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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처럼) 제단 위에 손으로 고기를 올리는 그런 글자를 상형한 건데요. 그냥 ‘기도하다’입니다.
우리는 ‘제사 지낸다’고 그러지만, 중국에서는 ‘제조선(祭祖先)’이라고 하여 조상을 제사 지낸다고 하죠. 아예 그렇게 표현을 해요. 조상에 대해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거예요. 제천(祭天)이라 그러면 하늘에 대해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거고요.
祭는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개념에서 존재하지 않거나 다르게 존재한다고 믿는 존재들을 모신다는 의미가 아닌 거죠. 그냥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 중에서 ‘큰 祭’가 있고 ‘작은 祭’가 있습니다. 큰 제와 작은 제의 차이는 ‘술’입니다. 술이 있으면 ‘큰 제’이고, 술이 없으면 ‘작은 제’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렇죠. 왜 그러냐면, ‘제어공(祭於公)’ 했을 때 公은 춘추시대에는 사실상 한 나라의 군주이다 보니까, 죽은 왕에게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행사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큰 제’이겠죠. 그 ‘큰 제’가 되면 술을 올립니다.
이렇게 (그림처럼)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 술을 올립니다. 술은 올리고 나서 나중에 어떻게 하죠? 버리나요? 먹죠. 제단에 물건을 올릴 때는 반드시 한손으로 올립니다. 올릴 때는 한 손으로 올리고 내릴 때는 반드시 두 손으로 내립니다. 오늘날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잘못돼 있죠. 두 손으로 잘 올리고 내릴 때는 막 내리죠.
두 손으로 내리는데 (그림의) 양쪽에 있는 손은 나중에 사라져요. 글자에서 손 두 개가 사라지고 남은 이 글자가 오늘날의 ‘복(福)’자입니다. 밑에 있던 제단이 옆으로 오고 술병이 이렇게 된 것이 복(福)자예요.
그러니까 福이라는 것은 기도할 때 올린 술이에요. 원래 의미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술은 두 손으로 내려서 나누어 마셔요. 그래서 먹는다가 아니라 마신다는 말을 넣어서 음복이라고 해요. 음복은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을 나눠 먹는 게 아니라, 그 술을 나눠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마시는 음(飮)이니까요.
이게 복이에요. 복이라는 것은 술이 있는 기도 행사를 끝내고 나서 그 술을 나눠 먹는 것을 말해요. 중요한 건 술은 ‘누가 먹느냐?’ 예요. 이 술은 누가 먹을 것인가? 음복은 누가 할 것인가? 음복을 할 사람들의 자격이 문제가 됩니다.
규(規)
그러니까 음복은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 주고, 이웃에 주고 그렇게 막 주는 게 아닌 거예요. 이 음복 즉 제상 위에 올려서 두 손으로 내렸던 술은 일단 이 규(規)를 터득한, 規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줍니다.
(갑골 規에 대한 설명 자료)
이 규(規)라는 글자는 뭘까? (그림처럼) 앞에는 사람이에요. 원래 사람이 없었어요. 사람이 눈을 이렇게 하고 가고 있죠. 그리고 밑에 역시 사람이죠. 이게 우리가 규칙(規則)할 때의 規인데, 여기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에요. 사회에 처음 막 나온, 성인식을 치르는 사람이에요. 성인식을 치르면서 눈으로 보고 배우는 사람이에요. 보고 듣고 하면서 배우는 사람을 말해요.
그러니까 사회에 처음 나오는, 성년식을 치룰 무렵에 사람이 보고 배우고 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規라고 합니다. 이게 약속이죠. 규칙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 규를 하기 시작한 사람이 일단 음복을 할 자격이 있어요. 규를 못 외우거나 규를 어기면 음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돼요.
이 규를 지켜야만 돼요. 그 당시 사회는 남녀 차별이 있는 사회도 있었겠지만, 남녀 차별이 없는 사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어쨌든 성인식을 치르면서 그 규를 배우고 그 규를 받아서 익힌 사람들만 일단 1차 자격이 돼요.
그리고 규(規) 다음에 칙(則)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규칙이라고 그러잖아요. 보통 이 則이 나오면 조개 패(貝)인데, 여기서는 이 조개 패나 조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이게 청동기 제기(祭器)예요. 청동기이죠. 청동기 옆에 칼이 이렇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청동기에 칼로 새긴 명문이 있는 거죠.
어떤 행사가 있다면, 거대한 기념식이나 거대한 기도식이 있다면 그때 거기서 약속된 내용이 있겠죠. 그 내용을 새기는 거죠. 그 내용을 새겨둔 그 그릇 또는 그 내용을 새기는 것 또는 새겨진 내용, 그것을 칙(則)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명문화되어 있는, 명문화로 새겨 놓은 그 사회 공동체의 어떤 법규이죠.
이 규와 칙을 지키고 익힌 사람들에게만 음복이 됩니다. 따라서 음복(飮福)의 복이라는 것은 내가 그 공동체의 어엿한 주인공 중에 한 명이라는, 주체 중에 한 명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자격이 획득되지 않고 그 사회 공동체를 파괴하거나, 공동체의 규약을 숙지하면서 공동체의 규약을 지키지 않거나 한 사람들은 음복에서 복을 마실 대상이 안 돼요.
이렇게 음복할 대상이 되려면 어쨌든 지켜야 되는 거죠. 요즘으로 치면 우리 한국에 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총괄적인 감사 의식을 치렀다면, 그런 대축제를 치뤘다면, 5천만 명 중에서 5천만 명이 다 음복의 대상이 아니라, 최소한 헌법 정도는 숙지하고 헌법 정도는 어기지 않아야 음복할 수 있는 거죠.
최근 여의도나 광화문에 시위 나오는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나올 만하다고 봅니다. 나이는 아직 덜 됐을지 몰라도 학습 중이어서 헌법을 숙지하고 있을 거거든요. 현재 어른이 되고 나면 다 잊어버렸어요. 저기 시청 쪽에 가서 머리 허연 분들이 시위하는 데 가서 “헌법 아세요?” 하고 물어보면, 안다고 대답하는 분들은 아마 0.01%도 안 될 거예요. 그러면 이 사회의 주체로서 자격이 없는 거죠.
그리고 이 복이라는 것의 습성이 기마민족 후기에 가면 맹세와 같은 것으로 옮겨 가게 되죠. 경주에 가면 계림이라는 작은 숲이 있습니다. 그 계림이라는 데는 원래 말을 잡아서 말의 피를 마시던 곳이에요. 이것이 나중에 닭의 피로 바뀌죠. 말이나 닭이나 공통적으로 사람보다 체온이 높으니까 그 피는 사람에게 들어가서 문제를 안 일으키죠.
福이라는 습성의 문화적 교류와 전파
어쨌든 계림은 닭이 사는 숲이 아니고 닭의 피로 맹세하는 숲인 거죠. 그 계림에 들어가서 기도식 즉 맹세식에 참여하고 나면, 그 닭의 피를 입에 발라주죠. 마치 음복과 같은 복의 의미로 “너는 드디어 신라라는 공동체의 어엿한 주체가 되었다!” 그렇게 표현한 거죠. 그래서 “나는 계림의 사람이다” 이런 표현을 하는 거예요. 그런 식의 맹세 의식에도 쓰이고 이것이 문화적으로 여러 가지로 섞이기도 하죠.
어원상에서 로드(road)의 ‘ro’ 발음이 로(路)와 같습니다. 원래 어느 것이 먼저 생겼을 거예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 road가 먼저 생겼을 것 같아요. 길이라고 하는 한자에서, 路라는 발음으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이 글자밖에 없거든요. 그 이전까지 길은 다 도(道)라는 발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가르키는 발음 속에 합성이 돼서 로(路)라는 것이 나오는데, 아마 이 로드(road)의 일부가 발음으로 채용되면서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로마 시대인 거죠. 아무튼 거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만큼 그 시대 또는 그 이전에도 서로 문명을 주고받았다는 것이죠. 그 이후에 이런 음복하는 문화는 로마 등 이태리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화가 돼요. 이태리에서는 각 지역마다 성수가 있어요. 성스러운 샘이죠. 성스러운 샘의 물을 끼얹어주거나 마시게 하는 것이 일종의 음복과 같은 의미가 돼요.
그게 현재 카톨릭에 남아 있는 일종의 세례 의식과도 비슷하고, 그리고 만나를 먹는 것과 비슷해요.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너는 이 공동체의 어엿한 주체 중에 한 명이 됐다”는 거죠. 일종의 카톨릭 커뮤니티의 일원이 됐다는 것입니다.
規(규)를 통해보는 성인식 문화
마찬가지로 그런 일원이 되는 양식으로서 시작은 이 規(규) 즉 성인식이에요. 한국 사회를 보면 성인식을 저는 꼭 해야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성인식을 하면, 예를 들어서 한 열 여덟이어도 좋고, 해당하는 나이는 설정하기 나름인데요. 가령 만도 좋고 한국식 나이도 좋고 20살도 좋아요. 설정하기 나름입니다.
단 그때가 되면 그 젊은 사람에게 시간을 주는 거예요. 몇 며칠 고민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주는 거죠. 자기가 어떻게 살고 싶은 지 무엇을 하고 싶은 지, 그에 대해서 자기 인생 계획을 짜라는 거죠.
짜는 중간중간 어떤 사람과 상의도 하면서 조정을 해요. 조정이 끝나면 정해진 어느 날에 중요한 친구와 친척들을 불러모을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파티를 여는 거죠. 파티를 열고 그 파티장에서 자기가 정리한 내용을 읽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기와 상의를 계속했던 사람으로부터 공동체 성원로서의 새로운 이름 하나를 받을 수도 있죠. 카톨릭으로 치면 그게 세례명이겠죠. 성인 명의 관명을 받는 것이죠.
우리는 약관(約款)이라고 하는데요. 관명(冠名)을 받는 거죠. 그게 일종의 그의 자(字)가 될 수도 있고 호(號)가 될 수도 있겠죠. 그렇게 약속을 하고나서, 그 자리에서 그 약속을 축하하는 의미로 친구들도 포함될 수 있고 친척이나 선배도 있을 수 있으니까, 서로 얼마씩 내서 그의 출발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금도 만들어주는 겁니다.
그렇게 사회에 온 사람들은 함부로 살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자기가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선배들 앞에서 했던 자기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 대해서 쉽게 버리지는 못할 거예요. 가볍게 살지는 않을 거예요. “내가 약속한 것만큼은 최대한 살아가야지” 하는 노력이라도 할 거예요.
아무튼 그런 의식이 있을 때 처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옛날에는 규(規)였어요. 나중에 이 규(規)라는 것이 동그라미 그릴 때 콤파스도 되지만, 원래 규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이런 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福(복)입니다. 복은 원래 그런 거였어요. 그 이후로는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일이 되었죠. 자기가 해결해야 되고 지켜야 되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복이 되었죠.
그러니까 복이라는 건 “좋은 복 지으십시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냥 요행으로서 복은 없어요. 내가 살아가는 것 이외에 요행은 없는 거죠.
행(幸)과 신(辛)
과거 한자의 사고 방식에서 행(幸)이라는 게 있죠. 신(辛)라면을 잘못 읽으면 행(幸)라면이 되잖아요. 그 행(幸)도 포춘이나 럭키로 이해하는데요. 뭔가 내 노력 외에 우발적으로 뚝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복이라는 것도 안 맞는 말이죠.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그런 것도 복이라 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림처럼) 幸은 위아래에 있는 게 있어요. 위와 아래에 각각 어떤 모양으로 돼 있는 게 있고요. 그리고 가운데가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이걸 세워야 해석이 돼요.
(가운데 있는 것은) 사람이에요. 서 있어요. 이것은 누군가를 잡아서 손을 나무에 이렇게 묶어놓은 거예요.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나무에 손을 묶어 놓은 거예요. 체포돼 있는 거죠. 감금돼 있거나 체포돼 있는 거예요. 이건 뭐냐? 우리를 괴롭히는 적국의 사람들, 다른 적대적인 공동체 멤버들을 잡아오면, 그들이 노예가 되죠. 적국의 전사들을 잡아서 안전하게 조치해 놓는 거예요. 그게 행(幸)이에요.
그러므로 행(幸)이라는 것은 안전을 도모해서 불완전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일 뿐이지, 우리의 능력과 재량으로 그 이외에 어떤 것이 뚝 떨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행이다 할 때 행(幸)은 위험 요소가 제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행이다 할 때 행은 위험 요소가 많이 제거되었구나! 안전하구나! 우리 공동체가 안전한 것만 가지고도 행이였던 거예요. 그 이상의 추가적인 요행을 바라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이 사람들을 계속 묶어놓을 수는 없죠. 계속 묶어놓을 수 없으니까 이 사람들에게 나중에 표시를 해두기도 하죠. 이 사람들이 안전에 도전하지 못하게끔 해버리는, 원시적이고 약간은 야만적인 문화가 있었어요. 어떻게 하느냐? 칼을 갖고 얼굴에 새겨버리는 거예요. 얼굴에 날인을 해버리는 거죠.
우리가 지금도 보면 도장 찍을 때 날인(捺印)한다고 하죠. 사실은 얼굴에 새기는 게 날인이에요. 그게 아닌 찍은 건 낙인(烙印)이죠. 낙관 낙인이에요. 우리가 날인한다 할 때 날은 새길 날(捺)자입니다. 이렇게 칼로 새길 날자이죠. 얼굴에 칼을 가지고 이렇게 새기는 거예요. 어쨌든 그렇게 날인을 해버려요.
날인을 할 때 그 상태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말로 하면 ‘맵다’고 그래요. 맵다는 말은 어떤 음식의 맛이 맵다가 아니에요. 음식의 맛이 맵다가 아니라 원래 날인하는 것을 맵다고 하는 거죠. 매울 신(辛)이 바로 그 글자예요. 이 말이 원래 쓰이던 말을 찾아볼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매운 맛을 보여줘야겠다! 이 매운 맛은 우리가 핫한 맛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주 고통스러움을 맛을 준다는 거죠.
우리가 쓰는 말 중에서 음식의 용어로 맵다는 말이 지금 우리 말에 없었어요. 왜 없는지 아십니까? 매운 건 뭐 때문에 맵죠? 고추를 먹어야 맵죠. 고추가 우리 한국에 들어온 지는 500년밖에 안 되죠. 그 이전에 있어야 맵다에 해당되는 우리 말이 있었겠죠. 맵다는 말은 고추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있던 말이거든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매운 해장국 먹어서 얼큰하다 그러잖아요. 얼큰도 우리 말이 아니죠. 얼큰은 만주식 술인 아리끼를 마신 상태를 말합니다. 만주 술을 아리끼라고 그러죠. 아리끼를 마신 상태 즉 알캉하다 혹은 얼큰하다는 같은 표현이에요. 아무튼 이것도 고추 들어오기 전에 있었던 말입니다.
9장
祭於公, 不宿肉. 祭肉不出三日, 出三日, 不食之矣. (제어공, 불숙육. 제육불출삼일, 출삼일, 불식지의.)
제어공(祭於公)
제어공(祭於公), 공에게 즉 돌아가신 군주에게 감사드리는 제사에서 불숙육(不宿肉), 고기를 익히지 않았다는 ‘不宿肉’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생각을 해봐야 돼요. 여기 주어들이 거의 다 없거든요.
불숙육(不宿肉)에 대해 6하 원칙으로 한번 보죠. 제(祭)를 하기 전인지 후인지, 대개 해석은 감사 기도를 한 후를 얘기하겠죠. 그러면 말이 겹치게 돼요. 고기를 묵히지 않았다! 그리고 제육불출삼일(祭肉不出三日)입니다. 감사 기도에 드린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았다는 거죠.
출삼일(出三日) 불식지의(不食之矣). “3일을 넘기면 안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의 고기를 묵히지 않다(不宿肉)는 것은 “준비된 고기를 미리 묵히지 않았다”는 거죠. 어떤 희생양이 있으면 그 희생양은 당일에 처리해서 감사 기도에 썼다는 얘기죠. 미리 잡아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미리 잡아두지 않고, 왜 그날 신선한 희생양을 골랐느냐? 만일 미리 골라두면 사람이 꾀를 내요. ‘이놈은 별 필요가 없겠네!’ ‘이놈을 미리 잡아놓을까!’ 아니면 ‘우리 감사 기도는 앞으로 일주일 후인데, 이놈은 한 3일 있으면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어쨌든 3일에 죽은 놈을 갖다가 제에 올리지 않는다는 거죠.
왜냐하면 공적인 축제에 쓰이는 것은 비실비실한 애들이나 생명이 정해진 애들이 아니라, 멀쩡한 애들을 당일 날 고른다는 거예요. 적어도 공동의 축제, 공(公)의 축제면 굉장히 큰 축제거든요. 그래서 고기를 재우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날 잡아서 그날 처리했다는 거죠.
그리고 제육불출삼일(祭肉不出三日)에서 말하는 것은 제(祭)에 쓴 고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애프터(after)이죠. 제에 쓴 고기는 3일을 넘기지 않았다는 거죠. 3일을 넘기면 드시지 않았다! 3일을 넘기면 못 먹죠. 이런 것이 단순한 것 같지만 복잡한 게 많습니다.
여기는 지금 장의 구성이 달라서 그러는데, 14장을 한번 봐 주시겠어요. 14장입니다.
問人於他邦, 再拜而送之 (문인어타방, 재배이송지.)
康子饋藥, 拜而受之, 曰: "丘未達, 不敢嘗." (강자궤약, 배이수지, 왈: "구미달, 불감상.")
문인(問人)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문후를 드리는 거죠. 안부를 묻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안부를 묻는다! 타방(他邦)에 있는 사람에게 물은 거죠. 즉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물으러 누군가를 보내는 거죠. 그럴 때는 재배(再拜)하고 보냈다는 겁니다.
두 번 절하는 것은, 한 번은 녹(祿)을 해 주시는 그분에게 드리는 절이고, 또 한 번은 문후를 받을 분에 대해 절을 대신 미리 한 거죠. 내가 이렇게 전해드리니까 그대로 전해드리라고 한 거죠. 이렇게 보면 전달이죠.
그런데 이걸 하자는 게 아니고요. 그 다음을 보시죠.
康子饋藥, 拜而受之, 曰: "丘未達, 不敢嘗." (강자궤약, 배이수지, 왈: "구미달, 불감상.")
강자(康子), 계강자라는 사람은 앞에 나왔었죠. 강자가 약을 선물 보냈다는 것입니다. 계강자가 약을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배이수지(拜而受之) “절을 하고 그것을 받으셨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은, 구(丘) 즉 공구 자신의 말이 나옵니다.
“구미달(丘未達) 불감상(不敢嘗)”입니다. “구(丘)는 미달(未達)”이라는 것은 “그 약에 대해서 잘 통달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불감상(不敢嘗)’이라고 했습니다. “감히 맛볼 수 없나이다” 하고 버렸다는 것입니다. 받긴 받았는데 버렸다는 것은 무슨 얘기일까요?
저도 그래요. 저에게 몸에 좋다고 약을 보내오시잖아요. 일단 “감사합니다!” 하고 받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면 버립니다. 천하 없는 약이라도 그렇습니다. 그냥 “몸 조심하세요!” 인사하는 게 옳고, 그 다음에 약을 보낼 정도는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예전에는 약이 의사보다 더 귀했어요. 그 사람에게 맞춰서 의사를 보내주지 약을 보내지 않는 거예요.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약을 보내는 거죠. 그 사람의 몸을 상대로 생각하면 의원을 보내줘야 되겠죠. 요즘으로 치면 병원 진찰권을 끊어줘야죠. 약을 사주는 게 아니라요. 그래서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다른 해설서에 그런 말이 있어요. 불송약(不送藥) “약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송의(送醫) “오직 의원을 보낼 뿐이다.”는 거죠. 그렇게 의원을 보내왔으면 공자가 “감사합니다!” 하고 진찰을 받았겠죠. 일설에는 이걸 잘못 해석해서, “강자가 공자를 암살하려고 할까 봐 두려워서 안 먹었다” 라는 얘기를 하는데요. 그 시대 즉 춘추시대만 하더라도 대놓고 암살하고 약 먹여서 죽이고 그러진 않았습니다.
그런 게 아니고, “너는 네 입장에서만 사람을 생각하는구나.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역지사지해서 보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3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3일을 넘기지 않는다.” 이건 3일까지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제육불출삼일(祭肉不出三日), 출삼일(出三日), 불식지의(不食之矣.)”
3일까지 남아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축제가 뭔가 잘못된 거예요. 그 자리에 오는 사람들이 다 먹고도 남아 3일을 넘겼을까? 분명히 양을 생각하고 했을 거란 말입니다. 3일을 넘긴다는 것은 고기가 변해서 더 이상 먹으면 안 된다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줌이 박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나누어져 오늘 떨어지면 그만인 거죠. 오늘 떨어지면 그만이고 내일 새로 잡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되는데, 사람들을 가려가면서 누구는 고기 한 쌍 내주고 누구는 그냥 나물 한 쌍 내주면서 고기가 3일 남도록 한다! 이건 아니다는 거예요. 공동체에서 감사 기도를 드릴 때는 적어도 고기는 충분하게 하고 충분히 나누되, 단 음주 음복은 아니라는 거죠.
술은 아니에요. 일반 술은 내줄 수 있지만 감사 기도에 드렸던 술은, 먹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한 잔씩 허용이 돼요. 쉽게 말해서 이번 감사 기도의 멤버 중에서 주인공 멤버에 속하고, 영주권자가 아니라 시민권자에 속하는 사람에게만 허용이 됐던 것이에요.
대한민국은 현재 태어나는 순간 다 국민권자가 돼요. 살인을 해도 국민권자에서 벗어나지 않고, 절도를 하고 강도를 해도 여전히 국민권자이죠. 강도를 해도 투표권이 있고 절도를 해도 투표권이 있고, 자격정지만 법적으로 당하지 않았다면 피선거권과 선거권이 다 있어요.
그건 아니라는 거예요. 적어도 음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격, 그건 이 시대에 근접한 걸 보면 시민권자죠.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속지주의가 아니라 속혈주의에 의해 한국 사람이 돼 버렸는데요. 시민권자가 되려면, 예를 들어 외국에서 현재 한국으로 귀화하려고 하잖아요. 사실상 시민권 얻는 거랑 비슷하죠. 이분들은 헌법도 시험 봐야 되고, 시험관 앞에서 애국가도 불러야 되죠. 한글도 시험 봐야 되고요. 역사도 시험 봐야 돼요.
오히려 한국에서 태어나 국민권자가 저절로 된 사람들은 헌법도 몰라요. 저도 모릅니다마는. 헌법이 예를 들어서 총강 9장,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30개의 장, 국회 29개 장 그 다음에 행정부 35개 장, 법원 10개 장, 헌법재판소 3개 장, 선거관리 3개 장, 지역 자치 2개 장, 경제 9개 장 그리고 헌법 개정 3개 장, 부칙 6개조 이렇게 돼 있고 내용들이 어떻다는 정도는 알아야겠죠.
지금처럼 우환이 와 있으면 국민들 사이에서 헌법 읽기 운동이 있어야 돼요. 헌법부터 읽고 시위에 나가라고 권하고 싶어요. 어겼다고 그러는데 자기는 읽어보지도 않고 남의 말을 따라가지고 어겼다고 주장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적어도 이 나라에서 음복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예의가 아닌가 그런 생각해 봤습니다.
10장입니다.
食不語, 寢不言 (식불어, 침불언)
식불어(食不語)라고 하면,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걸까요? 침불언(寢不言)이면 자면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걸까요? 물론 자면서 이야기는 잘 안 하죠. 자면서 이야기하는 건 뭔 소리일까요? 잠꼬대는 아닙니다.
식불어 침불언(食不語 寢不言) 이라고 그랬습니다. 語라고 하는 것 가운데 새가 떠드는 것도 語가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식불어(食不語)는 사람이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먹으면서 대화합니다.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식사를 하면서 내지 않아야 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짭짭거리지 않고 후루룩거리지 않는 등, 음식을 먹는데 짐승 소리를 내지 않고 사람답게 사람 소리를 낸다는 거예요.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먹지 않는 거죠. 그래서 짐승 소리가 나지 않게 먹는 거예요.
그럼 침불언(寢不言)은 뭘까? 자는데 언(言)에 해당하는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자면서 다 어기고 잡니다. 그이 말은 ‘아이고 아이고! 어휴 아이고!’ 등등을 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할 것 있으면 미리 하고, 누워서는 숨을 고르고 자라는 거예요. 숨을 고르지 않고 잠에 들지 말라는 거죠.
피곤해서 비명이 나올 수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냥 비만 오면 자지 않고 있어도 왼쪽 다리가 막 쑤셔요. 한 100kg짜리 사람이 올라와서 밟아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아구구’ 하는 이런 건, 잘 때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잘 때는 탄식을 뱉지 말고 조식(調息) 즉 숨을 고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語)라는 게, 향(鄕)과 관련해서 지난번에 말씀드렸어요. 사람이 몽고 파로 같은 데나 아니면 야외에서 불 피워놓고 있는 그런 단위가 향이라고 그랬잖아요. 이 향에서는 공사를 논하는 것과 같은 공적인 일을 결코 하지 말라고 하죠.
그래서 공자가 향당(鄕黨) 즉 향(鄕)의 당(黨)이라고 했는데, 그곳은 향적(鄕的) 개념이 있는 공적 자리인 거죠. 그런 공적인 공간인 거죠. 요즘으로 치면 마을 회관 이런 곳인데요. 그런 데서는 공적인 일을 논의하지 말라는 거예요.
공적인 일을 논하고 싶으면 논해야 될 사람과 이 당(黨)을 나가서 밖에서 논하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은 털어버리고 들어오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당(黨)에서 공적인 일이 이루어지면 이 향(鄕)은 무너지기 때문이에요.
엄밀하게 말하면 가족 간에 어떤 얘기를 다 할 수 있는데, 적어도 가족이 쉬는 공간에서는 공적인 어떤 얘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고 싶으면 나가서 하고 들어오라는 거죠. 아니면 그 논의를 하는 자리에 가서 같이 하라는 거죠.
그래서 밥 먹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때우는 것처럼 놀라는 거예요. 그게 맞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고 긴급하게 할 얘기 있으면 가족끼리 아예 밖에 나가서 같이 마루에 앉아서 얘기를 하든가 하라는 거죠.
노래와 타령 그리고 읊다
긍정적인 면에서도 부모 자식이든 부부 간이든, 나와가지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 때우는 얘기나 하면 하죠. 시간 때우는 얘기를 하니까 그러는데, 여러분 ‘노래’라는 것 아십니까? 한자로 말하는 노래 가(歌)를 우리는 노래라고 그러죠.
이 가(歌)는 사실 노래가 아니에요. 歌가 노래로 번역되면 안 돼요. 그러면 ‘노래’라는 건 뭐죠? 노래라는 것은 공부할 때 부르는 것도 노래이고, 싸우러 나갈 때 부르는 것도 노래이며, 일과 관련되어서 나오는 것도 노래예요. 노릇이나 놀이 그리고 노래가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노릇이나 놀이 등이 없이 새가 얘기하는 경우라면 새가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새를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는 거죠. 즐겁게 꽃도 보죠. 이럴 때 꽃 노래라고 하면 안 돼요. 꽃 타령이에요. 마찬가지로 새 타령이고요. 일과 그런 역할 등과 관련돼 있지 않는 것으로서 불러주는 것은 타령이예요.
그리고 타령이든 노래든 이러한 것을 구성하고 있는 높낮이와 길이를 가락이라고 그래요. 가락 가운데서 가사가 형성되지 못한 게 있죠. 우리는 가사가 있어도 그냥 속으로 대충 좀 굴리면 ‘흐물거린다’고 그러죠. 흐물거리는 건 가사가 없이 가락을 조이는 거예요. 어떤 목적대로 사물을 계속 얘기하면서, 엄마를 찾는다든가 밥을 찾는다든가 하면서 계속 입에서 소리하듯이 하는 것은 칭얼거린다고 해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동물처럼 그냥 하면 옹알거린다고 그러고요. 애기는 옹알거려요. 조금 더 크면 밥을 찾고 엄마를 찾으면서 칭얼거리죠. 칭얼거리는 것은 목표 의식이 있는 사물을 걸어놓고 하는 거예요. 흥얼거리는 건 확실하게 가사가 형성이 안 됐거나 가사를 까먹었거나 할 때 써요.
그런데 이 전체를 합해서 우리 말로 뭐라고 그러냐? ‘잎’이라고 불러요. 잎의 오늘날의 단어가 ‘읊다’예요. ‘한번 읊어 봐!’ 그러잖아요. 요즘은 읊어봐 하지도 않죠. 요즘은 다 ‘얘기해 봐!’ 그러죠. ‘읊어봐!’ 하는 것은 사라졌죠.
일제 시대 때만 해도 ‘읊어봐!’ 하면 노래를 불러야 돼요. “저기는 어디고 어디는 어딘데요!” 그러면, “읊으라니까. 떠들지 말고!” 그러면 “저는 요~ “ 하면서 나름대로 가락을 붙여가면서 막 해야 돼요. 그게 ‘읊어’이고 ‘읊다’예요. ‘읍다’가 어원이고 ‘읍다’는 원래 ‘잎’이라는 고어에서 온 말이에요.
잎이라는 말이 고어이고, 그래서 옛날에는 ‘입어 봐!’ 이러는 거예요. ‘잎어 봐!’ 해서 이렇게 ‘잎’이 붙어서 풀어내면 이게 노래예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노래예요. 그냥 이 ‘입’을 그냥 풀어내지 않고 읽으면 읽는 거예요. 그럴 때는 ‘읽다’예요. 글을 읽다 낭랑하게 낭독하는 것은 ‘읽다’예요. 기역(ㄱ)이 원래 없이 피읍(ㅍ)이 붙어 ‘읊’이 되면 그걸 노래화시키는 거고요.
우리는 이렇게 여러 문화를 외부로부터 자꾸 받아들이고 지역이 또 복잡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삼국시대 이후로 국내에서는 별로 안 싸웠어요. 그러니까 신라 백제 고구려가 끝난 이후로는 이 반도 안에서 별로 싸운 적이 없어요. 죽어라 목숨 걸고 싸운 적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원수도 별로 없지만 문화 교류도 더 철저하지 못했어요.
싸움만큼 확실하게 문화가 섞여요. 일본 같은 경우는 긴 전국 시대를 보내죠. 그러다 보니까 문화가 제대로 섞여서 오히려 이 ‘읊다’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일본말로 노래를 뭐라고 그러죠? 노래를 ‘우타’라 그러죠. ‘우타’는 읊다의 음운이 변화된 형태예요.
왜 이 얘기를 하느냐? 우리가 언어(言語)라고 쓸 때 이 옛날 말은 굉장히 다양하게 썼다는 거예요. 그 중에서 오늘날의 노래로 치면 이것은 어떤 역할이 포함돼 있는 것이라고 그랬죠. 어떤 일이 포함돼 있다는 거잖아요. 이건 향당 안에서는 하면 안 되는 거예요. 향당 안에서는 이런 노래도 부르면 안 되는 거예요.
향당 안에서는 타령이나 불러야 되는 거예요. 새가 좋다! 꽃이 좋다! 뭐 비가 좋다! 번개가 친다! 이런 것만 해야 되지, 괜히 일하는 노래 요즘으로 치면 일 하는 노래나 특히 군가와 비슷한 것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먹을 때에도 어떤 면에서 대화는 나누되,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일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짐승 소리 (비슷한 것을) 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옛날 어른들이 그래서 첩첩거리고 먹으면 굉장히 뭐라고 (나무랬던) 거예요. 쩝쩝댄다고 말이죠.
그 다음, 잘 때도 생각 없이 이미 호흡을 다 고르고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없이 자라는 거죠.
여기까지는 그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 11장입니다.
雖疏食菜羹瓜, 祭, 必齊如也(수소식채갱과, 제, 필제여야).
여기서 문장을 끊는 것은 ‘소식, 채갱과, 제’로 끊을 수도 있고, ‘소식, 채갱, 과제’로 끊을 수도 있어요. 어떻게 끊어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여기서는 ‘과(瓜)’까지 끊어 놨네요. 그럼 여기 끊은 방식대로 할 게요.
비록(雖), 소식(疏食) 나물로 된 밥 즉 나물 밥이에요. 이것을 나물 반찬이 있는 밥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보통 채소(菜蔬)할 때 소식(疏食)을 쓰니까 나물 반찬이 곁들어진 밥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나물을 끓여서 밥 만든 거예요. 그냥 미반(米飯) 즉 쌀로 만든 밥이 아니에요.
쌀은 조금 있을지 몰라도 대부분이 나물인 거예요. 옛날 우리 가난했을 때 소나무 껍질 끓여서 죽 끓여 먹고 밥 끓여 먹었던 그런 밥을 소식(疏食)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즘처럼 생각하는 소식(疏食)은 우리가 너무 잘 먹고 산다는 이야기이죠.
그러니까 먹을 게 없어서 집에서 끼니를 끼울 때, 나물 반 밥 반인 그런 밥을 소식이라고 그래요. 실제로 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소식을 먹었어요. 밥을 먹으면 보리쌀은 아래 조금 깔리고 나머지는 대개 산나물로 해서 밥을 먹었어요. 그리고 또 밥이 안 되는 나물도 많아요. 그러면 그걸로 죽처럼 그냥 끓여요.
이게 뒤에 나오죠. 채갱(菜羹)이죠. 채소 갱(羹)이죠. 채소 갱이라는 건 뻑뻑한 것이죠. 그러니까 한국식은 국은 맑은 물이고, 탕은 끓여 온도에 의해서 사물을 섞은 것이고, 갱은 뻑뻑하게 만든 거죠. 전분(澱粉)을 넣어서 갱(羹)을 만드는 건 현재 오늘날의 중국식이고요. 옛날에는 채소 안에 있거나 나무의 껍질 안에 있는 성분들이 오래 끓이다 보니까 뻑뻑해지는 거죠. 그런 갱(羹)이죠.
오늘날처럼 갱(羹)이라고 해서 이것저것 넣고 전분도 적당하게 넣어서 맛있게 나오는 그런 갱이 아니죠. 정말 가난한 거예요. 그런데 비록 채소 즉 나물이 반이 넘는 밥이든 그리고 나물을 갖고 갱을 끓였든 그리고 먹을 게 없어 오이나 먹고 있든, 그것밖에 차린 게 없을지라도 오늘 식사 자리에서 감사는 해야 된다!
祭, 必齊如也 (제, 필제여야)
제(祭)! 감사해야 된다! 감사를 할 때는 반드시 큰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해야 된다! 아무리 험한 음식을 앞에 놓고 오늘 식사를 때우더라도, 감사 기도를 하고 그 감사 기도는 음식에 따라서 소략(疏略)해서는 안 된다. 그 음식에 따라 소략해지는 게 아니라, 먹는다는 그 자체는 동일하기 때문에 마치 큰 제사를 지내고 그때의 경건함으로 감사해야 된다!
제(祭)는 감사 기도이고, 齊(제)는 감사 기도를 하나의 형식화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누군가가 돌아가시거나 누군가의 큰 어떤 행사가 있거나 해서, 이렇게 祭(제) 지내는 것이 형식화되어 있는 것이 齊(제)인 겁니다. 그렇게 감사하고 제사 드리는 경건함으로 한다는 거죠. 비록 소소하게 매일매일 먹는 이 나물 식사일지라도 말이죠.
그러니까 노나라만 하더라도 아주 달라진 게 있었어요. 공자가 노나라의 사구(벼슬)을 하면서 애공의 생활 습성이 달라진 게 있었어요. 애공은 그전에는 막 먹었어요. 그런데 공자가 오고 나서 긴장해서 그때부터는 식사할 때마다 한 번도 빼지 않고 기도하고 먹었어요. 이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카톨릭 크리스천만 (식사)기도를 합니다. 카톨릭 같은 경우 기도 안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요. 개신교도 안 하는 분들이 많죠. 그런데 이 감사 기도는 필요해요. 짧은 시간이라도 ‘내가 오늘 식사를 하는구나!’ 이건 밥이 차려지고 있는 사이에 해도 돼요. 자기가 차려서 자기가 먹어야 된다면 자기가 차리면서 해도 돼요.
자기가 차려 놓고 라면 하나 끓여 먹더라도 툭 놓고 툭 못 먹어요. 그러면 두 손을 놓고 먹죠. 그런데 사실 잘 지켜지기 어려워요. 저도 안 지켜요. 같이 지키자고 이렇게 권해드리고는 싶어요. 그래서 내 앞에 있는 것의 내용물에 따라서 결정하지 말자! 오늘 먹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언제나 감사다!
그 다음 장(12장)입니다.
席不正, 不坐(석부정, 부좌)
이것도 (시중) 해석이 많이 달라요.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그리고 “앉지 말라!”고 했는데요. “자리가 바르지 않다”는 게 무얼 말하는 걸까요? 여기에 대해 ‘자리가 깨끗하지 않거나’ ‘정돈이 안 돼 있거나’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도 있죠. 그리고 자리 배열이나 이런 게 잘못됐다고 해석하기도 해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석(席)이 무언지 알아야 해요. 席은, 어떤 공간이 있다면 여기에 이렇게 돗자리를 깔아놓는 거예요. 이게 석(席)이에요. 따라서 席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자리예요. 앉을 자리이죠.
반면에 좌(坐)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보면 다르죠. 이렇게 바위더미 흙더미가 있는데, 여기에 사람이 기대 앉아 있는 거예요. 이것은 행위를 말하는 거죠. 이 석(席)은 앉는 대상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 좌(坐)는 앉는 그 행위를 말하는 거예요.
여기에 석부정(席不正)이라고 했으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안고 있는 그 실제 물질적인 자리가 부정하면! 이라는 뜻이죠. 부정(不正)하다는 건 정(正)하지 않다는 뜻인데, 정(正)의 반대말이 많죠. 잘못됐다 오(誤)가 있는데, 여기서 안 맞을 것 같죠. 그 다음 부정으로 사(邪)가 있죠. 파사(破邪)라 그러죠. 이것도 여기에 안 맞을 것 같죠. 그 다음에 정(正)이 아닌 것이라고 쓰는 것으로 왜(歪)가 있죠. 왜곡할 때 왜(歪)인데, 어쨌든 이 세 개는 다 해당 안 돼요.
여기서 ‘바르지 않다(不正)’이라는 것은 ‘정리 안 된 자리’를 말해요. 정리 안 된 자리는 요즘하고 달라서 언제든 위험할 수 있어요. 내가 정리 안 된 자리에 앉지 않는 버릇을 해야 손님도 정리 안 된 자리에 앉지 않아요.
공자 시대만 하더라도 자리는 전부 짚이나 이런 걸 갖고 만든 동그란 의자예요. 아니면 그냥 멍석 같은 거예요. 멍석 같은 것 외에 아주 낮은, 중국 사극에 나오는 그런 자리 있죠. 그런 자리는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면 위험해요. 얼마 전에 누가 중고 패딩을 택배로 받아봤더니 그 안에서 구더기가 나왔다는 뉴스를 보셨습니까?
옛날 짚자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그 안에 심지어 지네가 있지 말라는 법도 없어요. 내가 깨끗하게 하듯이 누가 봐도 깨끗하게 하라는 의미에서 부정(不正)이라는 것에는 아무 주어가 없어요. 그냥 명령어예요. 나도 너도 다 포함되는 거예요.
석(席)이 부정(不正)하면 앉지 마라!
요즘 같은 경우는 뭐 별로 없지만, 요즘도 앉을 때는 자리를 확인하고 앉는 분들이 있어요. 깨끗한지, 물은 안 떨어져 있는지, 그런 것도 살피는데요.
석(席)이라고 하고 자리에 앉을 때 앞에 뭐라고 쓰죠? 착석(着席)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자리에 붙인다고 하는 거죠. 이 석(席)이 물질이니까 붙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좌(坐)를 쓰면, 좌정(坐定)한다 이렇게 쓰죠. 자리를 정해 놓고 앉는다는 거죠. 석(席)과 좌(坐)는 이렇게 뜻이 달라요. 만약에 다른 사람이 해석하는 대로, 서열도 안 맞고 자리 배치도 안 맞고, 여기는 호스트 석이고 저기는 게스트석인데 이런 것도 안 맞추잖아요. 그런 식으로 안 맞는 경우는 다른 글자를 써야 돼요. 좌부정(座不正)으로 좌(坐)자에다가 옆에 더 붙이면 돼요.
이 좌(座)는 뭔가 인문적이고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판단해서 하는 질서 개념의 글자예요. 강조할 때도 좌(座)가 어디 의자는 아니잖아요. 어떤 자리에서 누군가는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토론하고 이런 어떤 흐름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 좌(座)라고 하고, 그냥 앉는 행위는 좌(坐)이고, 앉는 대상체는 석(席)인 거예요.
그 다음 13장입니다.
鄕人飮酒, 杖者出, 斯出矣(향인음주, 장자출, 사출의).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향인나, 조복이립어조계).
향인음주(鄕人飮酒)이니, 향인들이 술을 마실 때 이야기입니다. “향당에 속하는 향인들이 술을 마실 때는, 장자(杖者) 즉 지팡이를 짚은 자를 말하는 나이 드신 분이 나가시고 다음에 나갔다.”
왜 그럴까요? 지금 한국에 지금도 그 문화가 남아 있어요.
약간은 이상하게 남아 있기도 하지만, 먼저 꼰대들부터 보내고 남아서 2차 가고 하는데요. 이것도 있지만 그래도 술이 한창 취했어요. 그러면 반드시 나이 드셨거나 상대적으로 자기가 존중하는 사람들을 먼저 차에 태워서 귀가를 시키고 그 다음에 자기들끼리 정돈해서 마시는 거죠.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죠. 이게 한국에 있어요. 일본이나 중국 대만에도 있어요. 중국은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유럽 같은 데서는 헤어지면 노소 없이 같이 헤어지죠. 그러다 보니까 노인네가 술 취한 상태에서 골목길을 걷다가 당하는 그런 장면이 영화의 모티브로 자주 나오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중간에 택시에서 또 술 먹으러 내리지 않았다면 영감님은 집 앞까지 무사히 가거든요. 오히려 모두 보내 드린 마지막 사람이 가다가 털리는 일이 나오죠. 노인들이 중간에 먹거나 자기 혼자 먹었으면 어쩔 수 없죠.
그래서 전체적으로 술을 같이 먹었는데 중간에 노인네들이 사고 나는 일은 없다라는 거죠. 마찬가지로 나가면서 뒷수습을 해야 돼요. 저 분은 자기 천막까지 제대로 가시나 안 가시나 살피는 거죠. 이것도 높임인 거예요. 그리고 자기 낮춤이고요. 질서인 거죠. 이런 것이 하나하나 배우는 것이 규(規)인 거죠. 규약(規約)의 규(規)인 거예요. 성인식이 되면 이런 것부터 배우는 거예요.
그래서 술 먹었다고 먼저 가면 그날은 술 먹었으니까 봐주겠죠. 그러다가 “너 어제 왜 그랬느냐? 그러는 것 아니다.” 그러는 거죠. 우리사회 우리 공동체에서 지켜야 될 규칙이 있고, 보호해야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 보호가 있어야만 언젠가는 또 돌아가면 우리 전체가 보호되고 이런 거다는 거죠. 아무튼 이런 간단한 얘기인데, 깊이 들어가면 더 복잡해져요.
다음 구절입니다.
鄕人儺, 朝服而立於阼階(향인나, 조복이립어조계).
향인나(鄕人儺)에서, 나(儺)라는 건 그냥 억지로 만든 글자예요. 이건 한자라기보다는 원래 다른 데 있던 것을 억지로 따 와서 만든 것입니다.
나(儺)가 뭐냐 하면, 요즘 새해를 맞이해서 12월 그믐날 밤에 폭죽 터뜨리는 것이 나(儺)예요. 그 날의 해라 그러죠. 아무튼 ‘날의 해(納)’라는 것은 새해 맞이를 하기 위해, 새해가 오기 직전에 모든 것을 태워서 청소하고 밝히는 그런 행사예요.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어떤 데에 여기저기 연기 나게 불을 붙여서 소나무 가지 같은 것으로 막 털고 이러거든요. 서양 문화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 그걸 보니까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뭐라 그러냐면 푸닥거리라고 그랬어요. 푸닥거리가 아니라 그전 밤에 하는 새해 맞이 청소예요. 첫 해가 뜰 때를 위해서, 그 해가 뜨기 전 또는 그 이전까지 청소하고 맞이하겠다는 거예요. 자시가 넘어가면 새해가 밝아오죠.
그러니까 송구(送舊) 할 때 청소를 한다는 거죠.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도 청소된 상태에서 맞이하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향인(鄕人)들이 ‘나래회 (날의 해)’를 벌이고 있어요. 그래서 나래회를 벌일 때 제일 먼저 깨끗하게 해주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게 초란이라 불러요. 초란이라고 부르는 건 10살에서 12살짜리 아이들인데, 그전(나이)에는 아직까지 너무 깨끗해서 청소 안 해요. 10살짜리부터 12살짜리 아이들이 먼저 나와서 간단하게 연기를 쐬요. 얘들은 연기만 갖고 휘저어요. 불은 안 붙여줘요. 불 붙이면 사고도 나겠지만 불은 안 붙여줘요. 그걸 초란이라고 그래요.
중국에 가면 새해 전날 하죠. 요즘은 아무 데서 아무나 터뜨리죠. 생일이라고 터뜨리고 자동차 샀다고 터뜨리고 집 샀다고 터뜨리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지금도 북경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가 아니면 설날 전날에는 폭죽을 터뜨리는 건 허용을 하죠.
우리는 그 행사를 그믐날에 안 하고 대보름날 했어요. 쥐불놀이가 바로 나래해여요. 우리는 옛날부터 대보름이 와야 진짜 새해라고 했죠. 아무튼 한국에는 새해 설이 참 많아요. 10월 상달이 새해이고, 동지가 새해이고, 대보름이 지나야 새해라고 하기도 해요. 아무튼 습성에서 대보름 때 하는 쥐불놀이가 그런 나래해에 해당돼요. 아무튼 제석일(除夕日) 마지막 날의 행사에요.
이때 공자는 조복(朝服) 즉 조회할 때 옷을 입고 어디에 서 계셨다는 거예요. 조계(阼階)라는 곳이에요.
향(鄕)에 당(黨)이 있으면, 그 건물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건물에 계단이 있겠죠. 향당도 웬만하면 다 남쪽을 보고 있죠. 그 가운데 동서로 되어 있는 계단을 조(阼)라고 그래요. 향당의 집, 즉 공회당 건물이 있으면 그곳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있을 거잖아요. 계단이 여러 개는 없어요. 옛날에 한두 개 정도, 동서로 나 있는 그 계단을 조계(阼階)라고 부릅니다.
조계 위 부분에서 걸거치지 않게 서 있었다는 거죠. 왜? 잠시라도 먼저 새해를 맞이하려는 각오예요. 그것도 자기가 공적인 임무를 갖고 있으니까 공복인 조복(朝服)을 입고, 공적인 임무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새해를 맞이하겠다는 마음이에요. 자기는 공인이니까! 현재 벼슬을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비록 향당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푸닥거리라고 하죠) 푸닥거리를 하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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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을사년 공부거리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