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망보시는 하느님
-노성호 신부-
신학생 때 복음 묵상을 하면서 적어놓은 노트를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런 묵상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대견스러울 정도로 훌륭한 묵상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유치 뽕짝’인 내용을 담고 있는 부분도 있다. 그만큼 순수하고 열정 가득했던 신학생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 초심을 잃지 않고 나를 다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때도 오늘 복음과 동일한 부분을 읽고 묵상했다. 내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도 모두 다 세어놓으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무척 두렵고 겁나서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소심해지기도 했고,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세면대 위에 빠져 있는 머리카락을 세어보면서 ‘오늘은 몇 가닥이 빠졌는데 주님도 잘 헤아리고 계시려나.’ 하면서 혼자 거울을 보며 히죽거렸던 기억도 새롭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 말씀 때문에 소심해지거나 그분께서 두려운 분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내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다 세어두실 정도로 나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분이 하느님이시며, 그 누구보다도 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분이 또한 하느님이심을 마음속 깊이 느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제 수품을 앞두고 피정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망을 보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고 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주님은 무섭거나 두려운 분이 아니라 참으로 좋으신 아버지라고 말이다. 예수님도 이러한 내 모습을 보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알고 계신다고 증언해 주시길 겸손하게 청해 본다.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 전열 신부 -
1. 오늘 복음에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박해받을 때에 대비하여 당신의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에 하느님의 힘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겪은 고통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위협과 반대는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육신을 잃는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하고 마카베오기 하권 7장 14절은 전해주고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우리 삶을 계획하시고 보살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분명히 우리를 지켜주시고, 당신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필요한 은총과 용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리며, 주님의 메시지를 기꺼이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2. 특히,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됨을 좀 더 자세히 살퍼보자면, 교황청 매스콤 위원회 위원이었던 맥루한(M. McLuhan)은 [미디어 이해]라는 책을 통해 유명해졌는데, 그 원리가 어렵지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쓰는 모든 도구들은 인간의 ‘확장’입니다. 자동차는 인간의 다리가 확장된 것이고, 포크레인은 인간의 팔이, 컴퓨터는 인간의 두뇌가, 마이크는 인간의 입이 확장된 것입니다. 그와 함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미디어이고, 예수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우리는 밝고 넓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그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메시지를 의미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 입은 예수님의 손과 발, 입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앞서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삶으로 옮겼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실천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나의 손과 발, 그리고 입이 하루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성찰해 봄도 하루를 사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끝으로, 이 시대에 주님의 메시지를 두려움 없이 전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는 시 한편 들려 드립니다.
러시아 시인 , 푸슈킨(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독서> : 보복과 복수대신 용서와 자비가 가득한 요셉
-경규봉 신부-
야곱은 전에 요셉에게 부탁하였듯이(47,29-30) 자녀들에게 조상들이 묻혀있는 막벨라 동굴에 매장해 줄 것을 공적으로 분부한다. 그가 매장에 대하여 그처럼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12,1-3; 26,2-3; 28,13)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47,30).
야곱은 조상의 매장지에 얽힌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다시 전한 후 세상을 떠났다. 야곱이 세상을 떠난 후 형들은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로 인하여 혹시라도 요셉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염려하여 요셉을 찾아가 빌었다. 그들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근거로 하여 용서를 빈다.
유언은 대부분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야곱의 유언은 그들에게 커다란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 그들 역시 요셉처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므로 요셉의 신앙에 호소하여 용서를 청한다.
요셉은 자신이 이미 형제들을 용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45,4-8) 형들이 자신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을 안타까이 여겨 요셉은 슬피 울었다. 그는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라고 형들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주권대로 되며 인간이 이 주권을 대신 행사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형들이 과거에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뭇 백성을 살리셨으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양육하겠다며 자비를 베푼다. 이는 요셉이 형제들을 이집트에 초청할 때 했던 약속의 반복이기도 하다(45,11.18.19).
요셉은 110세까지 살았다. 그는 생전에 많은 후손을 가짐으로써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였다(49,22-26).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을 거쳐 주어진 자손의 축복(22,17.18; 26.4; 28.14)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 백성이 됨으로써 온전히 성취되고 있다(로마 10,11-13).
요셉은, 자신은 비록 죽어도 하느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마치 자신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일일이 형제들을 찾아보시며 보살펴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47,11-12). 요셉은 하느님의 약속대로 훗날 그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 그곳을 유산으로 차지할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15,13-21) 훗날 이집트를 떠날 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 땅으로 이장하도록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다음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였다. 죄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여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요셉은 조금도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형들과 그들의 자녀까지 돌보려고 하는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참 신앙인은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며, 하느님께서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실 것임을 믿는다.
복수는 인간의 몫이 아니라 하느님의 몫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신명 32,35)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로마 12,19)라고 말했다.
또한 요셉은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형들의 죄로 인하여 종으로 팔리고 고통을 겪었지만, 이를 통하여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그러므로 참 신앙인 요셉의 믿음을 본받아 복수와 보복의 마음을 품지 않는 신앙인이 되자. 용서와 자비의 마음을 담은 신앙인이 되자.
내가 비록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고,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다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결국 좋은 결과를 이루실 것임을 굳게 믿자. 그리하여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임을 믿으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격려와 함께 의무감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위험이 있을 때 슬기와 여유롭게 대처하면서, 박해가 너무 심할때 때를 기다리면서 잠깐 옆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육신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작 두려워 할 분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것, 머리카락의 수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멸망시키실 리가 없기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청취자 여러분, 복음을 증거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까? 좀더 물질적으로 잘 살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까? 귀찮아서 입니까? 시간과 경제적인 제약 때문입니까? 내 것을 포기하고 희생?봉사하는 것이 힘들어서 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구원에 대한 관심이 아직은 없어서 입니까?
사실 이 모두가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너무나 민감한 나머지 눈치를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든 식사나 음식을 섭취할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형제님들 같은 경우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실 때,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그 외 어느 술자리에서든 술을 마실 때 항상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한다면 더욱 좋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기도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우십니까?
먼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떳떳이 드러내야 합니다. 당연히 언행이 따라 주어야만 가능하겠지만요. 그런 다음에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데 이에도 문제가 따릅니다. 교회 안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일을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총이 너무나 따갑고, 그들의 시기, 질투로 다시는 맡은 일을,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별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고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신앙심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 이나 방해요소로 인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짜증나기도 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 뒤에는 주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나 혹시 '나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 하고는 있지 않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옛부터 상식 이하나 인간답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라고 하시며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희망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한정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 때문에 꿈과 희망을 포기하거나 의무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의 전부를 육신과 영혼까지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꿈과 희망을 키워갑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두려워하지 말라!
-김찬선신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전하다보면 반대가 분명 있기 마련인데
그 반대를 주님이신 당신만큼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어차피 드러나기 때문이고
그때 반대를 받을 각오를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언젠가 드러날 것이기에
아예 매 맞을 각오로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로 하면
그것을 숨기려고 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죽음을 각오하면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기 때문인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당신도 죽으셨으니 우리도 죽을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통치자보다 더 큰 권한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우리 육신에 대한 권한밖에 없는데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과 육신,
온 생명에 대한 권한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육신이 죽는 것보다 영혼이 죽는 것을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자존심과 기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이
얼마나 비굴하고 비참한 것인지,
이것은 이 세상에서 한 자리 얻기 위해
자기 지조를 버리고 진리마저 저버리는 것,
그 이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전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시는 비유가 참새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참새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데
우리 인간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방학이 되면
서울에 사는 사촌이 저희 집에 와서 지내다가 올라가곤 했습니다.
그 먹을 거 없던 시절
저보다 사촌들에게 먹을 것을 더 많이 주시고
같이 잘못하였는데도 저만 야단치시는 어머니를 보고
제 어린 소견에 어머니가 저보다 사촌들을 더 사랑한다고
서운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해 사는데도
하느님과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난하고 안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기더라도
하느님이 우리를 그들보다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환난을 받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더 예뻐하고 사랑하실 것 틀림없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틀림없는데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일지 그것이 문제일 뿐이겠지요.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양승국신부-
<우리는 모두 아름답고 거룩한 이콘(eikon)>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로 미물 같은, 때로 하루살이 같은, 때로 하찮기 그지없는 인간이 대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챙기실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다음의 복음 구절을 통해서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도 비참하지만, 너무도 나약하지만, 마치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처럼 연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실 때 강건해집니다. 든든해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가슴 찔리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만일 연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집중시켜야 할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우리 내면의 보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투박한 질그릇 안에 깃들어계시는 그리스도의 빛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부족해도 힘과 용기를 내어 끝없는 정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는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심으로 인해 존귀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으로 인해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른편에 서서 인도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강건합니다.
이 세상에 사람처럼 존귀한 존재는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모상, 이콘(eikon)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그 어떤 대상보다도 더 아름답고 거룩한 이콘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의 이콘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앞에 또 다른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 줘야할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세상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합니다. 세속에 찌든 세상의 악취가 아니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긋한 냄새를 발산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인생을 보다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단 한번 뿐인 너무나 소중한 인생인데, 함부로 살아갈 일이 절대로 아닌 듯합니다.
‘될 대로 되라’가 절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도 결코 아닙니다. ‘아니다’ 싶을 때는 적절한 순간, 우리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필요도 있겠습니다. 단 하느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막 살기에는, 그냥 되는대로 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그냥 포기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 삶 전체를 걸고 추구해야할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존귀합니다. 사람이 하늘입니다. 사람이 최고입니다. 목숨 붙어있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은 존중받아야하고 그 생애는 숭고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인생, 나 자신의 삶, 때로 하찮아 보이겠지만, 시시하게 보이겠지만,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내 삶의 가치를 내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 누가 인정해주겠습니다.
나부터 먼저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 나부터 먼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것, 나부터 나를 먼저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내 어깨에 먼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강신숙수녀-
몇 해 전 서유럽 가톨릭 국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인 일이 있었는데 응답자의 8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응답했답니다. 그들이 응답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양심의 가책이나 사후심판과 관련되어 있었다니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두려움과는 어떻게 연관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많은 신앙인의 뇌리 속에 자리잡은 ‘하느님’ 이미지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상’보다 내 생전의 잘못을 낱낱이 셈해서 벌하시는 엄격한, 혹은 무정한 아버지의 상이 더 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혼과 육신을 모두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더 두려워하라”고 하신 문장만 떼어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간 오랜 세월 가톨릭 공식 교리의 영향으로 대물림되어 온 하느님상에도 무시 못할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조차 내어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친근한 기억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근 교회 안의 여성신학자들은 잘못된 하느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하느님의 ‘여성성’을 되찾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잘못된 신관을 바꾸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잘못된 신관은 그 자체가 우리 존재와 삶의 여정을 근원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이 으뜸으로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입으로는 하느님을 고백하면서도 잘못된 하느님상 때문에 이교도들처럼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의 잘못된 하느님 아버지상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린 어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장재봉신부-
그 동안 복음과 함께 했던 1독서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셉은 두 아내를 거느렸던 야곱에게 늦동이로 태어나서 귀염을 받았지만
그 어머니 라헬은 야곱의 귀향길 도중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 어린 것이 가여워서 야곱은 요셉과 베냐민을 편애합니다.
그것이 형들의 눈에는 당연히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서의 창세기는 세상의 어떤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그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오늘 1독서를 통해서
참된 의인의 모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제들에게 보여주는 요셉의 용서의 말마디는
참으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형들의 시샘으로 인해서 이집트 땅에 팔려가 노예 신세로 전락하여
살아가야 했던 요셉이 지난날 형제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배려하여
거듭 용서하며 위로하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성서는 그 장면을 “그 형제들의 가슴이 터질듯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러한 선처는 그에게 닥쳤던 재난이나
지금 누리는 최고의 호사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섭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자를 보내주신 하느님...
그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오늘 이 시간도 애 간장을 끓이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우리의 가슴도 터질듯이 저려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느 누구든 미워하거나 따지거나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내가 무엇이기에...
차라리 혼을 내시지...
차라리 화를 내시지...
차라리 외면을 하시지...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직 한 가지를 부탁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얼마나 하느님께서 아끼시는 귀하고
귀한 자녀인 것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모든 것에 당당하고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끝없는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우리들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요셉처럼 먼저 용서함으로
상대방의 “가슴이 터질 듯 하게 하는”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처럼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선입견을 버리고
오로지 평화이신 그분, 용서이신 그분,
희생이신 그분으로 거듭나는 사랑의 삶일 때에 우리는 하느님처럼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부여받은 우리는
내 작은 오만으로 인하여
타산적인 계산이나 변덕 때문에
하느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크신 하느님의 흔적을 내가 지울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의 뜻을 내가 눌러버릴 수 있을 만큼
우리들이 가진 자아의 힘은 무한한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크신 사랑과 용서를 살아내시는 지혜의 편을 선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송제호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희생과 주어진 사명에 투신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마음의 각오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자 한다면, 인간 관계에서도 갈등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모순과 불 합리가 뒤섞여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선한 질서를 희망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간혹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끔씩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성당 다닌다면서, 신자라면서 그게 뭐냐?, 이해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등의 주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억지를 부리는 이들도 만나게 됩니다.
신자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만을 강조하면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할 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그런 억지가 다행스럽게 하느님의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이라면 참을만한데, 그렇지 않을 땐 답답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따라오는 반대와 박해를 각오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결단의 순간에서 오는 갈등의 상황을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 가까이는 가족들에게서 받는 어려움부터도 참으라고 하시고, 그러한 어려움들을 당신께서는 책임지고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단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길에는 사람들의 배척과 반대와 박해가 있게 마련입니다. 성공과 승리 그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뜻은 역설적으로 실패와 좌절, 고통과 죽음 안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현세적인 욕심과 이익 그리고 편안함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용기는 선하신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써 꽃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고자 결심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용기와 확신을 주십니다.
" 두려워 하지 마라, 누구든지 사람들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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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옛날 히말라야의 험한 산 속에, 높은 경지에 오르신 고승이 한 분 살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스님께서는 통나무 틈 사이에 끼어 꼼짝도 하지 못하는, 그래서 굶어죽기 직전인 생쥐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이 스님께서는 이 생쥐가 불상해서 거두어들이고는 많은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생쥐가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주위에 돌아다니는 쥐를 잡아먹는 들 고양이 때문이었지요. 생쥐는 높은 경지에 오른 스님께 자기도 고양이로 변하게 해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스님은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그 청을 들어주었지요. 그러나 고양이로 변한 생쥐는 의기양양하게 방문을 나서다 사냥을 나온 사람들과 함께한 큰 개와 마주치자, 질겁하고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생쥐는 스님께 이번에는 개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지요. 하지만 개로 변한 생쥐는 스님과 함께 산에 오르다 호랑이를 보고는 혼비백산해 도망쳤습니다. 그리고는 스님께 다시 호랑이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난리를 쳤지요.
억지를 피워서 생쥐는 드디어 호랑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로 변한 생쥐는 길을 가다가 고양이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서 스님 방의 양탄자 밑에 얼굴만 숨기고 벌벌 떨더라는 것입니다. 생쥐의 이 모습을 보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지요.
“중요한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생쥐의 마음이다. 제아무리 고양이로 변하고 개로 변하고, 호랑이로 변한다 하더라도 너는 언제나 고양이를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너는 항상 생쥐의 마음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이 바뀐다고 네가 바뀌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겉모습이 바뀐다고 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진정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아니라, 내 내면의 모습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생쥐의 좁은 마음을 호랑이의 큰마음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결국 진정한 변화를 이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변화, 그냥 그럴싸해 보이는 변화에만 머물려는 우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마음까지 완전히 변하는 우리들을 원하고 계시지요.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들을 버리고서 주님 앞으로 다가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우리들은 두려워하지요. 그러나 이 생각은 생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호랑이의 큰마음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두려워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생쥐의 마음일까요? 호랑이의 마음일까요?
이 세상의 부와 명예보다는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이 더 중요함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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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사랑
-조성숙 수녀-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 곁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이 분명 두렵기만
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 아니면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지나온 저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아도 성장해간다는
것은 이 두려움을 끊임없이 떨쳐내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제 자신에 대해서 큰 좌절감을 느끼고 우울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머물던 수녀원에는 만삭이 된 ‘평화’라는 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첫배
출산이어서 모두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밤, 평화는 소리 없이
여덟 마리의 새끼들을 낳았습니다. 새끼들은 마치 누군가 목욕을 시킨 듯이
깨끗했고, 주변도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출산을 본 적도 없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평화’는 본능에 따라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을 본 저는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가 완벽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삶도, 내 실패도
거대한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깊은 안도감과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평화’가 나에게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저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해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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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그물
-기정희 수녀-
함께 사는 장애인들과 태안반도에 다녀왔다. ‘우리는 환경지킴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 춘천에서 전북까지 새벽을 가르며 먼 길을 오고 갔다. 아름다운 해변이 검게 그을린 것을 보면서 둔탁한 짐을 얹어놓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선거철이라 봉사자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는 주민의 말을 들으며 청년 봉사자를 따라 해변으로 나갔다. 참 아름다운 해변, 수천의 사람들이 여름을 즐긴다는 태안반도가 이제는 생계를 걱정하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전락했다. 우리가 만들어 간 EM액을 바다에 붓고 돌을 닦으면서 너무나 미약한 우리 노력이 얼마나 보탬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장애인 가족은 자신들이 돌을 닦았으니 깨끗해질 거라며 다음에 이곳으로 캠프를 오자고 했다.
세상 곳곳에는 하느님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우주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 풀꽃 속에 담긴 그분의 섬세한 손길처럼, 기름을 먹은 바위에서 푸른 이끼가 다시 돋아나는 것처럼 하느님의 숨결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심히 잊고 지낸다. 소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나를 지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 찬 이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되도록 함께하는 것, 작은 풀꽃에 담긴 섬세한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것, 인간이 일그러뜨린 세상을 미력하나마 다시 복원하는 데 힘을 다하는 것,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격려하는 것,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칠 수 있는 것….
이어령 씨의 수필을 보면 세상에는 인망·법망·천망이라는 세 가지의 그물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그물도 법의 그물도 피할 수 있으나 천망, 곧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다고 한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어둠이 빛을 가릴 수 없듯이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지금 세상이 어둠 아래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의 섬세한 보살핌 아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생명을 살리는’ 부르심이 아닌가? 죽어가는 사람들, 생명을 살리라는 부르심. 우리는 서로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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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피정을 마치며 / 뭐가 그리 두렵니?
-오상선신부-
우리 수도자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에게 미안해 해야할 것이 여럿 있겠지만
특히 매년 일주일씩 갖게 되는 연피정, 매월 하루이틀 갖게 되는 월피정이 아닐까?
금년에는 두봉 주교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라는 주제로
경남 산천 성심원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연피정을 가지게 되었다,
피정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뭘 그리 두려워하며 살았나 반성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사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나를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이 항상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반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그런 사람들에 대한 고민 때문에
나의 모든 시선과 관심이 그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정작 하느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이 고정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삶의 시작은 그분 때문이었는데
그리고 우리 삶의 목표도 그분인데
우리의 시선은 그분에게 고정시키기보다
늘 다른 것에 머물다보니
정작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보다는
인간적인 걱정과 염려, 두려움, 인정받고 싶음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지는 않는지...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신다.
겁낼 것 없다.
두려워할 것 없다.
오직 나만 바라보라.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느냐?
걱정하지 마라.
먹고 살 걱정하지 마라.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마라.
내가 너를 인정한다.
더 무엇이 필요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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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잡으시는 손
-김찬선신부-
어제
죽을 각오로
하느님을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을 우리는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주제의 연속성 차원에서
사람들이 스승인 나한테도 그랬으니
제자들인 너희한테도 마찬가지로 할 것임을 각오하라 하십니다.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사이의 공동 운명체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쁘게 해석하면 주님께서 물귀신 작전 같이
억울하게 나만 죽을 수 없고
너희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너희와 나는 결코 다른 운명을 살 수 없는 그런 운명 공동체이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그런 사랑의 공동체임을 얘기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런 운명 공동체성을 부정하여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정하면 주님도 제자들을 부정할 것이지만
긍정을 하면 천국부활의 영광에 함께 동참하게 된다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 주님을 거부하고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과 한 배를 탄 사람으로서
미래 구원의 보증을 받는다는 것이며
좋으신 하느님은 우리를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런 미래의 희망에 대한 믿음,
이것이 두려움을 몰아내는 힘입니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시기에
이런 미래의 희망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떨어뜨리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손을 놓지 않는 한
절대로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급류에 휩쓸려 갈 때,
절벽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우리의 손을 꽉 잡고 계신 주님을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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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우종선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격려와 함께 의무감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위험이 있을 때 슬기와 여유롭게 대처하면서, 박해가 너무 심할때 때를 기다리면서 잠깐 옆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육신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작 두려워 할 분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것, 머리카락의 수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멸망시키실 리가 없기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청취자 여러분, 복음을 증거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까? 좀더 물질적으로 잘 살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까? 귀찮아서 입니까? 시간과 경제적인 제약 때문입니까? 내 것을 포기하고 희생?봉사하는 것이 힘들어서 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구원에 대한 관심이 아직은 없어서 입니까?
사실 이 모두가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너무나 민감한 나머지 눈치를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든 식사나 음식을 섭취할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형제님들 같은 경우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실 때,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그 외 어느 술자리에서든 술을 마실 때 항상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한다면 더욱 좋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기도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우십니까?
먼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떳떳이 드러내야 합니다. 당연히 언행이 따라 주어야만 가능하겠지만요. 그런 다음에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데 이에도 문제가 따릅니다. 교회 안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일을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총이 너무나 따갑고, 그들의 시기, 질투로 다시는 맡은 일을,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별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고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신앙심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 이나 방해요소로 인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짜증나기도 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 뒤에는 주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나 혹시 '나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 하고는 있지 않는가? 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옛부터 상식 이하나 인간답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라고 하시며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희망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한정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 때문에 꿈과 희망을 포기하거나 의무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의 전부를 육신과 영혼까지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꿈과 희망을 키워갑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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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신부-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잡혀가고 채찍질 당하고 고발당하여 죽게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위험을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차례나 말씀하십니다.
26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28절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31절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한 일을 당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천둥이나 번개 , 거센 바람, 파도, 지진, 화산 폭발.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3,14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2,17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시오”
사도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읍시다.
답답할 제 주님을 내 불렀더니
내 소리 들으시고 구하여 주셨도다
주 함께 계시거늘 무서울 것 있을소냐
인간이 나에게 무엇을 할까보냐
주께서 함께 계서 나를 도와 주시니
원수들의 망신을 나는 보리라 (시 118,5)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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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장차 당신의 제자들이 당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도 언제나 보호해 주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없고 주인보다 잘난 종은 없다고 하신다. 그저 스승이나 주인만큼 되면 넉넉하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넉넉하게 되는 것은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스승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셨으니, 제자들이라면 이제 자기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완성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넉넉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바로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고 십자가 위에 오르실 수 있었듯이 제자들도, 즉 우리들도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과 마음의 각오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 어려움은 언제나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자기 고향과 부모와 친척들을 모두 뒤에 두고 떠나야 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어려움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명이었다. 그래서 여러 핑계를 대었고 모면하려 했으나, 결국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는 말씀에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이집트로 갔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사건을 대하게 될 때에 그 뜻을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는 자신의 몫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서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 때문에 많은 경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릴 수 있다. 사회적 체면이 그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28절).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잃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진정으로 두려워 할 것은 나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이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께서 다 돌보신다고 하신다. 그 "참새 한 마리도 너희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의 머리 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29-30절).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아무런 두려움이나, 미온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복음적인 삶이 자연스럽게 이웃에게로 전해지는 모습이 된다면, 그 안에서는 기쁨과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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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저는 딱 한 가지의 운동만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한다는 숨쉬기 운동? 노출의 계절인 이 여름에 몸짱을 만들기 위해 헬스를 할까요? 아니면 여름에 가장 어울리는 운동인 수영을 할까요? 모두 아닙니다. 요즘 제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운동인 자전거 타는 것을 저만의 운동으로 정했지요. 그래서 새벽 방송을 마친 뒤에는 곧바로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20Km 정도의 거리를 다녀옵니다. 그렇게 1시간 정도의 마친 뒤에는 얼마나 몸이 개운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태풍과 장마로 인해서 계속해서 날씨가 좋지 않았었지요. 따라서 자전거를 탈 수 없었고, 이렇게 매일 하던 운동을 하지 않으니 온 몸이 뻐근하면서 기분도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어제도 새벽 방송을 마친 뒤,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약간 어두웠습니다. 하늘은 무엇인가를 쏟아 부을 것 같은 기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쉬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자전거를 끌고서 밖으로 나왔지요. 오랜만에 타서 그런지 더욱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1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조금 더 멀리 가서 5분 정도 늦게 집에 도착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중간에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느라 5분이 늦었다면 또 어땠을까요? 하늘에서 쏟아지는 그 엄청난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비를 맞지 않게끔 집에 돌아왔던 것이지요.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즉, 주님께 감사할 일인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은 비를 맞지 않게끔 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이 새벽에 깨닫게 됩니다. 새벽에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도록 2시에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신 것, 맛있는 아침 식사로 하루 일과를 기분 좋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 미사에 참석하신 순례객들이 많아서 기분 좋게 미사를 할 수 있었던 것, 원로 신부님의 방문으로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생각해보면 은총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주님의 보살핌을 어제만 특별하게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지요. 하루도 빠짐없이 주님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습니다. 단지 내가 느끼고 못했을 뿐이었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제자들을 배척할 사람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 주님의 보살핌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두려움 없이 힘차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보살핌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주님의 보살핌이 없었을 때가 있었을까요? 어쩌면 내가 가장 힘들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도 잘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나를 보살피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가득한 그 보살핌을 가슴에 가득 담아보세요. 아마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껄요?
나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보살핌을 따져봅시다.
빠다킹신부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백남국 신부-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피정을 갔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며 바닷가를 거니는데 한 녀석이 질문을 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을 본 적이 있나요?”,“아니.” 잠시 침묵 후, 그냥 있으면 신부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아서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은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분이시란다,바람처럼.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지. 선선한 바람이 불 때 얼마나 기분이 상쾌하니. 그처럼 하느님이 우리 가까이 오시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지. 행복한 마음이 들거든 하느님께서 너를 휘감고 지나가시는 것이라 생각하렴.”
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 몸을 비틀면서도 묵주를 들고 내 뒤를 따라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행복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제 말대로 하느님께서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시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하느님을 내 곁에 모시고 온 것이겠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그냥 누군가가 사랑스러울 때, 마음이 평화로울 때, 기분이 상쾌할 때가 있으면 ‘아, 하느님께서 나를 스쳐가시는구나!’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한 마음이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물론 어떨 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처럼 하느님을 느끼기 힘든 때도 있겠죠. 그러나 뜨거운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선선한 바람은 불기 마련입니다. 조금만 잘 참아보십시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시는 주님께서 곧 당신을 스쳐지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양승국신부-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
얼마 전 한때 제가 직장생활 할 때 적을 두고 있었던 한 본당에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정겨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반갑던... 동고동락했던 동료들, 같이 교리교사로 활동했던, 그러나 이제는 전업주부의 티가 몸에 밴 자매님들, 저희에게 잘 대해주셨던 어르신들...
강의가 끝나고 인사를 나누는데, 한 자매님께서 그러시더군요.
“강의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깜짝 놀랐네요. 청년시절에는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는데...”
돌아보니 정말 그랬습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청소년기를 거쳐서 직장생활 할 때 까지 저는 정말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학기 끝날 때 마다 담임선생님께서 건네주시던 ‘통지표’ 생활발달상황 란에는 항상 ‘남 앞에 서기를 꺼려함’이란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엄청 소심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남한테 민폐 끼치는 것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A형’ 비슷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엄청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삶도 팍팍했습니다. 위장병을 늘 끼고 살았습니다.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두려움이나 근심 걱정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사라졌을 뿐 아니라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뻔뻔’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도 별로 떨리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 다 합니다. 한 마디로 ‘날나리’가 다 된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고, 주변 상황에 크게 영향도 덜 받으며, 마음이 편안해진 계기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가장 결정적인 배경은 아무래도 ‘하느님’ 체험이었습니다. 그냥 체험이 아니라 ‘강렬한 하느님 자비의 체험’이 일종의 ‘터닝 포인트’가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연한 기회에 다가온 은혜로운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저를 스치고 지나간 후 정말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해소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되풀이하여 강조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결국 걱정보다는 희망을, 두려움보다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는 원천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부드러운 주님의 손길 한번은 그간 우리가 떨쳐버리지 못했던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단 순간에 몰아내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강렬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인생의 지평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런 연유로 하느님 체험은 신앙생활 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은혜로운 주님 손길, 사랑으로 충만한 주님의 시선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집중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을까, 내 인생을 왜 이리도 꼬일까, 내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되지, 내 부끄러운 지난 삶을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고민을 거듭하는 우리에게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내 자녀란다. 나는 너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었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거라. 너는 내게 있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둘도 없는 보물이란다. 그러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거라.”
두려워하지 마라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 독서 중
‘두려워하지 마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띄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원초적 정서는 ‘두려움’임을 깨닫습니다.
알게 모르게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치 내면의 밑바닥에는
짙은 안개와도 같은 두려움이 깔려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실직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두려움,
일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병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열거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단적으로 허약한 인간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이 두려움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사랑자체이신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을 살 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비로소 자유로운 삶입니다.
진리와 사랑의 빛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마치 태양 빛에 사라지는 밤의 어둠 같습니다.
어찌 보면 무지가 만들어 낸 환상이 두려움인지도 모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과 육신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사람을 두려워하고 의심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못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 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에 대한 체험 깊어가면서
두려움은 사라지고 자유로워집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주 미사를 통해 자비하신 주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 장면이 꼭 미사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미사 중 천사들과 함께 노래한 후
우리도 이사야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이어 주님은 타는 숯불대신
당신의 성체를 우리 입에 대며 말씀하십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의 죄와 두려움을 없애주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라는 주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 이사야처럼 응답하며
보내시는 삶의 현장으로 가도록 합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아멘.
-이재혁 신부-
어린 시절 저에게는 참으로 두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미사 시간에 복사를 설 때 실수하고 나면 야단을 치시는 수녀님도 두려웠고, 성당 마당에서 야구할 때 야구공으로 유리창 깨먹고 나서 벌주시는 신부님도 두려웠고,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가 걸려서 손바닥을 때리시는 선생님도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분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분들 손에 든 회초리가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것이 더 무서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동안 해 오신 분들 중에는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을 때,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벌을 주실 분이기에 그 하느님을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들에게는 하느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벌이 두려운 것인데도 하느님을 두려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제가 어릴 적 벌을 주시는 그분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참새 두 마리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우리를 이처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해야 할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벌주시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하느님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사랑 가득한 분이십니다.
내가 전하는 하느님은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입니다. 나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하느님을 우리가 이웃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복음 선포가 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박해를 견뎌내야 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런 사랑의 하느님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내가 하는 복음 선포도, 내가 하는 증언도, 내가 하는 순교도 기쁜 마음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 8)
사랑의 하느님을 이웃들에게 전하는데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사랑의 대상인 하느님을 전하는 일에 우리 다 함께 외쳐봅시다.
“저를 보내십시오.”
-김구노 신부-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무서우십니까?
저희 성당에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 뱀을 정말 무서워하시는 선생님이 한분 계십니다.
다른 분들도 뱀을 무서워하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생님께서 뱀을 무서워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지어는 뱀이라는 말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무서워하세요.
여기는 뱀 없잖아요라고 하는데도 뱀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움찔하며 놀라십니다.
아마 지금도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뱀이라는 소리에 움찔하실 것 같네요.
왜 그렇게 놀라는지 너무 궁금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릴 때 누가 뱀을 자기 집 손잡이에 걸어놓았었는데 그걸 모르고 잡았다가 놀라 기절했는데
그날 이후로 뱀만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지며 깜짝 놀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처럼 뱀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어릴 때 개한테 호되게 당해서
개는 무서워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다른 동물을 무서워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동물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몹시 힘든 고통을 당해서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분들,
아니면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받는 모습을 보며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들이 호되게 당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왜냐하면 기껏해야 그들이 너희들 목숨밖에 더 가져가겠냐는 것이죠.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분명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을 두려워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더 이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예수님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그 무엇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껏해야 우리를 괴롭히고, 심해봐야 죽이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만 한결 같다면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되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자신 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박상대 신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은 이유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세상이 진리와 봉사와 사랑을 피력하는 복음의 근본정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 또는 세속의 본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심을 표하게 되고, 무관심은 독선(獨善)을 조장하고 적대심은 박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박해를 피하는 길은 복음을 등지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흥정을 벌이고 급기야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복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의 운명을 복음선포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선포자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며,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성령께서 선포자를 동반하실 것이고, 그 길 끝에는 천상의 월계관이 선포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실제적 박해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끝까지 항구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루가복음에서와는(6,40) 약간 다른 맥락으로 기록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24-25절)는 말씀은 복음선포자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팔자(八字)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엘제불(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9,34) 모함을 받았으니, 복음선포자도 같은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25b절) 결국 예수님과 복음선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같은 팔자며 운명이다. 이는 사도 바울로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자의 운명공동체(運命共同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시는 성삼(聖三) 하느님의 생명공동체(生命共同體)에로 질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복음선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박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28절)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집회 1,14) 따라서 복음선포자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히 배운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상황이 요구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목숨도 아무 값없이 그저 바쳐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어떤 순교도 순교자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을 날고 있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복음선포자를 이런 참새보다도 훨씬 귀하게 여기시며, 각각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실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30-31절)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 앞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극한 박해에 직면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미소한 손해에서부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취한 태도만큼 그분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선포자와 예수님 사이에 종말론적인 ‘동태(同態)보상률’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복음선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마르 8,38; 루가 9,26)...........◆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