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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수필가협회 2011. 7. 6.
재미있는 민속학 이야기
- 한국 민속문화가 세계로 나아가다
임 재 해(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1. ‘한류’의 세계화와 문화적 정체성 인식
국제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공정한 규칙 아래 이루어지는 게임이 올림픽이다. 우리가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할 수 있는 종목은 무엇일까? 전문가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할 뿐 아니라, 그 예측이 비교적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올림픽이든 국제대회이든 금메달 확보율이 가장 높은 종목은 태권도와 양궁이다. 태권도는 우리가 종주국이니 으레 금메달을 휩쓸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갈 까닭이 없다. 그런데 양궁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대회를 석권할수 있을까?
문화사적으로 보면 양궁도 태권도처럼 우리가 종주국이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활을 잘 쏘는 민족이어서 중국인들로부터 동이족(東夷族)으로 일컬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활 잘 쏘는 인물이었다. 누워서 날아다니는 파리를 활로 쏘아 맞추었다. 그 아들 유리태자도 활을 잘 쏘는 명궁이었다. 물동이를 쏘아 구멍을 뚫고 그 곳으로 물이 흐르자 다시 활을 쏘아 그 구멍을 막았다고 한다. 이처럼 활을 잘 쏘는 인물이 시조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명궁이 가장 훌륭한 인물로 추앙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활을 잘 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활 쏘는 그림이 아주 많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아주 신통하다. 산 속을 달리는 호랑이나 사슴을 겨냥하여 활을 쏘는 데, 궁사 또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고 있다. 이렇게 쏘아서는 맞을 확률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목표물도 빠른 속도로 크게 움직이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사람도 빠른 속도로 크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냥감이 달리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것을 보면, 가히 신궁이라 할 만하다.
정교하게 만든 총으로 겨누어서 쏘아도 맞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는 모두 주몽과 유리태자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고대부터 활을 잘 쏘는 유전인자를 전승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양궁도 태권도처럼 석권할 수 있는 역사적 요인을 갖추고 있다. 한류문화가 세계적으로 휩쓸 수 있는 역량도 이러한 민족문화의 정체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놓치고 있다. 서구문화와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 세계화된다고 착각하기 일쑤이다.
인간은 누구나 두 가지 기본 모순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일이며, 둘은 자기 일생의 첫 시기를 알지 못하는 일이다. 눈이 얼굴에 붙어 있는 까닭에 구조적으로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자기 태초의 역사도 알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자기가 직접 겪은 최초의 경험이자 가장 충격적인 체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와 같이, 출생의 경험과 갓난아기 시절의 자기역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의 두 번째 모순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워서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고, 시간적으로 태초여서 일생의 첫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두 가지 기본적인 모순이라 할 수 있다.
문화 읽기도 이와 같은 두 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 지금 우리 문화의 특징인 ‘한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이해하며, 민족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고대문화의 정체도 주체적으로 포착하지 못한 채 식민사학의 눈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외국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 대중문화를 한류라고 일컬으며 열광하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 학자들은 한류를 한갓 ‘서구문화 따라하기’ 또는 ‘선진문화 흉내내기’의 식민지 근성으로 해석하거나, ‘천박한 B급 문화자본의 파생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우리 한류의 가치를 이웃나라 사람들이 거울처럼 되비추어 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아시아의 대국으로 군림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문화권의 중심국가로서 늘 새 문화와 사상의 물줄기 구실을 하였던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대중문화와 기술상품이 중국을 휩쓸고 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와 손전화에 열광하며 한류열풍의 진원지 구실을 하는가 하면, 게임 프로그램에도 열광하고 있다. 「대장금」 특선요리가 중국식당의 고급메뉴로 불티나게 팔리는 데다가 신부들의 혼인 기념사진에는 장금이가 입었던 한복이 빠지지 않을 만큼 크게 유행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국가이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며, 아시아 대중문화의 선두주자였다. 따라서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적 경험과 일본 대중문화의 위력을 고려하여, 최근까지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을 망설이며 주저해 왔다. 그런데, 도리어 우리 대중문화가 일본열도를 석권하며 한류열풍의 도가니를 이루고 한국어 붐까지 일으키고 있다. 이제는 서구세계까지 그런 거울 노릇을 하게 되어 그 영향이 미국과 남미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러한 한류의 도저한 흐름에 대하여 오히려 한국인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연구소 일을 하고 있는 이아무개 박사는 “요즘 외국사람들을 보면 마치 눈에 콩깍지가 씌운 것 같아요. 한국사람들을 무조건 좋아한답니다. 한국인을 보는 눈빛부터 크게 달라졌어요”라고 할 만큼,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그런 까닭에 거울에 비친 우뚝한 자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놀랄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리둥절해 하거나 외국인들의 눈에 콩깍지가 씌운 것처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 이해는 더욱 모호하다. 민족사의 시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바이칼호에서 비롯되었고 고대문화는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기원되었다고 해석하기 일쑤이다. 북방문화 전래설로 설명되기 어려운 문화가 있으면 남방문화의 전래로 해명한다. 어느 문화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하지 않는다. 고대문화는 그렇게 이웃나라보다 한참 뒤떨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 고대문화의 뿌리를 제대로 알게 되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질을 고대부터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우리문화를 눈여겨보면, 오늘의 한류나 다름없는 문화적 역량이 오롯이 포착된다. 고대 사서의 기록이나 고고학 발굴보고서를 통해서 그러한 논거를 두루 발견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 한류를 자리매김한 것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중국이듯이, 고대문화의 경우에도 중국쪽 사서의 기록과 발굴보고서가 그 위상을 잘 보여 주는 거울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자료 읽기를 넓게 하지 않고 자력적인 눈으로 읽으려 들지 않는 까닭에 주체적 시선을 놓치고 있다.
현재의 한류를 비롯한 당대의 우리문화를 읽는 눈길도 마찬가지이다. 종속적 식민주의 시각으로 우리문화를 보니, 한결같이 우리문화는 외세문화의 허울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자기문화를 자기 시각으로 당당하게 읽지 못하고 한결같이 외세문화의 영향이나 종속으로 읽어야만 비로소 자기문화의 정체성을 해명할 수 있는 지식인이야말로 식민지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한류가 지닌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읽는 데도 고대문화에 대한 정확한 포착이 필요하다.
다행히 중국측 고대사료에는 단편적이나마 우리 고대문화에 관한 기록들이 다양하게 남아 있어서 다행스럽다. 게다가 최근에는 새로운 고대 유물들이 발굴되어 고대문화 해석에 긴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대사료의 증언들과 유물들을 증거로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를 새롭게 포착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 고대문화의 정체성를 읽으려고 한다. 하나는 거울 속에 비친 지금의 우리 얼굴인 한류 현상을 우리 눈으로 읽으며 본디 우리문화의 정체성을 추론하고, 둘은 이웃의 증언 속에 담겨 있는 민족문화 형성기의 고대문화를 우리 시각으로 해석하여 지금 우리문화의 창조적 원천을 포착해 내는 일이다. 두 방법은 공시적 시각이 서로 엇갈리지만 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상호해석이 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공간적 반영의 거울효과와 역사적 전통의 지속효과를 함께 주목하는 것이다.
2. 민족문화에 갈무리된 ‘한류’의 문화적 전통
상고시대에 우리 민족은 중국으로부터 동이족으로 일컬어졌는데,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동이족은 여러 모로 문화가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동이족 또는 고조선 문화를 다룬 중국의 기본 사료로는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을 꼽는다. 기본 사료를 중심으로 동이족 문화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동이사람들은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다”고 했을 뿐 아니라, “공자도 동이에 살고 싶어하였다”고 밝혀두었다. 게다가 “동이는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즐기고, 머리에는 변(弁)이라는 모자를 쓰고 비단옷을 입었다”고 하였으며, 그러므로 중국이 “예(禮)를 잃으면 동이에서 구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동이열전」의 가장 서두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어서 동이족에 관한 총론이자 일반적 경향성을 집약화하여 서술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핵심 상황을 나타내는 열쇠말(keyword)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동이족의 문화적 수준을 ‘천성유순(天性柔順)’, ‘도리로 다스리기 쉬움(易以道御)’, ‘군자국(君子國)’의 세 가지 열쇠말로 표현한 셈이다. 첫째 열쇠말인 ‘천성유순’이 민족성을 나타내는 말이라면, 둘째 열쇠말인 ‘도리로 다스림’은 도덕정치의 실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셋째 열쇠말인 ‘군자국’은 두 열쇠말을 아울러서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천성이 유순하니 엄격한 법치보다 도리로 다스리기 쉽고, 백성을 도덕으로 다스려도 충분하니 군자국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 열쇠말은 서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세 열쇠말의 의미를 더 부각시키는 결정적 열쇠말이 별도로 있어서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공자의 동경[孔子欲居]’이다. 앞의 세 가지 열쇠말들은 이 열쇠말을 통해서 그 의미가 한층 두드러진다. 공자는 도덕과 예의로 백성을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여겼으며 군자를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추구한 성현이다. 동이족 사회는 바로 공자가 이상으로 삼은 세계로서, 덕치가 실현되는 수준 높은 문화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군자국 동이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자가 동이에 가서 살고자 했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 두루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설득력을 뒷받침한다. 후한서 한전(韓傳)에도 공자가, 군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어서 동이에 가 살고 싶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子罕)」편과, 한서 「지리지」에도 공자가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는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어 객관적 증거 구실을 하기에 충분하다. 조선에는 예의로서 백성을 교화하고 양잠을 하여 명주를 짜고 범죄를 금하는 8조의 법 외에 60여조의 법이 만들어져 있을 뿐 아니라, ‘어질고 슬기로 교화를 하여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하며 이웃나라와 다른 까닭에, 공자는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서글프게 생각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동이에 가 살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뗏목을 타고 해외이민까지 꿈꾸었을까.
공자만 한반도를 동경했던 것은 아니다. 공자가 이런 수준이니 다른 사람들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자(箕子) 일족의 조선지역 이주는 기록에 나타난 그 첫 번째 사실일 따름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秦漢)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조선과 가까운 연(燕)․재(齋)․조(趙) 지역 중국인들이 계속해서 고조선으로 이주해 왔다. 그리고 “진한(辰韓)의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들은 진(秦)나라의 망명인으로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고 진술한다. 그러므로 요즘의 망명객들이 정치적 박해와 경제적 고난을 피해 선진국으로 망명하듯이, 당시 중국의 망명객들도 같은 심정으로 동이족의 선진문화를 동경하며 한반도로 망명해 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같은 기록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에 고난을 겪다가 망명하여 찾아오는 자가 많았는데, 대부분 마한 동쪽에 거처하며 진한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고 한다. 중국 이주민들이 워낙 많이 몰려들어 번성하게 되자, 마한은 그들을 싫어하여 질책할 정도였다. 요즘 같으면 과도한 불법이민을 경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동이 지역이 중국보다 살기 좋은 곳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공자를 비롯하여 귀족과 일반 백성들까지 다투어 동이지역에 와서 살기를 희망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사가가 이웃나라 동이에 관한 제일 첫 서술에서, 동이는 ‘공자가 동경한 군자국’이라고 밝혀 두었다면, 그 문화적 수준은 더 이상 이웃의 다른 문화와 자세하게 견주어 보지 않아도 좋을 만큼 당대 최고의 문화를 누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군자국에 이어 ‘불사국(不死國)’이란 내용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기록이 없지만, 중국의 사기에서 동이를 군자국 못지않게 불사국이라 일컬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 전 4세기부터 한무제 때까지 무려 3백 년 동안 불사(不死)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삼신산(三神山)을 찾는 탐사대가 발해를 건너 한반도를 향해 끊임없이 떠났다고 한다. 진시왕대에 이르러 삼신산을 찾고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보내는 일이 절정을 이루었는데, 발해 너머 동방에 그러한 유토피아가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들에게 ‘발해 동쪽의 바다’와 ‘조선’은 삼신산의 이상향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으며, “삼신산 탐사대의 주된 행선지가 조선반도”였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희구하던 불사의 주술이자 신선술인 방선도(方僊道)는 고대 동이문화인데, 동한의 허신(許愼)은 설문해자에서 동이를 곧 불사국이라고 밝혀두고 있다. “동이(東夷)는 ‘대(大)자’를 따랐다. 동이는 곧 대인(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 자는 오래 살았다. 따라서 동이에는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 고대의 동이는 중국인들에게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군자국이었을 뿐 아니라, 영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이상향의 불사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 최고의 성인인 공자도 군자국 동이를 동경했고 최고의 권력자인 진시왕도 불사국 동이를 꿈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같은 기록인 「동이열전」 말미의 서술 내용이다. 동이족 사람들은 ‘토착민으로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의관을 갖추고 비단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서두의 기록과 짝을 이룰 만한 말미의 기록에는 동이족의 생활세계를 한층 구체적으로 다룬 열쇠말들이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모두 ‘토착민[皆土着]’이라는 사실이며, 둘은 ‘음주가무[憙飮酒歌舞]’를 즐겼다는 사실이며, 셋은 ‘관모에 비단옷[冠弁衣錦]’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첫째 열쇠말은 동이족은 떠돌이 유목민이 아니라 붙박이 농경민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대 동이족 문화를 시베리아나 몽골의 유목민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음의 열쇠말이 더 구체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밝힌다.
둘째 열쇠말은 음주가무의 풍류를 즐기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열쇠말은 오늘날의 ‘한류’를 설명하는 우리 고유문화의 유전자로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의 유전자도 마치 생물학의 유전자나 세포의 DNA처럼 변함 없이 지속되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문화적 전통으로 재창조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그때마다 달라도 그 고갱이는 변함이 없다. ‘음주가무’를 즐긴 민족문화의 독창성은 이 시기부터 이민족들에게 포착될 정도로 두드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의 독창성을 공시적 상대성으로 말하면 문화적 ‘정체성’이되 통시적 기원으로 말하면 문화적 ‘원형’이며, 지속적 전통으로 말하면 문화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음주가무를 즐긴 동이족의 풍류생활과 예술적 취향은 다른 기록에도 끊임없이 반복되며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음주가무’라는 열쇠말로 표현된 문화적 정체성이 유전자가 되어서, 노래와 춤을 즐기는 문화가 한층 넓게 일반화되어 동이족 문화의 보편성이 되고,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시대에 따라 부침하다가 현재의 한류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동이족 문화의 역사적 출발점이자 문화적 유전자의 꼭지점을 이루며 보편성과 지속성으로 살아서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부터 우리 민족은 술을 즐겨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사실을 민족문화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현재의 한류 이해의 역사적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열쇠말은 상투를 가리는 고깔 모양의 모자 ‘변(弁)’을 쓰고 비단옷을 입었다는 내용이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비단을 짜서 옷을 지어 입었다는 말이다. 이 시기에 이미 실크가 일반화될 정도로 양잠이 발달했다고 하겠다. 양잠으로 비단옷을 곱게 지어 입고 ‘변’이라고 하는 특유한 양식의 모자를 갖추어 썼다고 하는 사실은 곧 ‘토착민’이라는 첫째 열쇠말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떠돌이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옷차림이자 관모이기 때문이다. 유목민들은 털가죽옷이나 털실옷을 주로 입는다. 명주실로 짠 비단옷은 농경생활을 전제로 하는 복식이다. 따라서 지배층만 비단옷을 입은 중국인들에게 예사사람들까지 비단옷을 두루 입은 동이족의 옷차림이 특히 눈길을 끌어 사서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후한서 「한전」에도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며 길쌈하여 비단옷을 짠다”고 했으며,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들어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는 옷차림도 농경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부여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궁실과 창고, 감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산릉과 넓은 들이 많으며”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다”고 해서 농경민의 정착생활을 자세하게 밝혀두었다. 사람들이 국내에서는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었으며, 외국에 나갈 때에는 수놓은 비단옷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우리 전통 옷차림의 정체성이 이때부터 어느 정도 확립되었던 셈이다.
앞의 세 가지 열쇠말을 마무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열쇠말이 ‘예’이다. 중국이 ‘예를 잃으면 동이에서 구했다[中國失禮求之四夷]’는 것은 곧 동이는 예의의 모범이 되는 나라라는 말이다. 후대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민족문화의 규정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이룬다. 앞에서 이미 사람들은 유순한 천성을 타고났으며 도리를 존중하는 군자국으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예의지국으로서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모습을 말미에 다시 자세하게 서술해 둔 것이다.
정착생활을 하며 음주가무를 즐기고 의관정재를 잘 갖추었다는 사실이 예의지국의 가장 긴요한 3 가지 요소이다. 상대적으로 떠돌이생활을 하거나, 가무를 즐기는 예술생활을 하지 못하고,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예의지국이라 하기 어렵다. ‘예악(禮樂)’이 이때부터 짝을 이루며 존중되었던 것이다. 공자가 살고 싶어한 군자국이자 예의지국으로서 문화생활은 가무를 즐길 만큼 상당히 역동적이되, 수준 높은 의생활을 누렸던 셈이다. 공자는 ‘인의예지’를 추구한 까닭에 군자국이자 예의지국인 동이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공자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의 백성들이 두루 ‘예’를 동이에서 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이열전의 서두와 결말은 아귀가 딱 맞을 정도로 수미일관된다.
중국사람들이 동이족의 문화적 정체성으로 기록해 둔 ‘예악’의 전통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전승되었다. 고려조까지는 예악 가운데 ‘악’이 ‘예’보다 성했다면, 조선조에는 ‘예’가 ‘악’보다 성했다. 고려조의 ‘악’은 고려가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조선조 선비들은 ‘악’을 누르고 ‘예’를 떠받들었다.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로 규정하여 걸러냈다. 자연히 조선조 이후에 ‘악’은 광대가 하는 천박한 짓으로 취급되었다. 조선조의 규범에 따라 최근 한 세대 전까지 가무악(歌舞樂)을 즐기는 사람은 광대나 딴따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고대는 달랐다. 동이족 풍속을 다룬 모든 기록에는 가무를 즐겼다고 거듭 밝혀두고 있다. 마치 오늘날의 한류를 묘사한 기록이나 다르지 않다.
3. ‘군취가무’의 문화적 유전자와 ‘한류’의 세계화
대중가요를 선두로 한 우리시대의 한류는 가무악을 즐긴 고대 풍류문화의 유전자로부터 나타난 표현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문화적 유전자들은 고대기록에서 매우 잘 드러날 뿐 아니라, 아주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나라별로 모아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후대에 기록된 다른 사료들의 내용도 거의 같아서 일일이 인용하지 않는다.
夫餘 : “臘月에 지내는 제천행사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었으니, 그 이름을 ‘迎鼓’라 한다. (……) 밤낮 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길에 다닐 때는 낮이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高句麗 : “그 풍속은 음(淫)하고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곧잘 떼지어 노래부른다. 鬼神·社稷·零星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 모임 곧 ‘제천대회’가 있으니 그 이름을 ‘東盟’이라 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며 놀이를 즐긴다.”
濊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韓 :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 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 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다시 이와 같이 한다. (……)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뜯기를 좋아한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지어 노래 부르며 춤추고 밤낮을 쉬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 춤은 수 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르는데, 땅을 밟으며 허리를 굽혔다 치켜들면서 손과 발이 서로 상응하며 가락과 율동은 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추수를 끝내고는 다시 이와 같이 한다.”
弁辰 :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筑과 같고 연주하는 音曲도 있다.”
馬韓 : “풍속은 귀신을 믿으므로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 떼지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신에게 제사지낸다. 10월에 이르러 농사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위의 기록에서 고대문화의 몇 가지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5월 또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행사를 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는 농공시필기를 말한다. 당시의 중요한 제천행사와 국중대회가 농경세시에 맞추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농경문화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부여의 토질은 오곡이 자라기 알맞았으며, 창고가 있다고 했듯이, 고대 여러 나라들은 모두 농사를 지었다. 따라서 동이열전 서문에서도, ‘동이는 어질어서 생명을 좋아하고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살생을 금하고 농사를 지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이족은 유목민족이 아니라 농경민족으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고대부터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남녀노소가 모두 가무를 즐겼는데, 남녀가 밤늦도록 무리를 지어 가무를 즐겼을 뿐 아니라 행인들도 아이 어른 구분 없이 밤낮으로 노래를 불러서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녀가 더불어 밤낮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놀이를 했는데, 특히 제천행사와 같은 축제 때는 ‘군취가무’ 또는 ‘가무음주’를 밤낮 쉬지 않고 며칠씩 계속했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 되풀이되는 열쇠말을 유형별로 묶어 보면 아래와 같다.
飮酒歌舞, 歌舞飮酒,
晝夜飮酒歌舞, 飮酒晝夜無休, 晝夜酒會, 連日飮酒歌舞
群聚歌舞, 歌舞數十人
晝夜男女輒羣聚, 暮夜男女群聚
동이족 사람들은 음주가무 또는 가무음주를 즐겼다. 특히 음주보다 가무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거듭된다. 그것도 한둘이서 즐긴 것이 아니라 무리 지어 즐겼다. 따라서 ‘음주가무’ 못지않게 ‘군취가무’라 하였다. 특히 남녀가 더불어 밤늦도록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중국과 달리 가무를 즐기는 데 신분의 구별은 물론 남녀의 구별조차 없었던 셈이다.
축제 때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노래 부르며 함께 일정한 양식의 춤을 추었다. 이런 축제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계속했을 뿐 아니라 며칠씩 이어서 했다. 최근에도 설이나 보름 명절을 5일 정도 놀았던 것을 생각하면 제천행사로 하는 국중대회의 상황이 짐작된다. 중국사람들의 눈에 특이한 풍속으로 보인 까닭에 이러한 내용을 거듭 밝혀 기록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술을 잘 마시고 노래를 잘 부르며 춤을 잘 추거나, 밤문화가 특히 화려한 것은 이러한 문화적 유전자가 표현형으로 나타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우리의 술소비량은 OECD 국가 가운데 거의 1위이다. 이웃나라들에 비하여 밤늦도록 흥청대며 술을 마실 뿐 아니라 일본에서 들어온 노래방은 우리나라에서 더 성업중이다. 그리고 우리 노래방기계는 마침내 해외로 수출까지 한다. 지금 우리 노래방문화와 음주문화를 중심으로 한 밤문화 양상을 보면 밤낮 없이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하는 고대의 기록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한류를 형성하고 있는 주류문화로서 대중문화는 모두 가무와 연관되어 있다. ‘가무일체’라고 할 정도로 노래와 춤은 원래 함께 가는 것이다. 가무를 즐겼다는 것은 신명이 많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세간에는 흔히 신명이라는 말 못지않게 신끼(神氣)를 들먹인다.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사람을 신명이 많다고도 하지만 신끼가 있다고도 한다. 안에 간직하고 있는 신끼가 밖으로 뻗어나서 어떤 행위나 표현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신명을 푼다’고 한다. 그래서 신명풀이란 바로 신기발현(神氣發現)이라는 말이다. 노래와 춤, 그리고 풍물은 신명풀이의 기본적 표현 양식이자 해방을 추구하는 예술활동이다.
가무로 신명풀이를 하는 데에도 혼자보다 여럿이 더불어 해야 제격이다.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면 신명이 더 고조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집단적 신명풀이’를 통해 인간해방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군취가무’ 또는 ‘가무 수십인’이라고 한 것은 공동체문화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삼국지 고구려전에 보이는 것처럼, ‘가무를 즐기는 풍속이 나라 전체에 걸쳐 읍락마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 이미 ‘읍락’의 문화와 ‘국중’의 문화로서 집단적으로 가무를 즐기는 인간해방의 문화가 두루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명풀이로 가무가 가능하려면 필수적으로 ‘악(樂)’이 전제된다. 악은 신명을 돋우는 기본 동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명풀이와 관련하여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악가무(樂歌舞)’ 일체라 해야 할 것이다. ‘가무’를 즐긴다는 표현 속에 이미 ‘악’, 곧 우리의 풍물 전통이 깃들어 있다. ‘악가무’는 으레 놀이[戱]를 동반한다. 남녀가 무리로 모여서 서로 노래와 ‘놀이’를 밤늦도록 즐겼다고 하는 대목이 그러한 상황을 증언한다. ‘가무’처럼 ‘악희(樂戱)’ 또는 ‘가희(歌戱)’도 함께 했던 신명풀이 양식이다.
놀이가 발전한 것이 곧 연극이자 드라마이다. 원래 ‘악․가․무․희’는 하나이지만, 음악을 기반으로 ‘가무희’ 곧 ‘가요, 춤, 희곡’이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 연극사의 전개 양상도 ‘악․희․극’의 전통에서 포착한다. 우리 탈춤은 악가무희(樂歌舞戱)이자 악가무극(樂歌舞劇)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의 양식으로 보면 가무오신(歌舞娛神) 형식의 굿이기도 하다. 탈춤은 굿에서 비롯되었다. 연극의 기원도 굿에서 찾는 것이 세계 연극사의 일반론이다. 주술적인 굿에서 예술적인 연극이 발전했으므로, 굿이 흥하면 연극도 흥하게 마련이다. 지금 드라마가 한류의 주류를 이루는 것도 굿문화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길거리 문화에 관한 기록도 흥미롭다. 거리문화에 관한 열쇠말은 별도로 주목할 만하다.
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絶
行道晝夜無 老幼皆歌 通日不絶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사람들도 노인과 아이 구별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밤낮으로 무리 지어 가무를 즐기는 주체로 성인남녀가 중심을 이루었다면, 길을 가면서 밤낮으로 노래를 부르는 주체로는 노인과 어린이의 구분이 없었다. 결국 주체로 보면 남녀노소 모두 노래 부르기를 밤낮 없이 즐겼는데, 다만 노약자들은 군취가무는 하지 않고 거리에서 노래 부르기를 종일 했다는 것이다.
밤늦게까지 길거리에서 아이 어른들이 더불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예사 신명이 아니다. 따라서 동이족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가무를 누구나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체로 보면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으며, 시간적으로는 밤낮의 구분이 없었고, 공간적으로는 마을 광장과 길거리의 구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붉은악마의 거리축제가 가능했던 것도 이러한 문화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 살펴본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 사실로 집약된다. 하나는 농경시필기에 제천행사로서 고구려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 예의 무천(舞天) 등의 국중대회를 열어 국민적 축제를 벌였다는 것이며, 둘은 남녀노소가 더불어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기를 며칠씩 계속했다는 것이다. 앞의 내용이 농경문화의 제의적 전통으로서 국중대회의 시기와 양상을 설명한 것이라면, 뒤의 내용은 국중대회의 축제 양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국중대회의 축제 모습을 나타내는 열쇠말만 가려내면 남녀노소(男女老少), 주야무휴(晝夜無休), 군취가무(群聚歌舞), 연일음주가무(連日飮酒歌舞)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인의 신명풀이 문화의 전통을 절묘하게 설정하고 있는 이 열쇠말은 고대 중국인들이 동이족의 문화에 관해 서술한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시대 한국문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포착하고 있는 긴요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가무를 즐기는 음주문화와 노래방문화로 상징되는 한국의 밤문화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자, 대중문화를 앞세운 한류의 자질과 근성을 포착해 주는 문화적 유전자를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악마’의 응원문화를 설명하는 열쇠말로도 딱 맞아떨어진다. 위의 열쇠말에다가 ‘행도개가(行道皆歌)’와 ‘통일부절(通日不絶)’의 열쇠말을 덧보태면, 마당놀이로서 군취가무뿐만 아니라 거리축제로서 세계적 주목을 끈 ‘붉은악마’의 응원열기를 고스란히 설명해 주는 까닭이다..
‘붉은악마’가 되는 데 남녀노소 분별이 없었다. 모두 거리와 광장, 체육관에 모여 한 동아리를 이루었다. 필승코리아를 외치고 깃발을 돌리며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밤낮 쉬지 않고 계속했다. 우리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 광화문 거리에는 종일 응원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진행되는 약 한달 동안 ‘붉은악마’의 응원축제는 계속되었다. 따라서 ‘남녀노소․주야무휴․군취가무․연일음주가무’라 할 만하다.
2002년 붉은악마들의 월드컵 거리응원은 단숨에 피파(FIFA) 공식선정 서포터즈 세계최강으로 평가되었다. 2006년 월드컵에서도 붉은악마들의 응원열기는 단연 압도적이었고 독일의 거리 응원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미쳐서 월드컵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4강에 오른 사실을 두고 ‘기적의 4강’ 또는 ‘4강 신화’로 규정하고 환호했다. 따라서 2006년 월드컵을 겨냥하여 ‘4강 신화는 계속된다’는 구호를 내걸고 다시 한번 4강 진출을 꿈꾸었으나 좌절했다. 신화나 기적은 계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붉은악마’의 응원문화는 기적도 신화도 아닌 민족문화의 전통이기 때문에 계속될 수 있었다. 축구는 기적의 4강이므로 지속될 수 없지만, ‘붉은악마’의 거리축제는 우리 민족이 본디부터 지녔던 문화적 역량이므로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자,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4. 문화적 정체성의 지속과 세계로 나아가기
세계를 압도한 ‘붉은악마’의 응원 열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전해오는 민족문화의 유전자가 세계적 축제인 월드컵을 통해서 표현형으로 분출했던 현상이다. 월드컵 대회의 응원축제는 곧 승리를 기원하는 현대적 제천행사이자 국중대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의와 축제, 기원은 늘 함께 간다. 따라서 영고와 동맹, 무천 등의 고대축제는 줄곧 우리 굿문화의 기원으로서 주목되어왔다. 노래와 춤으로서 신을 즐겁게 하여 소망을 비는 것이 바로 우리 굿문화의 전통인 까닭이다. 가무오신(歌舞娛神)의 제의양식이 바로 굿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노래와 춤을 즐기는 신명풀이문화는 우뇌형 기질을 가진 민족성과 만난다. 동이족 풍속으로 기록한 가무음주, 군취가무, 연일 음주가무는 모두 우뇌형 기질에 의해 형성된 굿문화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굿문화가 우뇌형 문화로서 감성적 문화라면, 유교문화는 좌뇌형 문화로서 이성적 문화에 해당된다.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굿문화의 민족적 전통이 조선조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유교문화에 의해 최근까지 억압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교적 전통이 약화되면서 그 동안 잠복되어 있던 굿문화의 유전자와 억압되었던 우뇌형 기질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하나는 밤문화로 살아나고, 둘은 한류문화로 발전했다. 밤문화는 예사시민들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고, 한류문화는 연예인들의 활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사시민들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낮에는 유교적 전통에 의해 점잖은 생활을 하며 마치 좌뇌형 인간처럼 이성적으로 활동하지만, 밤에는 상황이 바뀐다. 어둠을 이용하여 낮의 질서와 체면에서 해방되는 까닭이다. 익숙한 이들끼리 어울리면 2차는 필수이고 3차는 선택 사항으로 가무음주를 즐긴다. 시군 단위의 소도시마저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밤문화가 흥청망청하는 것이다. 정신의학자 이시형 박사는 이러한 우리문화의 이중성을 좌뇌형 낮문화와 우뇌형 밤문화로 흥미롭게 대조해서 설명한다.
우뇌형 전통 ⇔ 좌뇌형 전통
밤문화 ⇔ 낮문화
굿판 ⇔ 제사
무당형 ⇔ 군자형
무교적 감성 ⇔ 유교적 이성
남녀노소가 더불어 주야무휴로 군취가무하던 굿문화의 전통이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남녀노소가 분별되고 군취가무가 억제되었으나, 도덕적 검열이 민감하게 작동되지 않는 밤이 되면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현실의 밤문화이다. 최근에는 민주화와 더불어 밤문화가 활성화되어 불황을 모른 채 더욱 휘황찬란해지고 있다. 이것이 예사 시민들의 우뇌형 밤문화 양상이자 신명풀이 굿문화의 전통이다.
예사 시민들의 밤문화와 달리 연예인들의 우뇌형 기질은 한류문화로 발휘하게 되었다.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반공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억압이 더 이상 문예창작을 억압하지 않게 된 까닭이다. 1975년 군부정권은 우리 가요 220곡을 금지곡으로 규제했는데, 1996년 정태춘의 반대투쟁으로 금지곡이 해제되었다. 영화도 1996년 제1회 인권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상영한 것이 처음이다. 금지곡 규제와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되자, 대중문화 작가들의 창조력을 규제할 이념적 장벽과 정치적 억압이 비로소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1990년대 후기부터 예술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기발한 창조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한류의 기반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도덕적 검열이 작동되지 않는 밤에 우뇌적 감성의 신명풀이 문화가 발달하듯이, 사전심의와 이념적 굴레에서 해방되자 예술적 창조력이 마음껏 발휘되어 우리 영화가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 영화보급률이 50%를 웃돌게 되었다. 종래에는 배우나 가수는 광대와 같은 천민들로 취급되었으며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딴따라’로 폄하되었다. 따라서 가무에 소질이 있고 신끼를 타고난 재주꾼들도 한결같이 대중문화 활동을 기피했다. 공부 깨나 하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은 것이 연예계여서 우리 대중문화는 구조적으로 국제사회에서 주목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좌뇌적 유교문화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 연예인들이 인기스타로 선망의 대상이 되자,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신끼가 많고 가무에 재능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부러움 속에서 너도나도 연예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말리던 가족들도 제대로 밀어주지 못해 안타까워할 지경이다. 본디부터 타고난 우뇌적 민족성에다 고대 굿문화의 유전자를 지닌 연예인들이 마음껏 자기의 신끼를 발휘하며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나서자, 독창적 한류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기질적 자질과 문화적 유전자를 지닌 까닭에 우리 대중문화는 국제사회에서 비교우위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한류열풍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민족문화의 유전자가 지속되다가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나투어진 일반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5. 한국 주생활문화의 전통과 세계화 인식
일상생활의 민속문화도 문화적 독창성을 지닌 것은 세계 속으로 나아간다. 세계적 경쟁력을 지니고 세계무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민족문화로서 전통성과 독창성이 뚜렷한 문화이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이것은 한국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민속문화의 전통이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 “등 따스고 배 부르다.”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주생활과 식생활 양식이 반영된 말이다. 특히 한옥은 가옥의 구조나 양식보다 난방방식이 가장 독특하다. 그러므로 한옥의 특징은 등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온돌에서 찾을 수 있다.
한옥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온돌문화도 점차 바뀌고 있다. 종전처럼 부엌 아궁이에다 땔감으로 불을 지피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자연히 기름이나 전기를 이용한 보일러로 난방을 하게 되는데, 초기에는 벽면에다 라디에타를 세웠지만, 한국인의 온돌문화에 맞지 않기 때문에 보일러관을 온돌처럼 방바닥에 묻었다. 온돌문화는 근본적으로 밑면난방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실내에서는 신발을 벗고 앉는 좌식생활을 해야 편하며 잘 때도 등을 따뜻하게 하여 잠을 자야 편안히 잠들 수 있다. 그러므로 아파트와 같은 양옥을 짓고 침대를 사용해도 등을 따뜻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는 계속 추구된다.
세계에서 전기담요를 제일 처음 상품화한 나라는 일본이다. 원래 미국에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담요에 열선을 깔아 현재의 전기담요 비슷한 것을 의학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하여 가전제품으로 널리 쓰도록 개발한 것은 일본이다. 결국 전기담요의 발명은 미국에서 하고 상품화는 일본에서 한 것이다.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안방에 ‘고다쯔[火燵]’라고 하는 이불 속에 넣는 화로 외에는 구조적으로 실내에 난방시설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담요 상품화의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럼 세계에서 전기장판을 제일 처음 발명한 나라는 어느 나라일까. 바로 한국이다. 한국 외에는 전기장판을 상상도 할 수 없다. 등을 따뜻하게 해서 난방을 한다는 발상은 온돌문화를 누리는 한국사람들 외에는 불가능한 까닭이다. 온돌생활을 누대로 해온 한국사람들 체질에는 배가 따뜻하기보다 등이 따뜻해야 잠을 잘 잘 수 있다. 따라서 난방용 전열기로 전기장판을 개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980년대 초 일본인 주부관광객들이 한국에 오면 유일하게 사 가지고 가는 한국제 가전제품이 전기장판이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제 일본에도 전기담요를 전기장판처럼 바닥에 깔아 쓰는 용으로 생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덮는 담요보다 까는 담요의 수요가 더 많아졌다. 열의 대류법칙에 의하면 덮는 전기담요보다 까는 전기장판이 난방용으로 훨씬 효과적인 까닭이다. 이불용 전기담요에서 장판용 전기담요까지 오는 데 일본에서는 무려 5년이나 걸렸다. 1964년 무렵에 덮는 전기담요가 처음 개발되어서 상품으로 보급되었는데, 전기장판처럼 바닥에 까는 전기담요는 1969년이 되어서 비로소 상품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부터는 깔거나 덮거나 모두 가능한 겸용 담요가 개발되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바닥에 까는 전기장판을 개발하여 상품화한 사실에 비하면 문화와 가전제품의 발명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온돌문화는 전기장판만 발명 가능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벽면에 설치한 라디에터와 같은 측면 보일러가 서양건축에 도입되면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 보일러 배관을 방바닥에 깔아놓은 밑면 보일러를 새로 개발한 것도 온돌문화에서 비롯된 착상이자 발명이다. 온돌은 그 자체로도 벽난로보다 여러 모로 과학적이고 경제적이며 위생적인 난방구조일 뿐 아니라, 온돌식 보일러를 발명하고 전기온돌을 발명하는가 하면 마침내 옥매트와 온돌침대까지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일본에는 전기온돌도 옥매트도 없다. 바닥에 까는 전기담요가 고작이다. 온돌침대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기술문제 때문이 아니라 본디부터 온돌문화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벽난로형 측면 보일러를 온돌형 밑면 보일러로 바꾸었듯이, 전기 보일러도 전기온돌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열을 가할 수 없는 매트를 사용한 침대조차 온돌처럼 돌을 깐 침대를 만들어 바닥을 뜨끈뜨끈하게 만들었다. 온돌문화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은 돌침대를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온돌문화를 누린 사람들은 보일러형 난방시설과 침대형 잠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이러한 외래문화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온돌문화에 맞게 창조적인 발명을 하게 마련이다.
온돌침대는 단순히 돌을 깔아 전기로 열을 내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자파 차단 기술과 원적외선 방출 기술, 그리고 뜸질효과 등 다양한 기술을 발휘하여 가장 값비싼 고급침대를 생산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돌침대는 세계적인 발명품으로 외국에서조차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온돌침대는 매트형 침대와 가격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고가품이며, 앞으로 해외시장에 수출되어 기존의 침대시장을 석권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특정 돌침대 제조업체는 특허기술개발에 따라 벤처기업으로 지정되는가 하면, 미국 및 일본에 다량의 돌침대를 수출하여, 2000년 4월에는 수출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되었으며, ISO9002 국제품질 인증 획득과 함께 우수제품 GQ마크를 획득하고, 1997년에는 독일 신기술 발명전에서 의료기부분 금메달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돌침대는 찜질효과가 있으며 음이온 및 원적외선, 초장파 발생을 가능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잠자리용 침대로서 가전제품 수준에 머물지 않고 독일에서 의료기로 공인될 정도이다. 온돌문화에서 비롯된 창조적 발상이 침대문화를 혁신적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다.
온돌형 난방의 장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우리 주거문화가 온돌형 실내생활로 점차 바뀌어 갈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김치처럼 세계사람들이 온돌에서 자고 온돌침대를 사용한 체험을 통해서 이의 편리성과 건강성을 확인하게 되면 온돌형 보일러와 온돌형 전기장판, 온돌형 침대로 주거문화와 잠자리문화를 바꾸어갈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건강에 좋고 위생에 좋으면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온돌문화의 우수성이 국제사회에 알려지기만 하면 우리 건축회사는 수출시장을 개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 한국 식생활문화의 전통과 세계화 인식
온돌방의 난방구조와 좌식생활의 전통이 지속되면서 화장실 문화가 독특하게 자리잡고 있되, 우리 집의 겉모습과 공간배치는 거의 양옥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식문화의 경우는 안팎이 다 한식의 전통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밥과 국, 된장과 김치로 상징되는 한식의 전통은 의생활이나 주생활의 변모와 달리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아침을 빵과 차로 때우는 가정이 늘어나긴 해도 양식을 주로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전적으로 양복을 입고 양옥에 살아도 음식만은 한식을 주로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몸 속으로 흡수하는 식생활은 체질적으로 양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이다.
한국 식문화의 전통은 숟가락을 주로 사용하여 먹는 세계 유일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동아시아 문화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음식을 먹는 도구부터 서로 다르다. 한국은 숟가락을 주로 쓰고 젓가락을 보조로 쓴다면 일본은 전적으로 젓가락만 쓰며, 중국은 젓가락을 주로 쓰고 숟가락을 보조로 쓴다. 한국인들이 숟가락을 주로 써서 밥을 먹는 것은 두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물이 흥건한 국 종류의 음식이 많은 경향이다. 국이 있어야 품위 있는 밥상이자 고급 식단이다. 국물을 젓가락으로 먹을 수 없다. 입을 대고 바로 마시지 않는다면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 따라서 국 종류의 음식을 즐길 뿐 아니라 반드시 식사의 시작은 숟가락으로 국을 먼저 떠먹은 다음에 밥을 먹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숟가락을 놓으면 식사가 끝이 난다. 그러므로 숟가락이 가장 중요하다. 김밥이나 초밥과 같은 음식은 숟가락으로 먹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다.
둘은 뜨거운 음식을 좋아하는 성향이다. 식은 음식은 좋은 음식이 아니다.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뜨끈뜨끈해야 한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도 ‘그 국물 참 시원하다!’고 하며 뜨거운 음식을 즐긴다. 따라서 뜨거운 음식을 먹는 데는 숟가락이 제격이다. 특히 뜨거운 국물은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된장도 보글보글 끓어야 제 맛이라 한다. 뜨거운 된장을 젓가락으로 먹을 수 없다. 김밥이나 초밥 등은 모두 식은 음식이다. 굳이 숟가락이 필요없다.
셋은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밥그릇을 놓고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복이 날아가거나 거지가 된다고 생각한다. 밥상에 놓여 있는 음식을 떠먹는 데는 젓가락보다 숟가락이 더 기능적이다. 밥이나 국은 물론 된장까지 뜨거운 것을 즐기니 이런 뜨거운 그릇들을 들고 먹을 수 없다. 밥상에 놓여 있는 뜨거운 음식은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뜨거운 맛이 살아난다. 그러나 작은 밥공기를 들고 먹는 경우에는 젓가락이 더 기능적이다. 일본의 밥그릇은 뜨겁지 않고 작아서 들고 젓가락으로 먹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한식과 양식을 비교해서 보면, 우리 식문화의 경우 한결같이 큰 솥에다가 물을 흥건하게 붓고 오래도록 끓인 곰탕문화가 우세하다면, 양식의 경우는 한결같이 불에다 직접 익혀 먹는 바비큐문화가 우세하다. 따라서 우리 전통부엌에는 항상 큰 솥이 여럿 걸려 있으며, 지금도 밥솥이나 냄비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서양의 부엌에는 솥이 아예 없다. 굽는 장치와 후라이팬이 고작이다. 찻물을 끓이는 도구 외에 음식을 삶거나 찌는 도구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같은 음식이라도 우리는 솥에다 물을 부어서 삶거나 쪄서 먹는데, 서구인들은 모두 구워서 먹는다. 대비해 보면 아래와 같다.
곰탕 : 바비큐
찐 옥수수 : 구운 옥수수
삶은 감자 : 구운 감자
찐빵 : 구운 빵
오랜 정착생활을 해온 농경문화의 식생활과 떠돌이생활을 해온 수렵문화의 식생활 차이라 할 수 있다. 이동생활을 하는 데에는 밥솥을 가지고 다니거나 많은 물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 따라서 곰탕문화는 배제된다. 불만 있으면 익혀먹을 수 있는 바비큐문화가 드세다. 그런데 요즘 여행을 즐겨 다니며 야외 나들이를 하면서 음식을 먹는 경향이 높다. 따라서 김밥문화와 함께 구워먹는 바비큐문화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한식은 영원할 것 같지만, 한식을 먹는 식문화는 자못 서구화되고 있다. 주생활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밥상을 제각기 차려서 어른과 아이 또는 남성과 여성이 따로 밥을 먹었는데, 요즘은 한 상에 음식을 다 차려두고 남녀노소 분별 없이 함께 밥을 먹는다. 집이 양옥화되고 식탁이 갖추어짐에 따라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게 된 것이다. 한둘씩 밥을 차려 먹는 전통적인 밥상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이다. 한옥에서는 밥상을 비롯한 모든 가구들은 이동식이었다. 자연히 식구들이 거처하는 방까지 밥상이 따라갔다. 밥상이 가면 어느 방이든 식당방으로 변하는 것이다. 손님에게 방석을 내놓으면 응접실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침실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방이든 이부자리를 펴면 그곳이 곧 침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은 이처럼 하나의 방이 다양한 기능을 발휘하도록 주생활의 전통이 확립되어 있는 데 비해서 양옥은 하나의 방은 한 가지 기능만 하도록 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한옥이 집안에서 좌식생활을 할 뿐 아니라 한 방에 머물러서 정착형 생활을 한다면, 양옥은 집안에서 입식생활을 할 뿐 아니라 여러 방을 돌아다니면서 손님도 맞이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는 이동형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한옥의 사랑방이나 안방은 기능이 다양하다. 평소에 거실이자 손님이 와서 방석을 내놓으면 응접실이 되고 서안을 내놓고 독서를 하면 서재가 되며, 반짇고리를 들고 앉으면 작업실이 된다. 그리고 밥상을 차려오면 식당방이 되며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면 곧 침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사랑이나 안방에 앉아서 모든 방의 기능을 두루 누리는 것이다. 실내에서도 정착생활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양옥은 다르다. 방마다 기능이 별도로 있다. 거실이나 응접실이 따로 있고 서재와 식당방은 물론 침실도 따로 있다. 거실에서 생활하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응접실에서 맞이한다. 그러다가 끼니때가 되면 식당방으로 가고, 독서를 하거나 집필을 할 때에는 서재로 간다. 그리고 하루 일을 마친 다음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침실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거실에서 식당방, 침실을 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안에서도 이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한옥에서는 가구가 작고 이동식인데 비하여 양옥에서는 가구가 거대하며 붙박이식이다. 양옥의 가구는 소파와 침대, 식탁, 책상처럼 모두 붙박이로 설치해 두고 가구를 방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구에 따라 방을 찾아가야 한다. 잘 때는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로 들어가고 책을 읽을 때는 서재로 가야 한다. 자연히 밥을 먹을 때는 한옥에서 생활하듯 제 방에서 날라온 밥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식탁이 놓여 있는 식당방을 찾아가야 한다. 한옥의 부엌과 달리 주방이 좁기 때문에 밥상을 여럿 비치할 수도 없다. 자연히 모든 가족들이 함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문화가 창출된 것이다.
한옥에서는 저마다 따로 밥상을 받았다. 어른이나 손님들은 반드시 독상을 차려 대접을 했다. 식탁처럼 거대하지 않은 일인용 밥상이어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특별한 경우 겸상을 하고 부녀자들은 더러 둘레상을 이용해서 함께 먹기도 한다. 하지만 한옥이 양옥으로 바뀌면서 이러한 밥상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모두 식당방에서 모여 함께 먹거나 큰 상을 펴두고 둘러앉아 먹는다. 혼자서 먹는 밥상은 거의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밥상은 만들지도 팔지도 않아 쉽게 구할 수도 없다. 전통적인 밥상문화가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김치는 일본에서도 인기다. 김치는 이미 세계적인 식품으로 성장했고 지난해 중국에서 사스가 유행하면 김치는 더욱 주목받는 식품이 되었다. 전통사회에서 겨울철의 김장김치를 주로 즐기던 한국인들도 이제는 사철 김치를 즐기게 되었다. 김치가 빠진 한식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김치문화가 첨단 가전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바로 김치냉장고이다.
온돌침대가 장영실 과학 문화상을 수상할 만한 발명품이듯이 김치냉장고도 같은 수준의 발명품이다. 김치냉장고는 한국인의 최신 냉장고 발명품이자 한때 주부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가전제품 1호였으며, 침체에 빠진 가전제품 시장을 살려낸 효자 상품 구실을 하였다. 한 마디로 김치냉장고는 김치문화의 전통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김치문화를 온전하게 누리고자 하는 한국사람들에게 일반 냉장고는 한에 차지 않는다. 쉽게 맛이 변하기 때문에 김장김치의 온전한 맛을 즐길 수 없다. 당연히 김장독과 같은 새 냉장고 기술이 요청되기 마련이다.
김치냉장고 기술은 예사 기술이 아니다. 온도를 조절하는 것도 0.1도 수준으로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반 냉장고처럼 순환방식으로 냉기를 공급해서는 김치를 제대로 보존할 수 없다. 따라서 아예 김치를 보관하는 용기 자체가 4면에서 온도를 내려준다. 용기의 재질은 물론 냉장기술도 기존 냉장고 방식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김치냉장고는 김치의 숙성과 보존에만 기능적인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냉장고에 보관하면 송풍 방식의 냉기로 건조해져서 시들해져 버리는 야채와 과일, 생선, 날고기 등도 아주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의 냉장고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야채와 과일 등을 신선하게 보관하는 생장고로 재인식되고 있다.
김치냉장고의 해외 수출은 이미 4년 전부터 시작되어 우리 가전제품의 해외진출을 선도하고 있다. 다른 가전제품은 해외의 다른 여러 제품들과 경쟁을 해야 하지만 김치냉장고의 경우는 경쟁 대상이 없다. 그동안은 주로 교포사회를 중심으로 마케팅이 이뤄졌으나 지난해 월드컵 대회를 계기로 김치를 아는 외국인이 많아져 김치냉장고의 수출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따라서 김치냉장고의 해외마케팅 포인트를 중․상류층을 겨냥한 세컨드 냉장고로 잡고 있다. 즉 김치 보관용이 아니라 외국인의 식생활을 반영한 과일․야채․와인․치즈․육류 등을 보관하는 전문형 냉장고로 해외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김치문화는 김치 자체의 수출에서 한국식당의 수출, 김치냉장고의 발명과 새 가전제품의 수출 등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7. 의식주 생활문화의 현대적 창조와 세계화
같은 맥락에서 보면, 민속문화의 신기술 개발 가능성과 세계 시장에 수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라면의 종주국이지만 매운 맛을 즐기는 우리 음식문화에 맞게 개발한 매운 맛의 ‘신라면’은 지금 세계 라면시장을 석권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른바 빨래판 세탁기나 물걸레 청소기 등의 가전제품 개발은 순전히 우리 민속문화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빨래판을 이용하지 않는 서구식 세탁문화에서 빨래판 세탁기를 만들 발상을 할 수 없듯이, 입식생활을 하는 까닭에 방바닥을 물걸레로 청소하지 않는 서구식 주거생활에서는 물걸레 청소기를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빨래판 세탁기는 다른 세탁기에 비하여 세탁효과가 크면 다른 문화권에도 얼마든지 수출할 수 있고, 물걸레 청소기는 온돌문화가 확산되는 것과 더불어 세계적인 청소기로 보급될 수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굿사마리탄병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 병원은 지난해부터 양식을 배제하고 불고기를 비롯한 닭볶음탕․두부조림․참치김밥․미역국․된장국 등 한식으로 환자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원래 한국인 환자를 위해 한식을 공급했는데, 한식이 기름기가 적고 영양이 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병원측은 한식이 환자식으로 최고의 음식이라 판단한 결과이다. 온돌침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LA의 우리 동포들이 사는 아파트를 온돌형 보일러로 난방시설을 하고 그들이 집집마다 온돌침대를 사용하게 되면 미국내에 파급효과가 상당히 크리라 전망할 수 있다. 이불형 전기담요만 사용하던 일본에서도 장판형 전기담요를 쓰고 있는 걸 보면 전혀 억측은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에는 일본에도 위에 덮는 이불형 전기담요는 거의 수요가 없고 바닥에 까는 장판형 전기담요가 널리 유행하여, 일본의 난방문화도 온돌형으로 알게 모르게 전환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바닥에 까는 담요가 더 편하고 열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사회에도 재미동포들을 중심으로 온돌문화가 보급되면, 온돌형 보일러나 전기온돌 자재 수출은 물론 시공회사의 해외진출도 가능하다. 온돌침대의 경제적 효과 이상의 수출경쟁품이 바로 민속문화의 전통에 의한 온돌문화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김치는 국제사회에서 음식쓰레기로 취급되었다. 서양 음식을 기준으로 보면 김치는 음식이 아니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김치가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공식음식 차림표로 채택되었다. 2003년 아시아지역을 강타한 사스(SARS)라는 신종전염병이 유행할 때, 김치가 아시아인의 건강식품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세계적인 미국의 건강잡지 ‘Health’가 선정한 세계5대 건강식품으로 김치가 선정되었다. 김치를 건강식품으로 국제화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 아시아인이자 세계인들이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나서서 김치문화를 연구하고 발전시켰다면 진작 세계적 식문화로 발돋음했을 것이다.
지금 민속주 막걸리가 김치보다 한참 늦게 세계적인 술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막걸리도 지난 시대에는 김치처럼 홀대받아왔다. 맥주와 정종, 와인 등 외국술을 기준으로 우리 막걸리를 보니까 값싸고 하찮은 술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김치나 된장처럼 누구나 집집마다 담을 수 있었고 집집마다 고유한 술맛을 냈던 막걸리가 양조장 술로 전락하다가 오히려 일본에서 막걸리가 건강술로 주목되면서 최근에 막걸리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큰 마을마다 있었던 양조장도 줄어들어 이제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 희귀하게 된 위기상황에서, 막걸리 붐이 일게 되자 일본을 넘어 미국,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거쳐 EU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경제적 수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한국 술은 국제적인 술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다가 이제 세계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러한 민족적 존재감이나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값싸고 건강한 발효주, 누구나 쉽게 담아먹을 수 있는 민주적인 민속주를 우리만 독점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김치의 세계화도 같은 맥락에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고급문화나 대중문화의 세계화와 달리 민속문화의 세계화는 계급적이고 독점적인 지배문화이거나 경제적 상품화로 소비를 조장하는 문화가 아니라, 세계 식문화를 건강하게 만들고 민주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민중적인 문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세계화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