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7
5월16일 [부활 제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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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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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mvnlpJuj00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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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겹고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는 것, 참으로 멋진 기적입니다!>
활발했던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그리고 수난과 죽음의 시기에 이어진 영광스런 부활과 승천의 시기가 지나가자 이윽고 사도들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도들이 보여준 모습은 놀랍게도 활기차고 신명나던 공생활 기간 예수님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또 다른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말씀 한마디에 죽었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백약이 무효이던 불치병 환자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리스트라에 도착해 설교를 시작했는데, 마침 거기에는 태어날 때부터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 한 명이 앉아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를 유심히, 그리고 측은히 바라본 바오로 사도가 그에게 외쳤습니다.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사도행전 14장 10절)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평생토록 누워있거나 겨우겨우 일어나 앉아있던 그였는데,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엄청난 광경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군중은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를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르나바를 제우스 신으로, 바오로를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고 두 사람 앞에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까지 갈기갈기 찢었습니다. 그리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외쳤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
보십시오.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에게는 우리와 차별화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겸손의 덕이었습니다. 자신들은 그저 종이요 도구일 뿐, 기적을 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겸손하고 명료한 신원 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고, 나와 함께 길을 걸으시며, 내 일거수일투족에 함께 하신다는 뚜렷한 주님 현존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분의 능력이 내 손을 통해 발휘되고 있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결과가 놀라운 치유 활동이요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활발하고 역동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대는 예수님 공생활 기간과 사도 시대로 이제 종료되었습니다. 따라서 괜히 어설프게, 어줍잖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환자들 앞에서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노니, 일어나시오!’라고 외치다가는 큰코다칠 우려가 다분합니다.
이제 기적은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기적은 예수님이나 사도시대 기적과는 사뭇 그 유형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외적인 기적보다는 내적인 기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안 되는 그를 기꺼이 용서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이뤄내야 할 기적입니다.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결핍과 한계로 인해 힘겹고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는 것, 참으로 멋진 기적입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로 어처구니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 너무나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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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복음을 전할 때 공허하게 느껴진다면>
제가 지난 사순절 때 결심했던 것은 사순특강 요청을 거절하지 말고 다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스무 번 정도의 사순특강을 하였습니다. 반응이야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은 칭찬과 감사를 받았습니다.
아프라카 선교를 위해 기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책도 함께 팔았습니다. 그러나 특강이 다 끝난 마지막 순간에 느낀 것은 ‘공허함’이었습니다. 나름 고생하며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느꼈는데,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엄습해왔습니다.
그 이유를 가만히 묵상해보니 저는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드린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나 또한 보상을 받고 싶어 했었던 것입니다.
칭찬과 감사를 많이 받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당연히 그것을 받아야만 한다고 믿게 됩니다. 사실 아무리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광 또한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오롯이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앉은뱅이를 고쳐주어 사람들이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려 할 때 매우 슬퍼합니다. 그리고 설득하고 설득하여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모든 은총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기 때문에 영광도 받을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의 힘으로 무언가를 해 주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합당하지 못하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주님께 해당하는 주님의 몫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전하면서 받는 영광이 있다면 그 또한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사람들에게로 가야하고 또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은 주님께 올려 드려야하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물게 되면 그것이 독이 됩니다.
선악과가 주님께 해당하는 것처럼 영광도 주님께로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주실 때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받아야 했던 상처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우리 또한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겠습니다. 마음을 채워주시는 분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영광을 올릴 줄 아는 이들에게만 성령을 베푸시어 그 마음을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십니다.
주님을 전하건 또 무언가를 베풀어주건 사람에게서 절대 보답을 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면 공허하지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면 주님은 당신 영광이신 성령님으로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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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1-26 :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버지께 사랑을 받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당신이 누구신지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당신과 아들을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그들이 올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믿음으로 단지 바라만 보았던 진리를 눈으로 보게 해 주실 것이다. 즉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의인들만 “수려한 모습의 임금”(이사 33,17)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유다가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22절) 하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고 다른 한쪽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과 세상을 구별하는 것은 한마음이 된 이들을 한 집에 살게 하는 사랑이다. 이 집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사시며,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사랑을 주신다. 이 사랑은 실천되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이 실행될 때는 자기의 뜻을 죽이고 그분의 계명을 따를 때이다. 자기의 뜻을 따를 때는 그분의 뜻을 거스르게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과 지혜를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사람들이며, 그들 안에 “나와 아버지가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절)라고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 안에서 모든 악습과 욕정을 태워 버리시고 그들을 당신의 깨끗하고 합당한 성전이 되게 하신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의 마음 속에 오시어 그 안에 사신다. 이 말씀은 그분이 당신 친구라고 부르신 이, 당신의 명령을 따르는 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시며,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이다.”(24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하신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드님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외아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도 거부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이 당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그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그것들은 아들의 말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이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고 이제는 위에서 오는 빛으로 믿는 이들의 마음이 그분의 권위를 따르게 되었다. 즉,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절) 이 말씀은 아들은 말씀하시고 성령은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아드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은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지혜 자체로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성령과 함께 온전히 깨닫게 되며 아들의 지혜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삶을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는 삶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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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 23,3) ‘삶’으로 실행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믿음’이란, 머리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도 아니고, 입술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일도 아니고, ‘온 삶으로, 믿는 대로 사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로마 2,6-8)
<바오로 사도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긴 했습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이 말은,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믿음만으로’가 아닙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라는 말은,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의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도 아니고, 바오로 사도의 신학도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찬가에서 자신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1-3) 여기서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은, 사랑 실천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으로 한 일이 아니라, 속임수를 쓴 일이거나 사탄의 힘으로 한 일입니다. 또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주는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 없이 한 일이라면 ‘위선’이 될 뿐입니다. ‘위선’은 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바오로 사도의 말을 요약해서, ‘믿음과 사랑은 하나’이고, ‘믿음 실천은 곧 사랑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여기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고, 또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은 ‘예수님을 위한 계명’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계명’, 즉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계명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과 “나도 그를 사랑하고”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만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기 전부터.) 계명 실천은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라는 말씀은, 믿음과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 쪽에서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난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
이 말씀은, ‘성령 강림’을 예고하시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보호자’이신 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에 ‘진리의 영’이신 분입니다.(요한 14,17)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항상 성령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삶’으로 실천할 때, 그 보호와 인도를 온전히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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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구글’은 검색엔진입니다.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정보를 알려줍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운전합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를 이용해서 영상물을 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구글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글의 운영방식이 비대면 사회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글의 경영 마인드가 ‘사용자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는 수익의 50%를 영상물을 올린 사용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사용자를, 고객을 수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만족을 넘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기업은 어려운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년 전의 일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납니다. 여행 갔다가 신발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발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사무실로 가지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서비스센터로 갔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습니다. 신발을 다 고친 다음에는 택배로 신발을 보내왔습니다. 사용자 중심의 회사였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회사였습니다. 그 신발회사의 이름은 ‘칸투칸’이었습니다. 저는 칸투칸 신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누가 신발을 산다고 하면 당연히 칸투칸을 추천했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시간은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입니다. 장례가 나면 연령회장님은 두 가지를 고려해서 미사시간을 부탁하였습니다.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화장하는 시간을 고려합니다. 선산으로 고인을 모시는 경우는 선산까지 가는 거리를 고려합니다. 보통은 오전 7시나 10시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새벽 5시에 할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장지가 멀기 때문에 유족들이 일찍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하기 위해서는 저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전례봉사자, 성가대도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양해를 해서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자 중심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분이 2,000년 전에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우리와 같이 마시고, 우리와 같이 웃고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워 들판을 거닌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객 감동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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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동하 세례자요한 신부님]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
하늘에 맞닿은 달동네에는 아직도 사람내가 물큰합니다. 아이들 뛰노는 소리, ‘변소’에서 나는 냄새, 간간히 어른들 싸우는 광경. 달동네 사람들이 버거우면서도 올망졸망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늘도 가깝지만 이웃이 지척이기 때문입니다.
날 때부터 하늘을 배운 터라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싸울 줄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법도 훤합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내 몸의 자리를 내놓고 내 마음의 자리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이라면 반은 내놓아야 하고 셋이나 넷이라면 나를 삼등분 사등분하여 두 몫이나 세 몫은 내놓아야 합니다. 많이 모이면 모인 만큼 내놓아야 하기에 내 자리는 작아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자면 전부를 내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부이신 분이고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1,21참조)
하늘이신 예수님께 배우고 이웃이신 예수님과 부대낄 수 있다면 그분의 향기는 우리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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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
바오로 일행의 선교활동을 시기하며 비방했던 안티오키아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군중을 선동하여 바오로 일행을 박해했다. 그들은 바오로를 돌로 쳤고,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끌어내어 버리기까지 하였다.
신도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바오로와 일행은 1차 전교여행의 마지막 지점인 데르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도 각 도시마다 다니며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각 공동체마다 원로들을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은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불림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씀이며,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음으로써 현실적인 손해를 입을 수가 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수많은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도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가 많이 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에 시달렸으며,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참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박해를 받고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처럼 박해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요한 17,14-16) 세상의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요한 15,1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며 복음을 사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기쁨과 평화를 주님께서 주시며, 성령이 충만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닫아걸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다.(요한 20,19)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충만하도록 하셨다.(요한 20,22) 그들이 다락방에서 뛰어나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셔서 용기와 힘이 넘치도록 하셨다.(사도 2,1-4)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그들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도들이 박해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까닭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어려움과 고통은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러한 속에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주님의 말씀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사는 사람이다.
오늘 우리도 사도들처럼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함으로써 세상의 고통과 박해를 이겨내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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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정민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들음>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말을 귀담아 듣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가정. 신부와 신자가 서로의 바람에 귀 기울이는 본당.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학교. 부부가 상대방의 말을 ‘들음’은 둘 이상이 모인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들음’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첫 번째 표지가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들어주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분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은 항상 하느님을 거부하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느님께 귀 기울일 만한 침묵과 여유가 없는 듯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주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분의 말씀을 먼저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기도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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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과 사랑>
요한 14,21-26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사랑과 사랑>
사랑이
사랑에게
보이고 싶으시다네
사랑이
사랑을
보고 싶다네
사랑이
사랑에게만
보이고 싶으시다네
사랑만이
사랑을
보고 싶다네
사랑이
사랑에게
보여지신다네
사랑이
사랑을
본다네
사랑은
사랑에게만
보여지신다네
사랑만이
사랑을
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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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유를 주는 사랑>
살아가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굳이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기대되고 가슴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내 방식의 사랑이기에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기대하는 만큼 받지 못해서 애달프고 준다고 주는데,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으니 속이 상하고 그야말로 미워집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타기 때문입니다.”(법구경)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14,23-2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결속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가운데에서 또한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압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여러가지로 나타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랑은 들음으로써 완성됩니다. 상대의 원의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함으로써 증거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다면 아직 참사랑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듣지 않고 오히려 내 것을 강요하고 있다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만 남길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는 내적 일치의 사랑,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박병규)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분의 계명을 지키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사랑하십니까?
배우자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자녀를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나의 소리를 시끄럽게 들려주지 말고 먼저 듣고, 원하는 바를 분별있게 행하십시오. 사실 듣는다는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3) 하고 말하였습니다.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사랑은 온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야 하며 형제들의 온갖 필요에 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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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 독서를 읽다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느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바오로 사도가 만난 앉은뱅이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베풀 수 없었을까?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 편에서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은총 안에서 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또 하나의 논리를 곁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인간 편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신학을 동시에 병행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긴장 관계 안에 놓아두고,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구원과 행실을 통한 구원,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쌓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사랑하는 것, 아니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믿음과 행실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주위의 형제들을 마음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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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너, 나 사랑하니?>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주된 관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복음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형제인 '토마스 첼라노 형제'는 그의 전기에서 사부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 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1첼라84)
오늘 복음에 비추어서 보면, 그만큼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될 수 있었고, 그 결정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인 오상'을 받은 일이고, 후대에 사람들로부터 '또 하나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닮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닮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으려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요한14,21-26)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14,26)
프란치스코처럼 해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길이고, 닮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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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미국 워싱턴 주의 어느 식당 주인과 직원으로 있는 요리사가 다투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즉, 커피를 어디에다 마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요리사는 찻잔에, 식당 주인은 아무 데나 마셔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분명 별것도 아니었는데,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식당 주인은 이 요리사를 죽이겠다면서 총을 들고나와 발사했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은 안타깝게도 한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총을 식당 주인이 들고 있었으니 요리사가 죽었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식당 주인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발에 의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식당 주인의 사망 원인은 심장병이었습니다. 극도의 분노와 더불어 격렬한 움직임까지 더해져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몸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은 쉽지,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화가 날 때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리고, 가능한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 분노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할 확률이 높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셨고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시고,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또 싫어하는 것만 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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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신원>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
요즘 지인들이 보내 주는 5월의 우리 나라 풍경은 신록과 다양한 꽃들로 어디나 아름답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여기만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이 아니라
거기도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이네
어디나
하느님 계신 천국이네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겠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늘 나라 천국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입니다. 제 수도영성생활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토마스 머튼입니다. 1986년 수련기때 참으로 열광했던 분이며 이때 이분에 대한 책을 가장 많이 읽었을 것입니다. 아마 20세기 가톨릭 교회 수도승들중 최고의 영성가일 것입니다. 1968년 임종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인 토마스 머튼입니다. 그를 일컬어 말하곤 합니다.
“머튼은 카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성숙된, 모두에게 열려 있던 참 사람 토마스 머튼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 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참 사람이 되는 공부는 우리의 평생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산티아고 순례후 지금까지 강론시 가장 많이 사용했던 주제는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평생 여정이요,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 회개의 여정, 순종의 여정, 자유의 여정, 섬김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귀가의 여정, 예닮의 여정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수한 명칭들입니다.
그리하여 늘 점검해 보는 참으로 많이도 인용했던 말마디가 있습니다. 내 삶을 일일일생(一日一生), 아침 6시 일출로 부터 시작하여 오후 6시 일몰시 까지 하루로 압축한다면, 또 일년사계(一年四季)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압축한다면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오후 4시, 초겨울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깨어,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 주님을 닮아 참나의 삶을 살도록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누구나의 내면 깊이의 근원적 소망은 이런 참삶에 대한 욕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구체적 신원은 무엇입니까?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는 우리의 평생신원입니다.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본질적 처방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선교사로서 충실히, 한결같이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로서의 롤모델이 오늘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오늘 14장까지 계속되는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에 대한 보도입니다. 이 두분의 지칠줄 모르는 선교열정이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선교사로 파견된 두 분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 그리고 오늘은 이코니온에 이어 리스트라에서 선교가 소개됩니다.
선교의 대상은 무지無知한 사람들입니다. 이코니온에서 무지한 사람들은 사도들을 괴롭히고 죽이려 했고 사도들은 이를 피하면서 박해중에도 끊임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한결같이 계속되는 무지한 이들의 적대적 반응입니다. 참으로 무지가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의 고질적 질병인지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는 무지한 인간 현실입니다.
오늘 리스트라에서 바오로 사도의 앉은뱅이 치유후,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 오셨다.”는 군중들의 열광적 반응이 무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두 사도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이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외관상 똑같은 사람이지만 내적으로는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인지요!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입니다. 여전히 길을 잃고 헛된 것을 추구하다 보니 유령같은 삶이요, 괴물이, 폐인이 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돌아 가는 회개뿐이요,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충실한 것이 무지에 대한 근본처방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주님과의 친교를, 사랑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교사로서의 활동에 앞서 주님의 제자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내적 사랑의 관계가 선교활동의 원천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주님과의 친교에 그 답을 줍니다. 우선적으로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두차례 강조되는 내용이 대동소이 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것이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에게 당신을 체험토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활동에 앞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의 준수로 주님은 물론 형제들과 우정의 사랑을 깊이 하는 것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다시 반복되는 계명 실천의 중요성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인 사랑의 실천에 항구할 때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전 고백성사차 방문한 본당 사제와 일치되 내용도 있습니다. 이제는 수도자들은 물론이요 본당 사제들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수행자로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도움이 되는 분이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영적 스승이 없다 탄식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영원한 영적 스승인 보호자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해주시며, 주님의 훌륭한 제자요 선교사로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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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V_B4YpzW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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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성령의
이끄심으로
생명의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다시 열리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믿게 하신다.
한없이
가장 좋으신
성령을
매순간
우리들에게
주신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기억과 사랑의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성령의 시간이
바로 착한
열매를 맺는
은총의
시간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길을 다시
찾아 주신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새 마음으로
이어주신다.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는
살아계신
성령이시다.
숨 쉴 때마다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성령이시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내려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하신다.
십자가의
상처까지도
가장 좋은
사랑이 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다시 새롭게
다시 뜨겁게
하시는
사랑의 참된
보호자 성령께
우리의 삶을
맡겨드린다.
모든 것을
일치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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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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