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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 구절은 가장 강렬하고 자극적인 어투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공격하는 내용이다. 이 어투는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퍼부었던 내용과 일치한다 뱀들아 - 공동번역에서는 '이 뱀같은 자들아'로 번역하여 그 의미하는 바를 좀더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뱀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적인 동물로서의 예로 든것도 있고 상징적 존재로서 악마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타락하고 저주받을 자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뱀이 간교(奸巧)하여 죄악의 씨앗으로 여기는 생각과 저주받은 동물로서 생각하는 통념 때문이다
독사의 새끼들아 - 먼저 독사란 독을 품은 뱀이라는 의미보다, 여기서는 사단의 기질과 악마적인 본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함이 좋다. 그리고 새끼란 문자적으로는 '산출된 것', '탄생된 것', '자식',`자손'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독사라는 동물을 취급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비유된 것이므로 '자식'이라는 말이나 '족속'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 비유에서 독사와 그 새끼는 똑같이 한 가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조상들의 죄를 비난하지만 그들이 비난하고 있는 그 조상들의 족속이므로 똑같이 악한 족속이라는 뜻이 된다. 지옥의 판결 - 이같은 표현은 랍비들에 의해 자주 사용된 바 있는데
직역하면 '지옥에 떨어질 심판' 또는 '지옥 게엔나에 위탁된 심판'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게엔나'에서의 심판은 영영한 멸망에의 판결이다. 한편 이와 같은 번역은 모두 종말적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이미 영원한 절망에로 지정된 것이다. 판결을 피하겠느냐 - 가정법적 표현이면서 반문하는 형식이다. 심판이 피할 수 없이 자명하게 닥칠 것이라는 강조적 표현법이다.
[마 23: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 여기서 '선지자'란 구약의 예언자는 아니지만 그들과 동등한 권위와 영적 감화력과 자질을 갖춘 복음의 선포자로서 소위 순회 복음 전도자 정도로 불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이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덧입고 지혜있는 가르침으로 교회에 유익을 주는 자를 가리킨다.
또한 '서기관들'이란 유대교 인사가 아닌 그리스도 복음의 휼륭한 교사들을 뜻한다(13:52). 한편 이들은 베드로, 야고보, 스데반, 바울 등과 같은 초대 교회의 기둥같은 산 증인들을 위시한 많은 교회의 역꾼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특별히 예수께서 하신 '내가 보내매'라는 말은 현재형을 취하고 있다.
이는 단회적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암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께서는 계속적 파송으로 인한 당신의 사람들의 지속적인 박해 상황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계시다. 그중 '죽임당하는' 박해는 스데반과 야고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박해는 베드로나 시므온이나 안드레가, '회당에서의 채찍질'은 많은 사도들이
구박당함'은 수많은 복음 전파자들이 감수해야 했었다. 한편 이러한 본문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이해될 수 있다. (1) 30절에서 언급된 바리새인들의 호언장담에 대한 반박(反駁)으로서. 그들의 조상들이 지혜자와 선지자들에게 행했던 악행을 그대로 묘사하여 그들도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절에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과 31절의 내용과 더불어 바리새인들도 조상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암시한다. (2)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직접 예수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장차 예수께서 파송할 자신의 제자와 전도자들에게도 그들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조상들을 비판한 것처럼 그들도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적인 의도로 볼 수 있다. (3) '죽이다', '십자가에 못박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 자신이 앞으로 당할 고난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예언은 예수께서 자주 해왔다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 이 구절 역시 매우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아벧이 성경에 나타난 첫번째 살인의 희생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가 누구인가는 문제가 된다. 몇 가지 견해들에 대하여 살펴보면 (1) 이 사람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였다는 설이 있으나 그가 순교했다는 증거는 없다.
(2) 이 사람이 바리스 또는 이 이름들은 사본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의 아들로서 성전에서 두 열심당원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가랴 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이거나 순교자 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비록 그가 성전 경내 한 가운데서(엔 메소, in the mist)죽임을 당했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제사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증거도 없다. (3) 이 사람이 구약에서 베레갸의 아들(son of Berekish)인 선지자 스가랴(Zecharish)였다는 설이 있다(슥 1:1)
그러나 그가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 기록은 없다. (4) 이 사람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는 사가랴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런 견해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역시 증거가 없다. (5)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 사람이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일 것이라는 설이다. 이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이 사건은 히브리 정경(正經)에서 마지막 책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 곧 히브리 성경의 첫 책(창 4:8)에서 마지막 책(대하 24:20-22)에 기록된 모든 순교자들이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한다면 이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순교자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예수가 말하는 사가랴가 대하 24:20-22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야다'라는 부칭이 문제가 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슥 1:1에서는 선지자 스가랴의 아버지인 베레갸의 이름이 언급되는 한편 스 6:14에서는
그의 할아버지인 잇도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여호야다가 대하 24장에 나오는 스가랴의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호야다가 130세까지 살았던 사실(대하 24:15)은 이런 견해의 가능성을 높여주는데, 왜냐하면 스가랴는 여호야다가 죽은 직후부터 그의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알수 없는 바라갸(Berekiah)는 스가랴를 낳고 평온한 세월을 살다가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죽음으로써 그의 아버지의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본절)라고 말할 경우 바라갸가 사가랴(대하 24장에서는 스가랴)의 아버지라는 것도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들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의로운 피 - 이는 '의인의 피'(애 4:13), '무죄한 자의 피'라는 표현과 흡사한 의미로서 의롭다 인정받는 자의 죽음 및 그 피흘림과 관련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범죄자(犯罪者)의 선고를 받은 것 까지를 포함한 넒은 의미이다(히 11:4). 즉 이것은 아벨과 마지막 순교자 스가랴까지 의를 위해 순교당한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그런 측면에서 공동번역에서는 '땅에서 흘린 무죄한 피값'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러왔던 불의한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하는 형벌의 선언인 것이다. 한편 조상들이 저질러왔던 악행은 예언서들과 시편에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공동번역에서는 '피'를 '피값'으로 번역하여 본문의 의미, 곧 악행에 대한 그 대가를 지불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한편 이 35절은 27:24, 25을 예언한다. 즉 그때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 데 비해 유대인들은 예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 끔찍한 일에 대한 책임을 소리지르며 자청하여 떠맡았다.
[마 23: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다 이 세대(世代)에게 돌아가리라 - 주목할 점은 29절에서 일곱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될 때 그 대상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리고 35절에서도 '너희'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한 말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값을 받아야 할 대상이 이 세대로 지목되고 있다. 즉 그 시대에 살던 모든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집단적, 사회적 책임성을 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조상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늘 이 세대에서 회개하고 바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그 조상의 악의 양을 충만히 채우면(32절) 바로 이 세대가 멸망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예언을 한 후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그들은 경험하였다. 실로 과거의 죄악을 오늘 청산하지 못하면 오늘 이 세대는 과거의 죄악을 용인하고 반복하는 것이 되며 결국 과거와 마찬가지로 멸망의 화를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본절은 일곱 가지 저주 선언문의 최종적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 절은 23장 전체의 내용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감정을 첨가하여 마무리 짓고 있다. 문장 형태는 탄식문 형태이다. 예루살렘 -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두 번 부름으로써 애절하고 격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이 부분에는 마태가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였던 헬라식 발음으로서의 `예로솔뤼마'가 아닌 히브리식 발음으로 민족적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할 수 있고 종교적 중심지로서 상징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수의 이 탄식은 종교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을 향한 애정어린 부름이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 자여 - 이는 평화의 성읍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였던 도성이 살인자와 반역의 도시로 변한 사실에 대한 예수의 엄숙한 개탄이다
한편 모세 율법은 사술, 우상숭배등을 위시한 가증스런 범죄자를 돌로 쳐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의 미쉬나는 한발짝 더 나아가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이처럼 돌로 치는 일은 분노한 폭도(21:35;행 7:57,58)나 사전에 계획된 공모에 의해 이뤄지기도 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 이와 같은 표현은 36:7;사 31:5;36:7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이는 당시에 대중들이 잘 알고 있는 격언구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같은 격언구는 사랑과 애정과 보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당신이 갖고 있는 강렬하고 순결한 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을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과 일치시키고 있다. 내가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초월적으로 돌아보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요 8:58). 그러나 본문의 '몇번이냐'라는 말은 주어가 예수자신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공생애 기간과 더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역 기간 중 마치 암탉이 독수리의 침입을 예상하고 자기 새끼를 바삐 모으듯이 예루살렘(모든 유대인들을 뜻하는 환유법적 표현)을 모아서 보호하려고 노력하셨다(신 32:11;렘 48:40). 예수께서는 비록 유대지도자들을 책망하면서 심판과 화를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여호와 하나님처럼 누구든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단 1회만이 아니라 집요하고도 끈덕지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이 의미는 단지 그들이 원치 않는 수동적인 배척 뿐만 아니라 비난과 공격 등의 적극적인 배척을 하였다는 것을 앞의 '죽이고','돌로 치는'이라는 표현과 연관시켜 암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은 무모하게도 자신들의 멸망의 날을 앞당겼던 것이다. 정년 하나님의 사랑을 영속적으로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정한 때에 극렬하고도 단호한 심판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너희 집이 - 헬라어로 '오이코스'라는 단어는 '집'이라는 뜻 외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일반적인 '집'이나 '거처'를 뜻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신령한 성전으로서 기독교인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또 '나라'나 '가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집'을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 예루살렘 성전을 나타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성전을 마지막으로 떠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신적이 있으며,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앙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2) 이스라엘 '국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여하튼 예수를 끝까지 배척함으로써 버림받은 성전이나 국가는'나의 집'이 아닌 '너희 집'이 되는 것이다.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 몇몇 고대 사본들에는 '황폐하여'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권위있는 사본들(시내, 베자, 에브라임 등)에는 이 말이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한편.이 '황폐한'이라는 단어는 '한적한', `사막', '버림받은' 등의 뜻으로 바로 뒤이어지는 `버린 바 되다'와 유사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실로 예루살렘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정녕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예수가 '버린 바 된' 곳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영영히 '황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시 118:26을 인용한 문구로서 얼마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호산나'의 연호와 함께 사용된 구절이다 아마 이 표현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예배드리러 온 자들에게 인사할 때 사용했던 말로 추측된다.
그런 점에서 성전의 주체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예수도 존귀한 승리자로 오셨으므로 마땅히 모든 이들로부터 인사와 존경을 받아야 했다. 한편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예루살렘 입성 이전에 배열됨으로써 ' 까지'라는 말을 예루살렘 입성 때 곧 종려 주일까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종려주일에 사람들이 이 말을 외쳐된 일은 여전히 종말의 완성을 고대하는 역설적인 성취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 예수께서 있다. 특히 `이제부터'란 말은 대부분 종말의 완성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확실해진다.
이와 더불어 본절의 '나를 보지못하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활 후의 예수의 출현(出現)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종말적 도래를 가르킨다고 본다. 그런데 문맥의 전개를 고려해 볼 때 예수의 재림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용된 시 118편의 구절, 즉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고려할 때, 예수는 심판자로서 뿐만 아니라 환영받는 왕으로도 재림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유대인들은 지금껏 메시야를 배척해 온 잘못을 회개하며, 전민족적으로 그들이 거절했던 메시야를 '호산나' 찬송하며 그분의 절대 권위를 승인할 것이며, 그로 인해 선민의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