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亞洲歌姫之稱的鄧麗君(英文名為Teresa Teng)逝世,今年5月屆滿25週年,電視臺等也盛大播出特輯節目。至今在亞洲仍擁有超高人氣的鄧麗君,紀實作家平野久美子長年持續進行取材,寫下《鄧麗君之夢: 華人歌星傳說》(暫譯)一書,揭露她鮮為人知的家族故事。
아시아의 가수여왕이라고 불리던 덩리쥔(영어식 이름; Teresa Teng)이 세상을 떠난지, 올해 5월이 만 25주년이 되어,텔레비젼 방송국 등이 특집 프로그램을 성대하게 방영했다.지금도 아시아에서는 매우 높은 인기를 여전히 누리고 있는 등려군은, 르포 작가 平野久美子가 오랜 세월동안 취재하여, 『등려군의 꿈: 중화인 가수왕의 전설』(가제)이라는 책을 써서,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가족 이야기를 파헤쳤다.
2020年5月8日,適逢鄧麗君逝世25週年,我一邊聽著自海內外購買收藏的鄧麗君CD,再次為她的歌聲深深著迷。背負著宿命般的歷史,因出生的時代背景、場所和環境而沉澱的悲哀、愛恨、鄉愁、憧憬等複雜的心境經過昇華,巧妙地透過歌詞傳遞出許多訊息的鄧麗君,即使在歿後25年,人氣仍歷久不衰,熱門歌曲在各國被傳唱下去,也是因為她是具有言靈之力的稀有歌手吧。
덩리쥔 서세 25주년을 맞이하여, 나는 국내외에서 구입하여 소장한 덩리쥔의 CD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시 그녀의 노래에 깊이 빠졌다. 숙명같은 역사를 짊어지고, 태어난 시대 배경, 장소와 환경으로, 침전된 슬픔, 애증, 향수, 동경 등 복잡한 심경이 승화되어, 가사에 교묘하게 투과되어 많은 이야기를 전했던 덩리쥔은, 설사 사후 25년이 지나도, 인기가 여전히 사그러지지 않았다. 인기 곡들이 여러 나라에서 불리워지는 것도 그녀가 언어에 신령한 힘이 있는 몇 안되는 가수이기 때문일것이다.
現在依然會想起在鄧麗君逝世20週年的2015年發生的事。經過長途跋涉,終於抵達鄧麗君的母方親屬位在中國陝西省的墳墓。
「歡迎祭拜,你是第一個來到這裡的日本人啊。」
雖然被周遭的人如此催促著,手拿著線香,無法壓抑內心湧上的情感。鄧麗君生前熱切盼望能夠回到祖國掃墓,卻無法實現願望。
현재도 여전히 덩리쥔 서세 20주년이었던 2015년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오랫동안 길을 걷고 산을 넘어 , 마침내 중국 산서성에 있는 덩리쥔의 외가친척의 묘지에 이르렀다.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환영합니다,당신은 이 곳에 온 최초의 일본인 이십니다。」
비록 주위 사람들에게 재촉을 당하였지만, 손에 향을 들고서, 마음속으로 복받치는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덩리쥔은 생전에 조국에 돌아가서 성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으나, 소원을 이룰 수는 없었다.
長至膝蓋的牛筋草和狗尾草在寒風吹拂下窸窣作響。我深呼吸了一口氣之後,在龜甲墓前行叩拜之禮,墓碑上刻著十字架。
顯妣
聖名:馬利亞
趙張守鑫大人之墓
孝女 趙素梅 素桂、素亭 敬立
一九七四年六月十六日
무릎까지 길게 자란 왕바랭이풀과 강아지풀은 찬바람에 바스락거리며 소리는 냈다.나는 숨을 깊게 쉰 후, 거북모양의 묘 앞에서 절을 하고, 묘비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돌아가신 모친
세례명: 마리아
趙張守鑫大人지묘
효녀 조소매 ,소계, 소정이 삼가 세움
1974년 6월 16일
我的視線片刻間離不開那尊墓碑,上面刻著「馬利亞」,原來祖母居然是天主教徒啊......。演藝圈用的英文名Teresa Teng是鄧麗君自己取的,但有說法指來自對德瑞莎修女(1910-1997)的敬愛,或者是她上教會時的洗禮名。
나의 눈길은 잠시 동안 그 묘비를 떠나지 못하였다. 위에는 "마리아"라 새겨져 있는데, 원래 할머니는 의외로 천주교인이시군요. 연예계에서 쓰던 영어식 이름 Teresa Teng은 덩리쥔 자신이 골랐던 것이나, 테레서 수녀(1910-1997년)에 대한 존경으로 골랐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는 덩리쥔이 교회에 다닐 적의 세례명이라는 말도 있다.
鄧麗君祖母張守鑫之墓(筆者攝影)
덩리쥔 조모 장수흠(張守鑫)의 묘( 필자 촬영)
1991年,鄧麗君在巴黎接受專訪時,表示比起父親,自己更受到母親的強烈影響。「歌姬」的,要解開這位打動人心的歌唱能力,不只是被稱為「silky voice」甜美而有韻味的歌聲及精湛的表演技巧,關鍵在於鄧氏一家背負的歷史。如同她繼承了母親的好歌喉,鄧麗君的精神世界可能也受到母方的DNA影響吧,站在墳墓前的我如此想道。
1991년 덩리쥔이 파리에서 특별인터뷰를 수락하였을 때, 아버지보다는 자신은 어머니의 강렬한 영향을 더 받았다고 하였다. 「歌姬(가수 여왕)」즉,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이런 노래실력을 조사해 보니, 「silky voice」라는 감미롭고 우아한 노래소리 뿐만이 아니고 정교하고 깊은 연예 기교는, 덩씨 일가로 내려온 역사가 관건이다. 그녀가 마치 어머니의 좋은 목청을 이어받은 것처럼, 덩리쥔의 정신세계는 아마도 어머니의 DNA 영향을 받은 것도 있을 것이라고, 묘 앞에 서있는 나는 이같은 생각을 하였다.
祖父母的足跡
根據母方親戚表示,鄧麗君的祖母張守鑫(1904-1974年)是在爆發日俄戰爭的那年,出生於山東省東平縣。從纏足來看,應該生長於富貴人家。15、6歲的時候,與前途似錦的同鄉青年結為連理,之後生下3個女兒。
외가 사람들이 말한 것에 따르면, 덩리쥔의 할머니 張守鑫(1904-1974年)는 일본과 러시아 전쟁이 터진 그해에, 산동성 평현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전족을 한 것으로 보아서,
틀림없이 부귀한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다. 15,6살 적에 전도가 밝은 같은 고향 청년과 결혼을 하였고 슬하에 3명의 딸을 두었다.
鄧麗君的祖父趙守業(1900-1943年)是出生於北京發生義和團事件的1900年。自幼聰明伶俐,虛歲11歲時,被清朝政府選拔為最後的公費生,去過英國留學。當初預計留學2年,但是1911年發生辛亥革命,不到1年就被迫回國。
덩리쥔의 외할아버지 趙守業(1900-1943年)은 의화단 사건이 발생된 1900년에 북경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한국식 나이로 11살에 청나라 조정이 최후의 국비유학생으로 선발하여, 영국 유학을 떠났다. 당초 예상은 2년간의 유학이었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1년도 지나지 못하고 귀국을 당하였다.
然而,他活用那時學到的英文,之後在山東省港口的關稅處工作,從事電信業務。不久後,搬遷到現在的黑龍江省,晉升到哈爾濱電信局局長一職。但是,好景不常,1932年滿洲國成立後,日本軍進駐,他離開局長的位子,帶著妻女移居到河南省的開封市。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그때 배웠던 영어를 활용하여, 이후에 산동성 항구에 있는 관세처의 전신업무에 종사하였다. 오래지 않아. 오늘날의 흑룡강성으로 이사하여, 하얼빈 전신국 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고,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진 뒤, 일본군이 진주하여 외할아버지는 국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처자를 데리고 하남성의 개봉시로 이사하였다.
當時的哈爾濱大街(筆者提供)
당시의 하얼빈 큰길(필자제공)
「祖父在1943年病死於開封市。祖母當時才39歳,生活過得非常辛苦。」
외할아버지는 1943년 개봉시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그때 겨우 39살이어서,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我想起了鄧麗君的大哥鄧長安說過這一段話。
丈夫死後,守鑫帶著12歳次女與9歳么女,搬到長女婚後居住的西安。當時的西安還不在日本軍的支配下,非常偶爾的才會出現日本軍機空襲。母女就借住在國民黨相關的人集居的村莊裡。
나는 덩리쥔의 큰 오빠 덩창안이 하였던 일화가 생각이 났다.
남편이 죽은 뒤에,守鑫(외할머니)는 12살 짜리 차녀와 9살 막내딸을 데리고 큰딸이 결혼하여 살고 있는 서안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때 서안은 아직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지만 매우 종종 일본군 비행기 공습이 있었다. 모녀는 국민당과 관련있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 잠시 세들어 살았다.
我在2018年到訪了她們當時落腳的村莊,那是在山腳下的聚落。漫步在街上,感覺自己暴露在來自四面八方的視線裡,可以窺見對外來客有所警戒的封閉生活,市區驚人的經濟發展在這裡完全感受不到,就像是被人遺忘的村莊。
나는 2018년 그녀들이 당시 숨어살았던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그곳은 산기슭의 촌락이었다.. 길을 천천히 걷는데, 내 자신이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에 노출되는 느낌이 들어서,외부에서 온 사람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는 폐쇄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도시의 놀랄 만한 경제발전을 이곳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시골같았다.
繼長女嫁人之後,不久次女素桂(1927-2004)也結婚了。對象是國民黨士兵鄧樞(1915-1990年)。在河北省大名縣出生的他是獨生子,父母早逝,從小就被寄養在父方的親戚家。自軍隊的幼年學校畢業後,即進入軍隊當兵。
첫 딸이 시집을 간 뒤, 오래지 않아 둘째 딸 素桂(1927-2004)도 결혼을 하였다.
상대방은 국민당 사병 鄧樞(1915-1990年)이었다. 하북성 대명현에서 태어난 그는 외아들로, 양친을 일찍 여의고, 어릴 적 부터 친가 친척집에서 키워졌다.
군대의 유년학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군대에 병사로 입대하였다.
1931年發生柳條湖事件導致中日間的戰爭越演越烈,鄧樞在山東省、遼寧省參戰,好像是擔任後勤的工作。1945年日本一戰敗,緊接而來的是國民黨軍與共產黨軍進入正式交戰。1949年,毛澤東率領的共產黨軍贏得勝利,成立中華人民共和國。國民黨軍和家眷及其相關人員、排斥共產黨政權的實業家及市民等數百萬的難民,逃往香港、臺灣、東南亞各國、美國等地。局勢極為混亂之中,帶著兩稚子倉皇逃難的趙素桂經歷了多大的苦難可想而知。鄧氏一家也在1949年從汕頭搭船到臺灣,但是她壓根兒沒想到這一離開是和母親的永別。
1931년 발생한 柳條湖사건으로 중일 간에 전쟁이 날로 심해지게 되었는데, 鄧樞는 산동성, 요녕성에서 ,마치 후방근무를 담당하는 것처럼 참전하였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이어서 국민당군은 공산당군과 정식으로 싸우게 되었다. 1945년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군이 싸워서 승리를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국민당군과 가족들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 , 공산당 정권을 배척하는 사업가와 시민등 수백만의 난민이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각국, 미국등지로 도망쳤다.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운 중에, 두 어린 딸을 데리고 황급하게 도망을 친 趙素桂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덩씨 일가도 1949년에 汕頭에서 배를 타고서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이별이 어머니와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鄧氏一家從北部的基隆港上岸,在臺北的收容所待了一陣子之後,輾轉於桃園、宜蘭、羅東、雲林、臺東、屏東、臺北等各地的眷村。鄧樞為了生活從軍中退役,並且開始做起販售白米、雜貨等生意,但是不如預期,生活艱苦。其間,他們生了第四個小孩,也就是誕生於1953年的女兒鄧麗君。喜歡唱歌的素桂將戰前的流行歌曲到讚美詩歌當成搖籃曲,孩子因而從小耳濡目染。被迫離開故鄉,內心因不知道何時能夠回家而受創,她應該是懷著百感交集的心情,哼唱著山東省的民謠等歌曲吧。
덩씨 일가는 북부의 基隆항에 상륙하여, 대북의 수용소에서 한동안 대기를 한 뒤에, 桃園、宜蘭、羅東、雲林、臺東、屏東、臺北 등지의 군인가족집단촌을 전전하였다.
鄧樞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군을 제대하고는 아울러 쌀, 잡화를 파는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예상과는 달리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4째 아이를 낳는데, 바로 1953년 여자아이 덩리쥔(鄧麗君)이 태어난 것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素桂는 전쟁 전의
유행가부터 찬미시가를 자장가로 삼았기에, 어린 덩리쥔은 이리하여 어릴 적부터 늘 익숙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 힘들게 지냈으나 마음 속은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하며 상처를 받고 있어서, 그녀는 온갖 마음이 어우러진 심정을 품고서 산동성 민요등 노래를 흥얼거렸을 것이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덩리쥔의 감미로운 소리 그 재능은 모친의 dna를 물려받은것이군요. 감사합니다~
번역을 다 마쳤습니다
처음 소개된 내용이 있으니
잘 읽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