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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척독(尺牘) 에 나오는 21번째 이야기
영재(泠齋)에게 답함에 이어진 글 2
연암 글에 술냄새가 팍팍 풍기니 혹여 오해 할 것 같아 아무래도 글을 하나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요즘같이 아무데서나 마실 수 있는 술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도 황당하고 큰 오산이다. 역사극에서 '주모! 여기 술 한잔' 이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말은 거의 틀린 말이다. 조선시대 술은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왕들은 예외없이 금주령을 시행했고 함정 단속도 이뤄졌다. 이유는 간단하다.술은 곡물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주 식량을 낭비하는 것이다. 경제체제가 전적으로 농업 위주였던 조선시대에 곡물의 안정적 확보는 곧 정치-경제 체제의 안정과 연결되는 큰 문제였다. 불과 우리도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쌀로 막걸리를 담글 수 없지 않았던가.
조선시대엔 흉년이 되는 해에 금주령이 강하게 발동되었으며 천재지변이라든지 화재와 같은 재난, 국상 등이 있으면 전국민이 근신하는 의미에서 금주령이 발동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조선에선 500년 동안 금주령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유지됐다. ‘태조실록’ 7년 5월28일조엔 전국 각도에 술을 금하는 영을 거듭 엄하게 내렸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금주령이다. 태종 때도 금주령이 잇따라 시행됐다. “금주령을 내렸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먹는 것과 시정에서 매매하는 것도 모두 엄하게 금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0년 1월19일).
그런데
금주령은 강력했지만 실제 단속에 걸려드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이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는 걸려들지 않고, ‘탁주’를 마신 자는 걸려들어
처벌을 받는다 했으니(‘세종실록’ 2년 윤1월23일), 요즘으로 치자면 양주를 마신 사람은 괜찮고 소주를 마신 사람은 걸려든다는
얘기다. 무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할 때 음주를 허락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중요한 국정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4년 5월10일, ‘성종’ 9년 5월29일). 음주를 허용하자는 측은 활을 쏠 때 술의 힘을 빌려야 잘 쏠 수 있다는 것인데 일리 있는 말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조선 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자 술은 점점 고급화되었다. 소주의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다. 원래 소주와 같은 증류주는 알코올 함량이 높기 때문에 곡식이 많이 소모된다. 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許稠, 1369~ 1439)는 “내가 처음 벼슬길에 들어섰을 때는 소주를 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집집마다 소주가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세종실록’ 15년 3월23일). 드물게 쓰는 것이었으나 성종 때엔 연회에도 모두 소주를 사용하였다고 한다(‘성종실록’ 21년 4월10일). 그렇게 강력한 통제를 하였지만 실상은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조선 전기는 ‘음주의 시대’라 불릴 만큼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년 전인 1585년 지평 한응인(韓應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즈음 여항(閭巷)에서는 대소귀천(大小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연회에 절도가 없어 주육(酒肉)이 낭자하고 음악이 시끄러운 것이 태평하여 근심이 없을 때와 같으니, 매우 한심합니다. 술병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일절 금단하소서(‘선조실록’ 18년 4월29일).” 그야말로 로마의 평화가 아닌 조선의 평화였다. ‘대소귀천’ 모두가 술에 빠져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민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실록은 대소귀천 운운하지만 술의 최대 소비자가 지배계층인 양반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각 관청에는 주고(酒庫, 술창고)란 시설물이 있었는데, 특히 서울 각 관청은 고위 인사의 영접 전송 때 모두 술을 사용했다. ‘중종실록’ 36년 11월13일조에 따르면 서울의 품계가 높은 아문과 육조 소속 각 관청에서는 자체 내에서 술을 빚어 술을 물처럼 마셨다. 양반계급의 술 소비엔 당시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관료 중심사회였다. 양반들은 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도덕적 존재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면일 뿐 양반은 지배계급으로서 사회적 특권과 쾌락을 누리는 데도 열중했다. 음주 역시 그 특권적 쾌락의 일단이었다.
그렇다면 조선 사람들은 어디에서 술을 마셨을까. 문건에 따르면 조선 전기의 경우 술을 판매한 상점은 있었지만 술집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추측’이라고 한 것은 이제까지 접한 문헌에서 술집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술집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상업적 공간이 실제로 없었거나 그런 공간이 극히 드물었던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전기의 술집에 관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디서 술을 마셨을까. 조선 전기 실록에는 ‘회음(會飮)’을 금한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회음이란 환영 전송 잔치 등의 기회에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일을 뜻한다. 아마 조선시대엔 회음이 가장 일반적 음주 형태였던 것 같다. 이 경우 술은 양조주(釀造酒), 즉 집에서 스스로 만든 것이 주로 동원됐다.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관청에서도 술을 빚었다. 술을 빚어 판매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술을 사서 마시는 일도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 ‘태종실록’ 금주령에 관한 자료에서도 술을 빚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의 생계 수단인 양조는 금지하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술집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출현했다. 하지만 이는 숙종 때의 일이고 영조 때는 사정이 다르다. 한마디로 살벌했다. 실록 자료에 따르면, 영조의 명으로 술집에 대한 단속이 철저하게 진행됐다. ‘영조실록’ 4년 9월16일 사간 강필경(姜必慶)의 말에 따르면 술집의 영업행위는 단속으로 일시에 거의 종식된 듯했다. “주금(酒禁)을 신칙(申飭)한 뒤로 술집으로 이름난 것은 모두 술 빚는 일을 끊었습니다.” 흥미로운 단속 사례도 있었다. “송교(松橋) 근처 큰 술집 하나가 있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 도장을 찍은 첩자(帖子)를 높이 걸고 어공(御供)하는 술이라 청하여 법부(法府)에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뜻대로 매매하여 꺼리는 것이 없으니, 내자시의 해당 관원을 먼저 파직하고 서원(書員)은 유사(攸司)를 시켜 가두고 처벌하소서.”
내자시는 대궐에 필요한 식료품 자재를 공급하는 관청이다. 송교의 큰 술집이 내자시와 결탁하여 어공(御供), 즉 임금에게 바친다고 속여 술을 빚어 팔면서 한성부·형조·사헌부 등 사법권이 있는 관청의 단속을 피해왔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힘있는 행정기관과 결탁하고 ‘청와대’를 사칭하여 법망을 피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자시의 관원과 서원(書員, 書吏)들은 당연히 처벌되었다. 이후 영조는 금주령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대략 17세기 말쯤 시정에 나타난 술집은 영조의 가혹한 금주령으로 거의 사라졌다. 금주령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별 볼 일없었는데 그러나 영조는 달랐다.
그는 그의 치세 기간 내내 강력한 금주 정책을 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하려 했다. 국가의 제사인 종묘 제례에도 술을 쓰지 않았다. 민가에서도 제사에 술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이다. 영조는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53년간 재위하여 조선조 왕 중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길다. 금주단속이 무려 반세기 동안 실효성 있게 시행됐다는 의미다. 애주가들에게 영조 치세기는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은 탄압기였다. 영조의 강력한 금주령으로 인해 많은 소동이 벌어졌다. 과잉단속은 말할 것도 없고 단속반의 비리도 잇따랐다.함정 단속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영조의 금주령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난 공무원이 있을 정도였다. 금주령 위반죄로 참형을 당했던 윤구연(尹九淵)의 예를 보자. 영조 38년 9월5일 대사헌 남태회(南泰會)는 남병사(南兵使) 윤구연을 고발했다.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금주령을 범하고 술을 빚어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변방 장수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이러한 보고를 받은 영조는 “과연 들리는 바와 같다면 응당 일률(一律, 사형)을 시행해야 한다. 어찌 파직에 그치겠는가?”라고 말하며 윤구연을 체포해 올 것을 명했다. 윤구연이 잡혀오자 영조는 숭례문 앞에 나아가 윤구연의 목을 직접 칼로 쳤다. 영조가 이렇게 성급했던 것은 사실 확인차 보낸 선전관이 윤구연이 있던 곳에서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를 가져와 대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술항아리의 술은 금주령 이전에 담근 것이었다(‘영조실록’ 38년 9월5일).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의 목을 벤 것은 전제군주의 횡포였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차자(箚子·상소문)를 올려 윤구연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으나, 영조는 비답을 내리지도 않고 세 정승을 파직했다. 사간원 홍문관 사헌부의 신하들도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도리어 이들까지 벼슬이 떨어졌다(‘영조실록’ 38년 9월17일). 부수찬 이재간(李在簡)은 “사형을 너무 섣불리 집행했고 또 말리는 신하들을 파직한 것이 너무하지 않느냐”는 항변성 발언을 하다가 졸지에 성환찰방(成歡察訪)으로 좌천되었다(‘영조실록’ 38년 9월18일). 윤구연은 사실 억울한 죽임을 당했기에 이후에도 그를 신원하여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신하들의 요청이 계속되었으나, 그것이 실현된 것은 12년 뒤인 영조 50년 2월24일이었다. 이 날 영조는 윤구연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라고 명하였으니, 12년이나 지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이렇듯 잔인한 것이었다.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영조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계속 사형에 처해진 듯하다. 그러나 영조는 지나치다 싶었는지 이 조치만큼은 철회했다. 영조 39년 사헌부 지평 구상(具庠)은 “금주령을 범했다고 해서 사형에 처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말했다(‘영조실록’ 39년 6월23일). 영조는 이 말을 수용하여 “금주령을 범한 술의 양의 다과(多寡)로 등급을 나누어 죄를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공포는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영조는 사형을 면해주기는 했으나, 금주령을 어긴 사람들의 귀양행렬은 영조시대 내내 이어졌다. 영조의 서슬 퍼런 금주령은 신하들의 어떤 진언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영조 40년 9월11일 정언 박상로(朴相老)가 금주령의 폐단을 10개 항목에 걸쳐 조리 있게 논박했으나 영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박상로만 사적(士籍)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처벌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술이란 것이 애초에 없었거나 이슬람교처럼 종교적 설득이 병행됐다면 모를까 모든 사람이 술을 안 마시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영조 때에도 술꾼들은 여전히 숨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영조는 죽을 때까지 술과의 전쟁을 벌였지만, 당시의 조선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술을 마시려 했다. 단속이 심해질수록 알코올을 목숨과 바꾸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국 영조의 ‘술 없는 나라 만들기’는 미완의 성공에 그친 셈이다.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는 정반대의 정책을 폈다. 술꾼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정조실록’ 6년 5월26일조에 금주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좌의정 홍낙성(洪樂性)은 “곡식이 허비되는 것이 술에 있으니, 술을 많이 빚는 것을 금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정조는 곡식을 줄이는 효험도 보지 못하고 백성들만 고생시킨다는 이유로 금주령의 발동을 거부했다. 정조는 영조 시절의 가혹한 금주령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고 사실상의 효과가 없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무렵 그러니까 술을 마시다가 잘못 걸리면 사형도 불사하던 영조대왕 때 술을 드신 연암선생이시니 아무튼 간이 큰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때니 당연 그들은 술이라 해도 탁주를 마셨다. 아무리 영조라 해도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기 위해 술을 하사하는 호궤(犒饋)와 백성들이 마시는 탁주인 농주 (農酒) 등을 제외하고 금주하라는 전교를 내렸다고 한다. 영조는 금주의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성인도 술을 맛있어하는데 어찌 중인 이하라고 맛이 없어하겠느냐며 술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다. 설령 소주를 허용했다 하여도 연암이나 그들 친구들은 가난하여 소주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시는 술은 크게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 나뉜다. 술의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와 탁주로 나뉘며 자연스럽게 고급술과 대중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소주(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대개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시는 술인 탁주를 즐겨하였다. 당연히 탁주는 가장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술이었다. 그렇다고 탁주를 일반 백성들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대부분 탁주를 즐겨하였다. 연암도 집술이라 하여 손님대접용으로 늘 집에는 술이 있었다. 연암의 '술낚시'는 왜 유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탁주에 대한 다양한 글을 남겨놓았다.
연암도 그렇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탁주를 여러 의미에서 받아들였다. 모든 술이 다 그러하지만 탁주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승화시키고, 여러 지인들과
호주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자신의 울분을 탁주를 통해
승화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명망가들이 밤을 새워 술을 마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선비들의 술자리가 단순히 의례를 갖춘 향음주례만이 아닌 호쾌한 술자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는
더불어 금주령 시대에도 과도 단속 말고는 금하지 않는 술이었다고 볼 수있다. 따라서 탁주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민속 자료이자 유산이다. 나 역시도 탁주라 할
막걸리를 무척 좋아한다. 앞서 보았지만 사형에 처한다해도 몰래 마셔댄 술꾼들의 전통, 이 참 내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를 잘한다. 우리나라 처럼 노래방이 많으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전국노래자랑이 수십년이 지났건만 출연자는 넘쳐난다. 다른 나라는 노래를
부르라하면 피하거나 쑥스러워 하는데 우리는 거침이 없다. 스위스에서는 가라오케라 하여 노래부르는 곳에 스위스사람들이 찾아 온다. 혼자 사는 데 익숙한 그들은 노래부르는
우리를 보기 위해 술 한 잔 들이키며 찾아오는 것이다. 얼마 전 하바드대 교수가 한국인이 노래 좋아하는 것은 천부적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페라를 보통인들도 주절주절 외우듯이 우리는 노래라 하면 아무 때 어데서고 춤을 추며 바로 시작한다. 이는 나는 바로 술에 기인한다고 본다. 최부선생이 중국에 표류해 갔을 때 자신들은 손님이 오면 차를 내놓는데 조선은 어찌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최부는 바로 술을 내놓는다고 했다. 이런 문화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을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다. 술과 노래는 함유하여 정을 만들고 우리 특유의 고유문화를 형성했음이다. 사실 나도 처음 술을 배울때 한 잔 가지고는 성이 안차고 들이키며 정을 느끼며 그러다가 흥청대는 것이 노래였고 그것이 왜 또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인지 그때는 잘 몰랐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는 음주가무에 한해서는 도가 튼 민족으로 동질의 DNA소유자라는 것을. 아무튼 작금에 이르러 전과 다르게 술에 대한 강박이 도처에서 너무 심하다. 서슬퍼런 영조 때도 부어라 마셔라가 통했는데 그렇다고 술꾼들이 이에 굴하고 말쏘냐, 술꾼들을 너무 괄시하지 말라. 대신 한류열풍은 우리가 책임진다. 요즘은 소맥이 열심히 달리고 있지 않은가. 이는 다른 세상에서는 없는 한국 고유의 맛이다. 우리 민족이 사랑하는 막걸리, 수필가랍시고 글 하나 남기지 않는다면 이는 연암선생에게도 술꾼 조상들게도 후배로서 마땅한 도리가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