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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물 한 잔도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믿음이 순교까지 이르게 한다.
개그맨 김준호 씨가 예전에 도박에 중독됐던 당시의 심정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김준호는 지난 도박과 관련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푹 빠져있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도박을 시작했을 땐 결혼한 상태였다.
당시 아내가 외국에 있어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며 도박에 빠져들었다”라며 “누구 하나 제어해 줄 사람이 없었다. 스스로 중독이 많이 된 상태였다”라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피눈물 흘리신 뒤로 두 번 다시 안 하게 됐다”라며 “연예인은 외로운 직업이다. 외로워도 그걸 풀 방법이 별로 없다.
그래서 술이나 도박, 마약, 프로포폴, 여자 등 여러 문제에 휩싸이게 되는 것 같다” 라고 털어놨습니다.
우리가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김준호 씨가 도박에 빠져있었을 때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삶의 질은 아무래도 목표를 향해 내어 디딜 때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고통을 잘 견뎌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인생은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는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김준호 씨는 다른 것들로 자기가 치러야 하는 고통에 보상해 주었습니다.
이 보상 덕분으로 삶의 질이 추락했습니다.
켈리 최 회장과 같은 사람은 나이 마흔이 되어 빚만 10억을 진 상태였고 죽고 싶었습니다.
삶의 질이 매우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때문에 죽지는 못하고 삶의 질을 변화시켜보기로 하였습니다.
그 방법은 자신이 받아야 하는 고통에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술을 끊고, 쓸데없는 모임을 끊고, 드라마와 게임을 끊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참아내야 했던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고 이것이 실제로는 그녀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10년 만에 연 매출 6,000억에 이르는 회사를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을 ‘만족 지연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능력이 클수록 삶의 ‘마시멜로 실험’이란 1960년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진이 3~5세의 아이들, 653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 앞에 마시멜로를 놓아두고 먹지 말라고 하면서 15분 정도 기다리면 하나 더 주겠다고 하고 아이들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는가 보는 실험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그 실험에서 15분 기다려서 먹은 아이들과 바로 집어먹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추적해본 결과, 기다려서 하나 더 받았던 아이들이 사회적 지위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추적 검사의 결과, 우리 삶에서 인내와 절제심이 있는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결론이 도출되어 화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2018년, 캘리포니아 대학과 뉴욕대 신경과학 연구진이 다시 아이들의 환경까지 조사해보니 15분 이상 기다린 아이들의 집안이 대개 중산층 이상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자주 먹었거나 먹고 싶다고 하면 어른이 얼마든지 사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라서 기다리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집어 먹었던 아이는 그냥 놔두었다간 다른 형제에게 뺏기거나 나중에 다시 먹을 기회가 없다는 경험치를 갖고 있었던 가난한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은 그 고통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온다는 믿음에서 온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012년 심리학 잡지 코그니션(Cognition)에 록펠러 대학의 키드(C. Kidd) 팀이 발표한 마시멜로 실험은 마시멜로를 눈앞에 두고 기다릴 수 있는 아이와 기다릴 수 없는 아이를 만드는 요인은 신뢰감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험은 1차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아이들에게 1차에서 몇 분만 기다리면 컵을 예쁘게 꾸밀 수 있는 재료를 더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참여한 아이들의 반(14명)에는 실제로 기다리면 미술 재료를 주었고 반은 미안하다고 하면서 재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질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에 따르는 것은 맞지만
그 능력은 “보상에 대한 신뢰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이 신뢰 수준이 곧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보상 없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순교성인과 복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고통을 즐겨 받았습니다.
사실 생로병사의 모든 고통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죽음이 모든 고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인들은 이 죽음의 고통까지도 즐겨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뒤에 오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살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진취적으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고 질 좋은 삶을 산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사실은 순교로 나아간 사람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사랑으로는 그런 경지까지 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14)
우리는 자녀들이 질 좋은 삶을 살도록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어야 합니다.
부모님은 아픈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안 죽어!”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어떠한 보상도 약속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로는 죽음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지 거짓말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이성적인 접근입니다.
살아있으면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으면 알 수 없으니 굳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죽음 뒤에는 고통이 없이 인간이 사라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진화론적인 사고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면 얻을 수 있는 어떤 보상도 약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은 즐기는 것으로 전락합니다.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주는 믿음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먼저 불교를 들 수 있습니다.
불교는 원래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애초에 부처님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얼음을 주고 놀라고 했는데 얼음이 녹아버렸습니다.
아이는 얼음이 소멸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어른은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얼음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얼음이 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각으로 죽음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때 얼음을 물로 만드는 에너지, 물을 다시 얼음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주는
절대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을 리 없습니다.
신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죽음은 소멸과 생성의 순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만 줄 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어떤 보상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산 삶이나 그렇지 않은 삶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순교자가 무슨 삶의 질이 좋았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삶의 질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많으면 삶의 질이 떨어집니다.
인생을 항해하는 것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에 떠 있으면 노를 저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이 항해를 통해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명확한 신뢰가 없다면 물에 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우리는 파견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야 삶에 의미를 갖고 그래야 보상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난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보상에 대한 믿음은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8일 [연중 제25주일]
아모스 8,4-7
티모테오 1서 . 2,1-8
루카 16,1-13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예수님의 비유로 들어하신 말씀들은 당대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 교사나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가르침과는 달리,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환호하고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신 ‘불의한 집사’ 혹은 ‘약은 청지기’의 비유 말씀은 꽤나 난해합니다.
몇번을 되새김질하며 읽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특별한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사실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는 명백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재판에 넘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 관리를 총 책임지는 담당자였습니다.
집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재산을 낭비했으니, 절도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비리가 주인에게 발각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 문서를 위조했으니,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갖은 비리의 종합선물셋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주인은 불의한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이 비유 앞에 많은 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어서야!
대체 주장하시는 바가 무언인가?’하고 고민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비리와 위법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불의한 집사의 민첩하고 슬기로운 처신, 신속 정확한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칭찬하셨습니다.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가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비리와 불법 행위가 용서되거나 의롭게 되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편법적인 행동으로 인해 끝까지 불의한 집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과 관련해서 불의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릴 것을,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들 영혼의 유익을 위해, 불의한 집사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순간, 신속히 결단을 내리라는 요청이 불의한 집사 비유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시면 살짝 아쉬을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십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계시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산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부당하다 해도, 우리가 지상에서 행한 자선과 희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땅의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여,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줍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됩시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과 나>
2022. 09. 18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그분과 나>
그분 앞에 나서니
오로지 나만 보이고
그분 뒤를 따르니
비로소 그분이 보인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