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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금계
4. 철마로 주변 2
6월 22일 이른 아침, 나는 또 자전거를 끌고 길을 나선다.
우리 집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중간 창문가에 ‘나도풍란’이 예쁘게 꽃을 피워냈다. 나는 이 꽃의 우윳빛 순백색과 고동색 꽃무늬를 끔찍이 사랑한다.
우리 동네 방앗간. 전에도 한 번 이 집에서 미숫가루를 빻아다 먹었는데 이번에 또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미숫가루를 빻았다. 전번에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한 달 만에 벌써 1킬로 가량 체중이 빠졌다.
소설가 소영 박화성(1904-1988) 선생 흉상.
본명 경순. 4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읽고 7,8살 때 삼국지 옥루몽 구운몽을 읽었다 한다. 상당히 파란만장한 삶.
목포정명여학교, 숙명여고보. 니혼여자대학교 영문과.
1932년 ‘하수도공사’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 - 백화, 고향 없는 사람들, 헐어진 청년회관. 불가사리. 고개를 넘으면. 벼랑에 피는 꽃. 내일의 태양. 태양은 날로 새롭다. 열매 익을 때까지. 창공에 그리다.
철마로 부근 길가에 그분을 기리는 정자 세한루(歲寒樓)와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 자리는 박화성 선생이 여러 해 머무르면서 소설을 쓰고 후학을 지도하던 곳이라 한다.
어제는 우리 집에서 동쪽 철마로로 갔지만, 오늘은 동네 방앗간과 세한루를 거쳐 서쪽 방향 철마로로 접어든다. 아침 선선한 공기를 마시려고 꽤 많은 사람들이 산책로로 나왔다.
철마로 곁 어느 집 옥상에 올라앉은 소나무 분재들, 분재 중에서도 소나무 분재는 기르기가 까다롭다던데 저 집 옥상의 소나무 분재는 십 수 년째 지나다녀 봐도 늘 썽썽하다. 주인장의 정성이 지극한가 보다.
철마로는 산책뿐 아니라 자전거 타기도 꽤 괜찮은 길이다. 자동차 배기가스도 없어서 공기가 맑아 풋풋하고 싱그럽다. 게다가 예전에 기차가 지나다니던 곳이라 경사가 느리고 비교적 평탄해서 페달을 죽어라 밟을 수고로움도 덜하다.
목포동초등학교 - 이 학교도 기차가 지나다니지 않고부터 굉음에서 해방되었다.
동초등학교 부근 산책로 건널목. 푸들을 끌고 나온 아저씨. 우리 집에서도 한때 푸들을 키웠다. 이제는 절대로 개를 키우지 않는다. 우리 집 마당에서 놀고 있는 푸들 ‘다롱이’를 옆집에서 무단 침입한 우악스런 개가 물어 죽이는 바람에 속이 상할 대로 상했다. 사람만 죽어서 슬픈 게 아니라 동물이나 심지어는 식물이 죽어도 가슴이 아프다.
교회 건물치고는 외관이 현대적으로 상당히 세련되었다. 이 교회 뜰에 들어가면 여름 가을철에는 정다운 해바라기나 백일홍 과꽃이 피어 있어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하므로 퍽 마음에 든다.
목포 명문 목포고등학교. 뒤에 보이는 산이 유방을 닮았다고 유방산. 목포고등학교는 전통적으로 목포의 우수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1등 위주, 학벌 위주의 낡은 폐습을 버리고, 대학도 평준화하고, 공부를 잘하면 잘하는 대로, 꼴찌는 꼴찌대로 각자 적재적소에서 나름대로 평안하고 보람찬 삶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목포고등학교 울타리 너머 청호중학교. 내가 4년이나 근무하면서 숱한 추억을 쌓았던 곳. 지난봄에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겨 지금은 적막강산이다. 이곳이 앞으로 무엇으로 쓰일지 자못 궁금하다.
청호중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달중학교. 나는 청호중학교에서 근무한 다음 유달중학교로 이동해서 4년 동안 근무하고 정년퇴직했다. 나 근무할 적에는 운동장이 맨땅이었는데 이제는 천연잔디를 심어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아무리 예전에 내가 근무했던 곳이라 해도 이제는 쑥쑥 들어가기가 괜히 쑥스럽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하는 법이렷다.
유달중학교 체육관. 나는 저기에서 체육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느라고, 체육관 지은 후에는 탁구, 배드민턴을 치느라고 땀깨나 쏟았다.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꾸준히 운동을 해야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때마침 등교시간이다. 유달중학교로 등교하는 남녀 학생들. 나는 꽤 오래 전부터 여중학교 남중학교를 반반씩 섞어서 남녀공학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엄격하게 둘러친 담장을 허물고 안이 들여다보이도록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자 유달중학교도 완고한 담장을 헐고 밖에서 보이도록 투명해졌고,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유달중학교에서 나한테 국어수업을 받던 학생이 교지에 교사 평을 썼는데 날더러 ‘경세지재(經世之才)’라 했다.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리라냐? 제갈공명처럼 천지인의 흐름에 정통하지도 못할 뿐더러 옹졸하고 어설픈 똥고집 훈장한테 웬 날벼락이라냐?
그 학생 경세지재가 되었는지 어땠는지 아직 소식이 없다.
유달중학교 부근의 2호 광장. 목포에는 1호, 2호, 3호 광장이 있는데 이름만 광장이지 그냥 단순한 교차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해안지대였던 목포에서는 1호, 2호, 3호 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가장 넓고 중요해서 6,10 민주항쟁 때는 목포시민 절반쯤이 쏟아져 나와 1,2,3호 광장을 휩쓸고 다니면서 함성을 질렀다. “전두환이 물러가라!”
동부시장 바깥 길. 양파 값이 싸다더니 여기저기 양파가 넘쳐난다. 수확량이 떨어지면 수입이 적어 울상이고, 수확이 많으면 값이 떨어져 울상이고, 요래조래 무안 농민들은 죽을 맛이다.
동부시장. 예전에는 난전이었는데 재래시장 현대화정책으로 지붕을 덧씌워 말끔히 단장했다. 붐빌 때에는 사람이 발에 걸려 비켜가기도 힘들 정도다. 사람 냄새를 맡고 싶으면 시장을 찾을 일이다. 나는 딱히 살 물건이 없어도 동부시장을 어슬렁거리기 일쑤다.
일년감(토마토) 철인가 보다. 상자마다 가득 담긴 토마토 보니까 어렸을 적 커다란 토마토를 쥐어주던 울 엄니 생각이 난다. 소년시절 나는 유난히 비글비글 맥이 없고 기가 약했다.
“얼른 먹어라. 이게 몸에 좋단다.”
수박은 우물에 담가놓았다가 밤늦게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함께 나눠먹었다. 마당 평상에 누워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으면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잠에서 깨어나면 수박 내놓으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수박은 한 조각 살강에 숨어 있었다.
동부시장에서 가장 번화한 먹거리 골목.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 아마도 여기 있는 산해진미는 진시황도 다 맛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 언저리가 우리 마나님의 단골가게다. 갈치, 병치에 민어, 부세, 우럭, 고등어도 보인다. 뭐니 뭐니 해도 목포의 대표 생선은 먹갈치, 병치, 민어다. 요즘은 크고 두툼한 갈치, 병치 구경하기가 쉽지 않아서 서울 사는 아들한테 보기 좋게 몇 마리 싸 보내려면 십만 원, 이십만 원은 금방 훌쩍 넘어간다.
목포 생선 구하기가 날로 어려워진다. 연근해 어족 남획으로 씨가 마르는데다가, 그나마 중국에서 싹쓸이해가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