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나의 이름은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부당해도 따라야 하는 명령을 내리는 상관이나 버거운 일거리를 주는 직장 상사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살리시는 분이다. 그래서 내 바람과 달라도 또 싫어도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른다. 너와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은 가족이 갈라서는 거,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미워하게 되는 게 아닐까? 말라키 예언자는 말한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건 비극 중 비극이다. 예언자는 아버지 어머니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한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살았다. 그곳은 하느님이 돌보아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 하느님만 의존하며 사는 곳이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께만 속한 이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쳤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루카 3,5).” 의심하지 말고, 교만 떨지 말고, 쓸데없는 데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 말씀을 말 그대로 하느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이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고 제발 그 말씀을 듣고 따르라는 간절한 호소다. 요한이 아주 거칠게 말한 건 위협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구세주가 아니다. 그는 구세주가 들어오실 길을 닦는 사람, 그분이 쉽게 사람들 마음속으로 들어가시게 길을 내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단 하나, 서로 사랑하는 거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법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평화를 만들지 못한다. 구세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온 생애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이다. 그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을 따름은 곧 서로 사랑함이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시어 기적적으로 임신하고 출산했다. 그는 그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요한은 ‘하느님이 자비를,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요한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의 외침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온 생애는 하느님 사랑의 번역이다. 예수님이 안 오셨다면, 그분이 보여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도 하느님을 법대로만 판결하는 무자비한 재판관으로 알고 있었을 거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마지막에는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처럼 영원히 살게 해주고 싶어 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 바람을 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알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우들의 가장 큰 약점은 이 은혜로운 신앙을 실제 생활로 잘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해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할 수 있으면 그를 배려하고, 때론 시간과 재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 내 안에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신 하느님께 인사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엘리사벳은 사람들에게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루카 1,60).”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나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예수님,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고 친구고 동생입니다. 주님 덕분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이가 부모 말을 듣는 거처럼 그렇게 하느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손으로 아드님을 가리키시는 거처럼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언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