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을 털어 버린 잿빛 세상.
어찌보면 초겨울이 일년 중 가장 음울한 때이다.
하지만 거대한 자연의 윤회가 시작되는 시즌이기도 하다.
더불어 성찰의 계절이다.
우리 삶에도 윤회의 기회가 있을까.
내가 죽는다면, 그리고 다시 새로운 삶이 주어진다면….
삶과 죽음, 그 경계와 마주하는 임종(臨終)체험을 다녀왔다.
지난 4일 경남 양산에 자리잡은 임종체험관으로 향하는 차 안.
스피커 너머로 연말을 알리는 '올드 랭 사인'이 귓전을 은은하게 맴돈다.
문득 머릿속을 지나가는 망상 하나.
'오늘, 죽기엔 괜찮은 날이야'.
유언장을 쓸 때는 만감이 교차하면서 손끝마저 떨려 온다. | |
#웰 다잉(well-dying)의 시대
46분마다 한 명, 사망자 100명 가운데 5명꼴. 전체 사망원인 중 교통사고보다 높은 4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가운데 불명예 1위. 국내 자살에 관한 통계다.
'웰빙' 못지 않게 '웰다잉'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다. '문 밖이 저승'이란 옛말처럼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웅크리고 있다. 이승과의 마지막 순간,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까. 임종체험은 인간의 이런 근원적 물음에 대한 작은 해답을 제시하고자 만들어진 이벤트이다. '가짜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남은 삶을 더욱 가치있게 살아가자는 게 목적이다.
한화석유화학(주) 울산공장의 생산관리직 26명. 기자와 함께 이날 '저승길'을 동행할 길벗이다. 40·50대의 중장년들로 기업체 연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참여했다. 솔직히 마지못해 죽으러 온 사람들이다.
먼저 영정사진을 찍었다. 이왕이면 미소 띤 얼굴이 좋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다른 참가자들 표정도 한결같이 심드렁하다. 아무리 거짓 죽음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유쾌할 리 없다. 영정사진을 끼운 앨범 표지에는 'Return to Life(삶으로의 귀환)'라고 적혀 있다.
곧이어 강의실 이론수업. 임종에 앞서 성찰과 거듭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감정터치' 시간이다. 삶과 죽음에 관한 영상물이 중년 참가자들의 마음을 미묘하게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죽음은 낯선 단어에 불과하다.
#유언장 작성, 펜 끝이 떨리다
유언장 작성 시간. "날짜와 서명을 남기면 그 때부터 법적 효력이 발생한다"는 최해욱 원장의 말에 강의실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비로소 죽음과 진지하게 마주하는 순간이다.
경우에 따라서 실제 유언장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첫 문장부터 막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지우고 다시 쓰기를 몇차례, 슬쩍 다른 참가자들을 엿봤다. 종전의 산만한 분위기는 간데없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한 시간 내내 원고지를 빼곡히 채우는 이도 있었다.
이런저런 내용을 써 내려가다 가족 대목에서 손에 맥이 풀리면서 계속해서 필체가 엉클어졌다. 감정의 기복이 생겼는지 펜 끝이 떨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더 못쓰겠네…"라며 혼잣말을 내뱉곤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참가자도 보였다. 삶을 정리하는 순간, 소중한 사람들에게 느끼는 애틋함은 다들 비슷한 모양이다.
최 원장은 매번 임종체험을 진행하면서 유언장을 작성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자신도 가슴이 미어온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유서작성이 끝나면 치르는 입관식. 임종체험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 |
#죽었다, 내가…
오후 4시경. 검정 도포와 갓을 차려 입은 저승사자들을 따라 각자 작성한 유언장과 영정사진을 앞세우고 건너편 건물의 입관(入棺)실로 향했다. 사실상 임종체험의 하이라이트이자 대미의 순간이다. 북망산 가는 길을 비추기라도 하듯 서산에 반쯤 잠긴 짧은 겨울해가 더없이 눈부시다.
문을 열고 들어선 어두컴컴한 입관실. 모래 바닥에 놓여진 수십개의 오동나무 관을 보자 머리끝이 쭈뼛 섰다. 옅게 풍기는 향, 맨 앞쪽에는 조화들이 세우져 있어 합동장례식장을 연상시켰다. 천장에 뚫린 구멍 사이로 여린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장내는 음산한 분위기에 신비감까지 더했다.
죽음이 발아래 와있자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기자와 참가자들 모두 각자 누울 관 옆에 영정을 세우고 수의를 갈아 입었다. '공수래공수거' 누런 수의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입관식에 앞서 다섯 명을 추려 각자의 유언장을 낭독했다. 지나온 삶에 대한 반성과 회한이 절절하게 스며든 참회록들이다. 특히 가족에게 유언을 남길 때는 다섯 명 모두 목소리가 잠겼다. 애써 슬픔을 삼키려는 헛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울먹이며 유언장을 읽던 마지막 참가자는 '자신의 시체를 깊은 바다 속에 수장시켜 달라'는 문구에서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만 떠날 시간입니다." 최 원장의 음성도 가늘게 떨려 왔다. 신발을 벗고 관 속에 몸을 눕혔다. 실제 관 크기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하는데 몸을 옴짝달싹도 못할 만큼 비좁다.
저승사자들이 관뚜껑을 하나둘 닫기 시작하자 연출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극도의 공포가 엄습했다. 몇몇은 관 봉인을 완강히 거부하기도 했다(원하는 사람에 한해선 관의 뚜껑을 닫지 않는다).
뚜껑이 덮이고 이내 나무못으로 관이 봉인됐다. '쾅, 쾅' 천둥같은 망치소리, '차르르~' 곧이어 관 위로 모래 뿌려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이 그 순간 헉 하고 막혔다. 내가 죽은 것이다.
#그리고 부활, 삶은 계속된다
"이제 육체와 혼이 분리되었습니다. 10분간 자신이 걸어온 삶을 되돌아 보세요." 관의 벌어진 작은 틈을 통해 가느다란 빛이 들어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순간 영화 필름 감듯 자신의 생을 되돌아 보는 임사(臨死)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기자는 그런 기묘함은 체험하지 못했다. 다만 폐소증에 가까운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내보내 달라'고 비명을 내지르고 싶었다. 관 속에 묻혀 있는 동안 떠오른 것은 오로지 '살고 싶다'는 본능뿐이었다. 굳이 그 안에서 얻은 교훈을 말한다면, 훗날 죽음을 맞이하면 매장보다는 화장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숨도 쉴 수 없는 좁고 습한 땅 밑보다는 바람결에 허공을 날고 싶다.
영겁만큼 길고 아뜩했던 10분이 지나고 드디어 관이 개봉됐다. 콧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 다시 살아났다는 희열과 안도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최 원장은 "임종체험은 어둡고 공포스러운 죽음의 교육이 아닌 삶의 의미를 일깨우는 희망의 교육"이라며 "생을 한번쯤 정리해야 할 중년층 외에 청소년 등 젊은 세대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고 말했다.
■ 유언장
삶을 성찰하고 되짚어 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유언장 쓰기이다.
죽음 자체를 터부시하던 과거와 달리 최근 유언장 쓰기를 생활양식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추세다.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의 경우 종신보험 가입 요건으로 유언장을 요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언장 작성에는 따로 정해진 양식이 없다. 그래도 막상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면 현재 자신의 심경, 가족들에 대한 애정, 지인이나 직장 등 업무적인 사항, 마지막으로 미처 이루지 못한 소망 등을 일기 형식을 빌려 써내려 가는 것이 좋다. 평소 글쓰기에 익숙지 않다면 단문 형식으로 짧게 답하듯 적는 것도 요령이다.
한번 쓴 유언장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수정·보완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작성한 유언장을 유가족에게 전달해주는 온라인 서비스도 생겼다. 생전에 e-메일 형태로 유서를 쓰고 해당 사이트에 유료로 보관을 의뢰하면, 업체는 매달 생사 여부를 체크하고 작성자가 숨지면 가족들에게 e-메일이나 우편으로 유언장을 전달해 준다.
상속과 같은 재산 분배나 법적 분쟁을 야기할 만한 민감한 유언이라면 반드시 법률이 정한 일정한 요건을 거쳐야 한다.
현행 민법이 인정하는 유언장은 본인이 자필로 전문(全文)을 써야 하며, 작성 날짜 이름 주소를 적은 뒤 반드시 서명 날인을 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법률적으로 무효가 된다.
120억 원의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장에 날인을 빠트려, 대학과 유가족 간에 3년간 법정 공방을 벌인 사례도 있다.
자필증서의 유언 외에 민법에서 인정하는 유언 형태로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으면 되는 공증증서 유언, 작성한 유언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는 비밀증서 유언, 녹음, 남이 대신 써주는 구술에 의한 유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공증증서 유언이 가장 확실한 법적 효력을 보장받는다.
첫댓글 저걸 한국 문화라고 하기엔 좀
저런 프로그램은 적절치가 않네요. 우울증 증세가 있던 사람이나 남다른 고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저런 계기가 극단적인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도 있는데. 차라리 개똥 밭에서 구르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어떨까요?
자기를 되돌아 볼수 잇게 할수 있는 독특하고 좋은 체험인것 같네요. 정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갖게 될듯
우리가 서양의 문화를 다 이해못하듯 서양도 우리의 문화를 다 이해못하는겁니다. 임종체험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고 자살이나 우울증환자 안좋다는 기사를 쓰는거 보면 아직 글로벌 시대는 먼듯....
죽음이 극단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자에게 한정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