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변화라곤 하루가 바뀐 오전가 오후의 차이일 뿐
비가 여전하다. 스치는 지하철역에서, 거리의 메스컴에서 호의주의보,
호우경보에 수백미리의 비가 더 내리겠다는 엄포인지, 경고인지, 안내인지, 공갈인지
알 수 없는 멘트에 아량곳없이 비는 내린다. 숱한 영혼들의 분노의 눈물인지, 자기고백의
부질없는 하소연인지, 살아 못다 흘린 내 영혼의 고백인지...
육과 영의 존재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가?
형이상학의 고차원적 논리로 현실과 미래의 삶이 나뉘어져 고민될 수 있는 것인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하고 현재의 삶이 미래를 규정한다는 맑시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시장경제로 통용되는 21세기 현실세계의 삶앞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님이 엄연히 실체로 존재하는 독보의 삶에서 신은 영원은 구원자인가?
허정! 우리 일상에 어찌 굴곡과 분노가 없을 수 있겠냐만은
그런 건강한 분노와 가지 성찰의 모습은 늘 살아있음의 건강한 자기 표현일 뿐이다.
야 지천명의 세월, 그 영욕의 경륜과 삶의 지혜를 염려치 말지어다.
첫댓글 좋은 내용이네.
쪼매 갔다가 결국에 돌아오고마는 오새기를 누가 감히 염려한단말인가.염려는 사랑의 굴레를 뒤집어 쓴 것인 것을 모르는 이 또한 없도다,
ㅎ....형님!....염려는 사랑의 굴레...맞는 말씀 이네요....수직적 과 수평적의 사랑에서는....일방적일때...오히려....큰 부담을 느끼는것 같씁디다....세상에서는 말입니다...음
외부인혹은 주변인의 입장에서 미래의 귀결이 형이상학적 이지만...참여인 혹은 내부인의 포지션에서는 예측 결과의 미래일뿐....단순한 귀결 인것 인데...그 과정 역시 미래의 확신만으로 그 분깃이 상이 하기때문에....지금 시간 안에서는 큰 시험을 스스로가 자처 하게 되는것..그래서 영과 혼과 몸은...따로 움직일수 밖에 없는 것..그러나 중요한것은..내안의 존재와 밖의 존재의 차이점을 인정해도..결론은 객체와 주체가 본인 자신인 것이다..그러므로 책임과 사함 그리고 해방 사이에서 교만해지는 자신의 오점을 발견 하게 되는것이며...궁극적인 결론은 살아 있는 지속성의 생명 이라고..음...각자의 짊이 따로 겠지..잘살자...들
종교적인 해석은 언제나 이해불능에 골아프다~ 그래서 이렇게 외치나보지? 믿십니까???
안되겠다.오새기하고 독보 니하고 다방에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