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12월09일(토요일)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영주시 (부석사+소수서원)] 탐방일정 회비 45,000원, 11월16일 2호차 27번 좌석 예약
탐방지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위치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춘양로 1501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총면적 5,179ha의 동양 최대의 수목원이자, 남아공의 국립한탐식물원에 이은 전세계 두번째 규모의 수목원으로서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생물자원의 체계적인 보전 및 활용기반 구축을 위해 특화된 수목원으로 현재 위치하고 있는 봉화군 향토생물자원의 산업화 연구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위치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 온난화로 인해 점차 점유율이 줄어가고 있는 국내외 고산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고산식물을 수집하여 현재 희귀식물 313종, 특산식물 164종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시드볼트(Seed Vault)에 이어 단 2개뿐인 종자영구저장시설이자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를 보유, 운전하고 있다. 또 고산지역 희귀식물들만을 위한 알프스하우스 3동을 만들어 재배·전시하며 일반인들에게 고산식물만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축구장 6개 규모인 3.8ha 크기의 호랑이숲을 만들어 백두산호랑이를 넓은 자연환경에서 사육하면서 백두산호랑이 종의 보존과 함께 이곳 수목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의 호랑이가 아닌 자연에서 뛰노는 호랑이를 보는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더불어 지역을 대표하는 봉자페스티벌을 통해 지역 농가소득의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고, 산림자원의 유용물질을 산업화 기술로 민간에 이전해 건강식품류, 화장품 등의 신제품을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1,400km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자생식물 33%가 서식하고 있는 중요 생태축이다. 그 중 특산식물 27%, 희귀식물 17%가 백두대간에 자생한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시켜 대자연과 인간의 풍요로운 상생을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용안내 개장일 : 2018년 5월 3일 이용시간 : 하절기(3~10월) 관람시간 09:00~18:00 (17:00 입장마감), 동절기(11~2월) 관람시간 09:00~17:00 (16:00 입장마감) 호랑이숲은 17:00까지 운영(이동소요시간 도보30분) 쉬는날 :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당일 주차시설 : 일반주차 446대, 대형주차 15대, 장애인주차 10대 유모차대여여부 : 가능 애완동물가능여부 : 불가 문의및안내 : 054-679-1000 관련 홈페이지 : http://www.bdna.or.kr/ 상세정보 입 장 료 [기본] 어른 5,000원 / 청소년 4,000원 / 어린이 3,000원 [단체 20인이상] 어른 4,000원 / 청소년 3,000원 / 어린이 2,000원 [무료] 만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장애인·국가유공자 등 ] 탐방코스: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매표소~정원 구역~에코로드 전망대~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알파인 하우스~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식물원 구역~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매표소 ]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50분 소요) 07:00~10:30 “좋은사람들” 버스로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485 번지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이동 (213km) [3시간30분 소요] 10:30~10:35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매표소에서 탐방 출발하여 정원 구역으로 이동 10:35~10:50 정원 구역을 탐방 10:50~11:00 에코로드 전망대로 이동 11:00~11:05 사진촬영 11:05~11:10 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로 이동 [축구장 6개 규모인 3.8ha 크기의 호랑이숲을 만들어 백두산 호랑이를 넓은 자연환경에서 사육하면서 백두산 호랑이 종의 보존과 함께 이곳 수목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의 호랑이가 아닌 자연에서 뛰노는 호랑이 6마리를 보는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11:10~11:15 사진촬영 11:15~11:20 알파인 하우스로 이동 [고산지역 희귀식물들만을 위한 알프스하우스 3동을 만들어 재배·전시하며 일반인들에게 고산식물만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희말라야, 알프스, 지중해, 북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대표적인 세계고산식물들이 베테랑 산림직원들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11:20~11:25 사진촬영 11:25~11:30 세계에서 단 2개뿐인 종자영구저장시설이자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로 이동 [백두대간수목원에 조성된 시드볼트는 기후변화에 대비한 야생식물 종자 영구저장 공간이다.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시드볼트에 이어 단 두 곳뿐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안정적이고 과학적인 종자 연구가 가능한 시드뱅크(Seed Bank)와 시드볼트(Seed Vault)를 모두 보유한 국내 유일의 기관이기도 하다. 시드뱅크는 연구나 증식 등의 활용을 목적으로 종자를 중·단기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고, 시드볼트는 전 지구적 재난·재해 등에 대비해 식물 멸종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종자를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다.] 11:30~11:35 사진촬영 11:35~11:55 식물원 구역으로 이동 11:55~12:05 식물원 구역을 탐방 12:05~12:20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2:20~13:00 점심식사 후 “좋은사람들” 버스에 승차 13:00~13:40 “좋은사람들” 버스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출발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번지에 있는 부석사로 이동 (21km) [40분 소요]
탐방지 : 부석사 [부석사(浮石寺) 요약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절. 종파 : 해동 화엄종 창건시기 : 676년 (신라 문무왕 16) 창건자 : 의상조사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圓融國師)가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개연(改椽)을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국보 18)·조사당(국보 19)·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45)·조사당 벽화(국보 46)·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등의 국보와 3층석탑·석조여래좌상·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의 보물, 원융국사비·불사리탑 등의 지방문화재를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취현암(醉玄庵)·범종루(梵鐘樓)·안양문(安養門)·응향각(凝香閣)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또 신라 때부터 쌓은 것으로 믿어지는 대석단(大石壇)이 있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에서 10대덕(十大德)이라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모두 화엄을 현양(顯揚)시킨 승려들이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宋高僧傳)》에 그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및 신림(神琳) 등도 의상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의상 이후의 부석사와 관계된 고승으로는 혜철국사(惠哲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징효대사(澄曉大師)·원융국사·원응국사 등이 그 법통을 이었다. 부석사 입장요금은 어른 2천원, 중고등학생 2천원, 초등학생 1천원이다.] 탐방코스: [부석사 매표소~일주문~천왕문~지장전~관음전~범종루~범종각~선열당~응향각~장경각~안양루~선묘각~무량수전 동쪽의 삼층석탑(보물 제249호)~무량수전(국보 제18호)&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삼성각~부석~자인당~응진전~단하각~조사당(국보 제19호)~취현암~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壁畵)를 소장하고 있는 부석사 박물관~부석사 매표소]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40분 소요) 13:40~13:50 부석사 매표소에서 탐방 출발하여 [일주문~천왕문~지장전~관음전]의 동선을 거쳐서 범종루로 이동 13:50~14:00 범종루와 범종각을 관람 14:00~14:20 [선열당~응향각~장경각~안양루~선묘각~삼층석탑]의 동선을 거쳐서 무량수전으로 이동 [부석사의 범종루를 지나면 나오는 마당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희귀한 광경을 접할 수 있다. 누각 속에 부처님 여섯 분이 보인다. 실제 부처가 아닌 건물의 빈 틈이 그 뒷 건물인 무량수전의 벽과 어우러져 햇볕이 만들어낸 부처 즉, ‘공포불’이다. 그 틈이 6개가 되다 보니 6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있는 착시현상이다. 근래 부석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햇빛이 강한 여름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인다.] 14:20~14:3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을 관람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의 의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징하는 무한한 광명(無量光; Amitãbha)과 영원한 생명 즉, 무량수(無量壽; Amitãyus)에서 온 것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과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국보 제45호)은 높이는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 찬란하여 매우 정교한 솜씨로 지어졌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은 1962년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14:30~14:50 [삼성각~부석~자인당~응진전~단하각]의 동선을 거쳐서 조사당으로 이동 14:50~15:00 조사당과 조사당 처마 밑의 골담초(骨擔草)와 조사당 옆의 취현암을 관람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은 대한민국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로서 내부에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스님의 상(像)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벽면에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린 6폭의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가 있었다. 이 벽화들은 무량수전 안에서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가 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는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ㆍ1575~1641) 시절 영남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 탐을 냈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선비화가 ‘옥’에 갇힌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보호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 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되어줬을 뿐이다. 1300여년을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오시는 날엔 개나리처럼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놀랍다.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 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7세기, 의상대사는 열반 직전 자신이 거처하던 부석사 조사당 처마에 중국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느니라”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말 그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아왔을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에 기대니 /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부석사를 찾은 퇴계 선생도 이 작은 꽃나무를 두고 감탄한 나머지 찬양한 시 ‘선비화(禪扉花)’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그 때도 지금 처럼 비와 이슬 한 방울 없이 스스로 물이 생겨 살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정말 물 한 방울 없이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또 천년 넘은 나무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한 대학교수의 분석에 귀 기울여보면 의문점이 좀 풀리려나. 이 선비화는 줄기가 계속 굵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죽고 새 줄기가 다시 나와 세대교체를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여러 해 살이 풀과 같은 나무다. 그래서일까, 학명도 골담초(骨擔草)다. 나무인데 ‘풀 초(草)’자가 들어간다. 그럼 물 한 방울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 곳에 있다. 원래 건조한 땅에 강한 나무라고 하지만 물 한 방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뿌리를 길게 뻗게 했고 마침내 먼 곳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악조건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긴 뿌리를 뻗은 것은 마치 기린의 목이 긴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이 의문점을 풀어주긴 했지만 신비로움까지 다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무량수전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오솔길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처마에 있다.] 15:00~15:10 부석사 박물관으로 이동 15:10~15:15 부석사 박물관에서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壁畵)를 관람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 壁畵)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조사당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벽화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부석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5:15~15:20 부석사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5:20~15:40 “좋은사람들” 버스로 부석사를 출발하여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번지에 있는 소수서원으로 이동 (13.7km) [20분 소요]
탐방지 : 소수서원 [영주 소수서원 (榮州 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1963년 국보로 지정된 안향 초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981년 보물로 지정된 주세붕 초상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수서원 입장요금은 어른 2천원, 중고등학생 1,330원, 초등학생 660원이다.] 탐방코스: [소수서원 매표소~숙수사지 당간지주~성생단~경렴정~강학당~지락재~학구재~일신재~장서각~문성공묘~전사청~영정각~사료관~고직사~충효교육관~탁청지~광풍정~소수박물관~취한대~소수서원 매표소]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 소요) 15:40~15:50 소수서원 매표소에서 탐방 출발하여 [숙수사지 당간지주~성생단~경렴정]의 동선을 거쳐서 강학당으로 이동 15:50~16:00 [지락재~학구재~일신재]의 동선을 거쳐서 장서각으로 이동 16:00~16:10 [문성공묘~전사청~영정각~사료관~고직사~충효교육관]의 동선을 거쳐서 탁청지로 이동 16:10~16:15 사진촬영 16:15~16:20 광풍정을 지나서 소수박물관으로 이동 16:20~16:25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安珦 肖像)을 관람 [안향 초상(安珦 肖像) 요약 : 고려 후기의 명신 안향(安珦)의 영정.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소수박물관 (내죽1리) 크기 : 세로 37cm, 가로 29cm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1318년(충숙왕 5) 제작되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이제현 초상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한국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충숙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반신상(半身像)이며 30도 각도의 좌측상이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 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본시 순흥향교(順興鄕校)에 안치해 오다가 1457년(세조 3)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역모사건을 일으킨 후 부(府)가 폐지되자 한양(漢陽)의 안씨종가(安氏宗家)에 옮겨졌다가 소수서원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안향(安珦) 개설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인 안향(安珦)[1243~1306]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안향의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안유(安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훗날 이름을 ‘안향’으로 고쳤지만, 조선의 5대 임금 문종과 휘가 같아 조선시대 저서에는 ‘안유’로 기록되어 있다. ‘회헌’이란 호는 송나라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안자미(安子美), 할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증직된 안영유(安永儒)[1201~?], 아버지는 주리(州吏)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른 안부(安孚)[1220~?], 어머니는 예빈승(禮賓承)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안향의 첫 번째 부인은 우사간(右司諫) 김녹연(金祿延)의 딸 한남김씨(漢南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염수장(廉守藏)의 딸 서원염씨(瑞原廉氏)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낸 안우기(安于器)[1265~1329]가 아들이다. 사위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지낸 문욱(文頊),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허수(許绥), 통문서록사(通文署錄事)를 지낸 박제(朴璾),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한수연(韓守延),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1319]이다. 활동 사항 안향은 1243년(고종 30) 흥주(興州) 평리촌(坪里村)[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으로 승진해 내시원에 소속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원종이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1271년(원종 12) 서도(西道)에 파견되었는데, 청렴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내시원에 재직하면서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임금께 보고해 혁파하였으며, 1272년 감찰어사로 승진하였다. 안향은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백성들을 현혹하고 다니던 무당들이 오자, 무당들을 엄격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경상도안렴사가 고과 평정에서 안향을 표창하였고, 곧 판도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277년 판도좌랑, 1278년 전중시사를 거쳐 1279년 독로화(禿魯花)[뚤루게]에 선발되어 국자사업으로 승진하였다. 1279년 3월 대방공(帶方公) 징(瀓)을 따라 원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우사의대부를 거쳐, 1288년(충렬왕 14)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288년 9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89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원외랑에 임명되었고, 곧 낭중에 올랐다. 1289년 11월 원나라에 가는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세자를 수종하였는데, 1290년 귀국할 때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292년 충렬왕이 질환이 있자 안향의 집에 머물렀으며, 1293년에는 제국대장공주가 안향의 집에 머물렀다. 1293년 원나라 세조가 충렬왕에게 추충선력정원(推忠宣力定遠)의 공신호를 내렸는데, 안향이 시를 지어 하례하자 미(米) 50석을 하사하였다. 1294년(충렬왕 20) 부지밀직사사로 동남도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하였으며, 합포에서 안향은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294년 지공거로 동지공거 민지(閔漬)[1248~1326]와 함께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 1297년 첨의참리세자이보에 각각 임명되었다. 안향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적대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으로 임명되었다. 8월 충선왕과 계국공주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하였다. 1299년 충렬왕이 복위한 뒤 수국사로 승진하였다. 1300년(충렬왕 26)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은 오기(吳祁)[1259~1336], 석천보(石天補) 등의 무고를 당하였다. 이때 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으나, 곧 찬성사로 복직하였다. 1301년 국자감이 수차례의 병화로 허물어지자,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서부 양온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토지와 남녀 노비 각 100명을 국자감에 귀속시켰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관료들에게 차등 있게 은과 포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섬학전(贍學錢)으로 삼자고 양부(兩部)에 건의하였다. 안향은 1303년(충렬왕 29) 국학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 문묘 제기, 악기, 6경 및 제자사서(諸子史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이산(李imagefont), 이진(李瑱)[1244~1321]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로 삼았다. 이때 금내학관(禁內學館), 내시(內侍),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의 관리, 그리고 7관(七管), 12도(十二徒)의 생도 중 경서 수업을 받은 자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향은 1303년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고, 1304년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안향의 사적(事蹟)을 모은 『회헌실기(晦軒實記)』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첫 번째는 1763년(영조 39) 안향의 17대손 안극권(安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 세계비지(世系碑誌),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을 ‘도동본실기(道東本實記)’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1816년(순조 16) 안재묵(安在默) 등이 증보한 것으로,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되었다. 세 번째는 안명렬(安明烈) 등이 1883~1884년 사이에 간행한 것인데,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記)’라고 한다. 네 번째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으로 이를 ‘연산본실기’라고 부른다. 실기는 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안향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에 있는데, 안향 사후에 충렬왕이 내린 장지이다. 상훈과 추모 안향이 1306년(충렬왕 32)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를 치를 때 7관과 12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고 한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원나라 화공에게 안향의 영정을 제작하게 하여, 문묘에 봉안하였다. 훗날 흥주의 수령 최림(崔琳)이 이 영정을 모사하여 흥주향교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 초상이다. 1319년 조정에서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안향의 문생 신천(辛蕆)[?~1339]이 힘껏 주청하여 종사가 이루어졌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안향을 제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백운동서원은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게 된다. 1643년(인조 21)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56년(효종 7)에는 14세손 안응창(安應昌)[1603~1680]이 안향의 출생지인 지금의 순흥면 석교리에 영주 안향 향려비(榮州安珦鄕閭碑)[문화재자료 제611호]를 세웠다. 1676년(숙종 2)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도동묘(道東廟)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1781년(정조 5) 경기도 개성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신위를 봉안한 안자묘(安子廟)는 원래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다시 옮겼다.] 16:25~16:30 취한대로 이동 16:30~16:35 사진촬영 16:35~16:40 소수서원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6:40~19:40 “좋은사람들” 버스로 소수서원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3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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