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를 기리며
올해는 장맛비가 예년보다 더 늦게까지 이어졌다.
길어진 빗속에 김민기 선생님이 영면에 드셨다.
나에게는 저기 앞에 있던 우일한 불빛 하나가 깜빡이다가 뚝 하니 꺼져버린 기분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추억을 공유했다.
선생님과 내가 같은 시대를 이만큼이나 함께 살아왔는데 여태 한번도 뵙지를 못했다.
나는 이것이 몹시도 아쉽다.
많은 음악가나 예술가들이 존경하고 우상으로 삼는 이와의 만남을 고대하듯 나 또한 그러했다.
남들에 비해 한참 늦게 음악가가 되었음에도 나는 적이 아이같이 순진하고 간절한 소망을 가졌었다.
내가 만든 노래를로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다가 언젠가 선생님께 내 음악을 돌려드려야지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 처음 그림일기를그렸던 날을 기억한다.
생애 첫 그림일기를 완성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는데 제목도 무려 '나의 아픔'이었다.
애를 써 마침내 완성한 일기를 다음날 선생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설레고 주삣거리며 책상 사이를 걸어 나갔던 순간도 기억한다.
연세 지긋하셨던 이순희 선생님이 보시고는 창찬을 듬뿍 해주셨다.
덕분에 이후로도 꼬박꼬박 일기 숙제를 잘 했던 것이 기억의 마무리이다.
나도 음악으로 쓰고 그린 내 그림일기를 김민기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결국 이루지 못한 바람이 되었다.
내가 처음 기억하게 된 선생님의 노래는 '백구'이다.
어릴 적 라디오에서 듣게 된 이 노래에 나는 귀가 이만큼 커져서 숨죽여 듣다가 너무 슬퍼서 그만 울어버렸더랬다.
아니, 가요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프로에 동요 같은 노래가 나온 것도 신기했는데,
이야기인지 노래인지 모를 긴 곡이 한숨에 들렸던 것은 더욱 인상적인일이었다.
이후로 양희은선생님의 목소리로만 알던 '아침 이슬'을 선생님의 목소리로 듣게 되었을 때,
아무렇지 않은 슴슴함이 가슴뼈를 두드려 울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다 광고에서 '천리길'이 흘러나오고, 박세리 선수의 맨발 투혼과 함꼐 '상록수'가 흘러 나왔을 때
주변 친구들에게 이 노래가 알마나 멋진 노래 곡인지 들떠 자랑도 하고,
대학생이 되어 노랫말 속 '철망' '기지촌' '피어린 항쟁' '민족' '겨레' '혼열아' 등의 단어들에 놀라다가,
회사원이 되어 '처마 밑에 한 아이'처럼 '친구여 ' 한마디에 눈물바람을 거치며 서서히 그의 음악과 행보는
내 마음의 지표가 되어갔다.
실은 음악가가 된 후로 그를 존경하고 지향하는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주변에 워낙 많아서 나는 괜히 티를 그리 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음악은 나에게 더 깊은 작용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곡(음반) 작업을 끝낸 뒤에 발표하기 직전이나, 단독 공연을 준비할 때 나는 어떤 절차처럼 선생님의 노래를 듣는다.
그의 노래는 나의 마음을 잡아주고 시선을 선명하게 해준다.
과한 더하기 빼기는 없는지, 말 같은 말을 하였는지, 허재비 같거나 잔망을 부려대지는 않는지, 온기는 충분한지,
노래가 노래로서 온전한지, 그리하여 나로서 온전한지, 아직 한참 모자랄지언정 그렇게 나와 내 노래를 되짚고 살피도록 해준다.
이 의식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그는 수많은 동료 후배들의 '뒷것'이 되고자 하셨다지만 실은 그 어떤 존재보다 나에게는 '앞것'으로 소중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고 그의 목소리와 새 노래들도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 몹시 슬프지만,
그가 뜨겁게 살아낸 시절처럼 지금도 여전히 세계는 혼란하고 요란하다.
그 사이에서 하나의 작은 음악가일 뿐인 나이지만 '김민기'라는 큰 사람이 남긴 아름다운 것들을 앞것 삼아
내가 살아낼 시간 속에서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애써 볼 요량이다.
늦게나마 이렇게 몇자 적어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매우 감사드린다.
ㅇ늘은 '식구 생각'이 맴돌아 틀어두고 창밖을 본다.
문득 또 한번, 아 선생님 안 계시네 이제, 또 비가 오려는지 헛헛한 여름 바람이 분다. 정밀아 포크 싱어송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