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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 사도 아고보의 친 동생. 갈릴리 어부 출신.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13:23).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의 저자. |
본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요 “우뢰의 아들”인 요한입니다. 그의 부모는 (사업이 번창하여 삯군을 고용할 정도로) 유복한 어부 세베대와 주님을 충실히 따른 살로메로서(물론 그녀의 동기가 항상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마20:20,21), 살로메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여동생으로 추정됩니다(막15:40; 요19:25).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막15:40)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19:25)
한편, 열두 제자 중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나(요19:26,27), 세베대의 가족이 대제사장의 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요18:15,16)은 아마 세베대의 집이 부유했기 때문에 상류층 인사들과 종종 교류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요한의 형제로는 사도 야고보가 있었는데, 항상 요한보다 야고보가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야고보가 요한의 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대략 25세 때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혹자는 요1:37의 두 제자를 안드레(요1:40)와 사도 요한으로 보기도 합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4:21,22).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요1:37~40)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특별히 많은 사랑을 받고 가까이에서 주를 섬겼던 자로서, 12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형장까지 쫓아간 제자이며, 주님의 승천 후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고 사마리아로 파송 받는 등 복음전파 사역을 적극적으로 수행, 말년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한 듯 하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듯합니다(12사도 중 가장 오래 산 마지막 사도).
또한 그는 ‘우뢰의 아들’, 즉 ‘보아너게’라는 별명에서 볼 수 있듯 성격이 급하며, 모친을 통해 예수님께 높은 직책을 요구했던 점으로 보아 야심 역시 만만치 않은 자로 여겨지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모친 마리아를 그에게 당부한 것을 볼 때, 그분의 신뢰를 받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며, 말년에는 ‘사랑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사랑이 많았습니다(요일3:17).
3. 기록연대
: 주후 85-90년. 공관복음이 완성된 이후, 밧모 섬으로 귀양 가기 전.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그들의 복음서를 완성한 후로부터도 약 30여년이 지난 1세기 말에 이르러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요한복음을 제외한 신약의 대부분이 완성된 때로, 이 무렵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그분의 복음 역시 전파되어 있었으며, 바울과 베드로를 위시한 모든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후였으며, 로마 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후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共觀)복음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운명의 해 즉 주후 70년 이전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는데,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고 있던 터라, 요한은 이런 사실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신적인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는 그분의 말씀과 사역 등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4. 기록목적:
1)헬라 사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2)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3)'가현설'과 같이 당시 만연했던 영지주의의 그릇된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4)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증보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한편, 요한은 본서의 기록 목적을 처음 18절의 서론 안에 기술하고 있으며, 20:31에서 더욱 명확히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을 위한) 그리스도시요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신도들을 이끌어 예수님과의 거룩한 우애의 관계에 들게 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5. 기록대상: 소아시아 교회의 성도들
저자의 목회지인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의 성도들을 대상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
6. 특징:
1)예수님에 대한 주관적 해설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음
(공관복음-객관적 성격을 띤 전기체)
2)풍부한 강해와 상징적 표현: 사건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긴 강론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음. 대화와 변론과 상징적 표현이 풍부함.
3)예수의 신성이 강조됨.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이 강조됨.
본서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출현, 배척, 교훈, 고난과 부활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에 그리스도의 신성(하나님 아들이심)이 잘 드러나 있다(물론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도 나타나고 있지만).
4)독특한 표현 기법인 "나는 .......이다"라는 선포와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됨. 이는 주로 신에게 사용하는 구문 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7.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
①계보의 기록이 없음
: (마태에서와 같이) 요셉을 통한 그리스도의 세계도 없으며,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마리아를 통한 계보도 없습니다.
②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없음.
③예수님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도 없음.
④변화산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없음.
⑤제자들을 임명하심에 대한 기록이 없음.
⑥비유의 가르치심이 없음.
⑦승천에 대한 기록이 없음.
⑧마지막 대 사명에 대한 것도 없음.
8. 핵심장: 제3장, 핵심말씀: 3장 16절
제3장에는 본서의 중심 사상인 ‘믿음과 구원’의 불가분적 관계가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16절에 요약된 복음의 정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게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9. 핵심단어: 믿으라.
본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핵심 단어는 ‘믿다’로서 이는 참다운 지식과 더불어 과감한 결단이 요구되는 말입니다(본서에 98회 사용됨). 즉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은 즉시 영생을 얻지만, 그를 거절하는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정죄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10.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사들
: 가나혼인 잔치(2:1~11), 니고데모와의 대화(3:1~5),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장),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심(11장),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3:1~17), 여러 가지 강화들(14~17장), 도마와 안드레 빌립 유다 등과 같은 개인에 대한 정보들
11. 본서에만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칭
: ‘말씀’, ‘창조자’, ‘아버지의 독생자’, ‘하나님의 어린양’
12. 예수그리스도의 신성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다윗의 자손”이나 “인자”로 표현했다면,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분의 기원을 “태초에”까지 가져가고 있습니다(1:1). 즉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모든 만물이 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1~3).
예수님은 35회나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25회에 걸쳐 ‘진실로, 진실로’란 권위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증언 외에도 그의 신성을 증명하는 6가지 증언이 있습니다.
①세례 요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1:34)
②나다나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1:49)
③베드로: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9)
④마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7)
⑤도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⑥사도 요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20:31)
⑦예수 그리스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10:36)
13. 7가지 이적
또한 우리는 본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는 7가지 표적 또는 이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
①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2:1~11)
②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 (4:46~54)
③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5:1~47)
④5,000명을 먹이심 (6:1~14)
⑤바다 위로 걸어가심 (6:15~21)
⑥소경을 보게 하심 (9:1~41)
⑦나사로를 살리심 (11:1~57)
14. 나는(내가) .... 이다
본서에는 독특한 표현 기법인 “나는 .......이다”라는 선포와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신에게 사용하는 구문 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①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②나는 세상의 빛이니(6:35)
③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8:58)
④나는 선한 목자라(10:11)
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⑥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⑦내가 참 포도나무요(15:1)
15. 다 이루었다(19:30)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다만 “다 이루었다!”는 승리적 외치심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만이 구원의 사역이 완성되는 것입니다(요19:30).
16. 기록배경
에베소에서도 ‘케린투스주의’와 같은 영지주의 분파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요한은 헬라인들에게 익숙한 ‘말씀’(로고스)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했던 것입니다.
17. 요16:28에 따른 본서의 개요
1)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1:1~18)
: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로 태어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계셨는데, 바로 이 부분이 이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 다.
2)세상에 왔고(1:19~12:50)
: 그분은 친히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사 말과 행동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3)다시 세상을 떠나(13~19장)
: 13~17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시고 그의 제자들의 곁을 떠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으며, 18장과 19장에서는 예수께서 대적자들의 의해 십자가에 매어 달리사 그 죽음의 문을 통해 세상을 떠나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4)아버지께로 가노라(20,21장)
: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얼마 동안 이 땅에 머물며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바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께로 돌아가셨습니다.
<핵심 단어 및 구절 연구>
1:1 태초에(헬, 아르케): 이는 창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神聖)’과 ‘초시간적인 영원성’을 나타내기 위해 쓰였습니다.
한편, 성경에 ‘태초’라는 단어가 3번 사용되었는데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요1:1 ‘태초에’(헬, 아르케): 만물의 시초 이전에도 존재한, 즉 ‘시간적 차원을 초월한 영원’을 가리킴. 따라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영원 전 선재성(先在性)을 밝히기 위해 사용되었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
②요일1:1 ‘태초’: 이는 요1:1의 의미와 거의 동일하나 특별히 성육신하신 제2위 하나님, 즉 그리스도의 강림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됨.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오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③창1:1 ‘태초에’(히, 베레쉬트): ‘처음’, ‘기원’, ‘출발’의 뜻. 이는 요1:1과 요일1:1과는 달리 ‘무시간적 영원함’이나 ‘영원한 시간의 흐름 중 어느 한 시점’을 의미하지 않음. 왜냐하면 시간 자체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결과로 생겨진 것이기 때문. 따라서 창1:1의 ‘태초’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함으로써 시작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함.
1:1 말씀(헬, 로고스):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즉 그리스도를 가리킴.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라고 호칭한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영원한 뜻이자 계시 비밀의 총체로서 곧 성부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의 실체이시며, 둘째 인간과 관계성을 갖고 계신 계시자이셨기 때문입니다(상호 의사소통의 개체인 말씀으로 묘사됨).
①말씀은 누구이시며 언제부터 존재하셨는가? (요1:1,2) 그리스도, 영원 전부터
헬라어 ‘로고스’는 본래 스토아 철학에서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 원리라는 의미로서 사용되다가, 1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 Judeus)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존재로 이해되었음.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로고스’라는 용어를 요1:1~3의 맥락에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사용, 전체적으로 로고스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헬라 사상에 깊이 물든 독자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성육신하신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됨). 사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시는 상호 의사소통(communication)으로서의 진정한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본 절들 속에 사용된 ‘함께’(헬, 프로스)라는 전치사는 동등하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연합되어 있으며(서로 친밀한 인격 관계), 동시에 구별된 다른 주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이 전치사는 ‘서로 마주 대하는’이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치사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공존하면서도 엄연히 구별되는 인격체라는 사실과 ⒝그분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셨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1,2)
②태초에 그 말씀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요1:3) 만물의 창조
우리는 본절과 더불어 창1:1,2를 통해 천지창조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사역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성령님)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3)
③그분 안에는 무엇이 있으며, 또한 세상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4,5,9)
생명이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빛으로 나타남
사실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고 교제가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헌데 우리는 오직 누구를 통해서만 이 단절, 또는 분리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및 교제가 회복될 수 있습니까?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케 하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4,5,9)
④믿는 자에게 주신 것은? (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또는 권리)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단순히 ‘의뢰하다’(trust)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또는 모셔 들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그의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에서의 표현과 같이 말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한편, 이러한 자에게는 어떤 권세를 주시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헬, 엑수시아)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인 가운데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 또는 권리(right)를 받아 누리고 있습니까?
⑤그분은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즉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친히 거하셨으며(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사람), 지금은 보혜사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친히 내주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4절 상)
한편, ‘거하시매’(헬, 스케노오)는 '장막을 치다'는 뜻으로 구약의 성막에 친히 임재하신 하나님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⑥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8절) 태초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 있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 구요? 그가 비록 여호와와 대면했다는 명성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출33:11, 신34:10), 그 역시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닙니다(출33:17~34:9).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20~23)
그런데 이제는 그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말입니까?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8절)
1:19~2:11 그리스도의 공생애 초기의 한 주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초기의 한 주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을 설명했는데 이것은 그 묘사 과정에 있어 요12:1 이후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주간의 생애와 구조적인 유사성을 띠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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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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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1:25 |
첫째 날 |
세례 요한이 자신의 신분을 밝힘(1:19~28) |
토요일 |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자신에 관하여 밝히 드러내심(12:1~11) |
둘째 날 |
하나님의 아들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줌 (1:29~34) |
일요일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12:12~50) |
셋째 날 |
첫 제자들에 대한 소개 (1:35~42) |
다음주 목요일 |
제자들과 함께 나눈 마지막 만찬 (13~17장) |
넷째 날 |
나다나엘의 고백 : 이스라엘의 임금 (1:43~51) |
금요일 |
십자가에 달린 팻말 : 유대인의 왕(18:1~19:37) |
다섯째 날 |
침묵의 시기 |
금요일 이후 |
무덤에 장사되어 사흘 동안 머물러 계심 (19:38~42) |
여섯째 날 |
‘사흘 되던 날’ -가나 혼인잔치의 이적 (2:1~11) |
일요일 |
‘사흘 되던 날’ -부활 (20장) |
2:4,5 여자여(헬, 귀나이): 이는 당시 여성에 대한 최고의 존칭어로, 왕후 등을 부를 때 사용되었음.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모친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외에도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19:26)와 부활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부를 때(20;15)에도 사용하셨다.
2:12~25 두 번의 성전 정화 기사 비교
본문의 성전 정화 기사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행해진 사건이나, 공관복음의 기사는 공생애 말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혹자는 두 기사를 같은 사건으로 보기도 하나,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서와 본서에 쓰인 용어가 현격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4,15,19~22절의 말씀은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관복음에만 있는 표현 |
요한복음에만 있는 표현 |
①매매하는 자(마21:12; 눅19:45) ②시56:7의 인용(마21:13; 눅19:46) ③강도의 굴혈(마21:13; 눅19:46) ④나귀 타고 입성하신 후의 사건임(마21:1~11) ⑤‘호산나’ 찬양을 유대인들이 금지시키고자 함(마21:15,16) |
①양과 소(2:14) ②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심(2:15) ③장사하는 집(2:16) ④나귀 타고 입성하신 사건을 따로 다룸(12:12-19) ⑤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하고 예수께서 성전을 사흘 동안 일으키신다는 말씀을 하심(2:19~22) |
4:6 제육시: 유대 시간법을 따라 ‘정오’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로마 시간법을 따라서 ‘오후 6시’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①본서가 1세기 말, 곧 로마 문화가 팔레스타인에 정착되었을 때 기록되었고, ②저녁때에 물을 긷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으며(창24:11), ③사마리아인들이 예수와 함께 유하기를 청한 것(40절)도 이때가 해질 무렵임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4:23,24 영과 진리로:
①진리로 예배하라: '진리로'(헬, 엔 알레데이아)는 '진리 안에서', 즉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갖고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방향이 빗나간 열심, 무모한 열정 등 대신 말입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예배드려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요4:22 상) 또 바울은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심은 도리어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들을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요 16:2,3 참조).
하나님은 우상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바로 '우상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인류는 자기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우상들을 만들어 냈고, 그들을 달래고 섬겨왔던 것입니다. 우상들은 그 우상을 만든 사람들의 욕구 충족을 가능케 해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자가 그 분에 대해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의 인격에 대해서 알아가길 원하십니다. 예배자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알게 된 그 분 앞에 더욱 꿇어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언컨대 '이유 있는 엎드림'을 원하십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맹숭맹숭 고개만 넙죽 엎드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그러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6:6)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제물을 바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나를 아는 것’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이 산(그리심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즉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입니다. 그 때가 바로 지금인데,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고 말입니다.
②영으로 예배하라: 본 절의 ‘영’은 ‘영에 의해 인도되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예배의 핵심이 ‘어디에서가’ 아닌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드리는 것에 달려 있음을 시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심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했는데, ‘진리 안에서’에 이어서 두 번째로 ‘성령 안에서’ 예배드릴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성령 안에서' 예배드려야 할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한마디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 안에서’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에 의해 인도되어’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린도후서3:17)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인간의 오관으로는 식별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은 도덕적 속성을 지니며 스스로 결정을 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우상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분이므로, 우리가 그 분께 예배드리려면, '성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인도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에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깨달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의 인격적으로 교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도 성령이 없으면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예배했다면, 유대인들은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의 특징을 두 가지로 말하자면, ‘형식주의’, ‘의식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겉만 화려하게 치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속은 아무렇게나 방치해 둔 채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속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요?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임재로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③성령과 진리 안에서: 성령의 임재와 복음의 진리가 예배의 관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고, 복음의 진리와 예배자의 진실함이 겸비된 영감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과 진리.... 이 둘은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진리의 영’(요14:17), ‘진리의 영’(요16:1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점에서 그렇게 불리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항상 ‘진리 안에서만’ 그리 하십니다. 성령님은 항상 주님의 말씀만을 가지고서, 기록된 말씀 밖에 넘어서지 않고서 인도하십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되고, 우리가 진리 가운데 온전히 설수록 더욱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4:23하)
다윗은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나아온 때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예배의 회복을 원하면서 말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는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자연신론(이신론), 즉 창조주의 존재는 인정하나 이후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에 직접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주장을 반박하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묘사하셨는데(‘내 아버지’, 사실 예수님은 본서에서 35회나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제 곧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사실(빌2:6,7)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를 신성 모독죄로 여겼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절)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해 오셨으니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바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이루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자된 우리로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고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5,17)
6:28,29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를 위해 행하신 가장 큰 일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일 것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이 믿음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말세에 믿음 있는 이를 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구요.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극히 사소한 문제 앞에서 말입니다.
6:48-52: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생명의 떡’이며, 자신을 먹는 자라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48, 54절)
사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은 만나는 예수님과 그 사역에 대한 예표입니다. 고로,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요1:12절).
한편,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참된 양식과 음료로 비유하신 연유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 매어 달리사 찢기시고 흘리신 대속의 의미를 깨닫고, 영접하는 것 말입니다.
헌데 당시의 제자들 중 상당수는 이 말을 좀처럼 깨닫지 못하고(60절) 수군거리며(61절) 믿지 못한 채(64절) 결국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66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들이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0~66절)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좋은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좀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그것을 행하겠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좀처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구요? 움직이십시오.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있는 자동차를 움직이기 더 쉽다는 사실을 명심한 채 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17절)
8:28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여기서 든(헬, 휩소오)는 ‘높이다’, ‘잘 보이는 곳에 세우다’라는 뜻으로, 모세가 광야에서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단 것처럼, 예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의미합니다(장대 위의 놋 뱀을 매단 사건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죽음, 즉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끝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함).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 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 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21:8,9)
한편, 사람들은 언제 예수께서 메시야인줄 알게 된다고 했습니까? 인자를 든 후에,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어 달리신 후에야 깨닫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까?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서야 깨닫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한 줄도 알리라.”(28절)
8:56~59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성을 증거 하십니다. 어떤 말씀으로 입니까? 아브라함이 주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마침내 보고 즐거워했다는 말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무슨 말입니까? 그가 자신의 후손 중에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끼치는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영안을 떠서 미래에 자기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탄생하실 것을 바라보고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 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9)
헌데 주님은 이 사실을 어찌 알 수 있으셨습니까? 그분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온 천지 만물이 조성되기 전, 영원 전부터 계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의 선재성).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58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9:13~34 맹인이었던 자의 증언: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출교도 불사한 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으로 고백하는 등 영안 역시 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눈을 멀쩡하나, 영적인 눈은 여전히 어둡지 않습니까?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한편, 당시의 ‘출교’란 유대 종교 공동체에서 문란케 하는 자에게 가한 최고의 형벌로서 일시 출교와 종신 출교가 있었습니다. 일시 출교는 대체로 한 달 혹은 일정 기간 동안 회당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종신 출교는 회당에서 영원히 쫓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출교당한 자에게는 2m 이내의 접근이 금지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애곡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출교 이외에도 유대 사회에는 견책, 근신 등 몇 가지 형벌이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1~33)
10:1~18 나는 선한 목자라: 본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①구원을 위한 방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1절): “...문을 통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②문으로 들어가는 이(2절): 하나님께로부터 양들을 돌볼 권세를 합법적으로 부여받은 이는 곧 예수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③앞서 가면(4절): 서양의 목자들은 양떼를 뒤에서 모나, 동양의 목자들은 양떼 앞에서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왜 입니까? 앞쪽에서 다가오는 지형적 위험이나 맹수들의 습격으로부터 양떼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④양의 문(7절): 팔레스타인 들판에는 날씨가 좋을 경우 양떼와 목자들이 야숙할 수 있는 가설 우리가 많았습니다. 그런 양 우리는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만들어진 문이 따로 없었습니다. 왜 입니까? 목자들이 대신 출입구에 가로 누워 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양 우리를 출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나는 양의 문이라.”(7절)/“...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⑤절도나 강도(1, 8절): 자칭 메시야라고 하면서 백성들을 미혹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⑥나는 선한 목자라(14절): 구약에는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한 예가 많으며, 메시야를 목자로 비유한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본 절에 나타난 또 하나의 “나는 ....이다” 선언은 자신의 신성과 메시야직을 구약의 권에 직접 호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⑦내가 내 양을 알고(14절): 선한 목자의 특징입니다. 여기서 ‘안다’(헬, 기노스코)는 말은 ‘경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히, ‘야다’의 개념 참조) 즉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일일이, 친밀하게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⑧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절): 이 역시 선한 목자의 특징입니다. 즉 선한 목자는 양떼를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양떼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걸 수 있다는 말입니다.
⑨선한 목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16절).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0:41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비록 표적을 행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41절 상) 진실한 증거 사역을 힘쓴 까닭에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41절 하)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례 요한처럼) 진실한 사람입니까? 진실한 사역은 언젠가 그 결실을 맺게 됩니다. 비록 아무런 표적을 행하지 않고 외적인 능력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11:1~44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곧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한다: 본 사건은 요한복음에 수록된 7번의 표적 중에 맨 마지막 표적인 동시에 최대의 표적으로, 예수님께 등을 돌렸던 유대인들 중 상당수를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한편, 이 사건은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전주곡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으나.... 이날부터는 그들이(유대지도자들)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45, 53절)
12:41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이사야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처럼(8:56),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안이 열려 ‘주의 영광’을 목도하고 또한 ‘주를 가리켜’ 예언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 당시의 유대 백성들의 완고함에 대하여 말입니다. “..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39~41절)
13:34 새 계명: 죽음을 앞두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것은 ‘새 계명’입니다. 이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옛 계명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그 훨씬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옛 계명이 인간적 사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 상호간의 신(神)적이고도 헌신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더욱 그리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옛 계명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 |
새 계명 |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13:34) |
14:16 또 다른 보혜사: 여기서 ‘또 다른’(헬, 알로스)이라는 형용사는 ‘똑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다른 무엇’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은 모두 하나님이시며 신성에 있어서 동일하시지만, 그 위격과 사역에 있어서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보혜사’(保惠師 /헬, 파라클레토스)는 ‘파라’(곁에)와 ‘클레토스’(부르다)의 합성어로 , ‘도움을 베풀도록 곁에 부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계시는 동안 보혜사(保惠師)로서 우리와 함께 계셨으며, 하늘로 올라가신 후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 것입니다(성령님은 예수님의 간구에 의해 그분의 이름으로 파송됩니다, 16절). 실로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임하시지만, 동시에 마지막 때에 몸소 재림하시게 될 것입니다(18절).
15:1~2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는 또 하나의 “나는 .... 이다” 선언으로 시작되는 본장은 아마도 예수께서 예루살렘 인근의 포도원을 지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인 듯합니다.
①나는 참 포도나무(1절 상): 예수께서 가지와 같은 제자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②아버지는 농부(1절 하): 하나님 아버지를 부지런히 일하시는 농부, 즉 일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③내 안에(4절): 이 말씀은 바울 신학의 핵심 용어인 ‘그리스도 안에’(롬3:24 등)라는 말씀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④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하): 실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7절, 빌5:13). 그러므로 우리는 “....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하)는 구절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선 선행구절인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7절 상)을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17:21,22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된 것같이: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하고도 풍성한 사랑의 교제를 알게 하는 것은 물론,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근거까지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21절 ‘우리 안에 있게 하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친밀하고도 풍성한 사랑의 교제에 동참케 하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1,22절)
19:25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요19:25 |
마27:56 |
막15:40 |
비 고 |
그 모친 마리아 |
언급 없음 |
언급 없음 |
본서는 끝까지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음(2:1~5; 7:3-5). 이것을 비유하여 예수님께 집중된 렘브란트 광선이라고 함. |
이모 |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
살로메 |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의 이모였다. 그녀는 십자가 밑에서 마20:20-23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
작은 야고보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라면 글로바가 곧 알패오 |
막달라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 |
일곱 귀신이 나간 여인(눅8:2) |
19:28-30 예수님의 가상 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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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대 상 |
의 미 |
1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
성부 |
이 기도가 없었으면, 유대인들과 제사장들, 바울의 회심도 없었을 것이다. (행2:41,6:7;9:1-22) |
2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
강도 |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으신 까닭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도 천국 기쁨을 맛보셨다. |
3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26,27절) |
모친 요한 |
인간의 도리를 존중하신 예수께서는 참된 휴머니즘의 표본이셨다. |
4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가(마27:46) |
성부 |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홀로 지신 인자를 철저히 외면하셨다. |
5 |
내가 목마르다(28절) |
자 신 |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를 주신 예수께서 저주의 목마름을 겪으셨다. |
6 |
다 이루었다(30절) |
불분명 |
하나님에 대한 보고 또는 사단에 대한 도전 |
7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
성부 |
하나님은 인간 예수를 버리셨으나, 성부는 성자 예수를 버리지 않으셨다. |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9:1~12)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이니이까.”(요9:1,2)
우리는 여태껏 이와 같은 종류의 질문들을 무수히 해왔습니다.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게 되었습니까?”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뇌성마비 혹은 소아마비로 태어난 것입니까?” “왜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농아로 태어났습니까?” “왜 이 사람은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입니까?” “왜 이 사람은 행복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입니까?” 본문 속 제자들의 질문처럼 말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왜 그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어야만 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를 보면서 지나쳤던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은 필시 둘 중 하나일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모의 죄 때문이거나 혹 자신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왜 그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본문 속 제자들처럼 그 원인을 ‘죄’로부터 찾고자 하십니까?
*제자들, (주님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을 듣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그 사람은 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보니 후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부모의 죄 때문임이 틀림없군요? 필시 그의 부모들이 뭔가 중대한 죄를 저질렀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들 주님으로부터 예상 밖의 대답을 듣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일까요?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제자들은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예상 밖의 대답 앞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둘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이 이해가 되세요? 좀 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선 본문을 마저 읽어나가야겠네요.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신 후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보냄을 받았다’는 뜻)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된 상황에서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자신을 눈 뜨게 하신 예수라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이 틀림없다’고 고백하면서 증거 했습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요9:17)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9:25)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9:31~33)
사실 구약에도 많은 기적들이 있었지만 맹인이나 농아인이 치유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사역으로 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은 결국 자신이 누구시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야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란 바로 이런 점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지 못하십니까?” “날 때부터 뇌성마비 혹은 소아마비로 앓고 계십니까?” “날 때부터 듣지 못하십니까?”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왔습니까?” “평범치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미처 말하기 힘든 핸디캡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 복음의 진수와 맞닥뜨리시기 바랍니다.
가난, 장애, 핸디캡, 고통....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미워서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11:34-44)
* 베다니의 작은 행복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40km 지점에는 '베다니'라는 작은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 베다니는 '번민하는 자의 집' 또는 '가난한 자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마을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라비 나사로 이렇게 삼남매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삼남매의 집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종종 머무르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곳이기도 하구요.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마을 베다니를 즐겨 찾으셨고, 사랑과 위로와 은총을 마다하지 않고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이 삼남매를 특별히 더 아끼셨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부모를 일찍 여위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던 이 가정에 슬픔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왔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그만 병이 걸려서 죽게 된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급히 예수님께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예수께서는 이틀을 더 머물다가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바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말입니다. 두 자매는 예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그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늦게 오신 것일까요?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라"(요11:3,4)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늦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서야 작은 마을 베다니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의도된 지연.... 마르다와 마리아는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늦게 오신 주님만 야속해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 깨닫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직까지 문제 해결이 지연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아직까지 주님께 간구한 내용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까?
주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가장 위대한 소망의 상황으로 바꿔 놓으실 것입니다.
*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절)
예수님은 아무런 감정도 눈물도 없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인생들이 겪어야만 하는 죽음과 절망에 대한 비애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이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8)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격려를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어려움을 신앙적으로 잘 극복한 사람이라면 더욱 우리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분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절망, 곤고함을 다 보시면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애처로운 생각에 매우 침통해 하십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한계상황을 생각하시면서 측은해하시는 그 분의 눈 가엔 벌써부터 눈물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요 11:33,34)
문제의 근본을 물으십니다. 도저히 어찌하지 못하는 그 아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문제의 발단을 찾으십니다. 이미 썩어서 냄새나고 보기 흉해진 그 것 자체를 내보이라고 하십니다. 환자가 그 상처 부위를 의사에게 내보여야 하듯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가장 잘 아시는 '전문의'이십니다. 속이 곪아 터져서 썩어들어 가고 있는데도 언제까지 숨기고 계시렵니까? 우리의 문제, 고민,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교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4,5)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되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어디서부터 하나님과 담을 쌓게 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성공적인 처방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진찰해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
* 돌을 옮겨 놓으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요11:38,29상)
드디어 예수님은 무덤 앞에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무거운 돌이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덤에 오셨습니까? 호곡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실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그러자 마르다가 말렸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11:39하)
마르다의 말대로 이제 저 돌문만 옮겨 놓으면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이고 나사로의 흉한 몰골이 공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게 닫아 놓았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덮어버려 두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명령하신 대로 돌을 옮기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주님께서는 역사하시 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돌문을 열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이면 돌문 하나 정도는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치울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그 크신 능력으로 돌문을 옮기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일까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하도록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반드시 그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일정부분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 한 가운데로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까지 몽땅 대신해주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도록 언제나 배려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실까요? 주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만을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돌문들을 굴려버려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일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돌문들을 굴려버려야 하는지, 어떤 장애물들을 치워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일함'이라는 돌문이, 다른 이에게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돌문이 있습니다. 또 '두려움', '좋지 못한 습관', '쓴 뿌리', '시기와 질투', '의심' .....
우리가 스스로 그 돌문을 굴려버리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기다리실 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돌문을 굴려버리기 전까지는 아무런 역사도 시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절)
무리가 돌을 옮겨 놓자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요11:21,42상)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항상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응답하심을 감사하고(41절), 현재의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셨습니다(42절). 우리도 우리의 정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나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미 응답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하겠고, 또 현재 드리고 있는 기도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런 기도 후에 무덤을 향해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가 깊은 잠에서 깨어서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죽은 나사로가 깨어났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시간도 주님은 '나오라'고 하십니다. 캄캄한 데 있지 말고 밝은 광명의 세계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사망의 깊은 잠에서 깨어서 주님의 품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11:43,44절)
나사로는 생명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베로 동여져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수건이 덮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왔지만, 여전히 우리를 얽어매고 거추장스럽게 하는 것들이 동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꾸만 기우뚱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부자연스럽게 합니다.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하~2상)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날마다 하나씩 하나씩 벗어버려 나가야 할 것입니다. 풀어버려야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얼굴에 덮여진 수건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성경(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린도후서 3:14-17)
율법적인 태도를 벗어버리십시오. 더러운 생각의 수건을 벗어버리십시오. 죄책감의 수건을 던져 버리십시오.
* 행복을 다시 찾은 베다니 마을
죽었던 형제를 다시 돌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졌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처럼(3,4절)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작고 비천한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작고 비천한 마을 베다니를 돌아보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저를 믿었으나"(45절)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만으로(11:45~53)
* 우리 자신에 대하여 실망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할 때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염치가 없어 보이고 부끄럽지만, 이 구절만 생각하게 괴면 감히 다시 하나님께 구할 용기가 생깁니다. 뻔뻔하다고 생각되지만 다시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말하기를 너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9:6)
주님이 넘어진 우리를 세워주시기가 무색하게 다시 넘어져버리는 우리의 모습, 이런 우리 자신의 너무도 부끄럽게 여겨지고 뻔뻔하고 수치스럽게 여겨질지라도 다시 용기를 냅시다. 다시 주님께 간구합시다. 우리 자신을 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양떼를 위해서 다시 역사하시도록 말입니다.
* 살해 음모, 그리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권위와 인기를 한껏 높이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좇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동시에 산헤드린 공회를 몹시 긴장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구체적인 모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에 이릅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다음과 같은 말을 무심결에 내뱉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할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11:49,50)
가야바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거니와 그 분이 어떤 큰일을 하려고 하시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습니다. 가야바는 다른 공회원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비웃으면서(49절) 예수님 한 사람만 죽이면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장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들을 우리는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그것들을 간과할까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51절)
분명 그가 무심결에 내뱉었던 말은 잔혹한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민족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구속사적 대 예언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무심결에 말입니다. 물론 가야바 자신도 자신이 제안한 계획이 구속사적인 예언이 되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야바가 무심코 한 말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대민족뿐 아니라 열방을 구속하기 위한 것임을 부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51절하~52절)
*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런 악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 무심결에 그 예언을 하게 하셨을까요? 그는 그해의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가야바라는 한 개인은 악한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이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의 입을 잠간동안 감동시키셔서 예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단지 그가 그 해의 대제사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비록 우리 보기에는 우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수치스럽다고 여겨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양 무리를 위해서 우리를 기꺼이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설교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은혜의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리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축복의 통로로 만들어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음악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종종 우리에게 영감 있는 찬양 가사와 곡조를 짓게 하십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기쁨의 통로가 되게 하시가도 하십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말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시작한 일이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만난 그 사람이 우리 때문에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건넨 말 한 마디가 어떤 사람의 자살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보낸 문자메시지 하나가 어떤 사람에게 새로운 용기와 활력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부른 찬양 한 소절이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주께로 돌아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전한 강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건네준 책 하나가 한 가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다음과 같이 뻔뻔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 자신을 봐서는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이 시간 은혜를 다시 부어주소서!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가 하는 이 일에 동행하게 하소서! 당신의 양떼를 위해서 그렇게 하소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15:1~11)
*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자신....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하)
언제나 우리의 출발은 자신만만합니다. 뭐든 할 수 있고, 아무 거침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얼마 못가서 우리는 각자의 한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좀 전의 패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무엇만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자신입니다. 왜 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곤두박질치게 만든 것입니까?
우리의 태생적 한계 때문입니다. 물 없이 물고기가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철로 없이 기차가 달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나무 없이 가지 혼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 입니까? 물고기는 물속에 있어야 살 수 있고, 기차는 철로 위에서만 달릴 수 있으며,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그 과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물 밖으로 뛰쳐나간 물고기와 같은 처지 있진 않습니까? 혹 탈선한 기차나 부러진 가지마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래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어떤 결과나 결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절 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하)
* 그러나 매일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한다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5절 상)
그러나 이러한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고 또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바로 내가 말입니다.
뭐하기만 하면 말입니까? 주님께 붙어 있고, 또한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기만 하면, 어디든 헤엄쳐 갈 수 있듯 말입니다. 마치 기차가 철로 있기만 하면, 전국 어디든 달려갈 수 있듯 말입니다. 마치 배가 물 위에 떠 있기만 하면, 오대양 어느 곳이든지 항해할 수 있듯 말입니다. 마치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그 과실을 얼마든지 맺을 수 있듯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께 붙어 있기를 힘쓰고 있으며, 또한 그 분 안에 거하길 힘쓰고 있습니까?
한편,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본 절에서 ‘나’(그리스도)라는 대명사가 ‘내 말’로 대치되고 있는데, 이를 4,5절의 형식을 빌려 다시 쓰면, “너희가 내(내 말)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께서 ‘말씀’으로 성도들의 인격 속에 현존하고 계시므로) 곧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7절)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 말씀, 즉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절) 말씀 안에 거한다 하면서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말씀 안에 거하길 힘쓰고 있습니까? 매순간 말씀이 지시하는 바를 행하되 전심으로 지켜나가고 있습니까?
이러할 때 결국 우리는 누구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됩니까? 주, 곧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9절)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곧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주님께 꼭 붙어 있습니까? 늘 주님 안에 거하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데, 이는 곧 그분의 계명을 힘써 지키고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 특히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고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절)
사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4절). 누구 없이는 말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5절). 누구를 떠나서 말입니까?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놓고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결국 이는 주님과 함께 라면 얼마든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고 이룰 수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 하)는 구절을 뒤집으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한복음 15장 5절 하반절의 인생입니까? 아니면 빌립보서 4장 13절의 인생입니까? 전자입니까? 아니면 후자입니까? 이왕이면 주를 떠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 아닌,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주를 떠나서 이도 저도 안 되는 인생이 되기보단,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거침없이 질주하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부인과 시인(18:15~27)
* 베드로의 부인
그렇게도 장담하던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 그리고 거기 모여 있는 회중 들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조금 전의 그 용기는 다 어디 갔는지... 조금 전의 그 호언장담과 그 결심을 다 어디로 갔는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3,35)
베드로는 경솔히 맹약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는 어쩐지 우리와 아주 닮은 사람 같습니다. 어쩐지 친숙해 보입니다. 굳게 결심했다가도 쉽게 무너지는 모습, 사람들 앞에서 호언장담할 때의 모습과 비참하게 실패할 때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부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부인도 함께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 너도 이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18:17-18)
우리는 거의 매일 믿지 않는 사람들 틈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매번 우리를 향해 때로는 말로, 때로는 무언으로 물어오곤 합니다.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 "너도 크리스천이 아니냐?"
우리는 매번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맞아, 나는 크리스천이야'라고 하든지, "나는 아니야"라고 하든지....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YES'입니까? 아니면 'NO'입니까? 식사 할 때 감사기도를 합니까? 학교에 가서 잠깐이나마 성경을 펼쳐 놓고 있었던 적은 있습니까? 시험기간, 공부도 해야 하지만, 예배에 목숨을 걸고 사수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나는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가만히 사람들 틈바구니 속으로 숨어버리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나는 아니야' 라고 말하고선 종과 아랫사람들 사이로 숨어버렸습니다.
*부인....부인....부인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요18:25~27)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달랐던 베드로 역시 철저히 실패했습니다. 닭도 울고 베드로로 목 놓아 울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주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달라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왜 일까요?
* 예수님의 부인
18장 15-18절과 18장 25-27 베드로의 '부인들' 사이에 그 해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18장 19-24에는 어떤 내용들이 나와 있을까요? 이같이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부인(?)'이 나옵니다. 주님이 하나님을 부인했습니까? 그런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똑같은 자리에 베드로와 예수님은 함께 있었습니다. 전혀 동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같은 자리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고 있었고, 바로 같은 자리에서 베드로 역시 종들의 '심문(?!)'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셨기 때문에’(자기부인, 자기부정) 능히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셨고, 베드로는 자신을 부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었고, 베드로는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눅12:8,9)
자기 부인이 없이는 하나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부인'이 없으면(안 되면) '하나님도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면, 하나님도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주님의 부인(자기 부인)과 베드로의 부인
이 두 부인은 너무 대조적인 것 같습니다. 마치 베드로의 부인 사이로 '주님의 부인'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성경은 이 두 부인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지만, 주님을 차츰차츰 닮아가라는 의미는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부인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묵묵히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 사람들 속에 숨어 있지만 말고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우리가 크리스천임을 드러내십시오. 물론 거기에 걸 맞는 삶과 행동도 반드시 뒷받침하면서 말입니다.
3년을 30년처럼 삽시다(19:30)
* 늦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절).
늦었다고 생각되십니까? 지금부터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러기엔 지금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 구요? 예수님의 경우를 들여다보십시오. 불과 3년뿐이었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간이 불과 3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래도 (늦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이래도 포기하려 하십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본문 속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힘을 얻고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께 이 3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녹녹치만은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절대로 만만치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왜 입니까? 사단의 시험을 견디어야 하셨고, 늘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고,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일한다는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을 들어야만 하셨고,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자신의 동생들에게까지 의심을 받으셨고, 수많은 비판과 중상모략들을 감내해야만 하셨고, 제자에게 배신을 받으셨고, 자신의 동족들에 의해 로마 총독에게 넘긴바 되셨고, 정당하지 못한 법정의 판결을 받아야만 하셨고, 결국 당시의 최고형인 십자가 형틀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그분은 완전히 실패한 인생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해내지 못했던 아주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단 3년 동안 말입니다. 정말 그분은 공생애 3년 동안 자신에 관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한 모든 일들을 다 이루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리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30절).
* 3년을 30년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내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3:12,13)
사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다 이루었도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고, 심지어 1000년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사명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소명을 온전히 성취하지는 못했습니다. 단 한 명도 말입니다. 오직 누구 외에는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모든 악조건 중에서도 3년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사용하셨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자신의 소임을 온전히 이루시고야 만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길게는 70~80년,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소유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오래 산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 일 년, 아니 몇 개월을 살더라도 인생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단 하루를 살더라도 자신의 소명을 다 이룰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가장 인생을 잘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시간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인생을 얼마나 살아왔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주어진 기회에 충실한 삶을 사느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1년이 10년이 되고, 3년이 30년이 되며, 5년 50년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선용하지 못한다면, 10년이 1년보다 못하고, 30년이 3년보다 못하며, 50년이 5년보다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리면 뭐 합니까? 정반대로 달리고 있다면 우승과는 거리가 멀 텐 데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3년을 30년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 30년을 3년보다 못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생을 다 마칠 때에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하지는 못할지언정,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각자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노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왜 입니까?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가장 먼저 묻고 싶었고, 가장 먼저 확인하고픈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시몬 베드로가 ‘지난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세 번씩이나 당신의 양들을 부탁하셨던 것처럼, 이 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주께서 당신의 양 무리를 맡기기 위한 유일의 선결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15절)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욱 사랑하고 있습니까? “... 네가 이 사람들보다(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그리 거창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단지 주를 사랑하고 있느냐는 이 한 가지일 뿐입니다.
한편, 우리가 돌보아야 할 성도들 중엔 어떠어떠한 이들이 속해 있습니까? 첫째,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입니다(내 어린양, 15절). 둘째, 그릇된 길로 가기 쉬운 자들입니다(내 양, 16절). 마지막으로, 비교적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내 양, 17절).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들을 어찌 섬겨나가야 합니까?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들(15절)을 신령하고 순전한 젖으로 양육하고, 그릇된 길로 가기 쉬운 영혼들(16절)을 잘 감독할 것이며, 비교적 성숙한 그리스도인(17절)도 끊임없이 양육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말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마12:42,43)
* 사랑만 있으면 뭐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20)
왜 주님은 시몬 베드로에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물으신 것입니까? 이것만 확인되면 뭐든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그 어떤 역경과 환난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칠년이 마치 며칠 같이 여겨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20)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어떤 역경과 환난도 결코 우리 앞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상황과 환경도 더 이상 우리 앞에 장애가 되질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제 아무리 좋은 조건과 상황 속에도 불평과 원망, 패배만이 가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광야 40년 동안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불기둥과 구름기둥 아래 있었고, 누구도 지나가보지 못한 바닷길을 통과 했으며, 그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만나를 먹고서도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명자입니까? 교회와 성도들 앞에 사명자로 서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같이 물으시는 그 물음 앞에 진솔하게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명심하십시오. 주님을 향한 이 같은 사랑이야말로 주께서 당신의 양 무리를 맡기기 위한 유일의 선결 조건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는 똑똑한 사람이냐?”, “너는 많이 배운 사람이냐?”, “너는 잘난 사람이냐?”, “너는 학벌 좋고 배경 좋은 사람이냐?” 등을 묻지 않으시고, 오직 단 한 가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세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