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란 시에서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스테판,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등 먼저 간 친구들을 기리며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꿈속에서 죽은 친구들이 나타나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고 하자 “나는 내가 미워졌다.”고 했다. 힘겨운 시대를 함께 하지 못하고 친구들을 먼저 보낸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1980년 ‘광주’ 이후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되풀이됐다. 304명의 어린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고 바다 속으로 수장시킨 죄책감에 온 나라가 슬퍼해야 했다. 그런데, 같은 일이 올해 또 반복되었다. 10월 29일 이태원의 할로윈 축제에 참여했던 158명의 젊은 생명들이 길바닥에서 압사당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사망자는 내국인이 132명, 14개국의 외국인이 26명이었다. 군인들에 의해 총칼로 죽었거나 배가 침몰하여 바다 속에서 익사한 것이 아닌 유가족의 말처럼 “그냥 길을 걷다가 죽은” 것이다. 이 첨단디지털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기에 11월 22일 있었던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한 유가족은 “이태원 참사는 총체적 안전불감증에 의한 간접 살인”이라고 절규했다. 누구를 위한 추모인가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행정당국은 참사가 일어날 당시 늦장대응으로 비난을 샀던 것과는 달리 기민하게 대처했다. 우선 사태를 규정짓는 용어를 ‘압사’나 ‘참사’가 아닌 단순 ‘사고’로 명명하고 ‘이태원사고’ 대책본부를 구성한 뒤, CCTV를 뒤져 토끼 머리띠 장식의 인물을 찾기도 했다. 158명이 죽은 참사를 왜 그렇게 ‘사고’로 축소하려 했을까? 그리곤 10월 31일~11월 5일의 일주일간을 ‘국가애도’ 기간으로 정해 전국 각지에 분향소를 설치해 따지거나 비난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들에게 먼저 애도하자고 했다. 죽은 자들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추모’나 ‘근조(謹弔)’라고 쓰인 글씨를 뒤집어 달도록 했다. 행정안전부에서 국가애도기간 중 전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에게 애도를 표하는 '검은색 리본'만을 패용하도록 안내했다고 한다. ‘추모’나 ‘근조’의 표지도 없이 어떻게 추모한단 말인가. 더욱이 각 지역에 설치된 분향소에는 추모해야 할 위패도 영정도 없었다. 11월 28일 유가족 65명의 명의로 발표된 <성명문>에서도 “유가족들의 의사를 전혀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위패 없는 합동분향소를 운영하고, 추모기간을 설정하였”다고 당국을 비난했다. 애도기간과 분향소 설치가 일종의 ‘면피용’ 요식행위였던 셈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추모인가? 게다가 희생자 부검과 유류품을 통해 마약 관련 검사를 진행했음이 최근에 밝혀졌다. 사건의 원인을 행정력의 부실대응이 아닌 마약으로 몰고 가려한 혐의가 짙다. 2차 가해인 셈이다. 슬픔과 분노가 ‘힘’이 된다 158명의 유가족들은 서울, 경기 지역 39개 병원에 분산 안치된 자식들의 주검이 어느 병원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한다. 그리고 다른 유족들의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서울시가 유족정보를 발설하거나 공유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정안전부에서는 첫모임 이후 유가족과의 면담을 통해 동태를 파악하고 서로의 만남을 방해했다. 혹시라도 세월호처럼 집단적으로 대응 할까봐 겁을 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은 서로 위로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끔찍한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유족모임을 구성하거나 심리적 안정을 위한 공간도 없었고, 사고 발생 경과 등 기본적인 안내조차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158명 유가족을 각개 분리해서 장례를 치르면 사태가 진정될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생때같은 자식의 어이없는 죽음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데, 어느 부모라고 그 죽음을 잊겠는가. 그러기에 참사 24일 뒤인 11월 22일 우선 34명의 유족들이 ‘민변’의 주도 아래 처음 모여 기자회견을 가졌다. 정부에게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묻기 위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대통령의 공식사과를 요구한 것이다. 거기서 “이게 나라입니까?”라고 절규하며 살아남은 유가족들의 슬픔이 분노의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유가족들은 대통령과 서울 시장이 분향소로 보낸 화환을 부수기도 했다. 그 뒤 11월 28일에는 65명의 유가족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희생자들에게 “떳떳한 가족이 되고 싶”고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며, 책임자들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고자”했다. 12월 10일에는 과반이 넘는 89명의 유가족이 모여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협의회(가칭) 창립총회를 열고 본격적으로 협의회를 출범시켜 시민들에게 “함께 서주시길” 당부했다. 슬픔과 분노가 ‘힘’이 된 것이리라. 우리의 <헌법> 제 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태원역 1번 출구 추모공간에는 지금도 “막을 수 있었다. 국가는 없었다.”는 글이 붙어있다. 아, 대한민국은 어디에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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