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가 아니라 지구인이 문제이고 사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여기저기 산불로 우왕좌왕했는데 비 한 번 내려주니 요렇게 해결됩니다. 그 덕에 벚꽃은 구경도 다하기 전에 거의 떨어졌습니다. 그게 문제이겠습니까? 모두 살고 봐야지요. 꽃은 떨어졌어도 그 자리에 초록 잎이 싱그럽습니다. 사실 아름다움은 겉모양보다는 생명 속에 있지요. 먼지 푸석푸석하던 길이 촉촉하고 푹신한 감각으로 전해옵니다. 좋은 날씨만 좋은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햇빛과 비가 오고가고 맑음과 흐림이 서로 반복하며 세상은 아름답게 유지됩니다. 화사한 웃음은 아픈 울음이 있기에 더욱 값진 것이 아닌지 생각합니다. 인생이 맑은 날만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듯합니다.
4월의 한 주를 보내며 본격적으로 봄으로 치장하겠지요. 벚꽃은 떨어져도 많은 꽃들이 저마다 세상을 꾸미려 피어날 것입니다. 다만 따뜻한 봄바람을 타고 여전히 미세먼지와 황사가 훼방을 합니다. 결국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쓰레기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인구 줄여가는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늘어나니 하는 짓들이 자연을 훼손시키는 것뿐이라, 아무래도 사람 수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대한민국이냐 하는 것이지요. 역시 선진국으로 ‘선진’의 본을 보여야 하는 겁니까? 인구 비례하여 당연히 국회의원도 줄여야 할 것입니다. 세금 잡아먹는 기관 아닙니까?
세상은 시끄럽고 짜증나도 주변은 아름답게 꾸며지고 있습니다.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희망을 그리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세요. ㅎㅎ
2023년 4월 8일 김종우 목사 드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 : 8)
<파벨만스>
‘저 그림에서 지평선이 어디에 있는가?’ 사무실 벽에는 사진과 그림들이 붙어 있습니다. 노장 감독은 한참 젊은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질문합니다. 본 대로 대답합니다. 하나는 그림 아랫부분에, 또 하나는 그림 윗부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말해줍니다. ‘맞아. 지평선이 아래 있으면 재미있고 위에 있으면 흥미 있지. 그런데 중간에 있으면 망하는 거야. 이제 여기서 꺼져!‘ 젊은이는 멍 뜬 표정으로 잠깐 쳐다보더니 사무실을 나옵니다. 그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를 지르고 뛰어오릅니다. 그가 세월이 지나 세계적인 거장 영화감독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바로 그대로 자기를 만들었습니다.
시작은 ‘놀람’입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습니다. 캄캄한 밀실로 들어가기 싫다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달래고 달래서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당시 영화는 아직 신기한 오락입니다. 단순한 무성 활동사진에서 이제는 좀 더 긴 영화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말과 음악이 나오며 이야기를 담습니다. ‘샘’은 화면 속에서 달려오는 기차가 철로에 서있는 자동차와 다른 기차와 충돌하는 장면을 봅니다. 숨이 멈춘 듯해집니다. 그 놀라움이 쉽게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잠자리에 들어가지만 아까 영화관에서 본 그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어떻게 될까, 정말 저렇게 될까? 샘은 일어나서 선물로 받은 기차를 설치하고 직접 실험합니다.
직접 촬영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직 십대 초 어린아이가 촬영기를 가지고 직접 나섭니다. 손쉬운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가족의 일상을 담는 것이지요. 카메라도 발전합니다. 아빠의 선물로 시작하였지만 조금 크니 스스로 용돈을 벌고 모아서 보다 나은 것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카메라도 실력도 발전해갑니다. 가족의 칭찬과 사람들의 부러움을 삽니다. 자기네를 촬영해서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사실 자기의 삶의 모습이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지만 화면에 담아두면 언제라도 다시 되돌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촬영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촬영한 필름을 새롭게 편집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샘의 가족은 부모와 세 여동생으로 매우 화목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도 어렵지 않게 괜찮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아빠 ‘버트’는 공학도로 기계와 컴퓨터 계통의 일을 합니다. 그리고 머릿속은 늘 그 구조와 합리적인 이유와 목적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반면 아내 ‘미치’는 피아니스트로 예술적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버트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이해하고 받아주지만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족을 사랑하고 화목한 시간을 누립니다. 그런데 버트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찾으려 애씁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찾아가려 합니다.
경제권을 가지고 있는 가장이 직장 때문에 먼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합니다. 아내는 참고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은 환경의 변화에 더욱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학교를 옮겨야 하고 친구들을 떠나야 합니다. 다시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는 일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새 집을 마련하느라 몇 개월은 불편함을 감수하며 셋집에 거주해야 합니다. 이래저래 짜증나지요. 모두가 떠나온 집을 그리워합니다. 조금 적게 먹어도 따뜻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화목한 가족을 지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욕심은 그렇지 ㅇ낳습니다. 보다 나은 대접을 받고 일하며 보다 풍요롭게 살고 가족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나아지려는 것이 갈등의 소지가 됩니다.
어느 날 가족소풍을 가서 샘은 그 하루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의 조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필름에 담습니다. 남몰래 상처를 간직합니다. 나중에 엄마가 아들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눈치 채고 다그치니 그 영상을 엄마가 보도록 자리를 마련합니다. 엄마가 미안함을 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서도 엄마의 마음은 기울어 있습니다. 필름이 있는 한 그 장면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시는 촬영 작업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잘 하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지요. 엄마의 애인에게서 고급 촬영기를 선물로 받습니다. 억지로 받게 됩니다. 한편 샘은 전학을 간 고둥학교에서 인종차별(유대인)과 따돌림을 당하며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러면서도 영화촬영 기술 하나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 가운데 좋아하는 여학생도 생깁니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각자 가는 길이 다르니까요.
거장 영화감독의 자라온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어려서 영상으로 본 충격이 그의 장래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성장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두 남녀의 사랑으로 부부가 되지만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조금 더 복잡해집니다. 우리도 이제 참고 버티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자식의 인생이 있듯이 부모 각자의 삶도 중요합니다.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래도 가장 바람직한 것은 끝까지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영화 ‘파벨만스’(Fabelmans)를 보았습니다. 참고로 ‘Fabelmans’는 가족의 성이면서 독일어로 동화란 의미의 Fabel과 사람(Man)의 합성어랍니다.
어떻게 오실까?
세상을 살면서 기다림이 없이 사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려서는 엄마를 기다리고 조금 크면 아빠를 기다리다 친구를 기다리고 애인을 기다리고 남편을, 아내를 기다리며 삽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살지요. 지루하고 따분하고 초조하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기다림은 여기저기서 생깁니다. 가장 힘든 것을 대라고 한다면 아마도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결과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의 비결은 두 가지를 잘 만나는 것이랍니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과 때를 잘 만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사람을 잘 못 만나서 낭패당하는 인생들도 많습니다. 역사 이야기를 보면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난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가 지금을 산다는 것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났더라면 국난을 겪는 혼란의 때를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제대로 살기나 했을까 상상만 해도 온몸이 후들거립니다. 지금이라고 나을 것이 뭐 있느냐 하겠지만 나라가 평안한 것만도 다행스럽지 않습니까? 자기 먹을 거나 걱정하면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목표는 구원과 영생이고 우리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이루어주실 분을 우리는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한 결같이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해주시고 하나님 백성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거듭 약속하신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히 1 : 1 -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 아들이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메시야인데 막상 오시니 대놓고 거부했습니다. 거부한 정도가 아닙니다. 멸시 천대하고 비방하고 핍박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렇게도 기다렸던 분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런 몹쓸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우리가 똑같이 기다리는 입장에 있기에 이 사건은 면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성경 기록을 시작한 모세 때부터 약속하셨습니다. 신 18 :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특별히 선택을 받은 선민입니다. 그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덕에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백성 된 자리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 일을 소홀히 생각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우리는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잘 아는 대로 첫 언약 곧 구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혈통을 이어받은 하나님 백성 곧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 언약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메시야를 보내주마,’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약속은 파기되었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 8 :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이제 오신 메시야가 새로운 하나님백성 곧 영적 이스라엘과 언약을 합니다. 요 14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무슨 언약입니까?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소위 재림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 언약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속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주님의 말씀이기에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내용이 아니라 합하여 하나의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을 아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들은 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였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자가 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에 약속하신 목자가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말 4 :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는 분명 메시야는 아닙니다. 앞에 보면 이해합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여기 두 사자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길을 예비하는 사자요 또 하나는 언약의 사자입니다. 언약의 사자를 그 앞에서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라고 하였으니 이 분이 곧 메시야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보다 앞에서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 온다는 말이지요. 4절에서 본 바 그가 선지 엘리야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선지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다렸던 선지 엘리야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어떻게 오리라 생각하고 기다렸을까요?
엘리야는 BC 870년경 북이스라엘 아합 왕 때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왕비는 이방 나라 곧 시돈의 공주 이세벨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보통 여자가 아니었지요. 온 나라를 바알 우상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하려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막강한 우상숭배자와 겨루어야 했기에 하나님도 막강한 선지자를 세우셔서 그들과 겨루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떠났지요. 자기 사명을 제자 엘리사에게 맡기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왕하 2 :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그렇게 하늘로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그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다시 불수레와 불말들이 엘리야를 태우고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았을까요? 정말 그렇게 나타날 것이라 믿었을까요? 어쩌면 자기네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냥 타성에 젖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랬겠지요. 너희 선생이 그리스도라고? 그러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예언은 언제 이루어지고? 엘리야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메시야냐? 하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마 17 :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을 보며 성경의 예언을 들이대며 반박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은 것이지요. 예수님이 설명해주십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깨닫습니다. 11 -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문제는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지요. 이것을 제자들은 깨달았으나 유대인들이 깨달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백성의 목자 격인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믿을 수 있었을까요?
엘리야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엘리야도 보지 못했는데 메시야가 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오는 엘리야를 기다렸겠지요. 근 9백 년 전에 하늘로 올라간 그 엘리야를 말입니다. 말이 됩니까? 과연 그 엘리야가 올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마 11 : 12 - 14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까? 다시 약속하신 말씀에도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 1 : 9 - 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어떻게 오시리라 생각합니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그렇지 않습니까?
엘리야를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엘리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야가 아니라 세례 요한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뜻은 모르고 그 문자대로만 알고 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습니다. 요한이 잉태될 때 천사가 미리 해준 말이 있습니다. 눅 1 : 15 - 17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오는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을 입고 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이름으로 온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예언하신 ‘길 예비 사자’입니다.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과연 처음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성령이 함께함으로 예수님을 알아도 보았습니다. 요 1 : 29 - 30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러나 세례 요한은 시간이 지나며 변질됩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던 목자들은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제사장과 장로들이었습니다. 마 3 :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들과 맞서던 요한은 오히려 사명을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타까운 말씀을 합니다. 마 11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귀의 세력에 붙잡혀있던 천국(하나님의 성전)을 회복하려 왔던 사람이고 또한 메사야의 길을 예비하려 왔던 선지자였는데 오히려 그 세력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최후를 맞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 : 1 - 2) 외치던 선지자의 소리가 공허해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등불에 불과합니다.(요 5 : 35) 참 빛이 오면 마땅히 그 백성을 빛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여전히 제자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천국을 침노당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자식들(마 23 : 33) 곧 마귀의 종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 특히 목자라 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알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철저히 하나님 자녀라고 믿었습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것은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예수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왜 이런 결과가 나옵니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고, 물론 읽고 외우기도 하지만 그 뜻을 모릅니다. 단지 자기 생각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를 기다릴 뿐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마 11 : 27)
우리의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몇 가지를 정리해봅니다. 행 1 :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오시겠지요. 마 24 : 30 - 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구름 타고 오십니다. 나팔소리도 들립니다. 살전 4 : 16 - 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역시 나팔소리가 들리겠군요. 하늘에서 오십니다. 그러니 구름을 타고 오시겠지요. 계 1 : 7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역시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몇 번이나 말씀하는 걸 보면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듯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재림 때 과연 구름을 타고 오실까요? 지금 구름 타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무슨 구름을 타고 오실까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했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찌른 자들 곧 십자가 옆에 있던 로마 군병들입니까? 그들이 그 날에 다시 살아나서 예수님을 봅니까? 좀 웃기지 않습니까? 2천 년 전 예수님을 창으로 찔렀던 로마 군병들이 먼저 부활해서 또 예수님을 찌릅니까? 도대체 그들이 뭔데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차라리 우리 앞의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라면 모르겠습니다. 왜 하필 그들이 주님을 맞아야 합니까?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했는데 신자, 불신자 모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백성만 가리킵니까?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라 했으니 믿고 안 믿고 상관없이 모두 본다는 의미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다림이 너무 막연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몰라도 천국 가는데 지장 없습니까? 도무지 앞뒤가 맞지도 않는데 그냥 막연히 그런가보다 하고 믿으면 천국은 거저 가는 겁니까?
하나님이 뭐라 탄식하신 줄 아십니까?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누가 망합니까? ‘내 백성’ 곧 하나님 백성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왔던 육적 이스라엘이고 오늘 신약시대에는 바로 그리스도인들 우리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구약시대에만 적용되고 신약시대에는 적용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는 짓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구름을 타고 온다,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 보이려면 밤에 오시겠습니까, 낮에 오시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구름을 타고 오실까요? 양털구름? 뭉게구름? 먹구름? 새털구름? 더구나 나팔소리까지 들려야 합니다. 얼마나 커야 지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들릴까요?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어디서는 도적 같이 밤에 오신다더니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요?
왜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게 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한 마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몇 번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말씀하시는데 신자들은 땅의 이야기로 가르치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코드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안 맞아도 아주 전혀 안 맞는 것이지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의 언어를 배우라고요. 그런데 배울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간이 없답니다. 맞아요. 천국 갈 시간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나 잘 살면 그만이라는 뜻 아닙니까? 입으로는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데 가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신자를 신자라고 인정하고 자식이라고 받아주겠습니까? 한 마디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마 7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