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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46
1월25일[성바오로 사도의 회심 측일/연중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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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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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oAV4xqTvUE
[서울대교구 박배원 베드로 신부 집전(중앙동 본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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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 산전수전이었습니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의 부모는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 친히 밝힌 것처럼 그는 소아시아 지역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튀르키에 중남부에 있으며, 지중해에 인접한 천연적 항구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부모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어린 시절부터 유다인으로서의 탄탄한 가정 교육과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부라고 할수 있는 예루살렘에서 자랐습니다.
뿐만아니라 바오로는 엘리트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대스승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들어갑니다. 기록에 따르면 가말리엘은 유다 최고 법정인 산 헤드린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당대 율법교사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로 인해 최초로 ‘라반’ 영예로운 칭호까지 얻었습니다.
이런 조기교육과 엘리트 교육을 차근차근 이수한 바오로였기에, 그는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충실했으며, 온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겼습니다.
이런 바오로에세 한 가지 심기 불편한 소식이 전해집니다. 당시 정통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요 사이비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출몰과 확산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유다인들이 그리로 건너가니, 바오로 입장에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정의감과 종교심으로 충만했던 바오로, 촉망받던 미래 지도자 청년이었던 바오로는 즉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유다 최고 의회에 체포영장까지 발급받아 그리스도인들의 척결을 위한 선봉장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바오로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생긴 낙마 사건입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에 그리스도인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바오로는 즉시 그리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바오로는 갑자기 엄청난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는 말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강렬한 빛으로 인해 그의 눈은 멀어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상황 앞에서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 난감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는 주님께 거듭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꼬박꼬박 응답해주십니다.
그 순간 제가 바오로였다면 엄청난 두려움에 까무라쳤을 것입니다. 아니면 잽싸게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도 바오로 사도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오늘 우리에게도 바오로 사도가 온몸으로 체험했던 절절한 회심, 대대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강렬한 회심과 대대적인 삶의 전환 그 배경에는 끊임없는 기도와 주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끊임없이 주님께 질문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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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9a5AV9Bz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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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기도하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나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2』에 빌과 애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가 네 명을 모으고, 일을 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얻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습니다. 이야기 끝. 열심히 산다고 다 좋은 걸까요? 더 큰 뜻 안에 머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면서 하느님 뜻을 굳건히 따르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는 왜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박해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끈질기게 기도하면 알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하느님 뜻을 알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바오로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어떤 이들은 마음의 평화가 하느님 뜻을 따르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도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확실히 하느님 뜻을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 안에 머물라고 남겨놓은 흔적들입니다.
해리포터는 학대하는 이모, 삼촌, 사촌 더즐리 가족과 함께 사는 평범한 소년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법적 유산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열한 번째 생일에 해리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사냥터지기인 루베우스 해그리드로부터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해그리드는 해리에게 능숙하고 존경받는 마법사였던 그의 부모, 릴리와 제임스 포터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들은 해리가 아직 아기였을 때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해리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만 남기고 이 공격에서 살아남았는데, 이는 그를 마법사 세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호그와트에서 해리는 호그와트에서 수년 동안 부모를 죽인 볼드모트의 도전과 위험에 직면합니다. 이때 그를 돕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모두 해리 포터의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특별히 해리를 싫어하는 듯한 세베루스라는 인물도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해리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볼드모트의 하수인이기는 했지만, 그 사랑이 너무 커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그녀 대신 그녀의 아들인 해피 포터를 지켜주는 이중 첩자였습니다. 그는 볼드모트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해리 포터를 위하는 따듯함을 보여줍니다. 해리포터는 이들의 희생으로 결국 볼드모트를 물리칩니다.
만약 아이가 늑대와 살면서 열심히 살면 어떻게 될까요? 훌륭한 늑대가 됩니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입니다. 공동체에 내가 살아갈 올바른 뜻이 녹아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겨놓은 당신 뜻을 알게 만드신 유물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라고 해서 순교하면 하느님 뜻입니다. 교회에서 순교하지 말라고 해서 순교하지 않으면 그것도 하느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함으로써 하느님 뜻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이고 교회 안에 있으면 하느님 뜻 안에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으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느님 뜻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해리포터의 부모가 남겨놓은 유산들, 곧 부모의 친구들과 부모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그 부모를 따르는 이들 속에 있으며 결국 부모의 뜻을 실현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는 책도 믿을 수 없고 친구도 믿을 수 없고 행복도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만이 그의 길을 밝혀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바오로 사도에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했던 것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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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남자를 키워주는 여자의 덕목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감각이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감각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각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예전에 권투선수 무함마드 알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감각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둘째는 지혜가 있으면 좋다고 합니다. 평강 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의 장군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궁궐에서 배웠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며느리가 들어오면 집안이 잘 된다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재물과 권력을 원하지 않고 지혜를 청하였습니다. 셋째는 용서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합니다. 비록 상대의 실수로 다툼이 있을지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넷째는 음악을 좋아하고, 노래의 가사를 음미할 줄 알면 좋다고 합니다. 감성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편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부부가 같은 감성을 나눌 수 있으면 관계는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다섯째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면 좋습니다. 배우자가 일을 통해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면 지친 어깨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더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여자를 키워주는 남자의 덕목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년 동안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의 덕목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본이지만 신앙 때문에 잘못된 것을 감추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 사도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의 눈으로 기사를 검증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직언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신문 만드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직원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갈등과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덮어주고, 상대방의 장점은 드러내면 좋습니다. 조직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외부의 원인도 있지만 내부의 원인도 크게 작용합니다. 직원들이 서로 도와주고 화목하게 지내면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저는 신문사를 키워주는 직원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고,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는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께 사랑받는 신앙인의 덕목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는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셋째는 이제 나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이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기꺼이 십자가고 지셨습니다. 회개하고, 회개하였음을 삶으로 증거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교회를 키우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는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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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율법학자였다.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의 회심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 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의 회심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회심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박해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다. 그의 회심은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바오로의 회심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룬다.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을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을 지낸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이다.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였다.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부활하신 예수께로부터 온다.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며, 말씀을 우리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으로 나 자신과 모두가 주님 안에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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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한 번의 들음이 바오로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필리피서는 바오로 안에서 어떤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는지 다음과 같이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3,7-9) 예수님을 얻고 싶은 마음, 예수님 안에 있고 싶은 마음, 바오로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진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참된 회심은 ‘들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 우리의 믿음은 영적인 힘을 되찾게 됩니다. 바오로에게 일어난 영적인 변화가 우리 안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얻으려는 열망, 예수님 안에 있으려는 열망과 함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중단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10,17)라는 로마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믿음은 들음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이 중단된 신앙생활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심’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기쁨도 사라져 버리게 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그 힘을 잃어 가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구원을 가져다주는 신앙생활이 짐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신앙생활은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게 될 영적인 표징들을(마르 16,17-18 참조) 체험하게 이끌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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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오로 사도의 회심>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사도 22,3-5)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서에서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여기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말은, 교만이나 위선이 아니라, 실제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도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1,6), 바오로 사도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같은 충실한 신앙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성적인 유대교 신자로서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미리 예언하신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요한 16,2-3)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이고 충성하는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을 모르던 때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을 모르던 때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자기가 모르고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 1,13) 이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바치신 기도에 연결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죄인 줄 ‘모르고’ 한 일이더라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회개와 용서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반면에,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것은 처음부터 회개와 용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가 큽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결실을 맺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서 곧바로 변화되고 사도가 된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은데, 바오로 사도 자신은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라고 증언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갈라 1,15-18)
1)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이 언제 어떻게 실행되는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즉흥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섭리’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곧바로 응답하고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는 시간을 가진 뒤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3년 동안의 일은 전혀 기록에 없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바오로 사도는 회개하고 보속하는 생활을 했을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를 묵상하면서, 사도로서 일할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나타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한 뒤에 교회가 큰 박해를 받게 되었을 때, 아마도 분명히, 초대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그 기도가 응답을 얻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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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마르 15-17절)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다.
그럼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 매일 새로운 신상품이 개발되어 나오고 옛날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웬만한 일로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가 없다. 맥빠진 강론,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듯한 전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을 통해서는 복음 선포가 될 수 없다.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단순한 말만으로 복음을 전할 때는 지나갔다. 그럼 어떻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가?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고 했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기적은 꼭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믿는 이들에게는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믿는 이라면 누구나 이런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는가?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아니 복음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용기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을까? 정말 이런 기적들이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만일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아니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끝 부분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영적 여정을 다 끝마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불리움을 받은 그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한테 직접 교육도 받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앙이 성숙해졌고 마침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서 받은 사명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서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 선포자가 될 수도 없고 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지도 못한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고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만을 따라 다녔다.
그리고 때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절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비록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일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받게 된 것은 그냥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다. 그만한 훈련과 희생, 포기, 교육을 통해서 받게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때로는 예수님한테 꾸중도 듣고 질책도 받고,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복음 선포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아니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먼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 자신이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제자들이 예수님 한테 처음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걸어갔던 영적 여정을 우리도 걸어가야 한다.
영적 여정을 걸어가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 버릴 것은 잘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은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안일하게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켰던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고 내 맘대로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마르코가 제시해준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자들이 걸어갔던 그 길,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켜나갔던 그 방법을 따라 우리의 영적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이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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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베드로 대성전 앞에는 사도 바오로가 칼을 들고 사도 베드로는 열쇠를 들고 서 있는 상이 있습니다. 교회의 대표적인 성전에 두 사도는 교회 역사에서 큰 인물인 것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주님께 대한 성실과 사랑이 남 다릅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 부근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도 바오로 만큼 극과 극을 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한 때는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며 유대교인들 앞에서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주님과 지낸 열 두 제자들 중에 하나는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 살아생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필체와 성경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유대교의 그릇됨을 반박하며 이방인의 사도의 소명을 다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다마스쿠스 부근을 지날 때 눈부신 빛이 사방을 비추는 가운데 그는 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는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질문하지요. 그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도 22,8)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볼 수가 없었는데 그는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주님으로부터 다마스쿠스로 가라는 말씀을 듣지요. 그는 그 도시에 있는 하나니아스를 찾아 갔고 하나니아스는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가서 그에게 안수를 하자 곧 볼 수 있게 됩니다. 사울은 일어나 그에게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주님께서 부활 후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이미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실 뿐 아니라 세례를 또한 받도록 하십니다.
구약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구분이 있다면 회개의 세례이지요. 하나니아스도 사울에게 세례를 줍니다. 사도 베드로도 개종한 사람들에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만도 삼천 명 가량이 된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를 땅으로 엎어지게 했고 눈이 보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낮 사흘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또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열정적이면서도 고집스런 사울을 주님께서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니아스가 교회를 박해하는 사울이 이해되지 않는 인물이기에 주님께 반문의 질문을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니아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우리는 때로 이해되지 않는 이웃, 때로는 그들에게 미움까지도 갖게 되고 지친 나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문을 닫기까지 하며 내 멋대로 그들을 판단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다마스쿠스에서의 행적을 보면 나 자신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때로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고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시기 위해 나를 엎어지게 하고 곤경으로 몰고 가며 나를 눈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괴롭고 슬퍼서 먹고 마시지도 못하는 날들도 있게끔 궂은 날도 주님께서는 마련해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얕다면 ‘하느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지?’라는 질문을 수 없이 합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다면 곰곤해 생각하시는 성모님처럼 ‘이런 일을 통해서 주님께서 무엇을 워하시는 것이지?’라는 질문을 하며 내면을 향한 자성을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순명의 덕을 쌓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고집불통의 나 자신을 얼마나 넘어트리고 눈도 멀게 하실른지요? 남을 내 식대로 판단한 좁아 터진 나 자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 식대로 좋은 것만 골라 하고 귀찮은 것은 은근슬쩍 피하는 만성 기회주의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기를, 그래서 세상 끝까지 복음 선포의 열정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하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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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16,15)
오늘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6,15) 는 주님의 마지막 권고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복음 선포자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를 오늘 아침 성무일도 즈카리야 후렴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박해자였으나 하느님이 선택한 도구가 되었도다.』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열성은 하느님을 향함이 아니라 자신이 그릇되게 믿어 온 신념과 그로 인해 독선에서 나온 열성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사람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그리스도인을 지칭)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던”(사224)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려던 그 열성이 이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열성으로 바뀜이 바로 회심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릇 회심한 사람이며, 그런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회심자인 그리스도인의 원형이며 모델입니다.
그의 회심의 여정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체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체험은 그가 바닥에 쓰러졌을 때,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사22,7~8)라는 대화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둠이 아닌 빛으로, 거짓이 아닌 진리로,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로 말미암아, 사울에서 바오로로 신적新的 거듭남을 통해서 그는 박해자에서 하느님의 사도로 뽑힌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니아스의 입을 통해 바오로의 회심과 소명의 이유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22.14 ~ 15) 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니아스는 단지 바오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무엇보다 하느님의 선택과 파견의 뜻을 수용하기 위해 보고 들음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선택에서 파견을 수용하고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기 이전에, 무엇보다 먼저 사울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선택하셨다, 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흔히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받기 위해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 17) 그렇습니다. 사울이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울을 선택했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에 감사하면서 바오로가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역시도 유대인의 고정 관념처럼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응답으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이렇게 담담하게 권고합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22,16)
이렇게 자신을 선택한 놀라운 은총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선택하시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22,15)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실행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견 선포의 핵심입니다. 다만, 파견을 위한 준비 기간, 곧 숙성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맛 들여야 합니다. 마침내 바오로는 그렇게 그 기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맛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탁월한 선택은 훗날 사도 바오로의 생애를 통한 복음 선포 여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가 분명 하느님의 훌륭한 도구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다마스쿠스 여정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 체험으로 바오로는 “이롭던 것들을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기며”(필3,7~9참조) 온 세상을 다니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는 박해자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온전한 회심의 삶으로 우리도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영성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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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말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말은 긍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을까요? 7:3의 비율로 부정적인 감정어가 더 많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더군요.
부정적인 감정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비판은 두고두고 생각나는데, 어떤 이의 칭찬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나를 향한 화가 난 얼굴은 지워지지 않지만, 나를 향한 미소 짓는 얼굴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액수가 똑같아도 이익의 기쁨보다 손실의 고통을 더 크게 느끼는 우리입니다.
부정적 편향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긍정적 편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심리 법칙인 ‘4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나쁜 일 한 가지의 강한 영향력을 상쇄하려면 좋은 일 4가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와 다투었다면 다정한 대화를 네 번은 해야 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이 법칙을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했으면 몇 번이나 상대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잘해야 할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최하 네 번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을 갖고서 관계 회복을 아예 포기하면서 거리 두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용서해 주십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려고 하십니다. 거리 두는 관계로는 그 사람하고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관계도 안 좋아집니다.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정적 편향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셔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하셔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런 체험이 바오로를 변화시켰습니다. 부정적 편향에서 벗어나, 이제 긍정적 편향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나요? 주님과는 거리 두는 관계가 아니라, 친근하고 밀접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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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라, 그리고 되어라>
사도행전 22,3-16 (자신을 변호하다.)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마르코 16,15-18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가라, 그리고 되어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나의 벗이여
가만히 있지 말고
가라 기꺼이 가라
나의 벗이여
결코 멈추지 말고
가라 힘차게 가라
나의 벗이여
잊힌 이에게 가라
그리고 사랑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슬픈 이에게 가라
그리고 기쁨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움츠린 이에게 가라
그리고 희망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배고픈 이에게 가라
그리고 밥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어두운 이에게 가라
그리고 빛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살맛잃은 이에게 가라
그리고 소금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외로운 이에게 가라
그리고 곁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지친 이에게 가라
그리고 힘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묶인 이에게 가라
그리고 해방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쓰러진 이에게 가라
그리고 살림이 되어라
나의 벗이여
가만히 있지 말고
가라 기꺼이 가라
나의 벗이여
결코 멈추지 말고
가라 힘차게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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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심은 삶의 방향전환>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박해하였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언하는 마지막 삶을 봉헌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난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실수하고 잘못하며 죄를 짓게 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나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합니다. 혹 바른길을 걷고 있지 못하다면 서둘러 방향을 바꾸기를 바랍니다.
‘일기일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이므로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입니다. 따라서 헛된 것에 마음 쓰지 않고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회심은 방향 전환입니다. 단순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이 따르는 삶의 변화를 꾀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실한 삶의 방향을 바꾸었듯이 우리의 삶도 주님의 눈에 들도록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뒤로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돌아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하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활동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하고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주님의 소명을 확신한다면 몸을 희생하더라도 또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에 거침이 없습니다.
적극적인 전교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행동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주님을 전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였다.(1코린 9,23)고 고백한 바오로 사도와 함께 복음 선포의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율법 안에 있으면서도,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1코린 9,23-22)
그야말로 눈높이에 맞추어 접근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방법으로 더 분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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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심의 여정>
-안으로는 회심의 제자, 밖으로는 선교의 사도 -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오늘로서 1.18일부터 시작한 일치주간도 끝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에서 공히 참 좋아하는 성인이 바오로 사도,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제가 프란치스코 세례명을 갖게 된 것도 예전 개종하기전 개신교에서 유일하게 알았던 성인이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분들의 특징은 전격적 회심의 사건일 것입니다. 이중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정말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극적입니다.
바오로의 극적인 회심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보면 주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얼마나 인내하며 기다렸는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주님은 당신 사람으로 점찍어 놓은 사람은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성 스테파노의 거룩한 순교 장면을 시종일관 겪었던 사울이었으며 아마 주님은 이후로도 결정적인 계기를 기다렸던 듯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목하셨던 것은 바오로 사도의 한결같은 불같은 열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22장은 바오로 사도의 일장 연설중 자기의 전 회심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가 얼마나 신자들의 박해에 극성스러웠는지 바로 그때에 주님이 개입하셨음을 고백합니다.
바오로의 회심에 앞서 주님과의 극적 만남의 장면이 너무 생생합니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바오로 사도를 비추자 그는 바닥에 엎어졌고 이어지는 주님의 개입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
이 장면은 늘 읽어도 새롭고 신바람이 납니다. 주님은 바오로가 박해하는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새삼 주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행위는 그대로 주님께 하는 행위임을 깨닫습니다. 믿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마태복음 후반부 최후심판(마태25,31-46) 이야기중 다음 대목을 연상케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아마도 바오로 사도를 회심으로 이끈 이 생생한 주님과의 만남을 바오로 사도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아마도 바오로 사도의 지칠줄 모르는 불덩이 같은 선교열정의 원동력이 되었을 체험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주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종들을 다정히 부를 때를 연상케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모세야, 모세야!” 얼마전의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을 때,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답하던 사무엘의 모습도 연상됩니다.
당신의 때가 되자 주님은 전광석화, 일사불란하게 바오로를 사로잡으니 바오로는 완전히 주님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주님은 이미 예비한 당신의 사람 하나니아스가 주변을 대변하여 주님의 뜻을 전합니다.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당신이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나 회심과 더불어 눈을 뜨니 이젠 예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주변은 그대로 이나 보는 내적 눈은 완전히 바뀌어졌을 사울입니다. 이제 주님의 증인으로서 새로운 선교사명이 사울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불이 되어 곳곳에 마침내 로마에까지 복음의 불을 붙이니 활활 타오르는 복음의 불은 미구에 전 유럽을 타오르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 바오로의 눈부신 전교활동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말그대로 오늘 다음 복음 말씀 처럼 사명을 수행한 바오로 사도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무슨 복음입니까?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모두가 이런 주님과 일치되어 무지와 허무의 노예살이 어둠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감이 복음 선포의 궁극 목표입니다.
생명이요 빛이요 길이요 희망이요 진리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니, 이런 파스카 예수님 아닌 복음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산불처럼 번지는 복음의 불, 사랑의 불, 말씀의 불,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불이요, 지금도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선교의 불, 복음의 불입니다.
주님께 만약의 가정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바오로가 없었다면? 부질없는 질문이요 이미 주님께서 예비한 당신 복음의 일꾼 바오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 섭리의 “필연”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저는 다시 산대도 이렇게 뿐이 못살 것 같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아갈 복음 선포의 장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과 더불어 깊이 성찰해야 할 우리의 회심의 여정입니다. 바오로의 결정적 회심으로 회심은 끝났을까요?
분명히 확신하건데 아닐 것입니다. 순교의 그날까지 계속되었을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똑같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첫 순교자처럼 생각되는 정훈만 세례자 요한 수사가 떠난지도 11년째요, 그가 만들어 정자에 붙여놓은 “回心亭(회심정)” 명패는 여전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계속될 주님과 만남의 여정, 회심의 여정, 친교의 여정, 성화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우리 삶의 여정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일년사계(一年四季)로 내 삶을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와 있으며,ㅠ어느 정도의 성덕(聖德)에 도달해 있는지 가늠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과 함께하는 선교의 여정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본질적 사명입니다. 선교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안으로는 주님과 회심의 “친교”,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선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바, 친교와 선교, 수렴과 확산의 리듬에 따라 날로 복음화되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열매, 회심의 열매, 친교의 열매를 세상과 나누라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끝으로 우리 정주 요셉수도원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수도원 자체가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장이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로,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로 사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끊임없이 거행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에서의 환대를 통한 섬김과 나눔의 선교, 저는 바로 이것을 존재론적 복음선포의 선교라 부릅니다. 이를 요약한 고백시를 나눕니다. 회심의 친교 열매는 환대의 선교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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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1)바닥 영성>
바오로의 회심은 바닥으로 엎어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서 있다가 바닥으로 엎어지는 것, 높은 곳에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이것이 회심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기고만장한 사람은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으면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닥이란 실패로 치면 한두 번의 실패가 아니라 거듭된 실패요, 내려가다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곳까지 내려감을 뜻합니다.
그런데 바닥까지 내려감은 더 이상 내려갈 것은 없고, 이제 잘만 하면 올라가는 것만 남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한 곧 주저앉아버린 사람은 올라가지 않고, 빛 곧 희망을 본 사람만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두 번째 단계는 빛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빛을 보기 전에 그리고 빛을 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뒤집기입니다. 주저앉은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되지만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안 됩니다.
엎어진 상태로 계속 있지 않고 뒤집어야 하늘을 보고, 바닥에서 빛을 보게 되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도 엎어지며 큰 빛을 봅니다.
아니 실은 큰 빛을 보기 전에 큰 빛에 의해 쓰러지고 그런 다음 큰 빛에 의해 일어서고 올라갈 것입니다.
여기서 큰 빛이란 하느님한테 한 대 크게 얻어맞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지금 바닥에 엎어진 것이 실은 내 실수나 인간의 딴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한테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임을 크게 깨닫는 겁니다.
갑자기 큰 빛을 보게 되면 일시적으로 눈이 부시고 멀게 되듯 큰 빛은 먼저 우리 눈을 멀게도 하지만 보게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빛은 세상 것을 보게 하지만 큰 빛은 세상 것을 보는 눈을 멀게 한 다음 하늘을 보게 합니다.
그러니까 순서에 따라 회개의 단계를 정리하면
-엎어져 바닥까지 내려가기
-바닥에서 뒤집기
-바닥에서 희미하게 하늘을 보기
-엎어진 것도, 눈이 먼 것도 큰 빛에 의한 것임을 크게 깨닫기(바오로 경우, 눈에서 비늘이 떨어짐)
-이제 큰 빛과 새로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땅에서 살기
이런 회개의 상태를 오늘 독서는 하나니아의 입을 통해 전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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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방황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고 세속에 맛들여 살다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사람이 된 프란치스코 성인과도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열렬히 믿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서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이며 그리스도교 파괴자에서 전파자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의심하고 율법은 단죄하고 율법은 구속하고 율법은 억압하고 율법은 그래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믿고 사랑은 용서하고 사랑은 풀어주고 사랑은 부축하고 사랑은 그래서 사람을 살게 합니다. 자신도 살고 남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우리, 우리도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 바뀌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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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이방인의 사도!>
오늘 복음(마르16,15-18)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5-16)
오늘은 '이방인의 사도인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밖인 이방인 지역의 복음을 전하기 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박해자였습니다. 그는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은 유다 사람이었고,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섬기는 유다교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박해가 시작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이방인 지역으로 피해갔습니다. 박해자 사울(바오로)은 그들을 잡아오려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갔다가,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사도 22,7.8.10)
바오로는 하느님의 사람인 하나니아스의 도움을 받아, 완전하게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박해자에서'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우리도 '회심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어봅시다!
그러려면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 합니다. 이 도움은 '단순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믿음은 '말씀을 듣는 들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시 시작해 봅시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힘으로 일본 성지순례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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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icp5FGmC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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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매서운 날씨입니다.
세월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어도
눈부시게 빛나는 것은
회심의 가치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마음이 회심으로
전달됩니다.
마음을 잃은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시 찾는
길을 보여줍니다.
회심의 길은
우리모두가
걸어가야 할
빛의 길입니다.
회심으로
닫힌 눈과 귀가
열려 온전한 그리스도를
만나게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출구는
언제나 회심이었습니다.
회심으로
바오로 사도는
폭력과 거짓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제대로 보게됩니다.
맑고 생생한
삶이 무언지를
깨닫게 됩니다.
평생을
주님 뜻안에서
살게됩니다.
복음안에서
우리 마음을
바꾸는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변함없었던 세상에
사도 바오로의 회심은
우리를 다시 변화시키는
새로운 시도가 됩니다.
계속되어야 할
회심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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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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