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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正祖13년), 漢城府 499 姓氏의 시원(始源)과 소멸(消滅)
靑莊館全書로 본 東國의 漢城府 성씨(姓氏)
2022년 04월 16일
○ 오늘날 한반도(韓半島) 땅, 특히 ‘남한(南韓)’은 약(約) ‘5,200만’ 국민(國民)들이 다양(多樣)한 성씨(姓氏)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북한(北韓) 역시(亦是) ‘2,600만’의 국민(國民)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하니, 또한 다양(多樣)한 성씨(姓氏)가 있을 것이고, 남한(南韓)과 별 차이(差異)가 없는 성씨(姓氏) 분포(分布)를 보일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사실(事實)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생각해 보면 이제 겨우 110년(年) 전(前)의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韓國人)들은 너무 쉽게 지우려 하고, 이 땅에는, 토착왜노(土着倭奴)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의외(意外)로 많다는 것에 당혹(當惑)스럽다.】 즉 국권피탈(國權被奪) 사건(事件)이 벌어지던 그때의 한반도(韓半島) 인구(人口)는, 대략(大略) “1,100만 인(人)” 정도(程度)로 추산(推算)되고 있는데, 그 이전(以前) 1,789년 정조대왕(正祖大王) 때의 인구(人口)는 얼마나 되었을까?
당시(當時)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는? “겨우 19만 명【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는, 43,929 호(戶) / 189,153 인(人)】을 초과(超過)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 ‘일천(一千)년 전(前)’의 ‘8세기(世紀)’ 신라(新羅) 서울(京)이었던 ‘경주(慶州)=계림(鷄林)’은, 약(約) “18만 호(戶)”에, “일백만(一百萬)”인(人) 이상(以上)이 사는 대도회(大都會)였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에 비춰보면, 20세기(世紀) 1,910년 당시(當時)의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는, ‘일천만(一千萬) 인(人) 이상(以上)’이 되어야 함이 상식적(常識的)이다.】
※ ‘조선(朝鮮)의 인구현황(人口現況)’【朝鮮總督府 編著】에서 당시의 호수(戶數)와 인구(人口)를 비교(比較)해 보면 매우 흥미(興味)로운 사실이 발견(發見)된다.
명치(明治)33년[1900] 全國 : 1,397,630 호(戶) / 5,608,151 인
漢城府 : 42,454 호(戶) / 196,898 인
명치(明治)39년[1906] 내무부조사(全國) : 1,384,493 호(戶) / 5,793,976 인
명치(明治)40년[1907] 내무부조사(全國) : 2,333,087 호(戶) / 9,781,671 인
명치(明治)42년[1909] 全國 : 2,787,891 호(戶) / 10,390,856 인
명치(明治)43년[1910] 全國 : 2,894,777 호(戶)
위의 예(例)에서 1,906년도와 1907년도의 호수(戶數)와 인구(人口)를 보면 : 「“1백만(百萬) 호(戶)와 4백만 인(人)”이 ‘1년 사이’에 폭발적(爆發的)으로 증가(增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무언가 큰 사태(事態)가 있었음을 암시(暗示)하는 것이다.”라고 본다.
1,910년 이전(以前)의 조선(朝鮮)사회(社會)는, “양반(兩班)·중인(中人)·상민【常民:農工商】·천민【賤民:白丁·奴婢·倡優·僧侶】”등의 ‘네’ 등급(等級)으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위에서 말하는 조사(調査)에서, 천민【賤民:白丁·奴婢·倡優·僧侶】은 제외(除外)되었을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그런데 1,789년【정조(正祖) 13년】당시(當時)에 한성부(漢城府) 호적(戶籍)을 정리(整理), 검사(檢査)했던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의 말에 따르면,
➊ 〈한성부(漢城府) 내에서만 호적(戶籍) 4백 7성,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79성, 도곡총설(陶谷叢說)에 13성 등, 무려(無慮) “499 성(姓)”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조(正祖) 13년【AD 1,789년】 : 「한성부(漢城府) 오부(五部)는, 43,929 호(戶) / 189,153 인(人)이었다.」고 하였다.
이 말에 따르면 당시(當時)의 호수(戶數) ‘43,929’호(戶)인바, 성씨(姓氏)가 ‘499’성(姓)이라고 하였으니, 곧 몇 집 건너 하나씩은 성씨(姓氏)가 다 달랐다는 것이니, 이건 보통(普通) 놀라운 사건(事件)이 아니다. 즉(卽) ‘깜짝 놀랍다’는 이야기다.
「한성부(漢城府)는, 한성부(漢城府)되, 어디에 있었던 ‘한성부(漢城府)’였느냐?」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되는 것이다.
➋ 21세기(世紀) 오늘날의 ‘반도(半島)’의 ‘총(總) 성씨(姓氏)’는, 모두 “298성(姓)”이라고 한다. 그런데, 「서력(西曆) 1,789년 한성부(漢城府)는, 겨우 20만 이하(以下)의 인구(人口)였다」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오늘과 비교(比較)해보면 : 한성부(漢城府) 인구증가(人口增加)는 ‘100배(倍) 이상(以上)’ 되었음에도, 성씨(姓氏)는 오히려 200성(姓) 가까이가 없어졌다.[소멸(消滅)되었다]〉는 것은, ‘이해(理解) 불가(不可)’한 현상(現狀)이다.
➌ 이를 토대(土臺)로 유추(類推)해 볼 수 있는 것은, 「특히 구한말(舊韓末), 많은 백성(百姓)들이 자신(自身)들의 본래(本來) 성씨(姓氏)를 버리고, “김(金)·이(李)·박(朴)·최(崔)”등의 성(姓)으로 갈아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특히 ‘김(金)·이(李)·박(朴)·최(崔)’등의 4성(姓) 같은 경우는, 2015년 “2,500만 명” 가량이라고 하니, 아마도 “수많은 백성(百姓)들이 ‘김(金)·이(李)·박(朴)·최(崔)’ 등의 성씨(姓氏)로 갈아탔을 것이다.”라는 추론(推論)이 가능(可能)하다.
이건 ‘당시(當時)의 세도가문(勢道家門)과도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유추(類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한성부(漢城府) 인구(人口)를 보면,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은 마찬가지다.
➍ 또 하나는,당시(當時)의 「동국(東國)은 누구를 지칭(指稱)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동국(東國)의 한성부(漢城府)에 겨우 ‘이십(二十)만 인(人)’ 이하(以下)가 살고 있는데, ‘성씨(姓氏)가 500개에 가깝다’는 말은, 뭔가 왜곡(歪曲), 조작(造作)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疑懼心)이다.
즉 ‘반도(半島) 한성부(漢城府)’를 말하는 것이 아닌, 〈당시(當時) ‘수백(數百)만 명(名)’의 백성(百姓)들이 살고 있었던 또 다른 “한성부(漢城府)”를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합리적(合理的)이며, 이성적(理性的)인 의심(疑心)이다.
○ ‘정조(正祖) 13년(年)’이면 ‘서력(西曆) 1,789 년(年)’이다. 이때 “아정(雅亭) 이덕무(李德懋)”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보(修補)하면서, ‘한성부(漢城府) 호적(戶籍)’을 검사(檢査)하여 자운(字韻) 편차의 순서(順序)에 따라 기록(記錄)해 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21세기(世紀) 오늘날의 입장(立場)에서 바라보면, 이해불가(理解不可)한 내용(內容)들이 너무 많아, 과연(果然) “동국(東國)”은, 어떤 나라를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아래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동국(東國) 한성부(漢城府) 성씨(姓氏)”편을 보자. 즉(卽)
○ 靑莊館全書(盎葉記八) 東國諸姓 :《今上十三年己酉.修輿地.撿漢城府帳籍諸姓.余以韻編次.而貫鄕.繁不能記. : 금상(今上 정조(正祖)) 13년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수보했는데, 한성부(漢城府) 호적의 여러 성(姓)을 검사하여 내가 자운(字韻) 편차의 순서에 따라 기록했으나, 관향(貫鄕)은 번잡하여 다 쓰지 못했다.》
(01) 동운(東韻) 12성 / 홍(洪)ㆍ풍(馮)ㆍ공(公)ㆍ궁(宮)ㆍ공(空)ㆍ퉁(𤳈) 자서(字書)에 𤳈자가 없다. 속음으로 ‘퉁’으로 부른다. ㆍ공(工)ㆍ궁(弓)ㆍ동(童)ㆍ동(東)ㆍ충(充)ㆍ통(通)
(02) 동운(冬韻) 6성 / 용(龍)ㆍ종(鍾)ㆍ동(佟)ㆍ종(宗)ㆍ옹(邕)ㆍ동(冬)
(03) 강운(江韻) 3성 / 방(邦)ㆍ총(寵)ㆍ강(江)
(04) 지운(支韻) 13성 / 지(池)ㆍ피(皮)ㆍ기(奇)ㆍ추(追)ㆍ기(箕)ㆍ지(知)ㆍ사(司)ㆍ시(施)ㆍ이(伊)ㆍ자(慈)ㆍ자(玆)ㆍ비(丕)ㆍ사(篩)
(05) 미운(微韻) 2성 / 위(韋)ㆍ비(非)
(06) 어운(魚韻) 8성 / 서(徐)ㆍ여(余)ㆍ어(魚)ㆍ제(諸)ㆍ여(餘)ㆍ여(廬)ㆍ어(於)ㆍ허(虛)
(07) 우운(虞韻) 14성 / 오(吳)ㆍ노(盧)ㆍ유(兪)ㆍ주(朱)ㆍ호(胡)ㆍ도(都)ㆍ소(蘇)ㆍ부(夫)ㆍ노(蘆)ㆍ우(虞)ㆍ우(于)ㆍ호(湖)ㆍ오(烏)ㆍ수(輸)
(08) 제운(齊韻) 4성 / 제(齊)ㆍ규(奎)ㆍ비(鞞)ㆍ서(西)ㆍ
(09) 가운(佳韻) 1성 / 시(柴)
(10) 회운(灰韻) 6성 / 최(崔)ㆍ배(裵)ㆍ매(梅)ㆍ괴(槐)ㆍ내(來)ㆍ뇌(雷)
(11) 진운(眞韻) 12성 / 진(陳)ㆍ신(申)ㆍ진(秦)ㆍ신(辛)ㆍ빈(賓)ㆍ순(荀)ㆍ빈(彬)ㆍ신(莘)ㆍ인(仁)ㆍ은(銀)ㆍ진(眞)ㆍ춘(春)
(12) 문운(文韻) 5성 / 문(文)ㆍ은(殷)ㆍ운(雲)ㆍ군(群)ㆍ운(芸)
(13) 원운(元韻) 9성 / 손(孫)ㆍ원(元)ㆍ문(門)ㆍ온(溫)ㆍ탄(呑)ㆍ논(論)ㆍ원(袁)ㆍ은(恩)ㆍ돈(敦)
(14) 한운(寒韻) 8성 / 한(韓)ㆍ반(潘)ㆍ안(安)ㆍ간(干)ㆍ간(竿)ㆍ반(盤)ㆍ단(檀)ㆍ단(單)
(15) 산운(刪韻) 2성 / 반(班)ㆍ간(間)
(16) 선운(先韻) 21성 / 전(全)ㆍ권(權)ㆍ현(玄)ㆍ전(田)ㆍ천(千)ㆍ선(宣)ㆍ견(甄)ㆍ변(邊)ㆍ전(錢)ㆍ선(先)ㆍ천(遷)ㆍ연(延)ㆍ연(連)ㆍ연(燕)ㆍ견(堅)ㆍ전(專)ㆍ천(天)ㆍ천(芊)ㆍ연(年)ㆍ선(鮮)ㆍ연(蓮)
(17) 소운(蕭韻) 2성 / 요(姚)ㆍ요(要)
(18) 효운(肴韻) 1성 / 포(包)
(19) 호운(豪韻) 4성 / 조(曹)ㆍ고(高)ㆍ모(毛)ㆍ도(陶)
(20) 가운(歌韻) 5성 / 하(河)ㆍ나(羅)ㆍ다(多)ㆍ아(阿)ㆍ화(禾)
(21) 마운(麻韻) 4성 / 차(車)ㆍ화(花)ㆍ마(麻)ㆍ사(沙)
(22) 양운(陽韻) 26성 / 장(張)ㆍ황(黃)ㆍ강(姜)ㆍ방(方)ㆍ양(梁)ㆍ양(楊)ㆍ창(倉)ㆍ창(昌)ㆍ왕(王)ㆍ강(康)ㆍ강(强)ㆍ당(唐)ㆍ장(章)ㆍ방(房)ㆍ양(陽)ㆍ상(嘗)ㆍ상(相)ㆍ장(莊)ㆍ양(良)ㆍ강(羌)ㆍ장(長)ㆍ양(襄)ㆍ상(商)ㆍ창(菖)ㆍ황(皇)ㆍ창(蒼)
(23) 경운(庚韻) 9성 / 명(明)ㆍ성(成)ㆍ정(程)ㆍ평(平)ㆍ팽(彭)ㆍ정(貞)ㆍ경(庚)ㆍ형(荊)ㆍ경(京)
(24) 청운(靑韻) 6성 / 영(靈)ㆍ정(丁)ㆍ형(邢)ㆍ정(廷)ㆍ청(靑)ㆍ성(星)
(25) 증운(蒸韻) 10성 / 승(承)ㆍ승(勝)ㆍ승(僧)ㆍ승(昇)ㆍ증(曾)ㆍ응(應)ㆍ빙(氷)ㆍ승(升)ㆍ홍(弘)ㆍ능(能)
(26) 우운(尤韻) 8성 / 유(劉)ㆍ주(周)ㆍ추(秋)ㆍ모(牟)ㆍ구(仇)ㆍ구(丘)ㆍ유(由)ㆍ모(矛)
(27) 침운(侵韻) 9성 / 김(金)ㆍ임(任)ㆍ임(林)ㆍ음(陰)ㆍ금(琴)ㆍ심(尋)ㆍ금(禁)ㆍ심(深)ㆍ임(壬)
(28) 담운(覃韻) 1성 / 감(甘)
(29) 염운(鹽韻) 4성 / 염(廉)ㆍ엄(嚴)ㆍ염(閻)ㆍ점(占)
(30) 함운(咸韻) 3성 / 남(南)ㆍ범(凡)ㆍ함(咸)
(31) 동운(董韻) 2성 / 동(董)ㆍ공(孔)
(32) 종운(腫韻) 1성 / 봉(奉)
(33) 지운(紙韻) 6성 / 이(李)ㆍ사(史)ㆍ수(水)ㆍ기(起)ㆍ사(使)ㆍ사(仕)
(34) 어운(語韻) 2성 / 허(許)ㆍ여(呂)
(35) 우운(麌韻) 8성 / 우(禹)ㆍ노(魯)ㆍ호(扈)ㆍ두(杜)ㆍ유(庾)ㆍ오(午)ㆍ수(豎)ㆍ무(武)
(36) 제운(薺韻) 3성 / 계(啓)ㆍ미(米)ㆍ예(禮)
(37) 회운(賄韻) 4성 / 내(乃)ㆍ채(采)ㆍ매(母)ㆍ해(海)
(38) 진운(軫韻) 2성 / 민(閔)ㆍ윤(尹)
(39) 완운(阮韻) 1성 / 반(飯)
(40) 한운(旱韻) 1성 / 탄(憚)
(41) 산운(潸韻) 2성 / 간(簡)ㆍ판(板)
(42) 선운(銑韻) 4성 / 편(扁)ㆍ선(善)ㆍ연(軟)ㆍ건(件)
(43) 조운(篠韻) 2성 / 조(趙)ㆍ표(表)
(44) 호운(皓韻) 2성 / 호(好)ㆍ노(老)
(45) 가운(架韻) 1성 / 과(果)
(46) 마운(馬韻) 4성 / 마(馬)ㆍ사(舍)ㆍ먀(也) 속음이 ‘먀’이다. ㆍ하(夏)
(47) 양운(養韻) 4성 / 장(蔣)ㆍ앙(仰)ㆍ낭(浪)ㆍ광(廣)
(48) 경운(梗韻) 4성 / 경(景)ㆍ정(井)ㆍ병(秉)ㆍ영(永)
(49) 유운(有韻) 3성 / 유(柳)ㆍ수(守)ㆍ부(阜)
(50) 침운(寢韻) 1성 / 심(沈)
(51) 담운(琰韻) 1성 / 엄(奄)
(52) 염운(豏韻) 2성 / 범(范)ㆍ범(範)
(53) 송운(送韻) 4성 / 공(貢)ㆍ봉(鳳)ㆍ옹(瓮)ㆍ동(凍)
(54) 송운(宋韻) 1성 / 송(宋)
(55) 치운(寘韻) 7성 / 지(智)ㆍ계(季)ㆍ이(異)ㆍ사(泗)ㆍ자(自)ㆍ수(穗)ㆍ수(遂)
(56) 미운(未韻) 1성 / 위(魏)
(57) 어운(御韻) 2성 / 며(旀) 자서에 旀 자가 없다. 속음이 ‘며’이다. ㆍ초(楚)
(58) 우운(遇韻) 6성 / 구(具)ㆍ노(路)ㆍ우(遇)ㆍ소(素)ㆍ고(庫)ㆍ도(度)
(59) 제운(霽韻) 5성 / 예(芮)ㆍ계(桂)ㆍ계(契)ㆍ위(衛)ㆍ예(裔)
(60) 태운(泰韻) 5성 / 태(太)ㆍ애(艾)ㆍ채(蔡)ㆍ태(泰)ㆍ내(奈)
(61) 괘운(卦韻) 1성 / 개(介)
(62) 대운(隊韻) 1성 / 채(菜)
(63) 진운(震韻) 8성 / 인(印)ㆍ진(晉)ㆍ순(舜)ㆍ신(愼)ㆍ진(震)ㆍ순(順)ㆍ준(俊)ㆍ신(信)
(64) 원운(願韻) 3성 / 돈(頓)ㆍ만(萬)ㆍ헌(憲)
(65) 한운(翰韻) 4성 / 단(段)ㆍ판(判)ㆍ탄(炭)ㆍ한(漢)
(66) 산운(霰韻) 2성 / 변(卞)ㆍ편(片)
(67) 소운(嘯韻) 3성 / 소(邵)ㆍ소(召)ㆍ초(肖)
(68) 호운(號韻) 1성 / 호(號)
(69) 개운(箇韻) 1성 / 좌(佐)
(70) 마운(禡韻) 4성 / 가(賈)ㆍ야(夜)ㆍ화(化)ㆍ가(價)
(71) 양운(漾韻) 5성 / 상(尙)ㆍ장(將)ㆍ창(唱)ㆍ왕(旺)ㆍ장(壯)
(72) 경운(敬韻) 4성 / 정(鄭)ㆍ경(慶)ㆍ맹(孟)ㆍ정(正)
(73) 유운(宥韻) 3성 / 후(后)ㆍ당(當)ㆍ구(句)
(74) 염운(艶韻) 1성 / 염(念)
(75) 옥운(屋韻) 8성 / 육(陸)ㆍ목(睦)ㆍ복(卜)ㆍ국(鞠)ㆍ복(伏)ㆍ복(復)ㆍ목(木)ㆍ독(獨)
(76) 옥운(沃韻) 3성 / 옥(玉)ㆍ촉(燭)ㆍ독(篤)
(77) 각운(覺韻) 4성 / 박(朴)ㆍ탁(卓)ㆍ탁(濯)ㆍ학(學)
(78) 질운(質韻) 2성 / 길(吉)ㆍ필(弼)
(79) 물운(物韻) 1성 / 울(鬱)
(80) 월운(月韻) 3성 / 왈(曰)ㆍ골(骨)ㆍ발(發)
(81) 갈운(曷韻) 1성 / 갈(葛)
(82) 설운(屑韻) 5성 / 설(薛)ㆍ결(決)ㆍ설(偰)ㆍ설(雪)ㆍ철(哲)
(83) 약운(藥韻) 4성 / 곽(郭)ㆍ곽(霍ㆍ작(雀)ㆍ학(鶴)
(84) 맥운(陌韻) 4성 / 백(白)ㆍ석(石)ㆍ석(昔)ㆍ석(釋)
(85) 석운(錫韻) 2성 / 궉(鴌) 봉(鳳)의 고자, 속음으로 ‘궉’이다. ㆍ적(狄)
(86) 직운(職韻) 4성 / 국(國)ㆍ묵(墨)ㆍ직(直)ㆍ직(稷)
(87) 즙운(緝韻) 1성 / 즙(緝)
(88) 엽운(葉韻) 2성 / 섭(葉)ㆍ업(業)
(89) 복성(複姓) 7성 / 동방(東方)·사공(司空)·서문(西門)·선우(鮮于)·황보(皇甫)·남궁(南宮)·독고(獨孤)
지금 호적과 비교하여 ‘동국여지승람’에 더 실은 것을 별도로 아래와 같이 기록하니, 성씨가 옛날과 지금에 있어 유무가 부동함을 알 수 있다.
(90) 동운(東韻) 2성 / 옹(翁)ㆍ몽(蒙)
(91) 지운(支韻) 1성 / 시(時)
(92) 우운(虞韻) 3성 / 주(珠)ㆍ구(瞿)ㆍ오(吾)
(93) 제운(齊韻) 2성 / 혜(嵇)ㆍ제(堤)
(94) 회운(灰韻) 1성 / 태(苔)
(95) 원운(元韻) 2성 / 번(藩)ㆍ원(原)
(96) 한운(寒韻) 2성 / 환(桓)ㆍ단(端)
(97) 선운(先韻) 2성 / 원(員)ㆍ건(騫)
(98) 소운(蕭韻) 1성 / 표(標)
(99) 가운(歌韻) 3성 / 나(那)ㆍ하(何)ㆍ화(和)
(100)마운(麻韻) 2성 / 화(華)ㆍ과(瓜)
(101)양운(陽韻) 6성 / 장(㽵)ㆍ양(揚)ㆍ장(萇)ㆍ양(涼)ㆍ방(芳)ㆍ상(桑)
(102)경운(庚韻) 3성 / 영(榮)ㆍ경(卿)ㆍ경(庚)
(103)청운(靑韻) 1성 / 형(刑)
(104)증운(蒸韻) 2성 / 등(登)ㆍ승(乘)
(105)우운(尤韻) 1성 / 우(尤)
(106)침운(侵韻) 1성 / 침(侵)
(107)우운(麌韻) 3성 / 보(甫)ㆍ부(斧)ㆍ오(伍)
(108)호운(皓韻) 1성 / 초(草)
(109)경운(梗韻) 1성 / 경(梗)
(110)유운(有韻) 1성 / 부(部)
(111)송운(宋韻) 1성 / 종(種)
(112)치운(寘韻) 1성 / 위(位)
(113)우운(遇韻) 3성 / 부(傅)ㆍ고(固)ㆍ부(附)
(114)소운(嘯韻) 1성 / 요(尿)
(115)경운(徑韻) 1성 / 영(甯)
(116)유운(宥韻) 1성 / 우(祐)
(117)함운(陷韻) 1성 / 범(汎)
(118)옥운(屋韻) 3성 / 육(六)ㆍ욱(郁)ㆍ곡(谷)
(119)옥운(沃韻) 2성 / 곡(曲)ㆍ녹(綠)
(120)질운(質韻) 3성 / 필(畢)ㆍ율(律)ㆍ실(實)
(121)물운(物韻) 1성 / 물(物)
(122)월운(月韻) 1성 / 갈(碣)
(123)설운(屑韻) 1성 / 별(別)
(124)약운(藥韻) 2성 / 택(澤)ㆍ탁(拓)
(125)맥운(陌韻) 6성 / 석(席)ㆍ백(柏)ㆍ택(宅)ㆍ익(益)ㆍ책(冊)ㆍ혁(赫)
(126)석운(錫韻) 1성 / 적(翟)
(127)직운(職韻) 4성 / 익(翌)ㆍ칙(則)ㆍ역(力)ㆍ극(克)
(128)즙운(緝韻) 1성 / 입(入)
(129)복성(複姓) 2성 / 사마(司馬)ㆍ영호(令狐)
‘도곡총설(陶谷叢說)’이의현(李宜顯)이 지었다. 에는 2백 98성이 실려 있는데, 그 중에 호적과 ‘여지승람’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여기에 초(抄)한다.
(130)동운(東韻) 1성 / 풍(酆)
(131)동운(冬韻) 1성 / 공(龔)
(132)강운(江韻) 1성 / 쌍(雙)
(133)지운(支韻) 2성 / 사(思)ㆍ미(彌)
(134)회운(灰韻) 2성 / 태(台)ㆍ재(才)
(135)가운(歌韻) 1성 / 아(牙)
(136)지운(紙韻) 1성 / 궤(几)
(137)유운(有韻) 1성 / 수(壽)
(138)엽운(葉韻) 1성 / 섭(聶)
(139)복성(複姓) 2성 / 부여(扶餘)ㆍ석말(石抹)
- 이상(以上) 호적(戶籍) 4백 7성, 동국여지승람 79성, 도곡총설 13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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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莊館全書 57 盎葉記 四 / 新羅ㆍ高句麗ㆍ百濟ㆍ高麗의 기이한 성(姓)
(01) 숙씨(叔氏)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신라 애장왕(哀莊王)의 어머니 숙씨(叔氏)는 내물왕(奈勿王) 13세손 김숙명(金叔明)의 딸인데 동성(同姓)임을 혐의쩍게 여겨 아버지의 이름 ‘숙(叔)’자를 따서 씨(氏)로 삼았다.” 하였다.
(02) 정씨(貞氏) 《동국통감》에 “신라(新羅) 애장왕비(哀莊王妃)는 정씨(貞氏)다.” 하였다.
(03) 대실씨(大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高句麗)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에 비류부장(沸流部長) 추발소(鄒勃素)에게 성(姓) 대실씨(大室氏)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4) 송씨(松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비(瑠璃王妃)는 다물후(多勿侯) 송 양(松讓)의 딸이다.” 하였다.
(5) 극씨(克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朱蒙)이 마의 재사(麻衣再思)에게 성(姓) 극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6) 중실씨(仲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납의 무골(衲衣武骨)에게 성 중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7) 소실씨(少室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주몽이 조의 묵거(藻衣黙居)에게 성(姓) 소실씨를 내려주었다.” 하였다.
(08) 낙씨(絡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대신무왕(大神武王) 5년에 부여왕(扶餘王) 대소(帶素)의 종제(從弟)가 항복하자 봉하여 왕(王)을 삼아 연부(椽部)에 두고, 그의 등에 낙(絡)자가 있으므로 성을 낙씨(絡氏)라 내려주었다.” 하였다.
(09) 예씨(禮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시조(始祖)가 부여에 있을 때에 예씨에게 장가들어 유리(類利)를 낳았다.” 하였다.
(10) 을지씨(乙支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때에 을지 문덕(乙支文德)이 있었다.” 하였다.
(11) 천씨(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영류왕(榮留王)을 시해(弑害)했다.” 하였다.
(12) 화씨(禾氏)와
(13) 치씨(雉氏) 《동국통감》에 “고구려 유리왕(瑠璃王)에 두 여희(女姬)가 있었는데 화희(禾姬)와 치희(雉姬)였다.” 하였다.
(14) 북씨(北氏)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북(北)은 고려(高麗)의 성(姓)이다.” 하였고, 《정자통(正字通)》에 또한 인용되었다.
(15) 사선씨(似先氏) 《만성통보》에 “사선씨는 본래 고려의 유종(遺種)인데 당(唐) 나라 무덕(武德) 중엽에 사선 영문(似先英問)으로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을 삼았다.” 하였다.
(16) 부여씨(扶餘氏) 《동국통감》에 “부여씨는 백제(百濟)의 성(姓)인데 계통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氏)를 삼았다.” 하였고, 《만성통보》에 “백제의 부여씨는 음(音)이 변전되어 부유(鳧臾)로 되었다.” 하였다.
(17) 흑치씨(黑齒氏) 《만성통보》에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이다.” 하였다.
(18) 사씨(沙氏)
(19) 연씨(燕氏)
(20) 협씨(劦氏)
(21) 진씨(眞氏)
(22) 해씨(解氏)
(23) 골씨(骨氏)
(24) 목씨(木氏)
(25) 구씨(𦭻氏)
《북사(北史)》에 “백제(百濟)의 대성(大姓)이 8족(族)이 있으니, 사(沙)ㆍ연(燕)ㆍ협(劦)ㆍ진(眞)ㆍ해(解)ㆍ골(骨)ㆍ목(木)ㆍ구(𦭻)이다.” 하였다. 《만성통보》에 “상곡(上谷)에 백제(百濟)의 8성 중에 그 하나는 진(眞)인데, 한(漢) 나라의 진우(眞祐)는 태위장사(太尉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으며, 진현토(眞玄菟)는 산(筭)을 잘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협(劦)은 《북사(北史)》에 “힘력자[力] 셋을 붙여 협(劦)을 만들었는데 음(音)은 협(協)이다.” 하였고, 《만성통보》에는 “칼도자[刀] 셋을 합해 여(刕)자를 만들었는데 음(音)은 여(黎)다.”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자서(字書)를 상고해 보면 세 개의 도(刀)자로 이루어진 여(刕)자가 있고 세 개의 조(刁)로 된 여(刕)는 없으니, 세 개의 도(刀)로 된 것이 음이 여(黎)라면 아마도 세 개의 조(刁)로 된 것은 와전인 듯하다.그리고 구(𦭻)는 음(音)이 구(臼)인데 《북사(北史)》에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만들었다.” 하였으며, 《만성통보》에는 “초두[艸] 아래에 구(臼)를 붙여 𦭻를 만들었는데 𦭻의 음은 구(舊)고, 백(苩)의 음은 백(白)이다.” 하였다. 《운회(韻會)》에 “백제에 백씨(苩氏)가 있다.”하였으니, 의당 초두[艸] 아래에 백(白)을 붙인 글자를 따라야 한다.
(26) 문씨(門氏) 《씨족서(氏族書)》에 “문사명(門思明)은 인천(仁川) 사람으로 정종(靖宗) 때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다.” 하였다.
(27) 아씨(牙氏) 《씨족서》에 “아응시(牙應時)는 명종(明宗)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28) 빈씨(賓氏) 《씨족서》에 “빈우광(賓于光)은 수성(壽城) 사람으로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또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하였다.
(29) 풍씨(酆氏) 《씨족서》에 “풍순지(酆順之)는 정종(靖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였다.” 하였다.
(30) 이씨(異氏) 《씨족서》에 “이응보(異應甫)는 현종(顯宗) 때에 좌복야(左僕射)였다.” 하였다.
(31) 승씨(僧氏) 《씨족서》에 “승우본(僧牛本)은 고종(高宗) 때에 도령령사(都領令史)였다.” 하였다.
(32) 태씨(太氏) 《씨족서》에 “태집성(太集成)은 고종(高宗) 때에 사공(司空)에 수직(守職)하였다.” 하였다.
(33) 간씨(簡氏) 《씨족서》에 “간유지(簡有之)는 충렬왕(忠烈王) 때에 중랑장(中郞將)이었다.” 하였다.
(34) 추씨(秋氏) 《씨족서》에 “추적(秋適)은 충렬왕 때에 좌사간(左司諫)이었다.” 하였다.
(35) 범씨(凡氏) 《씨족서》에 “범영부(凡永富)는 신우(辛禑) 때에 문화안집사(文化安集使)였다.” 하였다.
(36) 지씨(智氏) 《씨족서》에 “지채문(智蔡文)은 봉주(鳳州)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에 우복야(右僕射)였다.” 하였다.
(37) 야씨(夜氏) 《씨족서》에 “야선단(夜先旦)은 충렬왕 때에 좌부승지(左副承旨)였다.” 하였다.
(38) 흔씨(昕氏) 《씨족서》에 “흔 적신(昕迪臣)은 풍천(豐川) 사람으로 고려 호장(高麗戶長)에 보승별장(保勝別將)이었는데 5세손(世孫) 섬(暹)이 충목왕(忠穆王)의 휘(諱)를 피하여 어머니의 성(姓)을 따라 권씨(權氏)가 되었으며, 벼슬은 검교예빈랑(檢校禮賓郞)이었다.” 하였다. 상고하대 섬(暹)은 바로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5세조(祖)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승창 (역) | 1981》
羅勾濟麗奇姓 : 叔氏。東國通鑑。新羅哀莊王母叔氏。奈勿王十三世孫。金叔明之女也。嫌▦同姓。以父名叔爲氏。貞氏。東國通鑑。新羅哀莊王妃貞氏。 大室氏。東國通鑑。高勾麗大武神王十五年。賜沸流部長鄒㪍素姓大室氏。 松氏。東國通鑑。高勾麗瑠璃王妃。多勿矦松讓女。 克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麻衣再思姓克氏。 仲室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衲衣武骨姓仲室氏。 少室氏。東國通鑑。高勾麗朱蒙。賜藻衣默居姓少室氏。 絡氏。東國通鑑。高勾麗大神武王五年。扶餘王帶素從弟投降。封爲王。置掾部。以其背有絡文。賜姓爲絡氏。 禮氏。東國通鑑。高勾麗始祖在扶餘。娶禮氏。生類利。 乙支氏。東國通鑑。高勾麗嬰陽王時。有乙支文德。 泉氏。東國通鑑。高勾麗泉葢蘓文弑榮留王。 禾氏,雉氏。東國通鑑。高勾麗瑠璃王。有二姬。曰禾姬,雉姬。 北氏。萬姓統譜。北高麗姓也。正字通。亦引之。○中國人。以高勾麗。爲高麗。 似先氏。萬姓統譜。似先氏。本高麗遺種。唐武德中。似先英問。爲右驍衛大將軍。 扶餘氏。東國通鑑。扶餘氏。百濟姓。以系與高勾麗同出扶餘。故爲氏。萬姓統譜。百濟之扶餘。音轉爲鳧臾氏。 黑齒氏。萬姓統譜。黑齒常之。百濟西部人。 沙氏,燕氏,劦氏,眞氏,解氏,骨氏,木氏,𦭻氏。北史。百濟大姓八族。沙燕劦眞解骨木𦭻。萬姓統譜。上谷百濟八姓。其一曰。眞漢,眞祐。太尉長史。眞欽太医令。眞玄菟善筭。○案劦北史。以三力作劦。音協。萬姓統譜。以三刁作刕。音黎。未知孰是。然考字書。有三刀之刕。無三刁之刕。三刀者。音黎。則恐譌爲三刁。𦭻音。北史。艹下臼。作𦭻。萬姓統譜。以艹下臼。作𦭻。萏音舊。苩音白。韻會曰。百濟有苩氏。則當從艹下白。 門氏。氏族書。門思明。仁川人。靖宗時。御史中丞。 牙氏。氏族書。牙應時。明宗時中郞將。 賓氏。氏族書。賓于光。壽城人。魁科。又中制科。翰林學士。筆法名世。 酆氏。氏族書。酆順之。靖宗時。監察御使。 異氏。氏族書。異應甫。顯宗時。左僕射。 僧氏。氏族書。僧牛本。高宗時。都領令史。 太氏。氏族書。太集成。高宗時守司空。 簡氏。氏族書。簡有之。忠烈王時中郞將。 秋氏。氏族書。秋適。忠烈王時左司諫。 凡氏。氏族書。凡永富。辛禑時文化安集使。 智氏。氏族書。智蔡文。鳳州人。顯宗時右僕射。 夜氏。氏族書。夜先旦。忠烈王時。左副承旨。 昕氏。氏族書。昕廸臣。醴川人。高麗戶長。保勝別將。至五世孫暹。避忠穆王諱。從母姓。爲權氏。官檢校禮賓郞。○ 案暹卽權睡軒五福。五世祖也。
○ 靑莊館全書 55 盎葉記 二 /뉴(妞)ㆍ왁(𨶠)ㆍ훵(遤)ㆍ할(㔛)ㆍ뼘(乀)
우리나라의 기이한 성 중에 가장 기이한 것들을 지금 적기로 한다.
(1) 《자휘(字彙)》에, “妞의 음은 뉴(紐)로 사람의 성(姓)인데, 고려(高麗)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상고해 보면《자휘》에 비록 妞자의 성(姓)이 실려 있지만, 본관(本貫)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
(2) 광주(廣州)에 ‘𨶠’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 음이 와억절(臥憶切) 언문의 음은 ‘왁’이다. 이라고 자칭한다. 그러나 《자휘》에, “𨶇의 음은 오(塢)로 작은 문이다.” 하였을 뿐 𨶠자는 없으니, 본래 오(𨶇)자 성이었던 것이 𨶠자로 잘못된 것이나 아닌지.
(3) 연안(延安)에 “遤”자의 성이 있는데, 그 음은 훤응절(暄應切)언문의 음은 ‘훵’이다. 이나 자서(字書)에는 없다.
(4) 《강화지(江華志)》에, “㔛”자의 성이 실려 있다. 상고하건대 자서에는 劼자가 있는데, 음은 할(轄)이고《설문(說文)》에는 삼간다는 뜻으로 되어 있고, 《상서(商書)》 주고(酒誥)에는, 여할비은헌신(汝劼毖殷獻臣)【너는 은(殷)의 좋은 신하들을 힘써 삼가라는 뜻】이라는 구절이 있으니, ‘㔛’자는 혹 ‘할(劼)’자를 ‘세로 쓴 것’이 아닌지.
(5) 흥양(興陽)의 목동(牧童)에 “乀”자의 성이 있는데,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음은 “뼘”이다. 이후암(李厚菴) 만운(萬運) 이 지금《문헌비고(文獻備考)》를 증수하면서 나에게 기이한 성(姓)을 물어왔기에 이것으로 답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역) | 1981》
妞𨶠遤㔛乀 : 我國奇姓中最奇者。今錄之。字彙。妞音紐。姓也。高麗有之。案字彙。雖載妞姓。而未聞爲何貫。廣州有𨶠姓人。自稱音卧億切。諺音왁。 字彙。𨶠音塢。小門而無𨶠字。無乃本𨶠姓。而譌爲𨶠歟。延安有遤姓。音喧應切。諺音훵。字書。無之。江華志。載㔛姓。案字書。有劼字。音轄。說文。愼也。書酒誥。汝劼毖殷獻臣。㔛字或劼字之縱結歟。興陽牧子。有乀姓。貫密陽。音뼘。李厚菴 萬運。 方增修文獻備考。訪余以奇姓。以此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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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기록(記錄)에서 살펴보듯,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수많은 성씨(姓氏)들은 어디로, 왜 사라졌는가? 물론(勿論) 세월(歲月)에 따라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인간(人間)무리들에 있어 숙명적(宿命的)이랄 수 있으나, 세월(歲月)이 흐르면 흐를수록 없어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다.
특히 인간(人間)의 혈통(血統)에 대한 것들을 보면, 위에서 말하는 바에, 수긍(首肯)하기 어려운 실정(實情)이다. 〈“수백(數百) 개(個)의 성씨(姓氏)가 ‘일백(一百) 여년(餘年)’만에 사라져버렸다”는 이야기는, 곧 이 땅(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시(確實視) 해준다.
오늘날의 대륙(大陸)의 형편(形便)과 비교(比較)를 해보면, 똑같은 봉건왕조(封建王朝) 및 유학(儒學)인 공맹학(孔孟學)을 중심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고려(考慮)하면, 과연(果然) 이러한 특이(特異)한 현상(現狀)이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벌어질 수 있었는가? 매우 회의적(懷疑的)이다. 또,
한반도(韓半島)인들의 혈통(血統)에 대한 집념(執念)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가? 심사숙고(深思熟考)를 거듭해 보아야 할 것 같다.
2022년 04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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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1세기 오늘을 기준해 위의 수많은 성씨들을 생각해 보면, 이해불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그동안 접해보지 못했던 수많은 성씨들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은 "우물안의 개구리, 그 이상도 , 그이하도 아닌, 말 그대로 우물안의 개구리였다"는 것이다.
[한국사 즉 조선사는 정말 있기는 한거냐?]
우리나라 국민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저 배부르고, 등 따스하고, 좋은 자동차 굴리고 다니면 그것을 '끝'이라는 걸까?
국민들이 원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국민들이 원한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으로 끝이지!!!!!!
선생님 수고 하셨습니다
하나씩 진실에 다가서는것 같아 힘이나네요^^
안녕하세요. "레시아"님!
항상 성원해 주시고, 관심을 갖고 지켜봐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선생님 보학에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관심은 많으나 아직 깊이 공부를 하지 못 했습니다.
역대 왕조별로 인구수에 관심이 많아서 조사를 해봤더니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가지고 국가가 운영이 될까?
그런데 실록을 읽다가 한가지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대부분 민수(民數) 또는 戶數 등등 검색을 해보니 관아에서
일부러 사람의 수를 줄여서 보고를 했다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그리고 그걸 암암리에 서로 알고 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인구수 대로 세금을 내야 하는데 조선의 양반들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것은 천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선비들은 주경야독을 했다고 하더군요.
세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의 수만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고종 때 인구수가 확 늘었잖아요.
일본이 들어서면서 국세조사를 해서 해마다 인구수가 나왔는데
특정성씨가 다 장악을 하고 있더라고요. 선생님 본문에서 처럼요.
제 생각은 이들이 대륙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고 쫓겨올수 밖에 없던
기득권 세력들 순서대로 인구수가 많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쌍놈인들 우리나라 이념이 군사부일체인데 성씨를 막 바꾸겠어요?
조작을 했으면 했지요.
안녕하세요. "Romantic"님!
이런 생각을 해 보실 수 있습니다.
각 지방에서 병역문제나 부세문제때문에 "머릿수"를 줄여 보고하는 행태는 쾌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 숫자가 문제가 겠지요.
또 노비는 즉 천민들은 인구조사에서 빠졌는가?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나 여타 옛 서적들을 보면, 팔도에 있는 "노비"들의 솟자는 각 관아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황들이 많고, 노비들을 위한 추쇄도감까지 있는 것을 보면, 팔도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집니다.
한성부 한곳의 성씨가 499성씨라고 했을때, 전국적으로 보면 현재의 성씨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많은 성씨들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한성부가 어디에 있었던 한성부였나? 하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 많은 한성부내 성씨들을 보면, 결코 한반도 한성부는 아니었다는 또한 확실해 보입니다.
성씨의 면면을 보면, 오늘날 중국에 있는 성씨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씨를 바꿨다고 보는 것은 오류다. 즉 성씨들은 그대로지만, 한성부가 반도의 한성부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늘 건강하세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