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훌륭한 교회
행13:1~3
사도행전 13장을 분기점으로 사도행전의 역사가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예루살렘교회가 중심이 되어 복음을 전파했지만, 13장부터는 소아시아 반도에 있는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가 중심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어떻게 초대교회의 탄생지였던 예루살렘교회가 쇠퇴하고 이방인 교회가 복음 전파의 주역이 되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1절입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파해주는 사람을 말하고, 교사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었다는 말은 안디옥교회가 “지도자”를 키우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에 비해 예루살렘교회는 어땠을까요? “아~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도님들이 계시는데 다른 지도자가 뭐 필요해?”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처음 안디옥교회가 시작될 때 지도자는 바울과 바나바, 이렇게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예루살렘교회에는 사도들이 12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던 예루살렘 교회는 퇴보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안디옥교회에는 성경을 잘 가르치는 바울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제임스 파울로라는 신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종의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내가 이웃에게 아주 큰 희생을 치르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이웃은 내가 치른 희생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보다”라고 말이지요. 즉 이웃에게 베푼 나의 희생이 이웃과 하나님 사이에 모종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겁니다.
반대 현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내가 이웃에게 엄청난 사기를 치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면 그 이웃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됩니다. 즉 나와 그 사람의 관계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종의 영향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신앙이 “안디옥교회 교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세 번째 특징이 1절 나옵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첫째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지중해에 있는 구브로(現 Cyprus) 섬 출신입니다. 그러니까 본토 출신 유대인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입니다.
둘째는 니게르라는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케르는 라틴어인데 영어로말하면 니그로(Negro)입니다. 즉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흑인이 안디옥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셋째는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를 말합니다. 이 사람도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넷째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헤롯 왕은 헤롯 대왕이라고 부르고, 그 대왕의 손자가 분봉왕 헤롯입니다 (헤롯 안티파스). 젖동생이란 말은 함께 자라났다는 뜻이므로 마나엔은 헤롯 왕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다섯째는 사울(바울)입니다. 바울 역시 소아시아 반도 남쪽에 있는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출신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본토 안디옥 출신들의 텃세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안디옥교회는 개방된 교회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에 반하여 예루살렘교회는 “우리 유대인들끼리만”, 즉 폐쇄적인 교회였습니다. 국가도 기업도 교회도 폐쇄적이 되면 반드시 쇠락합니다. 500년 조선왕조가 왜 일본에게 망했습니까? 조선은 폐쇄적이었고, 일본은 개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약해질 때는 폐쇄성이 됩니다. 다 귀찮은 거예요.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성경 읽는 것도, 봉사하는 것도 다 싫은 겁니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야단칠 것이 아니라 도와주어야 합니다. 아까 제임스 파울로 교수의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종의 영향을 줄 수 있다.”
네 번째, 안디옥교회의 특징이 2절~3절에 나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수하여 보냈다”는 말은 안디옥교회가 “교회 지도자”를 안수하여 선교사로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이걸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교회가 아니라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사역이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훗날 베드로도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했던 그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가 성(聖) 베드로 성당입니다.
성령이 최초로 임했던 그 놀라운 예루살렘교회가 왜 쇠락했습니까? 사람을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 영국 런던에서 사역하시던 스펄전 목사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인 메트로폴리탄 타버너클 교회를 목회했습니다. 주일만 되면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몇십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나라 개척교회만도 못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안디옥교회는 지도자를 키우는 교회였습니다. 둘째는 성경을 잘 가르치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셋째는 텃세를 부리는 교인이 없는 개방된 교회였습니다. 넷째는 교회 지도자가 선교사로 나가는 교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