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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 18세기 중반 | 19세기 후반 | ||||
寺 | 庵 | 합계 | 寺 | 庵 | 합계 | |
경기도 | 92(64.4%) | 51(35.6%) | 143 | 90(67.2%) | 44(32.8%) | 134 |
충청도 | 130(71.4%) | 53(29.1%) | 183 | 116(69.5%) | 51(30.5%) | 167 |
경상도 | 264(78.6%) | 72(21.4%) | 336 | 231(58.3%) | 165(39.9%) | 396 |
전라도 | 171(81.8%) | 38(18.2%) | 209 | 148(59.5%) | 101(40.5%) | 249 |
황해도 | 78(60.4.%) | 49(38.6%) | 127 | 46(65.7%) | 24(34.3%) | 72 |
강원도 | 64(41.3%) | 91(58.7%) | 155 | 52(52.5%) | 47(47.5%) | 99 |
함경도 | 74(53.6%) | 63(45.6%) | 137 | 82(78.8%) | 22(21.2%) | 104 |
평안도 | 173(74.6%) | 59(25.6%) | 232 | 138(53.9%) | 118(46.1%) | 256 |
계 | 1046(68.7%) | 476(31.3%) | 1522 | 903(61.2%) | 572(38.8%) | 1475 |
<표 1>에 따르면 18세기 중반에 비해 19세기 후반의 사찰과 암자 수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숫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寺의 수가 줄어들고 庵의 수가 늘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홍경래의 난이 휩쓸고 간 평안도 지역의 경우 사찰의 수가 약 25% 가량 줄어든 반면 암자의 수는 2배 가까이 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전라도의 경우에도 사찰의 수는 약 15% 줄어들었으나 암자의 수는 약 3배 가까이 늘어났다. 경상도는 전체 사찰과 암자의 수가 60개 이상 늘어난 것으로 확인되지만, 사찰 수는 30개 이상 줄어들고 대신 암자의 수가 크게 늘었다. 이처럼 18세기에 비해 19세기에는 영세한 규모의 암자가 많이 늘었으나 사격을 갖춘 절은 전국적으로 줄어들었다.
사찰 승려수가 기재된 호적 조사에서는 19세기 불교계의 어려움이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 17C후반 | 18C초반 | 18C중반 | 19C초반 | 19C중반 | 20C초반 |
청송사 호수 | 180(234) | 83(70) | 20(8) | 11(11) | 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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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흥사 호수 | - | 112(138) | 14(19) | 12(12) | 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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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호수 | 37(51) | 21(33) | 8(8) | 5(5) | 5(5) | 2(2) |
신흥사 호수 | - | 45(62) | 13(22) | 8(10) | 36(36) | 8(8) |
<표 2>는 『울산호적』에 나오는 울산지역 사찰 호구수를 세기별로 정리한 것이다. 이 네 곳은 17~18세기에 울산호적에서 가장 많은 호구수를 차지하는 사찰들이었다. 위의 표에 따르면 18세기 울산에 위치한 대표 사찰들인 청송사, 운흥사, 백양사, 신흥사의 호구수를 합하면 약 260호에 달하던 것이 20세기 초반에는 단 10호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 중 청송사와 운흥사는 이미 폐사된 상태였다. 이는 19세기를 지나면서 사찰 내부의 상황이 매우 열악해졌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900년에 작성된 울산호적에는 寺 4곳과 庵 6곳 등 10곳 사암의 승려 수가 기재돼 있는데, 이 중에 가장 많은 승려가 거주하는 사찰이 신흥사로 8명이 거주했으며, 나머지 사찰은 대부분 1~2명의 승려만 거주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신흥사에 36명이나 거주했던 것은 인근 지역 사찰의 폐사 영향으로 추정된다.
울산이 위치한 경상도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침이 덜했던 곳이었다. 사찰의 규모가 영세해지기는 했지만 숫적인 면에서는 크게 변동이 없었던 지역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승려의 호구수가 크게 줄어들었다면 다른 지역은 훨씬 더 심했을 것이 자명하다. 특히 민란이 대거 발생한 황해도나 전라도 지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이르러 사찰과 승려 호구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사찰 잡역이 지나치게 과도하게 부과되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전국 사찰에 소장된 19세기의 完文에는 당시 사찰들이 겪었던 경제적 어려움을 고발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1850년 예조에서 성급한 「報恩郡俗離山法住寺判下完文節目」에는 “읍속배들이 하나같이 誅求의 폐해를 끼치니 빈한한 승도들이 그 침탈의 근심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이처럼 사찰의 건물들이 해마다 頹落해져가고 승도들은 점점 더 凋殘해져가니 막중한 (원당) 수호의 임무도 거행할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법주사와 같은 대찰조차 이러한 어려움을 토로할 정도였으니, 각 고을의 소규모 사찰들은 사세를 유지하기가 힘든 지경이었을 것이다.
(2) 위기 극복을 위한 불교계의 대응
조선 불교계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지만, 교단 내부에서는 사찰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국의 사찰들은 19세기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관이나 조정에 연줄을 대거나 사찰의 각종 契를 결성해 保寺활동을 하는 등 여러 수단을 강구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실의 원당사찰로 지정받는 것이었다. 왕실원당을 설치한 사찰은 일정기간이나마 왕이나 王親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지방 관아와 土豪들의 침탈을 피할 수 있었다. 호조나 내수사, 여러 궁방 등 원당과 관련된 기관에서는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에 잡역을 면제하라는 완문을 成給하였고, 이는 사찰이 잡역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에는 지방 사찰의 승려들이 왕실원당을 설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유치 작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19세기에 나타나는 현상 중에 특히 주목되는 점은 염불만일회가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다는 점이다. 건봉사를 필두로 신계사, 유점사, 미황사, 표충사, 범어사 등 전국 사찰에서 염불만일회가 개최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사찰계가 전국적으로 크게 늘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염불계가 크게 늘어난 점이 주목된다. 임진왜란 이후 18세기까지 3건에 불과하던 염불계가 19세기에 이르러 19건으로 늘어났다. 염불만일회가 갖는 사상적 배경은 현실의 고통을 없애고 미래로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내세적 구원사상에 근거한다. 염불만일회가 他力的 신앙을 채택한 것은 그 시대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함께 시대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내포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19세기에 중창된 서울 근교의 사찰에서는 大房이라는 건축물이 새롭게 등장했는데, 이는 대규모의 인원들이 염불을 외우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따라서 19세기에 염불만일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반 백성들의 열망과 더불어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사찰들의 적극적인 포교 노력이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간주된다.
19세기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불교 교단 핵심에서는 여전히 간화선 중심의 청정한 수행풍토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三種禪 논쟁을 꼽을 수 있다. 삼종선 논쟁의 시발은 白坡亘璇의 『禪門手鏡』의 저술이었다. 백파는 『선문수경』에서 臨濟三句를 기준으로 선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임제 1구는 祖師禪, 임제 2구는 如來禪, 임제 3구는 義理禪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조사선과 여래선은 격외선으로 간주했다. 백파의 글이 발표된 후 대둔사의 艸衣意洵은 이를 반발하는 『禪門四辨漫語』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초의는 조사선과 여래선을 모두 격외선으로 간주하는 백파의 견해를 부정했다. 초의는 “조사선은 言敎에 말미암지 않고 부처로부터 이심전심으로 이어지는 格外別傳의 격외선이며, 여래선은 부처가 교화한 법문으로 言敎義理로 깨달아 들어가고 말로 이치를 증득하는 의리선으로, 양자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그 후 송광사의 학승인 優曇洪基으로 이어져, 『禪門證正錄』에서 초의의 견해를 지지했다. 이어 백파의 3대손인 雪竇有炯의 반격으로 이어졌는데, 설두는 『禪院遡流』를 써서 백파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이후 竺源震河가 『禪門再正錄』을 통해 백파의 삼종선을 다시 한번 비판하면서 이 논쟁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19세기의 선 논쟁은 임제법통과 간화선, 禪敎兼修와 華嚴敎學이라는 조선후기 불교의 양대 흐름 속에서 파생된 사건이었고, 그 핵심은 선 우위론과 禪敎竝行論이 경합을 벌인 선교판석과 해석의 문제였다. 여기에는 조선후기 불교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모색하는 선승들의 깊은 고민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었다. 19세기 선논쟁이 지닌 의의는 여러 면에서 평가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조선 불교를 주도하는 선승들의 禪氣와 구도를 향한 열정이 역동적으로 살아있었으며, 승가 내부에서 조선 불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 하겠다.
이 시기에는 寺誌와 高僧 列傳 등 사찰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兒庵惠藏과 만덕사계 승려들이 『大芚寺誌』를 편찬한데 이어 『萬德寺誌』를 편찬한데 이어 20세기 초에는 송광사에서도 사찰 자료들과 승려 비문 등을 엮어 『曹溪山松廣寺史庫』를 편찬하였다. 『佛祖源流』,『東師列傳』,『曹溪高僧傳』 등의 승려 전기도 이 시기를 전후해 송광사와 대둔사에서 편찬되었다. 이 또한 불교의 각 문파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세기에 이르면 승려들과 유학자들의 교유도 매우 폭넓게 이루어졌다. 아암혜장과 정약용, 초의의순과 김정희가 유불의 경계를 넘어서 깊은 교유를 맺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희는 백파와도 선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의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정희는 백파의 입적 직후 그의 비문을 지을 만큼 백파에 대한 돈독한 우정을 보였다. 백파는 안동김씨의 수장인 金祖淳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었고, 김조순이 백파의 「修禪結社文」에 序를 쓰기도 했다. 또한 백파는 洪奭周, 呂東植, 최창룡과도 儒佛의 同異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초의와 홍석주, 申緯의 교유, 應雲空如와 홍석주, 김조순 등의 교유 등도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문집에서 심심찮게 확인된다. 또한 이 시기 고승 비문은 유학자들이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과 성리학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모색하던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했다.
이처럼 19세기 조선 불교계는 사회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비록 많은 사찰들이 폐사하거나 축소되었지만, 대중들과 더불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미래를 발원하는 염불 수행 등을 통해 19세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Ⅲ. 송광사의 19세기 현황과 왕실원당 설치
(1) 부휴계 종찰로서의 명맥
송광사는 임란 직후 浮休善修와 그 제자들이 주석한 이래 19세기까지 부휴계 종찰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송광사의 총섭(주지)은 부휴계만 맡을 수 있다는 내부 조항에서도 부휴계를 대표하는 사찰로 조선후기 내내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호남불교계를 뜨겁게 달군 三種禪 논쟁은 주로 선운사와 대둔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송광사의 학승인 優曇洪基도 이 논쟁에 참여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우담은 『禪門證正錄』에서 조사선과 격외선이 임제삼구 중 1구에 해당되는 것은 맞지만 여래선을 격외선에 넣고 2구에 배당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는 초의의 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종래의 조사선=격외선, 여래선=의리선의 전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송광사는 19세기에도 부휴계 종찰로서의 명성을 계속 이어갔지만, 사찰 내부적으로는 매우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송광사는 18세기 중반에 설치되었던 육상궁 원당이 19세기 초에 용흥사로 이전되면서 막대한 양의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842년에 사찰 전각이 대부분 불에 타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서 송광사는 폐사 위기까지 겪게 되었다. 이 화재로 佛宇 5전, 僧寮 8방, 公舍 11소 등 2152칸의 건물이 전소되었다. 이때 화주를 자처한 인물이 일흔의 노승 奇峯大師이었다. 신도들의 시주와 승려들의 탁발만으로는 중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봉은 제자인 용운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영의정 權敦仁을 접견하고 송광사의 중창을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이후 용운은 세 차례나 서울을 오가며 공명첩 700장과 여러 관리들로부터 모연한 재물을 보시받았다. 이를 토대로 중창공사가 진행되어 1844년(헌종 10)에 보궁과 법당을 짓고, 이듬해에 승료와 공사(公舍)를 고친데 이어, 1847년에 이르러 여덟 암자와 일곱 전각이 모두 모습을 회복했다. 이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어 장장 14년에 걸친 불사 끝에 중창이 완료되었다. 이때의 중창불사를 주도한 용운은 송광사에 왕실원당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고종과 민비, 순종의 위패를 모시게 됨으로써 송광사는 각종 잡역을 면제받는 혜택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지만, 송광사가 부휴계 종찰로서의 상당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찰 중수기에 꾸준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은 20세기 초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20세기초 송광사의 주지를 역임한 錦溟寶鼎은 『曹溪高僧傳』을 집필하고 『曺溪山松廣寺史庫』를 편찬하는 등 송광사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들을 진행하였다. 또한 지눌의 조계종과 송광사 부휴계를 결합시켜 부휴계가 조계종의 적자임을 표방하는 글들을 남겼는데, 이는 송광사의 승려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부휴계의 전통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인 것으로 파악된다.
19세기에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염불만일회가 송광사에서도 개최되었던 사실도 확인된다. 송광사의 염불만일회를 주도한 인물은 洞虛致性이었다. 송광사 자정암에서 1879년 4월부터 만일회가 개최되었는데, 통허가 화주로서 사부대중의 교화를 盛行하였다. 이후 1885년(고종 22) 통허가 보제당으로 옮겨감에 따라 만일회도 보제당으로 옮겨갔다.
『조계산송광사사고』 등의 사료에는 염불회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통허대사 비문」을 통해 자정암에서 개최되던 만일회가 6년 뒤 본 절에서 열렸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로 볼 때 자정암에서 도저히 염불행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 본 절로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염불만일회는 매우 성황을 이루어서 재화가 풍족했고 법을 따르는 대중들이 넘쳤다고 전한다. 통허가 주도한 염불만일회가 일반 신도층으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의 송광사는 불교계 전반에 밀어닥친 잡역의 폐해를 겪는 가운데 1842년 대화재라는 참사까지 겹쳐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송광사 승려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승보사찰의 위상을 선양하고 왕실원당을 유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다.
(2) 승보사찰의 위상 선양
19세기를 전후로 불교계 안팎에서는 송광사가 三寶寺刹 중 僧寶寺刹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삼보사찰의 개념은 이능화가 1919년에 『圓鑑國師語錄』에서 삼보사찰을 정의하면서 보편화되었지만, 이 말은 이미 19세기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송광사를 승보사찰로, 통도사를 佛寶寺刹로, 해인사를 法寶寺刹로 칭한 사례는 홍석주가 1832년에 지은 『淵泉翁遊山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佛家에서 말하기를 東國寺刹에는 三寶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佛頭骨이 있어 佛寶이고 해인사에 있어서 龍藏이 있어 法寶다. 또한 이 절을 僧寶라 하는데 이곳에서 보조 이래 16국사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송광사=승보사찰, 통도사=불보사찰, 해인사=법보사찰이라 칭한 경우는 홍석주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보다 좀더 앞선 시기인 1828년(순조 28)에 쓰여진 『독남유록』에도 삼보사찰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불보사찰을 통도사가 아닌 금산사로 지칭하였다. 이로 볼 때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가 삼보사찰’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확립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863년(철종 14) 설두유형이 간행한 『山史略抄』에서도 “조계산 송광사는 고려 보조국사가 개창한 이래 열 여섯 명의 조사가 차례로 배출되어 많은 이들을 널리 이롭게 하였으니 승보사찰이라 한다”고 언급한 사례가 확인된다.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삼보사찰’의 개념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널리 유포되었다. 1899년 도총섭을 맡고 있던 용악 혜견이 대장경 세 부를 인출하고 해인사와 송광사, 통도사에 차례로 봉안하면서 삼보사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용악의 제자인 구하 천보도 1901년 『龍岳堂私藁集』서문을 쓰면서 삼보사찰을 언급한데 이어 송광사 주지 금명보정도 해인사 금강계단 계업에서 해인사를 大法寶宗刹이라 칭하고, 통도사를 佛宗刹이라 지칭하였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삼보사찰의 개념은 불교계 내부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말기의 문신인 김윤식의 「송광사」라는 시에도 승보사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시에서 김윤식은 “해동의 삼보사찰 중에서도 송광사가 유독 기이하다 이름난 곳(海東三寶刹 松廣獨擅奇)”이라고 칭하고 있다. 김윤식이 이 시를 지은 것이나 송광사를 특히 높이 평가한 것은 1880년 순천부사를 역임한 인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 내부에서도 승보사찰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중반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송광사 5대 중창주 용운이 지은 「송광사사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송광사의) 16국사는 모두 佛門의 名賢宗師로 道法을 천양하고 당우를 중수하였으니 진실로 이는 동방의 제일도량이라. 가히 16국사는 총령의 달마, 진단의 주돈이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하겠다. 양산의 통도사, 합천의 해인사, 승평의 송광사는 각각 불법승 3보를 대표하는 종가이다. 즉 통도사는 석가여래의 정골사리를 탑에 안치하였기 때문에 불보라 하고, 해인사는 팔만경판을 소장한 곳이기 때문에 법보라고 한다. 송광사에서 松자는 18명의 宗師라고 破字가 되는데 16국사는 이미 출현하셨으니 나머지 2명의 종사가 나와 법을 전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방 삼천의 사찰 가운데 명현종사가 많이 출현하시어 널리 불법을 펴시고 백성과 임금을 위해 축원하였으나 그 나머지 삼천 사찰이 감히 송광사에 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송광사사적기」에는 통도사, 해인사와 더불어 송광사가 삼보사찰의 종가임을 밝히고 있다. 이에 더 나아가 송광사가 동방의 삼천사찰 중에서도 최고라는 자긍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19세기에는 송광사=승보사찰이라는 의식이 송광사 안팎으로 팽배해 있었다. 이는 송광사가 19세기의 위기 속에서 내부적으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16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이라는 자긍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불교계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삼보사찰의 개념도 19세기의 위기의식을 극복하고 불교를 중흥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3) 왕실원당 설치와 운영
송광사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세 차례에 걸쳐 왕실원당을 설치하였다. 숙빈최씨의 사당인 毓祥宮願堂, 고종과 명성황후, 세자(후일 순종)의 복을 비는 祝聖殿, 그리고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설치한 聖壽殿이 그것이다. 약 150년에 걸쳐 세 번이나 왕실원당으로 지정된 사찰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왕실에서 송광사를 수승한 명산대찰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호남 제일 사찰이라는 명성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① 육상궁 원당 설치
송광사에 육상궁 원당이 설치된 것은 1755년(영조 31)이었다. 육상궁은 숙빈 최씨의 사당으로, 영조는 재위 23년부터 약 30년에 걸쳐 숙빈 추숭작업을 진행하였다. 숙빈의 사당은 원래 숙빈묘(肅嬪廟)라 하였는데, 영조 29년에 육상궁으로 추숭되었다. 육상궁 추숭이 이루어진 지 2년 뒤에 송광사에 원당이 설치된 것으로 볼 때, 육상궁으로의 승격을 기념하기 위해 원당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정에서는 육상궁 원당 설치를 명하는 첩지와 함께 송광사가 담당하고 있던 紙役을 비롯한 각종 잡역을 면제하라는 완문을 내려 보냈다. 이듬해인 1756년(영조 32)에 대웅전 남쪽에 있는 옛 명부전 남쪽에 숙빈의 원당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때 설치된 육상궁원당은 약 50여년 뒤인 1803년에 용흥사로 이전되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1930년대에 송광사 주지를 역임한 임석진의 『松廣寺誌』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영조 31년(1755)에 轉牒하여 송광사에 육상궁원당을 奉設하고, 同寺의 紙地와 제반 잡역을 일체 勿侵하라는 勅旨를 전하셨으므로 本府使로부터 다시 이 旨를 본사에 전하고, 仍하여 완문을 成給함과 동시에 色吏를 案同하고 본사에 枉顧하여 지부․지첩 등을 破壞시켜 累年의 痼弊를 蕩除함에 이르렀다. 翌年에 都監 好安 , 別座 見日師, 都木 白雲臺 등이 대웅전 남쪽에 있는 舊 명부전의 남쪽에 本宮을 奉建 하고, 영조대왕의 모후인 숙빈 최씨를 봉안하였다. 그런즉 당시의 寺威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凜嚴하였을 것은 呶言을 기다리지 않을 사실이다. 이래로 同宮의 庇寵이 自別하여 同 36년 3월과 同 38년 7월과 同 42년 3월에 모든 救弊의 완문을 成給하심이 있었다. 그러나 순조 3년(1803) 어느 사정에 말미암아 元 창평군 龍興寺로 移設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설의 원인에 대하여는 “어느 해에 各邑 군수들이 본사에 회합함이 있었는데, 마침 昌平倅의 供饌에 몇가지의 饌羞가 빠졌음에 말미암아 野卑한 불평을 품고 돌아간 뒤로 仍하여 원당 이설의 대활약을 개시함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사의 별첨록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 4년 11월에 定上房이 이 願堂事로 경성에 왕래하다” 하였으니 그때까지도 오히려 복원 운동을 한 흔적이 있는 증거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순천 인근의 군수들 모임이 송광사에서 열렸는데, 그때 창평 원님의 반찬에 몇가지가 빠지는 바람에 이에 불만을 품고 송광사에 설치된 육상궁원당을 창평 용흥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원님의 반찬 때문에 왕의 私親을 모신 원당을 옮겼다는 사실이 다소 믿기지 않는데, 근대 시기에 송광사 내부에서도 원당이 이설된 정확한 원인을 몰라 이런 풍문이 돌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육상궁 원당이 설치되었을 당시 송광사에는 1755년(영조 31), 1760년(영조 36), 1762년(영조 38), 1766년(영조 42)에 연달아 잡역 혁파를 명하는 완문이 내려졌다. 하지만 육상궁 원당이 이전된 후인 1831년(순조 31) 송광사에 발급된 완문에는 막중한 잡역을 담당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조계산송광사사고』에 실린 「松廣寺 雜役矯革節目」에 따르면 19세기 초 송광사는 무려 순천 관아의 14개 부서에 75항목에 달하는 잡다한 물품과 代錢을 조달하고 있었다. 송광사에 이 완문이 成給된 것은 순조 31년(1831)으로, 순조 30년 송광사가 栗木封山으로 지정된 이듬해에 암행어사가 순천군을 방문했을 때 지급된 것이다. 송광사가 관청에 지급한 물품 목록을 살펴보면 대부분 간장이나 밀가루, 새끼줄, 약초, 산나물 등 절에서 생산하는 물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관노나 아전들의 수고비까지 송광사에서 부담하고 있었다.
『송광사지』에서는 육상궁 원당이 용흥사로 이전된 후에 고종 초까지도 송광사의 승려들이 원당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로비를 벌이기 위해 서울을 오고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왕실원당이 지니는 혜택이 매우 컸으며, 송광사 승려들이 왕실원당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② 고종․민비․순종의 축성전 설치
송광사는 1886년(고종 23) 三殿의 원당인 祝聖殿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때 설치된 원당은 순천부사 이범진이 고종과 민비에게 건의해 성사된 것이었다. 당시의 구체적인 내용은 임석진의 『송광사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돼 있다. 이범진이 순천부사로 재임할 당시 서울에 갔다가 고종과 민비를 면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미 용운으로부터 누차 원당 봉설의 慶業을 부탁받은 터였는데, 순천군의 상황을 보고하던 중 송광사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민비가 “그 사찰이 서울 근교에 있었으면 佛事라도 하고 싶구나”라고 하자, 이범진이 “제가 중책을 받들고 축성전을 奉設하겠사옵니다”라고 답하니, 그 자리에서 윤허하고 1000냥을 내렸다. 또한 “이 돈을 체달하여 토지를 사서 三殿의 誕辰에 佛供을 하는 비용으로 쓰라”고 하달하였다. 이에 이범진은 순천으로 돌아가 논 32두락을 매입하고 東方丈에 위패를 봉안한 후 축성전의 액호를 올렸다.
고종의 축성전은 1909년(융희 3)에 혁파되었다. 1909~19 10년 사이에 왕릉의 수호를 담당하던 사찰들의 조포의 역이 대부분 중단되었는데, 송광사도 이 시기에 왕실 원당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③ 기로소원당의 설치
1903년 송광사에는 기로소원당이 설치되었다. 이미 고종의 원당인 축성전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고종의 원당이 하나 더 마련된 것이다. 기로소원당은 왕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사찰에 왕의 만수무강과 안녕을 비는 원당을 설치한 것이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 관직을 역임한 원로 문신들의 친목기구로, 1394년 태조가 70세 내외의 2품 이상 관료들을 대상으로 기로소선생안을 작성하고 전토와 어전, 노비 등을 하사한 것이 조선 기로소의 효시였다. 이후 기로소는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 문신들의 친목기구로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기로소 입소에 대한 경제적 혜택이 사라졌지만, 조선시대 관료들은 기로소에 입소하는 일을 매우 명예롭게 여겼다. 조선의 왕 중에는 태조, 숙종, 영조, 고종 등 4명의 왕이 기로소에 입소했다.
조선왕조의 기로정책은 孝治主義를 실현한다는 명분 하에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의 하나로 유지되었고, 그 정점에 기로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유교적 효치주의에 기반을 둔 기로소에 왕이 입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찰에 원당을 설치한 것은 매우 특이하면서도 이율배반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조선후기에 유학자 관료들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크게 변화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기로소원당이 설치된 것은 그 중에서도 두 차례에 불과하다. 영조가 기로소를 입소한 후 의성 고운사에 延壽殿을 설치한 것이 최초이며, 고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해 송광사에 성수전이 건립된 것이 두 번째이다.
고종의 기로소원당 설치는 영조의 전례를 따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기로소 입소가 결정된 후 명산 대찰에 원당을 설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원당을 유치하기 위한 청원을 올렸다. 원당의 지정 권한은 당시 耆老所 次知 侍從院 奉侍臣인 李炳鼎에게 있었다. 이병정은 무창군 출신의 鄭明源을 監董官으로 삼았는데, 정명원에게 전라도에 위치한 사찰들 가운데 한 곳에 기로소원당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정명원이 “전라도에서 가장 큰 절은 송광사”라고 아뢰어 송광사에 기로소원당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송광사의 승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없어 수소문 하던 차에, 마침 서울 원흥사에서 열린 화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송광사의 총섭 금명보정이 상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정과의 접견이 이루어진 후 송광사에 기로소원당 건축비용으로 1만냥의 돈이 하사되었고, 11월에 성수전이 완성되자 고종의 전패가 모셔졌다. 이후 기로소에서는 기로소원당 세칙을 내려 원장과 판사가 원당에서 담당해야 할 내용을 하달했다.
『조계산송광사사고』에 수록된「傳令順天郡松廣寺判事僧」에서 당시 기로소원당의 운영 방침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송광사에 하달된 기로소 세칙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점은 기로소원당에서 치러지는 의식 내용을 기로소에서 직접 규정해 하달했다는 것이다. 세칙 가운데 肅拜하는 의례와 축원 절차에 대해 “(기로소원당의 최고책임자에 해당하는) 원장과 판사가 직접 담당하고, 축원은 원장이 직접 대웅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서쪽을 향해 몸을 숙이고 지성으로 위를 향해 축원을 올리라고 명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시했다.
『조계산송광사사고』 「이봉대사 비문」에는 “평생 동안 반드시 子時에 일어나 북쪽을 향해 대궐을 바라보며 네 번 절했는데, 비바람이 불고 병이 들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나라에 큰 喪이 있으면 번번이 직접 齋醮를 베풀어 정성을 다해 빌고 축원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볼 때 이봉이 기로소원당의 원장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기로소원당은 1908년(융희 2)에 폐지되었는데, 『松廣寺誌』에는 土匪의 봉기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전한다. 1957년 10월 성수전 앞에 있던 관음전이 퇴락해 훼철할 때에 관세음보살을 성수전으로 이안하고 전각 이름을 관음전이라고 하였다.
송광사는 고종의 기로소원당을 설치한 인연으로, 고종이 붕어한 지 100일째 되는 날에 百齋를 설행해 고종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송광사의 주지 금명보정은 천도문을 지어 고종이 환생하여 다시 제왕이 되기를 염원하였고, 생전에 송광사에 심은 3대의 인연과 공덕을 기렸다.
고종의 성수전으로 지어진 건물은 지금까지 송광사에 남아있는데 대웅전 왼쪽에 위치한 관음전이 바로 그곳이다. 원래는 담장과 솟을 대문이 둘러쳐진 유교식 사당 형태로 지어졌으나 현재는 담장이 철거된 채 건물만 남아있다.
Ⅳ. 맺음말
19세기 조선 불교계는 억불시대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크게 늘어난 승역과 잡역은 19세기 삼정의 문란으로 인해 사찰경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막중한 양으로 늘어났고, 전국에 폐사하는 사찰이 속출할 정도로 잡역의 부담은 커져갔다. 그 결과 19세기에 들어 사찰의 수는 줄어든 반면 암자 수는 크게 늘어났다. 이는 寺格을 갖추지 못할 정도로 사찰의 형편이 좋지 못했으며, 사찰들이 전반적으로 영세해졌음을 의미한다.
불교계에서는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큰 절에서는 승려들이 계를 조직해 위급한 상황에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왕실에 줄을 대 원당을 설치함으로써 잡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염불만일회가 크게 늘어났다. 사부대중들이 수백, 수천명씩 모여 보다 나은 내세를 발원하는 염불결사의 유행은 19세기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는 불교의 저변이 훨씬 더 하층민까지 확대되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일반민들이 19세기의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깊이 신앙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상이라 할 수 있다.
교단의 존폐위기 속에서도 불교계 내부에서는 구도를 향한 승려들의 禪氣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19세기를 풍미한 백파와 초의의 삼종선 논쟁은 후학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20세기 초까지 이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다. 또한 사지와 고승 열전 등 사찰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점, 승려와 유학자들의 교유도 더욱 폭넓게 이루어졌다는 점 등도 19세기 불교가 지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간 것은 송광사와 같은 대찰도 마찬가지였다. 송광사는 1803년 육상궁원당이 용흥사로 이전됨에 따라 상당히 힘겨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842년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사찰의 주요 전각들이 모두 불타는 참화까지 겪게 되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송광사의 노승 기봉은 일흔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서울로 올라가 중앙 정부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고, 상좌인 용운으로 하여금 중창불사를 진두지휘케 하였다. 그 결과 14년만에 이전의 가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송광사는 18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세 차례나 왕실원당으로 지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18세기 중반에 숙빈최씨를 위한 육상궁원당으로 지정된 데 이어 19세기말에는 고종과 민비, 순종의 축원당으로 지정되었고, 20세기초에는 기로소원당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연달아 세 번이나 왕실원당이 설치된 것은 송광사가 호남을 대표하는 대찰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세기 불교계의 위기와 송광사 화재로 인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송광사 승려들의 적극적인 유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광사의 19세기는 고군분투의 시간들이었다. 19세기라는 가장 어두운 암흑기를 이겨내기 위해 위로는 왕실과 인연을 맺어 잡역을 탕감받고, 아래로는 대중들에게는 염불을 통해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을 전하며 僧寶寺刹의 전통을 수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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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onggwang Temple(松廣寺) and Buddhism in 19th Century during the Joseon Dynasty
Tak Hyo-Jeong / Academy of Korean Studies
In 18th century, when it generally grew in the area of society, economics and culture, also has grown up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Temples which had been burned out during the two great wars, were restored and bases for Buddhism were expanded.
But Joseon Dynasty in 19th century was caught in a vicious circle that monopolization of power and commercial business caused to breakdown of civil economy and civil riot. It was in 19th century when had been the one of the most difficult time in Buddhism during the Joseon Dynasty. It was not simply caused by political suppression, social and economical absurdity in the Joseon Dynasty was transferred to Buddhism.
In spite of those difficulties, Buddhism in 19th century exerted oneself to keep its livelihood and to promote development of temples. The simplest way to preserve power and economy of celebrated temples was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王室願堂). The Royal Buddhist Shrines were exempted from paying taxes and financially benefited from the royal family. Also were those evaded from public service.
Songgwang Temple(松廣寺) was one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from the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It was burned down in 1842 and reconstructed by chief monk Yongun in Songgwang Temple. In 1902 at the time of King Gojong it was also appointed to the Royal Buddhist Shrines for commemoration of king's good health and longevity. Songgwang Temple had been closely connected with the royal family in the Joseon Dynasty. And it invited actively various kinds of the Royal Buddhist Shrines.
* key-word
Songgwang Temple(松廣寺), Royal Buddhist Shrines(王室願堂), buddh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