와의 관계 요소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8). 뜨겁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동료 신자들을 향한 죄 용서를 포함합니다. 1:22 내용의 반복입니다. 둘째, 불평하지 말고 서로 환대하라고 합니다(9). 셋째, 성령의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를 향해 섬기고 봉사하라고 합니다(10-11a).
모든 일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1차적으로 은사 사용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언급한 신자의 삶, 곧 언약 백성으로서 세상 속 제사장 삶의 궁극 목적이기도 합니다(참조. 2:9-10).
그리스도인답게 젓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수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이 고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쇄도하여 들어온 종말의 시간표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저항에 남다른 가치관으로 저항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