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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지 두달여 지난 후
홍씨의 아들을 왕위를 이을 동궁으로 책봉한다.
세손인 아들이 동궁이 되었다고 하여
홍씨의 근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동궁 책봉은 왕이 되기 위한 첫걸음일 뿐
그후에 갈 길은 앞으로도 더욱 멀고 험한 길.
세손은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홍씨는 남편이 죽은뒤 처음 영조를 만난 자리에서
세손을 영조가 있는 경희궁으로 데려가 가르치길 간청.
영조가 자신 때문에 홀로된 며느리 혜경궁 홍씨에게 묻는다.
“아들인 세손을
내게 보내고나서
혼자 견딜까 싶으냐?”
“떠나 보내며 섭섭하기는 작은 일이요,
위로 모셔 장차 배우기는 큰일이로소이다.”
혜경궁홍씨는 아들을 영조의 품으로 보낸다.
아들의 장래 운명이 영조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어머니를 보고 싶어서 우는 어린 세손을
마음 아프지만, 영조가 도로 데려가라고 해도 마다한다.
혜경궁홍씨의
공식적인 칭호는
영조가 하사한 "혜빈."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친정으로 쫓겨났던 그녀가
혜경궁으로 입궐하면서 받은 이름.
'혜경궁 홍씨.'
그녀는 영조의 딸이자
시누이 화완 옹주에게도
각별한 정성(精誠)을 쏟는다.
그녀는 ‘한중록’에서
화완 옹주를 무시하고
행실을 비난도 하였지만
영조의 사랑을 받는 화완 옹주.
그녀를 이용해 아들이 영조 눈밖에
나지 않도록 ‘특별관리’ 하려고 했던 것.
목표는 단 하나
‘아들의 보위’였다.
결국, 혜경궁 홍씨의
아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은
아들을 정조로 등극시키는데 성공.
사도세자가 죽은지 14년 만에
조선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아들.
온갖 시련을 견디고 이날을 기다린 그녀.
"주상을 간신히 길러내어
보위에 오르시는 모습을 뵈오니
어미의 마음으로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목차...
1. 한중록.
2. 왕의 어머니.
3. 혜경궁 홍씨.
1. 한중록.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쓴., 역사 기록이지만,
그 내용은 충격적인 고백이자 인간적 절규에 가깝다.
조선왕실의 그 어떤 여인도 감히 남길 수 없었던.,기록.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기억력이 특출나고 총명하여,
한번 들은 이야기는 절대 잊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중록>의 독자는 누구나 정조의 말에 수긍하게 될 터다.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3차례 회고록을 묶은 책이다.
혜경궁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친인척의 청탁에 의해서였다.
61세 때인 1795년 혜경궁은 조카 홍수영 부탁을 받고,
"나의 일생"으로 이름 붙여진 `간이 자서전'을 써 줬다.
정조가 죽고 얼마 후인 1802년 순조의 생모, 가순궁이
자손도 알 수 있도록 사도의 삶에 대해 들려달라고 부탁.
'내 남편 사도세자'를 썼던 것이 그녀가 남긴 두번째 기록.
정조가 죽고 친정인 홍씨 가문이 위태롭게 되자
'친정을 위한 변명'이라는 회고록이 세번째 기록물.
9살 나이에 동갑내기 남편의 세자비로 간택되어
앞날의 권세가 예정되었던 혜경궁 홍씨의 운명은
뜻밖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극으로 치달으며
벼랑 끝으로 몰려 1762년 음력 5월에 남편이 죽게된다.
영조가 사도에게 자애가 없어 그가 서서히 미쳐갔고,
미친 자식이 날뛰니 영조는 종사를 지키기 위해.,결단.
혜경궁이 이 일에 관해 사실 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은
임오화변에 관한 공식 역사기록이 훼손된 것이 글쓴 이유.
정조는 1776년 즉위 직전 영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승정원(왕의 비서실)의 임오화변' 기록 멸실을 요청.
아버지 사도의 괴이한 죽음이 즉위 후 부담이 되었던듯.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소문들이 권력암투
가운데 바깥으로 번져나갔다.
"사도가 병환이 없는데 영조가 신하들의
헐뜯는 말에 넘어가 자식을 죽인 것이다."
"홍봉한(혜경궁의 아버지) 등이 권하여
뒤주를 들여오게 했다"라는 풍문이었다.
혜경궁 홍씨 입장에선 이런 소문들은
곧바로 친정을 공격하는 빌미로 느꼈다.
왕의 외척이 된, 혜경궁 홍씨 가문은
그녀가 궁에 들어오며 입신양명 권세.
혜경궁 아비 홍봉한은 삼정승의 자리를 두루 거쳤고,
병권과 재정을 총괄하는 자리를 오가며 실세로 살았다.
'작은 아버지' 홍인한 또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
하지만, 66세 영조의 계비가 된 15세 정순왕후.
궁에 들어와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정조가 즉위하자 권력구도의 물갈이가 필요해졌다.
많은 권력을 이미 장악한, 혜경궁 홍씨 가문.
이때부터 집중적인 견제와 공격을 받게 된다.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내 목숨이 아침 저녁 사이에 왔다갔다하니,
내가 쓴 기록을 주상 어미인 가순궁에게 맡겨,
내가 죽은 후에라도 주상에게 드리고자 하노라.
.......................
........................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가 지은.,4편의 회고록.
제1편은 회갑해에 나머지 세 편은 1801/5년(순조 1~5)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한문본· 국한문혼용본 등.
사본에 따라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
4편 종합본은 '한듕록' '한듕만록'의 두 계통 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 입궁 후 50년 궁중생활을 회고.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기록을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 모함으로
아버지· 삼촌· 동생 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대변.
제 2 편은 화성 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인들과 친척들 이야기로 끝맺음.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화완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 기록.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 사건(洪麟漢 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洪國榮)의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주장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제 2 편을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 손자 순조에게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의 대화를 인용한다.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 참변 진상을 폭로.
‘을축 4월 일’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에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돌아간 해이다.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서문-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들과
세자 생모 영빈과 불화로 영조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했다.
세자는 그 사이에 공부에는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던 것.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청정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해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洪鳳漢) 주장이 아니라 기록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혜경궁 홍씨는 양쪽의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제1편은 혜경궁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밝힌 해명서.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정순왕후 친정 경주김씨와 전 세자빈 친정 풍산 홍씨
간에 정권다툼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그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祕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정명공주 후예로 명문가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었다는 사실에서,
정계 야화로서 역사 보조자료로서 가치 있다.
임오화변 이유 및 홍봉한 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록.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
한중록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貴人)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 규범 여인상을 볼 수 있다는 점 등.
그녀가 쓴 한중록은 조선시대 고전문학의 백미.
2. 왕의 어머니.
1795년 을묘년, 봄빛이 화창한 윤2월 9일 아침,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화성으로 향한 혜빈 홍씨.
아들 정조가 마련한 조선왕조 사상 최대의 인원과
물자가 동원된 8일 동안의 을묘원행에 나섰던 것이다.
정조는 새로 축조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와 함께 그해 61세가 된 어머니
혜빈 홍씨의 회갑연을 준비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등극과 동시에 일갈했던.,정조.
할아버지인 영조 이래로
강력한 신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입지를 뒤흔들던
'노론'의 세력을 억누르고
진정한 군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당시 정조는 노쇠한 혜빈 홍씨의 건강을 염려하여
출궁과 회갑 진찬연과 현지에서 벌일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의 리허설까지 벌린 아들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화성 행차는 긴 여정이었지만 홍씨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화성의 현륭원에 당도한 그녀는
28세의 나이로 비명에 죽은 남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어루만지면서
오랜 세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정조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주고
'혜빈(惠嬪)'이었던 그녀의 궁호를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려주었던 것.
아울러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바쳤다.
홍씨가 비정한 정치놀음의 희생양으로
젊은 날에 남편을 잃은 뒤 수많은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들 정조를 지켜내기 위해 살아온
30년 고행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했던.,화성 행차.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은 일종의 회고록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
그 시대의 치열했던 당쟁의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중록은 한 권의 책으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크게 두 차례의 집필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 시기는
아들 정조가 조선 최대의 원행인
을묘원행을 통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전배.
화성행궁에서 회갑잔치까지 벌여주었던 1795년(정조 19년)경.
‘내가 언제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
혜경궁 홍씨는 이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환갑을 맞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기에 이 책의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말 '한중록(閒中錄)'이다.
여기에서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이 비정상적인
성격을 보이던 영조와 그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린 사도세자 때문에 벌어진 사건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갈등은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 당시 아내로서
남편을 적극적으로 구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아울러 사위의 죽음을 방관한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비호.
역사가들에 의해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두 번째 집필은 정조 운명 1년 후
1801년(순조 1년) 정순왕후에 의해
그녀의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무렵에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듯한
비통한 심정이 되어 붓을 들었고,
제목은 <읍혈록(泣血錄)>이 되었다.
하여, 한중록(恨中錄)은
1795년의 한중록(閒中錄)과
1801년 읍혈록(泣血錄)이 합쳐진 책.
혜경궁 홍씨는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 가순궁 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정을 하게 되면
정순왕후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길 바란 것.
.....................
......................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인 홍봉한과
시아버지 영조와의 첫 인연은 별로였다.
한양 거평동 출신으로 성균관 유생이었던 홍봉한은
1735년 6월 18일 둘째 딸인 혜경궁 홍씨를 얻고 나서
두 달 뒤인 8월 18일 임금에게 노론의 거두였던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게 한후
출석점수가 모자랐던 홍봉한에게 5년 간 유생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로부터 8년 뒤
영조와 홍봉한은 사
돈지간으로 만나게 된다.
3. 혜경궁 홍씨.
1743년 봄, 9세가 된 사도세자는
관례(冠禮)를 치른 다음 절차에 따라
음력 3월 23일에 성균관에 참배하였다.
기쁜 날을 맞아 영조는 성균관에서
활쏘기 행사인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고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르는 알성시(謁聖試)를 실시.
그런데, 당시 31세의 늙은 유생으로
학생회장 격인 성균관 장의를 맡고 있던
홍봉한은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던 것이다.
관례를 치른 세자의 앞에 혼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간택령이 내리자 명문대가 처녀들이 줄지어 입궐했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백여 명의 처녀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지만, 일개 성균관 진사의 딸로서
세자빈이 된다는 것은 천운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에 이르자.,강력한 세자빈 후보자.
홍씨는 정식 발표 전에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과
누나 화평옹주에게 불려가서
이미 사전 예절교육까지 받았다.
그것은 분명 영조의 의중이었다.
생각을 비틀어보면 권력을 쥐고 있던
노론 집안에서 좀 부실한 인물을 찾아낸 것.
그렇게 해서
혜경궁 홍씨는
불과 열 살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된다.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에 불과.
혜경궁은 당시 심정을 한중록에서 표현하고 있다.
‘집에 머물 날이 점점 줄어들자
내 마음은 갑갑하고 슬프고 서러워
밤이면 어머니 품에서 잤다.
두 고모와 중모께서도
나를 어루만지면서
이별을 슬퍼하셨다.
부모님은 아침저녁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어여삐 여기시고,
궁으로 들어가는 나를 불쌍히 여겨
여러 날을 못 주무셨다.’
인생의 대사를 앞두고
잠 못 이루는 어린 딸과,
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부모의 마음,
여느 가정에 볼 수 있는 따스한 풍경이다.
하지만 진실은 저 언덕 너머에 있다던가.
당시 홍봉한은 미리 준비해둔 큰딸의 혼수를
둘째 딸의 세자빈 간택에 몽땅 쏟아 부을 정도.
조선시대에 양반이 왕의 사돈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인생 역전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어린 혜경궁 홍씨는
사고무친한 궁중에서
긴장감에 잠못 이루었다.
‘궁중에 들어온 후로
어른들께 문안드리기를
감히 게을리 하지 못했다.
궁중의 법도가 지극히 엄하여
예에 맞춰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뵐 수 없었고,
날이 늦으면
모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새벽에 문안하는 때를
어기지 않으려고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혼례식은 1744년(영조 20년) 1월 11일에 있었다.
이때 세자나 홍씨 공히 10세에 불과한 미성년자들이었다.
친구 같은
남매 같은
부부가 탄생.
그 결실은 홍봉한의 몫이었다.
그 동안 9품직인 세자익위사 세마에
머물러 있던 홍봉한은 왕실과의 혼인 후
문과 전시에 합격하며 탄탄대로가 펼쳐졌다.
................
.......................
어린 세자빈 홍씨의 궁궐 생활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이른 아침부터 남편과 함께 궁궐 어른들에게 문안을 드리고,
낯선 궁중예법에 적응하느라 종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매우
다정다감해 심심할 틈이 없었다.
궁궐에는 시어머니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이씨를 비롯 화평, 화협, 화완,
화순옹주 등 여러 시누이들이 있었다.
그 무렵 영조는 옹주들 가운데서도
선희궁이 낳은 맏딸 화평옹주를 편애.
사도세자는 누나의
막후 지원을 받으면서
아버지 영조의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화평옹주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빠진 영조의 심기가 틀려
그 여파가 세자 부부에게까지 왔다.
1749년(영조 25년) 15세 성인이 된 세자 부부는
비로소 의식을 치르고 합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데 바로 그날 영조는
세자에게 선위교서를 내려
조정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세자는 물론 신하들이 눈물로
호소했지만 영조의 입장은 단호.
그것은 경종의 독살설이
퍼진 이래 수시로 발휘되는
영조의 변덕이자 충성심 테스트.
그 사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세자의 속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화평옹주 사망후 영조의 사랑은
화완옹주에게 기울었고 그와 동시에
세자와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감정기복이 심했던 영조는 '이인좌의 난' 이래
자신이 경종을 독살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기에 42세에 얻은 사도세자를
경종을 모셨던 궁인들에게 맡긴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아들조차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해부터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지만 끊임없이 간섭하고
질책하면서 부자 간의 사이가 더욱 더 멀어졌다.
변덕스런 아버지의 뒤틀린 시선을 의식한 사도세자는
울화증에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식사조차 목에 걸렸다.
뛰어난 무예 실력에 자유로운 예술가 기질까지 갖췄던 세자.
어느 결에 아버지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세자는 날이 갈수록 정신이상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세자빈 홍씨가
의소세손을 낳았지만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산으로 죽은 화평옹주를 떠올리며 비탄.
2년 뒤 의소세손이 병으로 죽었지만
사도세자 부부에게 위로 말조차 없었다.
그럴 즈음에 터진 1755년(영조 31년) 나주벽서 사건.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니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벽서의 주범은 소론 강경파 윤취상의 아들 윤지였다.
그로 인해 이듬해 소위 을해옥사가 벌어졌다.
윤지, 윤광철, 박찬신 등 수많은 소론 인사들이
죽음을 당하고 직접 관련없던 소론의 영수 조태구,
유봉휘, 이사상 등에게도 역률이 적용되었다.
이미 죽은 이광좌, 조태억의 관적도 삭탈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5월 역도를 토벌한 기념으로
실시한 토역경과(討逆慶科)에서 다시 조정을 비난하는 글.
범인은 이인좌의 난으로 사형당한 심성연의 아우 심정연이었다.
그로 인해 윤취상의 동생 윤혜,
김일경의 종손 김도성 등 몇
남지 않은 소론 인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연이은 두 사건으로 인하여
소론은 붕당 기능을 거의 상실.
1756년 가을, 세자빈 홍씨는 둘째 아들인 정조를 낳았다.
그때의 소회를 그녀는 <한중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비록 20세 전의 나이였지만
떳떳하고 흐뭇한 마음이었다.
이 아들에게 훗날 몸을 의탁하리라
생각하니 어찌 기쁘지 않았겠는가.”
혜경궁 홍씨가 원손을 낳자 아버지 홍봉한은
어영대장, 비변사 당상, 좌참찬 등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결과 홍봉한은 노론 외척당
북당의 영수로 정계를 좌지우지.
그런데 당시 수렴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가
소론의 견해에 동조함으로써 장인과 척을 진다.
이대로 영조의 치세가 저물고 사도세자가 등극하면
이미 재가 된 소론의 불씨가 살아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복수극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고심하던 노론 일파는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결정.
구체적 행동에 들어가자 혜경궁 홍씨는 몹시 곤란한 처지.
아버지를 따르자니 남편이 울게 되고,
남편을 따르자니 아버지가 울게 된 것.
결국 혜경궁은 남편 대신 아버지를 선택.
가문과 권력이
부부라는 관계보다
우위에 있던 시대였다.
그로 인해 안팎으로 고립된 사도세자는
죽은 효장세자의 처남인 소론의 영수
조재호에게 의지했다.
그러자 노론 측에서는
나경언 고변사건을 조작해
영조를 몰아세웠다.
그 와중에
세자를 편들어주던
대비 김씨와 왕비 서씨가 운명.
이제 세자 곁에는 완충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영조는 공공연히 세자에게 면박을 주었고,
울화증이 깊어진 세자의 상태는 악화되었다.
이때 상황을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술회.
세자가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평양을 왕래하는 등 난행과 광태.
세자는 내시 김한채를 밀고자로 의심하여 목을 베어 버렸다.
평소 멀쩡하던 세자는 발작하면
그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을 지경.
그렇듯 세자의 상태가 극에 치닫자
생모인 선희궁 이씨는 저간의 일을
영조에게 고해 파국을 몰고 왔다.
평소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영조는
그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알고 크게 분노.
결국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한 다음
휘령전 앞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무더위와 기갈 속에서
세자는 8일 동안 버티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때 혜경궁 홍씨의 심사(心思)는
한중록에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서글프고도
서글프도다.
모 년 모 월일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하늘과 땅이 맞붙고, 해와 땅이 어두운 변을 만났으니
내가 어찌 잠깐이라도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고 참아 모진 목숨을
보전하며 하늘만 부르짖었다.’
사도세자가 폐서인되고 운명하자
홍씨는 세자빈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과
함께 눈물을 훔치며 친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28세 때의 일.
하지만 그녀는 보름 뒤 자신의 조치를 후회한 영조가
죽은 세자에게 사도(思悼)란 시호를 내리고 복권시키자
세자빈의 지위를 되찾고 궁궐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홍씨의 희망은 아들 정조를 잘 키우고
정적들의 위협에서 지켜내 보위를 잇게 하는 것뿐.
그러기 위해서는 영조라는 소용돌이를 넘어서야 했다.
변덕스런 영조의 성정을
뼈저리게 경험한 그녀로서는
또 다른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그리하여 재입궁한 뒤
만난 영조에게 원망 대신
감사의 예를 바쳤던 것이다.
“저희 모자가 보전함은
모두 전하의 성은이로소이다.”
이런 며느리의 태도에 영조는 몹시 감격.
혜경궁 홍씨는 영조와 세손 사이에
깊은 유대감을 맺어주는 데 성공했다.
“내가 너를 볼 마음이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니 아름답구나.”
그렇지만 그녀의 가시밭길은 끝이 없었다.
사도세자 사후 노론의 화살은
아들 세손을 겨냥하고 있었다.
세손과 그들은
이미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때부터 혜경궁과 영조는 합심해
노론으로부터 세손을 보호해야 했다.
홍인한을 필두로 하는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 하자
혜경궁은 이전의 약속을 지키라며 강력하게 저항했고,
영조 역시 노론 일파의 정치적 공세에 강력하게 맞섰다.
자식을 죽였는데 손자까지 죽일 수 없었던 영조,
남편을 죽였는데 아들까지 죽일 수 없었던 혜경궁,
두 사람은 한 마음으로 세손의 방패막이가 되었던 것.
1764년(영조 40년) 7월,
그 동안 홍씨를 후원해주던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이 운명.
그때부터 혜경궁 홍씨는
노론의 사주를 받은 궁녀와 환관들을
경계하며 빈틈도 보이지 않았으며 때맞춰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삼았던 것.
효장세자는 열 살의 나이로 죽은 영조의 장남이었다.
그것은 세손을 사도세자의 너울에서 벗겨주려는 영조의 배려.
하지만. 졸지에 아들을 빼앗긴 혜경궁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소식.
‘위에서 하시는 일을 아랫사람이
감히 이렇다 하겠냐마는 그때 내
심정은 망극할 따름이었다. '
'내가 임오년 화변 때
모진 목숨을 결단치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그와 같은 간난신고를 거친 끝에 세손은
1776년 3월 조선 제22대 정조로 즉위한다.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을 지켜보았던 정조.
지성으로 효도를 바쳤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한 외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칼을 휘둘렀다.
심복 홍국영의 사주에 따라 동부승지 정이환이
홍봉한과 홍인한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가세했다.
“홍봉한의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군신상하가
편히 먹고 잘 수 없습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모든 것이 정상화 될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친정이 위기에 몰리자
수라를 물리고 잠을 자지 않는 등
온갖 방법으로 정조를 추궁했다.
그러나, 정조는 강골이었다.
어머니의 애달픈 호소에도 불구
그는 과거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외가 일족에게 모조리 사약을 내렸던 것.
앞장서서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홍인한도 이때 불귀의 객이 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노쇠한
외조부 홍봉한과 처남 홍낙인 정도.
참담한 아들의 복수극은 그것뿐이었다.
자신의 기대처럼 정조는
뛰어난 학문과 정치력을 발휘
당쟁으로 얼룩진 조정을 아울렀다.
더불어 규장각을 통해
인재양성 및 장용영을 세워 무력까지
장악한 정조의 치세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
이윽고 자신의 개혁정책이 구체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자신감을 얻은 정조는
어머니의 평생 소원을 이루어주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는 어머니가 칠순이 되고
아들 순조가 성인이 되는 갑자년이 오면
수원에서 함께 살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신원시킴과
동시에 외가를 복원시켜주겠다는 약속이었고 그리하여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숨겨왔던 아들 정조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부푼 기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이런 고로
선왕은 이를 데 없이
미워하며 후일을 별렀다.
중부를 여산으로 귀양 보낼 때에 전교하시기를
여러 가지 죄목으로 논란하여 다시는 세상에서
사람 노릇을 못하게 죄어 매었다.
선왕은 본래 외가에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한 번 풀고자 하셨지만, 차
마 노모를 두고 어찌 외가를
망하게 하실 뜻이 있었겠는가.’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정조가 말년에 왜 그토록 수시로
경모궁에 가서 통곡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서울대학교병원 후분 인근.,경모궁터.
사랑하는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이중적인 행태,
그러나 자식만은 끝내 지켜주려 했던 지극한 모성애
그 사이에서 정조의 가슴 속은 갈가리 찢겨졌던 것이다.
이런 효자가 1800년에 승하하면서
그녀의 기대감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28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50년을 구중궁궐에서 혼자 산 여인.
그 처절한 삶을 견디게 한 것은 오직 하나.
1800년 음11월 순조 즉위 날에 식음 전폐.
'군주의 몸으로 어미를 극진히 봉양했으니
내가 이제 무슨 여한이 있어 더 살겠는가? '
'자신의 목숨까지 끊어
아들 곁으로 가려한 그녀.'
뒤이어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국왕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면서 다시 노론의 세상.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은 뒤 병인경화로
노론이 괴멸되고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혜경궁 홍씨는 그렇듯
혼란스런 정국의 변화와
일희일비를 겪고 지켜보며
1815년(순조 15) 음 12월 15일,
창경궁에서 향년 81세로 생을 마감.
고종 때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
혜경궁 홍씨도 왕비로 추상되면서
친정아버지 홍봉한도 영풍부원군에 추증.
'그녀가 저승에서 남편 사도세자와
왕이 되었던 아들인 정조를 만났다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무엇이라 표현했을까? '
드라마.
안국동 아씨(1979, MBC) 배역 : 김영란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1988, MBC) 배역 : 최명길
하늘아 하늘아(1988, KBS) 배역: 하희라
대왕의 길(1998, MBC) 배역 : 홍리나
정조암살미스터리-8일(2007, 채널CGV) 배역: 정애리
이산(2007, MBC) 배역: 견미리
비밀의 문(2014, SBS) 배역: 박은빈
드라마 스페셜 - 붉은 달(2015, KBS2) 배역: 박하나
정약용과 인척관계.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 홍국영은
정약용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나기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나이에
늦동이 아들인 홍중후(1687년생)를 봤던 것.
홍중후는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항렬임에도
나이 차이가 많게 되었다.
왕실 인척 관계
시아버지 : 제21대 영조(英祖, 1694~1776)
시어머니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
시어머니 :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 金氏, 1745~1805)
서시어머니 : 온희정빈 이씨(溫僖靖嬪 李氏, 1694~1721)
시아주머니 : 추존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1719~1728)
형님 : 효순소황후 조씨(孝順昭皇后 趙氏, 1716~1751)
생시어머니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1764)
남편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1762)
장남 :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
차남 :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며느리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1789~1857)
며느리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1786)
손자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
손녀 : 옹주
며느리 : 현목수빈 박씨(顯穆綏嬪 朴氏, 1770~1822)
손자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
손부 : 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1789~1857)
손녀 :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
부마 : 풍산인(豊山人)
영의정 홍낙성(1718∼1798)의 손자이며
홍인모(洪仁謨)의 아들 지돈녕부사 영명
효간공 홍현주(孝簡公 洪顯周, 1793~1865)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21)
부마 : 광은위 김기성(光恩尉 金箕性, ?~1811)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
부마 : 흥은위 정재화(興恩尉 鄭在和, 1754~1790)
풍산 홍씨 가족관계.
5대조부 : 영안위 홍주원(永安尉 洪柱元, 1606~1672)
5대조모 : 선조 적녀 정명공주(貞明公主)
고조부 : 예조판서 정간공 홍만용(禮曹判書 貞簡公 洪萬容, 1631~1692)
고조모 : 관찰사 송시길(觀察使 宋時吉, 1597∼1656)의 딸 여산 송씨(礪山 宋氏, 1629~1677)
증조부 : 증 좌찬성 홍중기(贈 左贊成 洪重箕, 1650~1706)
증조모 : 영의정 이경여(令議政 李敬輿, 1585~1657)이 손녀이며
대제학 문간공 이민서(1633~1688)의 딸 전주 이씨(全州 李氏)
종조부 : 판서 증 좌찬성 충경공 홍석보(洪錫輔, 1672~1729)
당숙 : 증 영의정 홍상한(1701~1769) - 어유구의 조카사위, 선의왕후의 사촌제부
6촌오빠 : 영의정 홍낙성(1718∼1798) - 홍현주(정조의 부마이자 혜경궁의 손녀사위)의 조부
조부 : 예조판서 증 영의정 정헌공 홍현보(洪鉉輔, 1680~1740)
조모 : 임방(任埅, 1640~1724)의 딸 풍천 임씨(豊川 任氏)
아버지 : 영풍부원군 익정공 홍봉한(洪鳳漢, 1713~1778)
어머니 : 관찰사 이집(1670~1727)의 딸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1713~1755)
외조부 : 관찰사 이집(觀察使 李潗, 1670~1727)
외조모 : 송정 유헌(松汀 兪櫶, 1617~1692)의 딸 기계 유씨 (杞溪 兪氏)
오빠 : 홍낙인(洪樂仁, 1729~1777.06.19) - 민진원(인현왕후의 오빠)의 손녀사위
올케언니 : 관찰사 민형수(觀察使 閔亨洙, 1690~1741)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언니 : 일찍 죽음
남동생 : 지돈녕 홍낙신(知敦寧 洪樂信, 1739~1796.06)
올케 : 조명건(趙明健)의 딸 임천 조씨(林川 趙氏)
남동생 : 지돈녕 홍낙임(知敦寧 洪樂任, 1741~1801)
올케 : 조명건(趙明健)의 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여동생 : 전주 이씨 이복일(李復一)처(1746.윤03~????)
남동생 : 동돈녕 익정공 홍낙륜(同敦寧 翼靖公 洪樂倫, 1750.11~1813)
올케 : 판돈녕 익헌공 김지묵(1725~1799)의 딸 청풍 김씨 - 김시묵의 조카딸
올케 : 이선해(李善海)의 딸 덕수 이씨(德水 李氏)
서모 : 정부인 김해 김씨(貞夫人 金海 金氏)
남동생 : 홍낙좌(洪樂左)
올케 : 신황(申貺)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
남동생 : 홍낙우(洪樂佑)
남동생 : 홍낙동(洪樂侗)
남동생 : 홍낙이(洪樂儞)
올케 : 김제행(金悌行, 1724~?)의 딸 안동 김씨(安東 金氏)
조모 : 이세황(李世璜, 1702~?)의 딸 성주 이씨(星州 李氏)
숙부 : 홍인한(洪麟漢, 1722~1776)
11촌 조카 : 홍국영, 원빈 홍씨(정조의 후궁)
...............
.................
'풍산홍씨 홍원의 아들' 홍주원에게
'선조의 적비'인 정명공주가 시집을 가자
인조가 하의3도 농지 20결을 4대손까지 사패.
그후, 풍산홍씨 5대손인
'홍상한'이 반납하지 않아
그후 333년 동안 농민운동이
하의3도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홍상한..............
1728년(영조 4) 진사시 합격,
1734년 의금부도사, 이듬해 증광문과 병과로 급제.
1738년 예문관검열, 이듬해 지평.
1740년 부수찬 이듬해 관동지방 어사.
1743년 대사간. 이듬해 아들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
전라감사 파직. 그해 곧 이조참판에 복직, 이듬해 도승지.
1746년 대사헌,
1748년 형조판서가 되어 장형(杖刑)의 남용을 금지.
1752년 평안도관찰사. 1754년 예조판서.
1755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판돈녕부사를 거쳐,
1759년 판의금부사로서 세손의 사부를 겸하였고,
1769년 병이 심해져 벼슬을 그만두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영의정 추증
..................................................
' 정조'의 배다리.
1776년 정조는 노론의 반대를 뚫고 즉위한 후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버지 사도세자 추숭 작업에 진력하기 시작한다.
먼저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근처)자락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고, 수원에 화성을 조성하여
개혁도시로 만들고. 정조는 아버지 묘소를 옮긴 후.,자주 행차.
아버지 추숭작업을 통해 왕권 강화 목적도 있었고
현장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려는 뜻도 포함.
그런데, 화성 행차에 가장 큰 난제는 정조가 한강 건너기.
중종이 아버지 성종의 선릉 참배 때 배다리 이용.
그 이전에도 배다리가 몇 차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조는 대규모 행차를 위해 새로운 배다리 건설을 지시.
1789년 배다리 건설 주관관청 주교사(舟橋司).,설치.
1795년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맞아
화성행차를 단행하며 최고의 배다리 건설을 완성하였다.
배다리를 건넜던 어가 행렬과 함께 행렬을 보기 위해서
구름처럼 몰려든 수많은 백성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실학 정신을 바탕으로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다리.
그 설계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배다리 건설을 성공시킨
관료들과 장인들, 배다리 건설에 적극 협조한 경강상인.
이들 모두의 합작으로 조선 최고의 배다리가 완성된 것.
정조의 배다리 건설 프로젝트의 성공은 화성 건설과 함께
과학과 실학정신 정조시대의 문화를 압축적으로 대변한다.
한반도 역사에는 무수한 왕들이 있었다.
어떤 임금은 백성과 나라를 위해 봉사했고,
어떤 임금은 전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조선 왕조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긴.,세종과 정조.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7~1800)는
왕도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49세에 운명.
정조가 태어날 무렵
영조의 52년 간 통치로
나라가 어느 정도는 안정.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도세자 아버지,
'혜경궁 홍씨'를 어머니로 태어난 정조.
왕손이 태어나자 기뻐한.,할아버지 영조.
아들 사도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영조.
어린 손자가 학문에 열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자,
더 말할 나위 없을 총애를 손자에게 쏟아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왕손에게는
너무나 많은 시련이 닥쳐 오고 있었다.
세자 신분으로 정사를 맡고 있던 사도세자는
영조와 궁중에서 사사건건 마찰을 빚고 있었다.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몰래 궁중을 빠져나가 평양에 가서
기생 또는 비구니와 어울리기도 했다.
경종(사도세자의 큰아버지)이
노론에게 몰려 죽은 일을 두고
큰아버지 원수를 갚겠다고 큰소리.
원로대신들을 함부로 대하며 억눌렀다.
자연히 사도세자의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특히, 노론에서는 이런 세자가 왕이 된다면
자신들의 신변이 위협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여 세자에 대한 모략이 끊일 날 없었다.
부왕인 영조도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더구나 세자의 처가인 홍씨 세력도 노론 편.
마침내 영조는 세자의 비행을 들어 근신하게 했고,
끝내 뒤주 속에 가두는 처벌을 내렸고 한여름 뒤주 위에
짚북데기를 쌓아 아들을 더위에 못 이겨 죽게 만들었던 것.
정조는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엄청난 사건을 목격했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에 그 처벌의 옳고 그름을 두고
조정 대신들이 갈라졌는데 사도세자 편은 시파(時派)였다.
그 반대편 벽파(僻派)는
세손의 동정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였고 그당시
권력을 쥐고 요직을 차지.
만약, 어린 세손이 삐끗하기라도 하면
벽파로부터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몰랐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아들에게 근신을 당부.
세손의 신변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세손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떠든다든지 조정의 내막을 아는 체 하면
벽파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기 때문이었다.
세손의 보호를 맡은 홍국영은
어린 세손의 신변을 잘 돌보았다.
어느날 한밤중 세손이 거처하는 곳의
지붕에서 기왓장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근신들이 잡으려 하자 범인은 이미 도망.
끝내 그 연루자들을 잡아들였는데
이 일은 세손의 동정을 살피려는
벽파들이 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나날 속에서
세손은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잠자야 했다.
세손의 나이가 어느덧 20세에 이르렀을 때
영조는 80세가 넘어서 기력이 점점 약해졌다.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영조는
어느날 대신이 있는 자리에서 세손을 불러 근심스레 물었다.
“노론 소론과 남인 북인을 아느냐?
나라의 일과 조정의 일을 아느냐?
병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
이조판서에는 누가 좋을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홍인한이 불쑥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동궁은 노론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 · 병조판서에 누가 좋을지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나이다.”- 명의록 -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을까?
영조와 세손을 여지 없이 깔보는 말이다.
더욱이 홍인한은 세손의 외가 아저씨뻘.,처지.
이때 세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 가지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三不必知)’라는 것이다.
세손은 23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맡았다.
이때도 홍인한과 영조의 양외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의 대리청정 조치를 막으려 했고, 대리청정이
단행된 뒤에도 방해와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23세 세손에게는
위험한 시기였다.
다음해 영조는 83세 나이로 운명 후, 정조가 즉위.
정조가 즉위 후 첫번째로 한 일은 아버지 명예 회복.
비공식호칭 사도세자를 정식호칭 장헌세자로 받든 것.
이어, 벽파 홍인한 정후겸 등을 귀양 보냈다.
홍국영을 도승지로 삼고 여러 일을 지휘하게 했다.
세손 때 생각하던 일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
일부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난뒤 규장각을 설치.
많은 책들을 수장, 역대왕의 문적을 수집하여 보관.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그의 근신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그당시, 명망 높고 재주 있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젊은 인사들을 모아 배치한 것.
때때로 정조는 그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당대 정치의 득실과 학문을 토론.
또 서자 출신으로 재주가 있는 아까운 인사들을
검서(檢書)라는 이름으로 모아 정사에 이용했다.
정조는 처음으로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실시.
문신을 가려 뽑아 규장각에서 일정 기간 공부하게 하고
시험을 보게 하여 성적이 좋으면 좋은 벼슬자리에 발탁됐다.
초계문신은 바로 신진 정치 엘리트이며,
여기서 배출된 이들이 이가환 · 정약용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