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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의무가 왜 필요할까? 왜 지금?
오늘날 사회적 의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긴급하게 제기되고 있다. 내가 지난 10여 년간 분배정치라고 부르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분배정치 란 간단하다. 누가 무엇을, 왜 가져야 하는가라는 정치적 질문이다. 이 기본적인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분배(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재화나 가치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와 의무의 문제(특정한 분배방식이 구속력을 갖게 되는 함의와 이러한 함의가 실제로 구속력을 갖게 되는 이유)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이제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왜 특정한 사람들이 분배를 받거나 받으면 안 되는 지, 그 이유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지탱해왔던 두 가지 주요한 기둥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노동과 시민권이라는 두 기둥으로는 이제 더는 이러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나의 전문 연구 분야인 남아프리카는 물론이고, 남반구를 비롯한 그 밖의 많은 지역에서 엄청난 인구가 분배문제를 다루고 법제화하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배제되어 있다. 노동에 기반을 둔 분배요구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실업과 불완전 취업 상태에 있는 인구는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불안정한 이른바 ‘비공식’ 생계가 급속하게 증가함에 따라, 안정적인 정규 영역의 노동력을 통한 점진적인 통합(이에 관해서는 내가 타냐 리Tania Li와 함께 ‘적절한 일자리’의 세계에 관해 토론한 적이 있다)이라는 전 세계적으로 공인된 과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그와 함께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닌, 일반적으로는 시민권이라는 토대를 기반으로 ‘사회적’ 분배 (연금, 장애수당, 실업보험 등의 ‘복지제도’)를 제공하고 있지만, 그러한 분배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거기서 멀어지고 있다.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인구가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면서 일터나 거주지에서 시민권에 기반을 둔 사회보호장치에서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분배정책들은, 지금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분배요구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요구는 노동이나 시민권에 기반을 두지 않은 (넓은 의미의) ‘소유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소유권을 ‘현존’이라고 부른다. 조금은 수수께끼 같기도 한 이 단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일단 기존의 노동과 시민권에 기초한 분배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 최근 들어 문제가 제기된 과정을 짚어 보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우선 노동의 측면부터 살펴보자. 경제를 성장시켜 ‘개발’이라는 과정을 완료하면 정규직이든 비정규적이든 고용이라는 형태가 보편화될 것이라는 일종의 공감대가 전 세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현대 사회는 일자리와 고용된 사람으로 형성되리라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너무나도 자주 배신당해왔지만, 여전히 전 세계의 정치가들이 일자리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모두가 일자리를 갖는 약속된 세상의 뒷면을 보지 못해 헛고생하는 것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적절한 일자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개발’이 도달해야 하는 최종 목표 혹은 기준이 되어왔다. 그러면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개발’을 저해하고 방해하는 부류로 여기며 백안시해왔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이른바 불안정성에 대한 논의가 논의가 종종 고용 이외의 범주(실업, 지하경제, 비공식 고용, 불안정한 사회, 사회불안 등)에 대한 분석에 의존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일자리’라는 세상의 밖은 모두 부정적인 공간으로 규정된다.
‘선진국’이라는 개념에는 임금노동이 모든 사람의 안정적인 생계, 사회적 통합과 편입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산업화되지 않은 농촌 지역에서 생계를 떠난 사람들은 ‘일자리’만 구화면 근대화된 사회질서에 잘 적응해 그 일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뭘 할 건데?”하는 질문에 흔하지만 매력적인 답변은 ‘일자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과 가족이라는 성적 역할 구분에 대한 통념, 시간과 공간의 구성, 정규 교육의 역할, 존경심과 미덕, 국가에 대한 공헌, 이 모든 것이 ‘적절한 일자리’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었다.
보편성이라는 우리의 상상이 점차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고 있는 오늘날, 한때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상황이 명확하게, 그리고 낯설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의 지적은 기억해둘 만하다. 그는 전체 인구 중 극히 일부인 안정적인 도시 노동 계급의 생활방식이 순식간에(어찌 되었든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듯) 모두의 미래로 제시되어버렸다고 말하면서 20세기를 ‘노동자의 세기 the century of laboring man’ 로 회상한다.
스탠딩이 주장하듯, ‘노동자의 세기’가 종말을 맞이했다면, 그 이유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 임금노동자가 사라진 탓이 아니라, 지구적 성장과정에서 더는 임금노동을 보편적인 해결책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급망과 노동시장이 세계화되면서 노동 계급의 조직력이 약해지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재정 긴축 탓에 구조적인 실업과 비정규직화가 지속되고 있으며, 최근의 기술발전이 임금노동의 전 분야를 대체하거나 대폭 축소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오랜 기간 이어져왔던 전환 논리는 이제 설득력이 없다.
일자리가 사회경제적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러한 우려는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더는 안정적인 임금노동(예전에는 한동안 ‘적정한 일자리’로 간주되었다)으로 살아갈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인구의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는 전체 인구가 자본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잉여’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고도의 ‘구조적 실업’ 상태에 놓여 있는 가난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선진국에서도 생산직이 줄어들고 경제 또한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탓에 마이클 데닝Michael Denning이 언급한 ‘무임금 생활자wageless life’의 비율이 올라가고 있다.
한편, 경제적 영역에서 ‘적절한 일자리’가 제공하는 안정성과 유사한 안전장치를 정치적 영역에서는 국민국가라는 형태로 제공해왔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법적으로 인정한 정치적 성원권 political membership에 따라 일련의 명백하고 보편적인 권리와 의무가 보장되어왔다. 그리고 이 또한 분배정치의 핵심 질문, ‘누가, 왜 무엇을 받는가?’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노동’의 관점에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로 비쳤다면, 일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대가를 받지 않는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 노인(종종 가임기 여성도 포함)들은 ‘노동자’, ‘가계 부양자’, ‘가장’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합법적인 ‘피부양자’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장애나 예측할 수 없는 경기변동에 따른 실업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국민국가는 종종 ‘복지국가’라는 형태로 직접적인 분배자 역할을 했다. ‘복지국가’는 ‘사회안전망’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사회적 지원 형태로 또 다른 합법적 의존성을 제공해왔다. 분배 결과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가장 순수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지원은 내가 정의한 분배정치의 두 기반에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첫째는 일반적으로 노동자가 아닌 ‘피부양자’(어린이, 고령자, 장애인, 가임기 여성 등)에게 제공된다는 점이다. 노동자(‘부양자’, ‘신체가 멀쩡한 노동자’)와는 완벽한 대척점이다. 둘째는 사회적 지원이 거의 언제나 국가에 소속된 집단 내의 시민권자로 한정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정책은 타협의 여지 없이 국민국가의 성원권과 결합된 상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다. 이미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쪽으로 상황이 바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 이유로 국가 수준을 벗어나는 분배의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전 세계적인 기본소득 같은 글로벌 수준의 재분배 프로그램이라는 이상은 추진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노동과 시민권에 기반을 둔 분배방식을 승인하고 법제화해왔던 예전 방식이 더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의무에 대한 인식을 시급하게 바꿔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인구가 기존의 방식에 기반을 두거나 국가의 시민권에 기반을 두거나 간에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ㅣ때문이다. 이젠 농부가 아니기에 땅을 경작해서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거나, 일할 형편이 되지 않아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전작에서 언급한 ‘분배생계distributive livelihoods’(노동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의 수입에 기대는 생계)에 의존하는 도시인구가 증가하면서 노동에 기반을 둔 체계가 무너지는 데 일조하고 있다.
국가 프레임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는 임금노동과는 무관하게 사회보장제도 등 시민권에 기반을 둔 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 남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서든 불법 체류자로 낙인찍힌 비합법적 이민자들이 빈민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음에도 정치적, 분배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는 분배할당 시스템의 국가 간 간극을 볼 때, 나는 노동과 시민권 이외의 어떠한 기반이 새로운 종류의 분배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제도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사회적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재구성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누가 무엇을 갖는가? 왜?’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여기서 나는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두 영역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는 내가 ‘소유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현존’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에세이의 주제이기도 하다.
내 책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주장한 ‘소유권’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전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우리는 생산적인 노동에서 배제되어 있더라도 때때로 자신을 궁극적이거나 정당한 ‘소유자’라고 인식하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해 강력하게 분배를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가치론과 ‘노동자는 피억압 계층’이라는 인식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주의는 임노동자 계급에 혁명성을 부여하면서, ‘룸펜’이라 불리는 소외된 비노동자 대중의 정치와 지속적으로 갈등해왔다.
그러나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나는 생산 시스템에서 역할을 맡지 못하고 배제된 사람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제안할 수 있는 대안적인 좌파 전통이 풍부하게 이어져왔음을 제시했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자인 피터 크로포트킨 Pter Kropotkin의 경우, 분배에 관한 보편적인 요구와 분배 정의의 개념은 노동이 아닌 궁극적으로 사회적인 성원권에서 출발함을 항상 주장해왔다.
넘쳐나는 우리의 부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전 세대보다 우리가 훨씬 더 생산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들보다 뛰어난 인종이어서는 아니다. 우리가 더 열심히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100년, 아니 1,000년의 인류 역사를 거치면서 세대를 이은 노동과 희생, 발명으로 건설된 거대한 지구적 생산조직을 통해 그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거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구 전체적으로 수백만 명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 거대한 부를 생산하는 조직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현시점에서 소리 높여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기업의 주주들만은 분명히 아니다. 그 조직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상상하고, 고통받고, 피 흘린 모두의 후손들, 간단히 말하면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생산과 관련된 모든 쳉계는 통합된 유산이다. 그리고 크로포트킨은 공통의 소유권에 대한 요구에서 보편적인 분배요구들을 도출해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전체 산출물의 일정 부분은 생산조직의 모든 사람에게 소유권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지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즉 우리 모두가 거대한 공동 자산의 상속자로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유산은 노동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피 흘리고, 창의력을 발휘해서 함께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가치의 원천은 사회 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과실에는 대한 정당한 권리는 노동자가 아닌, 상속자이면서 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에게 돌아가야 한다.
<분배정치의 시대>에서 내가 제시한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학문적인 관심만은 아니다.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보조금 정책 옹호자들 역시 놀랍게도 비슷한 주장을 펼쳐왔다. 그들은 모든 나미비아 국민이 국가와 광물자원의 실질적인 소유자이기 때문에 국가의 부에 대한 지분share를 가지고 있으며 매달 현금을 지급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정부한테 매달 적정한 수준의 금액을 받는 것은 단순히 소유자에게 정당하게 분배되는 지분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시민권에 따른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투표권이 아니라 ‘국가의 부에 지분을 갖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정부한테 직접적으로 교부금을 받는다고 해서 동정이나 적선을 받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거나 낙인을 찍을 필요가 없다. 나미비아 국민들은 국가 전체가 소유하는 ‘부의 참여자’로서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인 지분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부의 정당한 공동 소유자인 그들은 선물을 받는 것도 아니고, ‘도움’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미 그들의 몫으로 할당되어 있는 ‘정당한 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분과 분배방식에 대한 이러한 주장이 아무리 강력해도 국가 혹은 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이 승인한 집단적인 성원권에 기반을 두는 한 근본적으로 배제라는 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문제가 제기된다. 극도로 유동적인 오늘날의 세계에서, 많은 국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가 제공하는 보호망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론적으로 심오하기도 하면서 필연적으로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핵심 질문이 등장한다. 시민권에 따른 지분 이외에 무엇을 기반으로 분배의무(지분의 의무)를 설정해야 하는가? 즉, 시민권으로는 정당한 지분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분을 의무화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의무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