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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9일 월요일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압살롬을 피해 달아나던 다윗은 사울 집안의 친척이 저주를 퍼붓자,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사는 군대라는 마귀가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 돼지들 속에 들어가게 하시어 그를 치유하신다(복음). <압살롬에게서 달아납시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5,13-14.30 16,5-13ㄱ 그 무렵 13 전령 하나가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쏠렸습니다.” 14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어서들 달아납시다.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압살롬에게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오. 서둘러 떠나시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서둘러 우리를 따라잡아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고, 칼날로 이 도성을 칠 것이오.” 30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제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계속 올라갔다. 16,5 다윗 임금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6 온 백성과 모든 용사가 임금 좌우에 있는데도, 그는 다윗과 다윗 임금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졌다. 7 시므이는 이렇게 말하며 저주하였다.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 8 사울의 왕위를 차지한 너에게 주님께서 그 집안의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돌리시고, 그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너는 살인자다. 이제 재앙이 너에게 닥쳤구나.” 9 그때 츠루야의 아들 아비사이가 임금에게 말하였다. “이 죽은 개가 어찌 감히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을 저주합니까?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 10 그러나 임금은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 주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시어 저자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어찌하여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하고 말할 수 있겠소?” 11 그러면서 다윗이 아비사이와 모든 신하에게 일렀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12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13 다윗과 그 부하들은 길을 걸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네 이름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시자, 그가“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있던 더러운 영은 죽은 이들의 무덤에서 삽니다. 죽음의 세계에 갇혀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학하며 한 사람을 괴롭힙니다. 이 더러운 영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놀랍게도 “하느님의 이름”까지 팔아가며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이름처럼 수많은 악령들이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서 몰살을 하고 맙니다. 아마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그들은 한 인간이 더러운 영으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해진 것보다는, 자신들의 마을에 혼란을 일으키고, 돼지 떼를 몰살시킨 예수님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치유를 받고 새사람이 되는 길보다는 지금의 나와 적당히 타협하고, 세속적 평화를 지키고 싶어 하는 나약한 인간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려고 할 때, 그를 집과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시어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직접 선포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가장 치욕적인 존재로 소외당한 한 인간의 극적인 치유와 회심이, 설득하고 변화시키기 가장 힘든 가족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복음의 힘임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족의 비극은 다윗 가문의 피비린내 나는 저주에서도 봅니다. 자신의 죄는 용서받았지만, 그 벌로 자식들에게 쫓기며 죽임을 당할 처지인 다윗의 모습에서, 내 잘못으로 보속해야 하는 벌이 작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어쩌면 더러운 영이 나와 가장 가까이 있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라면, 가장 먼저 치유되도록 청하는 것이 중요할 듯싶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인간의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느님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시다가 악령 들린 한 사람을 만나셨는데, 그는 등골이 오싹하게도 무덤 옆 토굴에서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악령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코 복음 5장 9절) 당시 군사 조직에 따르면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으로 구성되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군대라는 이름의 악령이 들린 사람 안에는 거의 7천 마리의 악령이 뱀 무더기처럼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원래 하느님의 피조물이며 거룩한 성전이었던 한 인간이 이다지도 참혹하게 악령의 소굴로 변한 것입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 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폭력적이며 듣도 보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군대라는 악령이었는데...예수님의 출현 앞에 바짝 꼬리를 내립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코 복음 5장 6절) 참으로 진귀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광란의 낮과 밤을 보내면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놓던 악령들이 예수님 앞에 완전한 무능을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악령 들린 사람의 참혹한 현실을 측은히 여기시며 단체 투어 중인 악령들을 일거에 몰아내십니다. 그리고 비참했던 한 인간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주십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인생이 하느님의 자비로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서 또 하느님과 함께 삽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받아들이기 위해 버려야하는 것들
어떤 선교사가 문명이 아직 이르지 못한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처음으로 본 것은 그들이 무거운 짐들을 손, 어깨, 머리 할 것 없이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먼저 그들에게 문명의 이로움을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수레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레 하나를 다 완성해 갈 즈음에 고국에 잠깐 들어갈 일이 생겨서 원주민들 보고 수레를 한 번 이용해 보라고 하고서는 잠깐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오면서 그들이 수레를 잘 이용하며 자신에게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만들어놓은 수레는 건들지도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물건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우리가 들고 다니는 것도 무거운데, 저 무거운 것까지 함께 끌고 다니라는 겁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레가 무거워 보이고 짐처럼 여겨져서 사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게라사 지방으로 가십니다. 돼지를 키우는 지역이라는 것은 비록 갈릴래아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교도인들이 사는 동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법에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키우지도 먹지도 가까이 가기도 원치 않아했던 동물입니다.
역시 그 곳에는 군대라고 불리는 마귀 들린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곳에 마귀 들린 사람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왜냐하면 하느님의 부재가 곧 지옥이고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것도 곧 죄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둠의 지역에 빛을 비추어주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예수님께서 그 마귀들이 수많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돼지 떼는 여기서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수많은 부정한 생활풍습을 상징합니다. 돼지가 부정한 동물이라고 말씀드린 것처럼 마귀는 부정한 풍습들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은총을 베푸셨는데 돼지 떼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더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끊어야 하는 것들이 동시에 많이 생깁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남들과 싸워서도 안 되고, 거짓말을 해도 안 되고, 사기를 쳐도 안 되고, 부정한 죄를 지어도 안 되고, 주일날 일해서도 안 되고,부부끼리 싸우고 미워해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것들이 수 없이 많이 생깁니다. 정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짐스러워서 중도에 교리를 받다가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깁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만 많이 생기니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그 게라사 주민들에겐 빛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잃은 돼지 떼가 아깝습니다. 예수님께 더 이상 동네에 손해를 끼치지 말고 동네에서 떠나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은총을 주시고도 동네에서 쫓겨나십니다.
수레를 처음 본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이 지고 다니는 짐들보다 수레가 더 무거워 보이기 때문에 수레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어떤 사람이 자신들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들을 더 힘들게 하려고 하는 것만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정말 손해막심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탄의 세월의 연속이었습니다. 기껏 모세의 말을 듣고 이집트를 탈출했더니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보이는 것은 오직 사막뿐입니다. 언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달할지는 기약도 없습니다. 이집트에선 부족함 없었는데 사막엔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음식도 없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후회가 되어 모세와 하느님께 한탄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더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시기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방해를 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게라사인들이나 예화에 나오는 원주민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당연히 내가 어둠에 있었다면 또 빛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면 어둠의 행실은 벗어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녀들이 벽에 낙서해 놓은 것도 지우기 어려운데 오랜 시간 내 안에 묻어있는 때를 벗기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고생길입니다. 그러나 그 고생이 두려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영원한 어둠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게라사엔 가시지 않습니다.
처음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잃어야 하는 것들이 많게 보이고 그것이 손해막급인 것처럼 생각이 들어도 하느님은 그것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주시려 하심을 믿어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어둠의 행실 하나만 더 던져버린다면 그만큼 내 안을 빛으로 가득 차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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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술피치오 세베로
(Sulpicius Severus)
축일 : 1월 29일
신분 : 주교 교회사가
활동지역 : 부르주(Bourges)
활동연도 : +420/425년경
같은이름 : 술피치우스 술피키오 술피키우스
갈리아(Gallia) 지방의 교회사가이자 성인전기 작가인 성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또는 술피치오 세베로)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겐나디우스(Gennadius, +5세기경)의 “명인록”(De viris illustribus)과 그의 친구였던 놀라(Nola)의 성 바울리누스
(Paulinus, 6월 22일)의 “서한”을 통해서이다.
그는 36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보르도
(Bordeaux)에서 고전과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성 바울리누스를 만난 것 같다. 공부를 마친 뒤 변호사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유한 집정관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사망하자 곧 공직 생활을 청산하고 389년경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394년경에는 모든 재산을 다 청산하고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요인은 부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성 술피키우스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
(Martinus, 11월 11일)의 권고와 성 바울리누스의 모범에 의한 것이었다.
그 후 성 술피키우스는 엘루소(Eluso)에 머무르다가 자신을 위해 일부 재산을 남겨 두었던 프레물리아쿰
(Premuliacum)이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영성생활과 저술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마을은 툴루즈(Toulouse)와 카르카손(Carcassonne) 사이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성당을 지어 봉헌하였었다.
또 그는 이 은둔 장소에 성 마르티누스가 세운 수도원과 유사한 공동체를 형성하여,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장모인 바술라(Bassula)와 함께 생활하였다.
바술라는 성 술피키우스에게 물질적인 도움은 물론 영성생활로 나아가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성 술피키우스가 순교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었다.
406년 12월 갈리아 지방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을 때 프레물리아쿰도 황폐화되었는데,
성 술피키우스는 이때 무사히 피신하여 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또 420-425년 사이에 프리밀락(Primillac)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겐나디우스는 성 술피키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
(Pelagianism)의 오류에 빠져 생애 말기에 보속행위로 죽을 때까지 저술을 중단하고 절대 침묵의 삶을 살았고, 그 당시의 저자들이 성 술피키우스가 평신도라고 전하는 것과는 달리 사제직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또한 전통적으로 부르주의 주교였다고 전해지나 그 또한 확실하지 않다.
성 아퀼리노 (Aquilinus)
축일 : 1월 29일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밀라노(Milano)
활동연도 : +650/1015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
(Bayern)에서 태어나 쾰른(Koln) 교회의 고위직에 임명되는 것을 피하고자 애썼던 성 아퀼리누스(또는 아퀼리노)는 아리우스주의
(Arianism)에 대항하는 방랑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파리(Paris)로 갔고, 이어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갔는데 그곳에서 아리우스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유해는 밀라노에서 공경을 받고 있으며, 교회미술에서 그는 목에 칼이 관통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 질다 (Gildas)
축일 : 1월 29일
신분 : 수도원장 역사가
활동지역 : 뤼(Rhuys)
활동연도 : 500?-570년경
같은이름 : 질다스 길다스
현자로 불리며 8세기 초반부터 성인으로 공경을 받은 성 길다(또는 질다)는 “브리튼의 전복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 Brittaniae)이란 저서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그는 500년경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왕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직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 길다에 관한 여러 전기와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던 덤바턴(Dumbarton)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클라이드(Clyde) 강 연안 지역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일투드(Illtud, 11월 6일) 성인의 지도로 웨일스
(Wales)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돌(Dol)의 주교가 된 성 삼손(Samson, 7월 28일)과 레온의 성 베드로(Petrus)와 같이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자로 생활한 후 아일랜드로 건너가서 사제가 될 준비를 하였고, 북아일랜드의 아마(Armagh)에서 잠시 생활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수도원과 교회 건립에 힘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Roma)로 성지순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독한 삶을 위해 브르타뉴(Bretagne) 외곽 지역에 있는 오트(Houat) 섬에서 은수자로 살았다.
그 후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본토의 뤼에 수도원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성 길다는 아일랜드에서 특별한 공경을 받고 있고, 브르타뉴와 그외 여러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의 수호성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바도니쿠스(Badonicus) 로도 불린다.
첫댓글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