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조선시대 중엽의 대표적인 사랑시로 꼽히는 홍랑의 시
원본이 공개됐다. 홍랑의 시가 실린 서첩은 근대 한국 최고의 서화
감식안으로 꼽히는 위창 오세창의 집안에 내려오던 것이다. 서첩에는
1936년 가람 이병기가 썼다는 발문도 수록돼 있다. 여기서 가람은 홍랑의
시가 친필임을 확인하는 한편, 이 시의 내용과 표현이 '한 보배'와 같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56년 편찬된 가람의 저서 <국문학 전사>에도
그대로 담겨졌다. 이를 계기로 홍랑의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렸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戀詩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렇다면 가람 이병기를 비롯한 국문학자들이 홍랑의 시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별과 관련된 시는 많지만 이만큼 멋이 살아
있고 낭만적인 작품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홍랑이 그처럼 사랑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선 해어화사>에는 홍랑의 사랑에 관한 짧은
일화가 소개돼 있다. 책의 내용에 의하면 선조 때의 시인 고죽 최경창이
바로 홍랑의 연인이다. 생몰 연대가 확실치 않은 홍랑의 시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최경창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당시 공개된 서첩에는 그동안 알려져 있던 홍랑의 시 뿐 아니라 최경창이
홍랑과의 사랑을 통해 남겼다는 세편의 시도 함께 수록돼 있다. 게다가
고죽은 이 서첩의 말미에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해
놓았다. 두 사람의 사랑을 자신의 손으로 분명하게 확인해준것이다. 400년 전
간곡한 사모의 마음을 담아 연인에게 보낸 홍랑의 시에 담긴 애틋한 사연이
되살아나고
1. 만남 그리고 이별
고죽 최경창은 해주 최씨 문중으로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일찍부터 탁월한 문장을 보였고, 악기를 다루는
재주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최경창이 과거에 합격한 것은 1568년, 홍랑을 만나 사랑한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을 때엿다. 최경창이 남긴 기록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1573년
가을 최경창이 북도평사로 부임했다. 그가 부임한 곳은 함경북도 경성,
서울에서 천리길이 훨씬 넘는 변방이다. 최경창은 이곳에 북도평사, 즉 병마
절도사의 보좌관으로 부임한 것이다. 당시 서른넷의 최경창에겐 이미 처자가
있었지만 경성에 부임할 때는 혼자였다.
당시 변방에 부임한 관리가 가족을 데려가지 않고 혼자 건 것은 군사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변방 사졸들에게 배치되는 기녀가 있는데, 그
기녀를 '방직기'라고 했다고한다..
여기 당시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최경창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서패리에는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변방에 군사활동을 나갔다가 그 지역 관리가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 홍랑이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를 읊는데 홍랑이
함께 있는 사람이 고죽인지 모르고 그의 시를 읊었다. 이에 고죽이 누구의
시를 좋아하냐고 묻자 홍랑이 고죽 선생의 시를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그때서야 최경창이 자신의 신분을 밝혓다는 것이다. 사실 고죽 최경창은
당대의 문인인 송강 정철등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문장으로 불렸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은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고죽은 당시를 이렇게 적고 있다.
홍랑이 자신의 처소인 경성 병영에 따라와 함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녀가 고죽을 만난 이후로는 오직 한결로 고죽만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관기는 처소를 벗어 날수 없었기에 이별은 불가피한 장막
이었다..
최경창이 임기가 만료 되어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영흥땅 함관령 까지 그를 배웅하면서 그 아쉬운 마음에 시를
한 수 읊는다; 당시 날은 저물고 비는 소록 내렸다고 최경창은 적고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잠자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그러자 그것을 듣고 감격한 최경창은 즉석에서 그 시조를 한시로
의역하여 둘이 서로 글을 나눠가지기를 한다.. 마음 나눠 가지기 인 것이다.
번방곡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須知一夜新生葉
憔悴愁眉是妾身
2. 파직 그리고 죽음
조선시대 여염집 여성들에게는 '일부종사'가 절대적인 도덕관념이었지만
기생은 예외였다 부임해온 관리가 머물다가 떠나면 또 다른 사람이 찾아
들기 마련이고, 그러면 또다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여야 하건만 홍랑은
그렇지 못했다..
최경창이 서울로 온 2년 쯤 뒤 선조9년 봄 사헌부는 최경창의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받게 된다..
"최경창은 식견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북방의 관비를
불시에 데리고 와 사니 이는 너무도 기탄 없는 일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경성에 있어야 할 홍랑이 최경창과 함께 산다는 내용인 것이다..
최경창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을해년에 내가 병이 들어 봄
부터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홍랑이 이 소식을 듣고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했다."
단지 병석에 누운 고죽을 걱정해 찾아온 홍랑의 행동이 최경창의 파직으로
까지 비화된 까닭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 있었다. 최경창은 자신의
기록에서 "그때 양계의 금이 있었고 국상 때였다"고 적고 있다.. "양계의
금"은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도성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곳은 중국과 국경을 맞댄 중요처이고 따라서 그들의 이탈을 막아야
햇기에 앙계인들이 외지로 나가거나 결혼하는 것은 금기였다 더욱이
당시는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은지 1년이 채 안된 국상 기간이었다.. 허균
역시도 국상기간에 기녀와의 관계로 파직을 당했듯 홍랑의 경우도 마침
국상인지라 동서간 당쟁시 반대 정적들으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최경창의 병소식을 천리길 멀다 않고 달려온 홍랑의 사랑은 그를
파직에 이르게 한다...
결국 다시 둘은 헤어지게 된다
헤어지며
옥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는데
이별의 정 때문인 듯 새벽 꾀꼬리 울고 운다.
깁 소매에 보마 탄 정관 밖에서
풀빛만 아득히 먼 데 홀로 떠나고 있구나 ,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고죽 최경창
홍랑의 일로 파직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던중.
함경도 종성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한다(같은 함경도가 의미심장하지 않은
가?) 그러던중, 종성 객관에서 병을 얻어 누웠는데, 여기엔 두가지 이야기
가 전한다. 그 하나는 홍랑이 소식을 듣자 마자 종성객관으로 달려갔지만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최경창이 죽음을 맞이햇다는 설과 소식을
들은 홍랑이 달려와 온갖 간호와 수발을 다하였지만 최경창은 끝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설이 있는데 아마도 최경창의 서첩에서 그녀
가 간호한 부분이 안나오기에 이렇게 둘로 나뉜 것이리라 어쩌면 너무
병이 깊은 최경창은 이미 글을 쓸 수 없었을른지도 모른다 . 선조 9년
마흔 다섯의 한창 나이였다.. . 명문가에 태어나 당대에
이름을 날린 문장가로서는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었다. 그것은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 그에게 지워준 짐이었던 것이다..
최경창의 사후 출간된 <고죽집>의 서문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내가
젊었을 때 고죽의 시사를 듣고 보니 과연 근세에 뛰어난 가락이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서문에서 우암은 고죽의 시뿐 아니라 사람됨까지도 크게 평가하면서
율곡 이이의 표현을 인용하고 있다. "율곡선생이 말하기를 고죽은 그
성품이 깨끗하고 하는 일마다 선이 되는 사람이니 그 청고한 절조는
사람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또 송시열 자신은 "사람 때문에 시가
가려진다더니 오히려 시때문에 사람이 가려졌구나"라는 말로 고죽의
문장과 성품을 칭송하고 있다.
고죽 최경창은 이렇게 당대의 학자, 문인들로부터 인정받을 정도로 고고한
성품을 지녔고, 파직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여인을 사랑했다.
최경창과 홍랑의 사랑은 파직과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강해지고 신실해졌을 것이다.
3. 그리고 그후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은 문집 <회은집>에서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동을 적고 있다. 즉 "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3년의 세월 동안
움막을 짓고 씻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묘를 지켰다고 한다.
노류장화와 같이 누구나 꺾을 수 있다고 여겨진 기녀신분 더우기 재색이
겸비한 홍랑이 주위의 협박과 유혹을 물리치고 수절한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녀는 고죽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여인의 생명 같은
얼굴에 상처를 냄으로써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랑이었기에 . 이런 홍랑이었기에 고죽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도
의연 할 수 있었고. 파직에 임해서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떳떳이
글로 남길 수 있었으리라
<회은집>은 계속해서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난리가 일어나자
홍랑은 고죽의 시를 지고 피난하여 병화를 면하게 했다.: 3년상을
마치고도 무덤을 지키던 홍랑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피난길에
오른다. 고죽이 남긴 시를 모두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선시대 뛰어난 시인인 고죽의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이
같은 홍랑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고죽집>에는 홍랑이 수집한
시가 대부분 실려있다.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긋고 삼년이 지나도 무덤을 지키고 전란이
일어나자 연인의 글을 지키기 위해 서첩을 싸들고 전선을 넘은 홍랑의
사랑, 이 홍랑의 사랑은 기적을 낳게 한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기생의 신분인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낸 것이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도 대를 이어
전해왔고,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예를 갖춰 홍랑의 묘를 돌보고 있다.
홍랑의 지고한 사랑이 후세까지도 감동시켜 양반사회에서 기생의 신분을
극복하고 죽음후에도 사랑하는 님의 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終
그녀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다율리에 있다. 한강의 흐름을
왼켠으로 끼고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일산 신도시를 훨씬 지나 삼학산
봉우리가 보이고 일산을 지나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다시금 들판이 펼쳐지면서 교하(交河)라는 곳이 나온다. . 한강과
임진강 두 물줄기가 교차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오른 켠으로 방향을 돌려 좁다란 포장길을 잡아들면 면소재지로
가는 길이다. 낮은 구릉을 넘어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바로
청석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다율리.
홍랑의 묘소는 청석정이라는 음식점이 있는 작은 마을 뒤 산자락에
있었다. 세 개의 산소가 내리닫이로 이어져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하다. 맨위의 것이 최경창의 묘로 부인과 합장되었고,
홍랑은 바로 아래 최경창의 발치 한 가운데 누워있다.
입구에 시비(詩碑)가 서 있으니, 앞면은 '고죽시비(孤竹詩碑)'라 음각
하여, 홍랑의 시를 한시 번방곡(飜方曲)으로 번역하여 기록해 두고,
뒷면은 '홍랑가비(洪郞歌碑)'로 '묏버들~ ' 시조를 새겨두었다.
두 사람의 시비를 따로 세워두지 않고, 이렇게 하나의 비석 앞뒷면에
적어둔 것은, 살아서 못다한 정을 죽어서나 한 몸 되어 지내라는
후인들의 마음일 것이다. . 비천한 신분으로 그나마 사랑하는 사람의
발치에라도 묻힐 수 있었던 것은 홍랑의 지극한 정성을 후손들조차
외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梨花雨 흩뿌릴 제
배꽃 흩어뿌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는구나
-계랑(桂娘). 여류시인. 부안의 기생. 성은 이(李) 본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계생(桂生). 시조 및 한시 70여 수가 전하고 있다.
황진이와 비견될 만한 시인으로서 여성다운 정서를 노래한 우수한 시편이 많다.
참 고 : 梨花雨―비처럼 휘날리는 배꽃
송인送人
사랑을 나눈 시냇가에서 임을 보내고
외로이 잔을 들어 하소연할 때
피고 지는 저 꽃 내 뜻 모르니
오지 않는 임을 원망하게 하리
弄珠灘上魂欲消
獨把離懷寄酒樽
無限烟花不留意
忍敎芳草怨王孫
지은이-영양 기생
농주(弄珠)―연인과 함께 사랑을 속삭임.
상춘傷春
이것은 봄이 감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임을 그리워한 탓이네
티끌같은 세상 괴로움도 많아
외로운 목숨 죽고만 싶네
不是傷春病
只因憶玉郞
塵豈多苦累
孤鶴未歸情
지은이-계생(桂生), 혹은 매창(梅窓). 부안기생. 『매창집(梅窓集)』이 전한다.
春愁
시냇가의 실버들 유록색 가지
봄시름을 못 이겨 휘늘어지고
꾀꼬리가 꾀꼴꾀꼴 울음 그치지 못하는 것은
임 이별의 슬픔 이기지 못함인가
지은이-매화(梅花). 생몰년 미상, 조선시대 평양 기생. 애절한 연정을 읊은
시조 8수(그중 2수는 불확실함)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무제
임 가실 제 달 뜨면 오마시더니
달은 떠도 그 임은 왜 안 오실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임의 곳은
산이 높아 뜨는 달 늦은가 보다
郞去月出來
月出郞不來
相應君在處
山高月出遲
지은이-능운(凌雲).
참 고 : 상응(相應)―생각해 보니
무제
마을 하늘은 물이런 듯 맑고 달빛도 푸르구나
지다 남은 잎에 서리가 쌓일 때
긴 주렴 드리우고 혼자서 잠을 자려니
병풍의 원앙새가 부러웁네
洞天如水月蒼蒼
樹葉蕭蕭夜有霜
十二擴簾人獨宿
玉屛還羨繡鴛鴦
지은이-취선(翠仙). 호는 설죽(雪竹) 김철손(金哲孫)의 소실.
참 고 : 십이상렴(十二擴簾)―긴 발을 뜻함
이별 離別
말은 다락 아래 매어 놓고
이제 가면 언제나 오시려나 은근히 묻네
임 보내려는 때 술도 떨어지고
꽃 지고 새가 슬피 우는구나
駐馬仙樓下
慇懃問後期
離筵樽酒盡
花落鳥啼時
지은이-일지홍(一枝紅). 성천(成川)의 기생.
선루(仙樓)―신선이 산다는 다락.
황혼黃昏
실버들 천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서
구름인 듯 인가를 볼 길 없더니
문득 목동이 피리불며 지나간다
강 위에 보슬비요 날도 저물어 가누나
千絲萬縷柳垂門
綠暗如雲不見村
忽有牧童吹笛過
一江烟雨自黃昏
지은이 : 죽향(竹香). 호는 낭각(琅珏). 평양 기생.
참 고 : 연우(烟雨)―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내리는 비
추얼야秋月夜
노를 저어 맑은 강 어귀에 이르니
인적에 해오라기 잠 깨어 날고
가을이 짙은 탓인가 산빛은 붉고
흰 모래엔 달이 둥글다
移棹淸江口
驚人宿驚飜
山紅秋有色
沙白月無痕
지은이-추향(秋香)
추우秋雨
금강산 늦가을 내리는 비에
나뭇잎은 잎마다 가을을 울리네
십년을 소리없이 흐느낀 이 신세
헛된 시름에 가사만 젖었네
九月金剛蕭瑟雨
雨中無葉不鳴秋
十年獨下無聲淚
淚濕袈衣空自愁
지은이 : 혜정(慧定). 여승(女僧).
가의(袈衣)―중이 입는 옷.
어이 얼어 자리
어이 얼어 자리 무슨 일로 얼어 자리
원앙 베개와 비취 이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서 잘까 하노라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鴛鴦枕 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비 맛자신이 녹아 잘* *노라
지은이 한우(寒雨). 조선 선조 때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내던 평양 기생.
취연
열흘이나 이 장마 왜 안 개일까
고향을 오가는 꿈 끝이 없구나
고향은 눈 앞에 있으나 길은 먼 千里
근심 어려 난간에 기대 헤아려보노라
十日長霖若未晴
鄕愁蠟蠟夢魂驚
中山在眼如千里
堞然危欄默數程
지은이 : 취연(翠蓮). 자는 일타홍(一朶紅). 기생
참 고 : 장림(長霖)―긴 장마
중산(中山)―지명. 사랑하는 임이 있는 곳, 또한 고향
죽서
꽃이 지는 봄은 첫 가을과 같네
밤이 되니 은하수도 맑게 흐르네
한 많은 몸은 기러기만도 못한 신세
해마다 임이 계신 곳에 가지 못하고 있네
落花天氣似新秋
夜靜銀河淡欲流
却恨此身不如雁
年年未得到原州
작자-죽서(竹西). 철종 때 사람. 서기보(徐箕輔)의 소실
履霜曲
비가 내리다가 개고 눈이 많이 내린 날에
서리어 있는 수풀의 좁디좁은 굽어돈 길에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잠을 빼앗아간 내 임을 생각하니
그러한 무서운 길에 자러 오겠는가?
때때로 벼락이 쳐서 無間地獄에 떨어져
고대 죽어버릴 내 몸이
내 임을 두고서 다른 임을 따르겠는가?
이렇게 하고자 저렇게 하고자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는 期約입니까?
맙소서 임이시여 임과 한 곳에 가고자 하는 기약뿐입니다
작자 미상
연희
은하수 다리에서 견우직녀 이 날 저녁에 만나
옥동에서 다시 슬프게 헤어지네
이 세상에 이 날이 없었더라면
백년을 즐겁게 살아가리
河橋牛女重逢夕
玉洞郞娘恨別時
若使人間無此日
百年相對不相移
지은이 : 연희(蓮喜)
황진이를 소설에 등장시킨 작가는
이태준, 정한숙, 박종화, 안수실, 유주현, 정비석,
최인호, 김남환, 최정주,김탁환 등이거
황진이의 시는 시조가 6수, 한시가 7수 전해진다.
황진이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의 진위는 확인하기 어렵다
황진이 고사 기록
황진이에 대한 고사는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 이덕형이 지은 '송도기이' 허균이 지은 '성옹지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임방이 지은 '수촌만록' 서유영이 지은
'금계필담' 김택영이 지은 '소호당집' 개성유수를 지낸 김이재의 '중경지'
홍중인의 '동국 시화휘성'등에 황진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 지고 있다
[송도기이]에서는 진이의 어미 현금이 18세에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다가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하로여한 사람을 만나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좋아하여
진이를 낳았다는 출생 비밀이야기,개성유수 송공이 황진이의 노래를 듣고
천재로 평가한 것과, 그의 첩이 절색이라고 질투를 느낀 사실및 송공 어머니의 수연에서
진랑이 화장도 않고 담담한 자세로 나와 국색의 광채를 빛낸 일,
악공 엄수와의 일화, 중국 사신 일행이 황진이를 보고 천하절색으로 평가한 일화.
황진이가 선비들과 놀기를 즐기며 당시 읽기를 좋아하며 서화담을 사모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 담소를 나눈 일화 등이 있다.
[어우야담]에도 황진이가 서화담의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시험하고자
허리에 실띠를 묶고 대학을 옆에 끼고 나아간 일화와 밤을 틈타
서화담의 침소에 접근하여
마등이 아난을 어루 만지는 것처럼 유혹한 일화가 기록 되어있다.
또한 성격이 호탕하고 소탈한 재상의 아들인 한량 이생원과
금강산 유람을 떠난 후 자신의 몸까지 팔아 승려에게 양식을 얻은 일화다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한양의 절창 이사종의 노래에 반해 그와 송도에서 3년,
한양에서 3년간 동거했던 일화도 에피소드로 전하고 있다.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임제가 진이의 무덤에서 축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
조정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성옹 지소록]에서는 노래를 잘한 [사인 이언방]과의 일화, 황진이를
개성 장님의 딸로 묘사하면서 거문고를 잘 타고 노래를 잘 한 것으로 서술했다.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을 거쳐 금성에 와서 고을 원님이 절도사와
잔치를 벌이고 있는 곳에 나아가 헤진 옷과 누추한 행색으로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면서 다른 기생들을 주눅들게 한 일화,
황진이가 " 지족선사가 30년을 면벽하여 수양했으나 그의 지조를 꺾었다.
하지만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까이했으나
끝내 선을 넘지 못했으니 실로 성인이로다 라고 한 일화 진랑이 서화담에게
송도 삼절을 꼽은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기타 [수촌만록]에는 야곡 소세양과의 한 달간 동거 일화가 소개되어 있으며
황진이가 양곡에게 준 율시 '월하정오진'이 기록되어 있으며
[금계필담]에서는 종실 벽계수가 손곡 이달과 황진이를 찾아간 일화가 소개 되어 있으며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로 시작하는 시조가 기록되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돌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가난하지만 세속에 젖지 않고 청정하게 살아가는 중년의 선비인 이언방은
노래도 잘하여 절창이라는 평을 받은 선비인데
황진이가 이언방을 생각하며 부?? 상사곡이라고 한다.(문정배 지음 황진이중)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서울 북촌의 양반중에 벽계수가 있었다, 그는 왕족으로서 본명이 이창곤인데
글을 잘 하는 문장가이며, 시조와 풍류에 일가견이 있는데
황진이가 그를 유혹하려 지었다고 전한다.
(서울의 북촌에는 양반이 있고, 청계천변에는 중인이 살고,
왕십리에는 병사들이 살며, 강건너에는 백정과 무당들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