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WINS>
-프롤로그
“쌍둥이입니다.”
푸석한 금발이 반쯤 하얗게 새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인의 손목을 놓고 차분하게 고한다.
“쌍둥이…라?”
"에, 제 이름을 걸고 맹세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쌍둥이입니다.”
“알겠소. 이 일에 대해 함구하도록 해 주시게.”
“…예?”
“아이가 둘이라는 것은 비밀로 해 달라는 말이네.”
“아, 알겠습니다.”
그는 오랜 궁 생활에서 얻은 지혜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나가보게.”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 여인의 하얀 손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만삭의 배를 쓸어내리는 동안 그는 허리를 숙여 보이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문 쪽을 흘끗 바라본 여인은 발소리가 멀어지자 침대 옆으로 길게 내려온 끈을 잡아당겼다.
딸랑-하는 영롱한 소리가 공기를 두드리고 조금 전에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검은 메이드 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하르트가(家)에 기별을 넣어주게.”
“예, 알겠습니다.”
다시 문이 닫혔다. 여인은 만삭의 배를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한명쯤은…….”
-본문
화려한 금발을 단정하게 자른 작은 소년이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걱
두꺼운 종이 넘기는 소리가 커다랗게 방안을 울렸다. 커다랗고 동그란 흑청색 눈동자를 또르르-소리가 들릴 만큼 열심히 움직이며 책을 읽고 있는 이 꼬마는 하르트가의 차기 가주 로이웰르 혼 하르트.
“로웰.”
“아, 아버님.”
“책 읽던 중이었니?”
중년의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흑청빛 머리칼이 하얗게 세어 반백이 된 머리. 현 하르트 가주.
“예, 카르틴의 고어(古語)라 속도가 붙질 않네요.”
작고 하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소년을 보는 가주의 연륜 가득한 흑청빛 눈동자는 곱게 휘어졌다. 눈가로 잡힌 굵은 주름이 세월을 담고 흐른다.
“저, 카류리드 왕자님께선……?”
가주가 왕궁에 다녀왔다는 것을 아는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곧…비마마께서 모시고 오실거야.”
“아……!”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에도 로웰은 ‘그’의 방문 소식에 들떠 기뻐했다.
“건강하시던가요?”
언제나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던 흑청빛 눈동자가 기쁨과 기대의 빛으로 가득 출렁였다.
“그래. 많이 자라셨더구나. 훨씬 총명해지셨어.”
로웰과 꼭 닮은 모습의 왕자를 잠시 떠올린 가주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며 그의 안부를 전했다. 같은 틀로 찍어낸 듯 꼭 닮은 얼굴과 총명한 눈동자.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한 행동. 모든 것이 닮아있었다.
“기대되요.”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에 붉게 홍조가 어렸다. 기대어린 기의 모습을 보는 가주의 눈에 연민과 염려의 빛이 스쳤다.
“카류, 괜찮니?”
“아아…네.”
파리하게 질린 소년은 위태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대감어린 얼굴로. 그런 그녀를 보며 카류는 슬프게 웃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문을 열자마자 먼저 내려버리는 어머니의 등을 보며 카류는 또 웃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눈으로.
“어서 오십시오, 아스트라한님.”
“아아, 오랜만이군요.”
오는 내내 멀미에 시달린 카류가 힘들게 몸을 가누며 내려서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또 한 번 무너진다. 그에게 저렇게 웃는 어머니는 너무도 낯설다.
가까이 선 디트경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카류의 눈에 비친 것은 경쾌하고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녀…카류 자신의 어머니였다. 아픈 아들은 안중에도 없이 즐거워 보이는…….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소리 내어 울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내며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겼다. 지금 주저앉아버리면 미움을 살지 몰라. 카류는 눈물을 꿀꺽 삼켜버렸다. 약해지면-버림받을지도 몰라. 어머니가 원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강한 아들 일 테니까.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시녀들이 허리를 숙이고 가주와 로웰이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스트라한님.”
“어서 오십시오, 아스트라한님.”
딱딱한 인사말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부자의 목소리로 울린다.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오랜만이구나, 로웰.”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는 힘겹게 속도를 내어 겨우 따라온 카류의 손을 잡아끌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카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그런 카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 아이가 카류란다, 로웰.”
따스한 미소. 카류는 낯선 얼굴의 어머니를 올려보다가 자기 앞으로 다가온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닮은 소년을 보며 그는 습관적으로 웃었다.
“반가워요, 로이웰르삼촌!”
언제 슬펐냐는 듯 밝은 웃음에 모두 그의 슬픔을 잊는다. 놓쳐버린다. 그래서 그는 혼자다.
“반갑습니다, 카류리드 왕자전하.”
호감어린 미소와 예의바른 인사에 카류도 그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그가 미워졌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난 뒤 로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카류의 어머니, 아스트라한의 희고 가느다란 팔이 로웰의 몸을 굳게 지탱하고 있었다.
익숙한 느낌에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카류를 스쳐본 로웰은 카류의 표정에 놀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어린 눈동자와 설핏 스친 분노. 그리고 끝내 떠오른 체념과 자괴감.
보는 사람마저 즐겁게 만들었던 그 웃음은 그의 철저한 가면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를 기만하기 위한 웃음. 하지만 그 표정조차 누가 눈치 챌까 금방 사라져버렸다. 사무치게 슬픈 무표정을 가장한 그를 주시하던 로웰은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의 그는 몸도, 마음도 크게 다쳤다는 것을.
언제나 별다른 부담 없이 안겨있던 품이지만 지금만큼은 몸에 맞지 않는 무거운, 불편한 옷처럼 껄끄러웠다.
조심스럽게 팔을 풀어내고 바닥에 내려섰다. 그의 누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놓아주었다. 로웰은 조금 뒤로 처진 카류에게로 다가가 차분히 부축했다. 눈을 크게 뜨고 그런 로웰을 보던 카류는 그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접객실에 도착하자 로웰은 카류와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본의 아니게 멈춰선 카류의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로웰은 그의 누나에게 말을 건넸다.
“왕자님께서 피곤해보이시니, 침실로 모셔가겠습니다.”
“아아, 고맙구나, 로웰.”
친근하게 로웰의 머리를 쓸어 넘긴 후, 그녀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자, 가시죠.”
천천히 이끌었지만 무리하게 걸어 온데다 필사적으로 버텨야 했던 이유가 사라진 뒤라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런 그를 가볍게 안아 올린 디트경은 특유의 음성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힘없이 늘어진 카류의 팔이 걸음에 따라 흔들렸다.
커다란 침대에 눕혀진 카류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었다. 시트를 가지런히 정리하고서 디트경은 휙-돌아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카류리드 왕자님.”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갑작스런 물음에 로웰은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얼마든지요.”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요. 내 이름은 ‘카류’니까.”
지친 얼굴에 동그란 웃음을 그리며 말하는 카류를 잠시 내려 본 로웰은 옅은 미소를 그리며 긍정의 답을 한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류님. 대신 저를 로웰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로웰.”
전과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으며 카류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후련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네……?”
“나를 부축해 준 것도, 그리고 이렇게 같이 있어주는 것도.”
“이런 것쯤은,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걸요?”
“하지만, 아무도 해주지 않았는걸.”
침울한 기색이 스쳤다.
로웰은 파리한 안색의 카류를 가만히 바라보다 무심결에 그의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미처 카류가 반응하기도 전에 눈가를 문질러낸다.
“로웰?”
“울지 말아요, 카류님.”
“아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류.
“그렇게 웃지 않아도 되요.”
“…….”
“외로운 거죠? 쓸쓸한 거예요, 그렇죠?”
카류는 흐릿해진 시야를 감추려 눈을 감았다.
“그럴…리가. 내겐 형제가 다섯이나 있어. 모두들 착하고 소중해.”
“그건 ‘카류님’이 생각하는 ‘그들’이지 ‘그들’이 생각하는 카류님이 아니잖습니까. 카류님께는 그들이 소중하고 따스한 가족일지 몰라도, 그들에게는 아닐 수도…….”
“아니야!”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카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로웰은 놀란 기색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해서 상대도 같을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들이 당신을 생각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아니야…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카류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져 나간다.
“그들을 위해 너무 희생하진 마십시오. 좀 더 당신을 생각하란 말입니다.”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로웰이 중얼거린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카류가 침대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았다. 울적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런 것 정돈…알고 있어요.”
그런 카류를 가만히 바라보는 로웰.
“알아요, 세상은 거울과 달라서 그대로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나도 알고 있다구요.”
둥글게 말린 카류의 등이 가늘게 떨린다.
“하지만…그래도…조금은, 조금은 더 기대하고 싶어져서…어머닌, 날 봐주지 않으니까…….”
울음 섞인 목소리가 커진다.
“어머닌, 어머닌 날 봐주지 않으시니까! 그러니까…처음부터 시작 할 수 있는 형제라면……형제라면, 날 봐줄 지도 모른다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푸른색 계열의 소매가 검게 젖어갔다. 애처롭게 떨리는 카류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웰은 그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나…봤어요, 누님의 품에 안긴 나를 보며 당신이 짓던 표정. 사실은 사랑받고 싶었던 거잖아요. 베푸는 사랑에 지쳐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지쳐서, 받고 싶었던 거잖아요.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어 했던 주제에…그렇게 웃으며 속이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느릿한 움직임으로 등을 쓸어내리는 로웰의 눈에도 엷은 수막이 서려있었다.
“내가, 내가 줄게요. 나도…당신의 형제니까.”
로웰의 품을 벗어나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보는 카류에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로웰은 말을 이었다.
“조금 멀어도, 형제이긴 하잖아요?”
태연스러운 그 말에, 카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드디어, 기둥을 찾았다. 자신의 무게를 지탱 해 줄, 손을 잡아줄 형제를 찾았다.
“야호♥, 로웰!”
멀리 복도 끝에서부터 로웰의 이름을 부르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이는 카류.
“아아, 카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기는 로웰을 보며 에르가와 딜티는 뒤에서 숙덕이기 바빴다.
“저 녀석, 언제 윗대에 까지 손을 댔지?”
“거기다 아주 닮았어.”
“그렇지? 저 녀석, 나르시즘인가……?”
“그럴지도.”
그 둘의 작은 대화는 이미 카류의 귀에 도달하여 무사히 안착한 상태였으니, 그것이 그들의 불행이었다.
“나르시즘? 에르가형~내가 아무리 로웰을 좋아한대도 질투는 안 돼.”
손가락을 흔들며 설교조로 말하는 카류의 태도에 에르가의 이마에 고운 사거리가 만들어졌다.
“…뭐라고?”
“로웰과 나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거든♥"
옆에선 로웰을 끌어안으며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카류의 언행에 에르가가 하얗게 탈색되어갈 무렵, 로웰은 그런 그들을 보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차오른 장난기는 비밀로 해두자.)
평화로운 아카데미 생활이 하루하루 지나고 있었다. 한해 먼저 입학해 기숙사에 들어온 로웰은 카류가 등교해서 하교하는 시간까지 그의 교실을 들락거렸고, 카류도 수업이 끝난 뒤에도 호위 기사들을 피해 로웰의 기숙사에 숨어드는 기행(?)을 저질렀다.
“아, 로웰.”
“응?”
“우리 이번에 고대유적탐사 간다고 하던데.”
“아, 그래? 나한테는 해당사항 없을걸.”
“에? 어째서?”
“그건 유력가문의 자녀들만 가거든.”
“유력가문?”
“응. 세력이 있는 귀족가의 자제나 너처럼 특이케이스로 성 밖에 나와 있는 왕족정도가 아니면 그런 유적지엔 못가. 국가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급귀족들에겐 아예 다가갈 수도 없게 하는 거지. 하급귀족일수록 변절하기 쉽잖아.”
“쳇, 치사해.”
태연하게 답하는 로웰에 비해 카류는 툴툴거리며 바닥을 찬다. 흙이 튀어 올라 마른 공기 중을 떠다니자 옆에 앉아있던 딜티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해, 카류.”
잔기침을 하는 딜티를 보던 로웰이 카류를 제지했고 그는 딜티를 힐끔 보더니 발을 멈췄다.
“조련사와 원숭이 같아.”
간단한 비유에 카류는 잔뜩 열을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누가!”
쿡쿡 웃는 로웰을 노려보던 카류는 항복했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카류는 로웰 앞에서만 어린애 같다니까.”
딜티의 감상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평소에는 다른 애들 챙겨주기 바쁘면서 로웰이랑 같이 있으면 어리광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진짜 그 나이또래의 아이들 같아 보여.”
“에에, 그런가?”
고개를 갸웃 거리는 카류의 움직임이 무색하게 모두들 긍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나는 내가 없을 때의 카류가 어떤지 모르니 동조할 수 없는걸.”
“그거야 당연하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들을 보며 잠시 뚱한 표정을 짓던 카류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로웰에게 매달렸다.
“그거야 로웰이 내 사랑♥이니까!”
“…….”
괴생물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카류를 보던 모두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카류가 그들의 행동에 더욱 광분했음은 물론이다.
“잘 다녀와.”
“응, 나 없다고 바람피우면 안 돼♥"
“그래.”
여유 있게 답한 로웰은 카류의 뒤쪽에서 웃고 있는 에르가와 딜티에게도 손을 흔들어보였다. 웃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손을 흔들어 보이는 둘을 가만히 보던 로웰은 카류에게 바짝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카류, 조심해.”
“응?”
“그리고 이거, 꼭 가지고 있어.”
“응?”
품에서 단검과 작은 주머니를 꺼내 손에 쥐어주자 카류는 이해하지 못한 듯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품에 넣었다.
“조심해, 카류.”
“걱정 마. 다들 같이 가잖아.”
“그래… 잊지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절대로. 기다리는 사람은 나뿐이 아닌 거 알지?”
“응.”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카류는 이내 웃으며 로웰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자기, 보고 싶어도 참아♥”
‘너도, 조심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당부에 로웰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너무 늦는 걸…….”
초조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로웰은 어수선한 교사들의 분위기를 떠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유적을 탐사하기 위해 학생들이 보내진지도 어느덧 열흘이 흘렀다. 이쯤 되면 도착해서 한창 경험담을 떠들 때도 되었는데, 도착했다는 말한 마디 없이 조용한데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교사들의 분위기는 불안한 예감을 더 부채질한다.
“…찾아가봐야 하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고민하던 로웰은 교문 쪽을 힐끔 보고는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사 없이 자율학습 중이던 학생들은 그런 로웰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 어디가?”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교실을 나서는 로웰을 발견한 한 아이가 로웰을 향해 물었지만, 로웰은 그런 그를 한번 바라보았을 뿐, 아무 답도 없이 교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런 그를 의아하게 보던 아이도 곧 잊어버리고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복도로 나온 로웰은 교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업시간이라 텅 빈 복도를 지나 교무실에 도착한 로웰은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지? 지금은 수업시간 아닌가?”
“질문이 있어서 왔습니다.”
“뭔가?”
동그란 안경을 쓰윽 올리며 차가운 눈으로 묻는 그를 당당하게 바라보며, 로웰은 조금도 주눅 든 감 없이 질문을 던졌다.
“유적 견학을 간 학생들은 언제 돌아오는 겁니까?”
“…그건 학생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 일행 중에 제 사촌이자 이 나라의 왕자이신 카류리드 왕자님도 계십니다. 제게 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표정으로 길게 한숨을 몰아쉰 교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굴이 붕괴되었다네.”
“…그들이…갇힌 겁니까?”
단숨에 답을 내놓는 로웰의 물음에 교사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확신에 가까운 추정에 긍정했다.
“기사들은 단 한사람도 함께 있지 않지. 용병들이…그 분들을 잘 데리고 나와야 할 텐데…….”
걱정 어린 교사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로웰은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내일이 휴일임을 기억해낸 로웰은 기숙사감을 찾아갔다.
“외출 신청하고 싶습니다만…….”
“언제부터 언제까지 말인가?”
“내일 소등시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언제 나갈거지?”
“지금요.”
“…담당 교수님께는 허가받았는가?”
“네.”
태연한 로웰의 답에도 의심스러운 듯 그를 한번 훑어본 사감은 종이에 뭔가 적어 로웰에게 넘긴다.
“귀가시간 지키게.”
“알겠습니다.”
로웰은 종이를 접에 주머니에 챙겨 넣고는 그길로 학교를 빠져나왔다. 줄지어 서있는 마차 중 하나에 올라탄 로웰은 마부에게 동전을 건네며 ‘하르트 가’로 가달라고 말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로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긴 가죽 끈에 걸린 나무 팬던트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부디…무사해야 한다.’
마차가 서서히 멈춰서고 로웰은 급하게 내려섰다. 막으려던 문지기가 그를 알아보고 물러서는 사이 그는 이미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고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로웰도련님.”
“아버님을 뵙게 해주게.”
“…가주님께서는 용무가 바쁘신지라…….”
“어디 계신가? 직접 찾아뵙겠네.”
잠시 고민하던 집사는 결정을 내린 듯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쫒아 로웰이 도착한 곳은 서재였다.
-똑똑
노크를 한 집사가 옆으로 조금 비켜서자 로웰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서재에는 피곤한 기색의 가주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아버지.”
“…예상보다는, 조금 늦었구나, 로웰.”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된 건지 알려주십시오.”
“우선, 앉거라.”
쇼파로 옮겨 앉은 가주의 권유에 로웰도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마주앉은 로웰의 어린 티가 완연할 얼굴에서 각오와 긴장감을 발견하고 설핏- 힘없이 웃음을 짓는다.
“동굴이 붕괴되었다.”
“…그건 들었습니다. 정황은 어떻습니까? 궁에선 누가 파견되었지요? 아니, 누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쏟아지는 요구에 가주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였다.
“언제나 차분하던 네가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별일이구나.”
“친구가, 형제가 위험하니까요. 궁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 내일 아침 일찍 입궁하자.”
가주가 순순히 허락하자 로웰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서재를 나섰다. 오랜만에, 실은 카류가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 로웰은 오래전 카류와 친구가 되었던 방에 들어서서 길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부디…카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님…….”
눈에 띄게 초췌해진 그녀는 평소와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사하겠지요?”
간절한 눈빛으로 속삭이는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당당하고 평온해 보이던 평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조금 놀란 로웰은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염려마세요. 무사히 돌아올 겁니다.”
나직하게 속삭인 말에 그녀는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유리잔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의 옆에서 그는 서럽게 울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닌, 날 봐주지 않으니까…….’
바보 같은 녀석이다-라고 생각하며 로웰은 환영처럼 떠오른 그의 모습을 지워버린다. 돌아온 그 녀석은 웃고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그만을 믿고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이 살 수 있다.
‘나도…사실은 네게 위로받고 있는걸.’
카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울린다.
“카류…….”
조그맣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울컥 솟은 눈물을 삼키며 창밖을 멀리 내다본다. 무사해라, 무사해라… 끝없이 중얼거리는 로웰이었다.
“으음, 조용한걸.”
늘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조장하던 카류가 없는 2학년 교실은 음침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아니, 고요했다.
무사히 돌아온 카류는 여전이 헤픈 웃음을 지으면서,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로웰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카류의 체온이 로웰의 떨리는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 주었다. 성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안아준 어머니, 아스트라한의 온기가 불안했던 카류를 안심시킨 것 처럼.
이런 저런 생각으로 썰렁한 복도를 걷던 로웰은 카류가 있었던 교실의 문을 열었다. 책상위에 늘어져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에르가와 멍하게 창밖을 보는 딜티를 비롯해 그의 주위에 모여 있던 이들이 힘없이 늘어진 모습이 뜨거운 태양빛 아래 녹은 얼음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딜티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아, 로웰?”
“다들 왜 이렇게 늘어져 있는 거야?”
“그러게- 카류가 없으니 어쩐지 심심해서.”
솔직한 딜티의 답변에 눈을 깜빡이던 딜티는 나직한 웃음을 짓더니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이번에 왕실 무도회가 열리지?”
“응, 들었어.”
“그럼 카류도 볼 수 있겠네.”
“아, 그렇군.”
나른하게 풀려있던 딜티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늘 싸우고 장난치더니, 그래도 정이 들긴 했나봐?”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평소였다면 카류가 했을 말을 태평스럽게 읊으며 기지개를 길게 켜는 딜티는 한층 밝아보였다.
‘사랑받고 있구나, 카류.’
로웰은 자신의 품에 안겨서 울던 어린 꼬마를 떠올리며 푸근한 웃음을 지었다.
“와아! 다들 오랜만이야!”
무도회가 열리는 빛의 궁 중앙 홀에 들어서자 카류가 즐겁게 웃으며 다가온다. 그의 미소가 너무도 반가운 그들이었지만 내색 없이 평소처럼 받아친다.
“아아, 너 없는 학교는 너무 평화로워서 즐거웠는데.”
투덜거리는 딜티를 보며 킥킥 웃던 카류는 품을 뒤적여 곱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의아한 표정의 딜티를 보며 장난기어린 표정으로 사악하게 웃어 보인 카류는 종이를 팔락이며 딜티의 주위를 맴돈다.
“아아- 로웰이 편지를 보내왔는데 말이지…….”
“으와앗!!”
여유로운 자세로 빙글빙글 도는 카류에게 달려들어 편지를 빼앗으려하는 딜티는 전에 없이 밝아보였다.
“쯧쯧, 아직 어리다니까.”
에르가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 장난을 멈추고 에르가에게서 한걸음 멀어지는 둘이었다.
“에르가형, 많이 아픈가보네.”
“그런거 같지? 쯧쯧… 우리 모른척하자.”
언제 싸웠냐는 듯 어깨동무까지 하고 멀어져가는 둘의 모습에 에르가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마에 사거리를 닦고서 둘의 뒤를 쫒았다.
“너희! 거기 안서?!”
다른 귀족들은 안중에도 없이 떠드는 그들. 어두운 그늘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쌍의 눈들이, 그들의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도망쳐!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왔다. 수려한 글씨체가 망가져 흩어진 종이를 구겨 쥐며 로웰은 아랫입술을 세게 물었다. 만약을 대비해 싸두었던 귀금속들과 검을 집어 들고 기숙사를 빠져나온 로웰은 이미 파악해 두었던 길을 따라 아카데미를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서쪽 문으로 향한 로웰은 급히 준비한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비명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입술 위로 붉게 변해 흘러내린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창백하게 마른 하얀 입술이 보인다. 군데군데 갈라져 붉은 혈흔이 남은 상처투성이 입술을 비집고 짙은 감정이 가득 담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의 머릿속에는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가 스쳐 지난다.
-‘그 폐왕자 이야기 들었어?’
-‘당연하지. 리아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며?’
-‘아무튼,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험담이 주를 이루는 대화였지만 그의 안위를 전해준데 대한 감사와 안도가 그에겐 더 지배적이었다.
커다란 바위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옆에 새워두었던 검을 집어든 로웰은 나뭇가지의 뻗은 방향과 이끼가 낀 밑동을 살피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리아영지는 수도로부터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지로 들어가서 성안으로 가는 것은 후에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를 벗어나 리아영지로 향한지 이제 이레째. 깊은 산속으로만 다녀왔지만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왔다. 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는 무용지물. 마을사람들이 이용하는 작은 오솔길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곧 마을에 도착할 것 같았다.마을에서 피워 올린 밥 짓는 연기가 보이는 곳에 이르러 로웰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바스락
나뭇잎 헤치는 소리에 놀라 로웰은 습관적으로 검을 뽑아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상대의 검도 로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당황한 로웰이 간격을 확인하느라 조금 늦게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로웰의 귀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웰……?”
“아아…….”
반가움에 한걸음 다가가려다 손에 들린 검이 여전히 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색하게 팔을 내린다. 다정하고 차분한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린다.
“딜티…….”
검을 검집으로 밀어 넣은 딜티는 카류가 그랬던 것처럼 성큼 다가와 로웰을 끌어안았다. 그의 체온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 로웰이 그의 등을 약하게 두드려 주고 다시 마주보았다.
“어떻게 도착하긴 했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로웰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딜티는 로웰의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응!”
“로…웰……?”
창백해 보이는 안색의 카류가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천천히 다가갔다. 여느 때와 다르게 느릿한 발걸음에 로웰은 걸음을 내딛어 잘게 떨리고 있는 카류의 손을 굳게 잡았다.
“아아……!”
긴장한 탓인지 차갑게 식은 카류의 손을 잡고 놀람으로 커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로웰의 것과 같은 색의 눈동자 이지만, 맞잡은 손의 떨림이 그 눈동자에서 그대로 묻어나 여린 심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말…정말 로웰이야……?”
“당연하지. 로이웰르 혼 하르트. 네 사촌형제.”
생긋 웃으며 태연한척 답하자 그제야 실감난 듯 로웰을 끌어안는 카류였다. 감격어린 눈동자에 가득 담았던 눈물이 톡- 떨어져 로웰의 어께에 얼룩을 만들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팔을 뻗어 로웰을 밀어낸 카류는 그의 어께를 잡고 그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로웰은 팔을 뻗어 카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내가 너처럼 허술한 줄 알아?”
“치잇, 나도 허술하지만은 않아!”
투정부리듯 눈을 흘기며 말하는 카류의 모습에 여전히 그들 사이에 서있던 약간의 긴장이 무너졌다.
“자,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올라가서 쉬어. 자세한 사정은 내일 알려줄게.”
“아아, 알겠어.”
“내가 안내해줄게~”
신이 나서 로웰의 팔을 잡아끄는 카류를 보며 딜티와 에르가들은 다소 안심한 듯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필요이상으로 우울해 있던 그였기에 주변의 걱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무덤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로웰을 안내하기 위해 팔랑-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신나서 달려갔던 카류가 진지한 얼굴이 되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카류……?”
“…나 결심했어.”
뭘? 하고 묻는 것 같은 친우들의 표정에 카류는 드물게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쟁을, 시작하자.”
기둥이 돌아왔으니, 다시 일어서야지-라고, 카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시작했다고?”
“네.”
하얀 종이에 적힌 수려한 문자들을 쓱-훑어본 루브의 물음에 앞에선 보좌관은 간단히 답했다. 심각해진 루브의 표정에 그는 간단한 설명을 더한다.
“하르트가의 후계자도 합류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웰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애칭에 보좌관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루브는 그런 그의 기색을 눈치 챘지만 모르는 척 서류를 눈에 담았다.
“그래, 그럼 계속 수고해.”
보좌관을 내보내고 루브는 서류를 손에서 놓았다. 피곤한 듯 눈을 문지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 멀리 남쪽을 바라본다.
“…바보같아.”
노을도 다 져가고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내다본 루브는 짙은 감정이 가득 담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부디…….”
부디, 모두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결과가 오길 바랄 뿐이다.
건조한 땅에 촉촉이 여신의 축복이 내려앉았다. 하얗게 마른 땅을 적시는 빗물을 환영하는 주민들의 환호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어떤 식으로든, 이제 전쟁은 끝나겠구나.”
“…그래.”
구름이 모여 그늘을 드리운 회색 하늘을 올려보며 조용히 속삭이는 카류의 말에 로웰은 좁은 폭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가 보기엔, 어떻게 끝날 것 같아?”
“글세…….”
두루뭉실하게 답을 피해가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답은 하나뿐이다. 국왕군의 승리. 혹은 반란군의 패배. 애매한 답변에서 그러한 미래를 읽어낸 카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전쟁 같은 거 일으키지 않는 건데 그랬어.”
“…….”
자신을 보는 로웰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카류는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지평선에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던 걸까.”
조용히 자신의 말에만 귀 기울여 주는 로웰의 씀씀이에 카류는 빙긋 웃어버린다. 이 상황에선 어떤 위로도 상처로 남을 테니까. 부정해도 믿지 않을 것이고, 긍정하면 상처가 될테지.
멀게 내다보고 있던 시선을 가까이로 돌려 로웰에게 고정하며 복잡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를 마주하는 로웰의 얼굴이 굳었음은 어째서일까.
“로웰은 ‘신의 선물’이란 뜻이래.”
뜬금없는 말에도 로웰은 동요 없이 카류를 마주했다.
“내게, 넌 신의 선물이었어. 고마워, 로웰.”
처음 친구가 되었던 순간이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어지지 않는다. 그날이 없었다면, 지금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게도 넌 신의 선물이었어.”
똑같이 돌아오는 말에 카류는 눈을 깊이 감았다.
하얀 백마 위에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은 작은 아이. 작은 체구에서 느껴지는 위엄과 당당함과 부드럽게 율동하는 흑청빛 머리칼은 능히 그 아이의 이름을 짐작케 해 준다.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 이제 반란을 일으킨 패륜아로 불리는 그의 영광된 명칭들은 이미 세간의 기억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불과 백여미터 앞에 주둔한 국왕군을 보면서도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검을 뽑아드는 그를 눈에 담으며 기사들의 검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내달리는 양군.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애초에 수적으로 불리했기에 모두의 예상대로, 국왕군은 승리했다. 아니, 반란군이 패배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고압적인 목소리. 카류리드와는 다른 위엄이 서린 목소리. 기품있는 붉은 눈동자에 가득 서린 것은 군주답지 않은 슬픔이었으나 이들 중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없습니다.”
포로답지 않은 당당함에 눈살을 찌푸리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넓은 연회장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평온한 표정의 그와 달리 잔뜩 긴장한, 혹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다른 포로들이 그의 뒤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으나 붉은 눈동자는 흑청빛 작은 아이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반란은 그 직위를 막론하고 참수형이다.”
차갑기만 한 목소리에서 씁쓸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이 자리에서…폐륜아 카류리드를 처형한다.”
고저 없이 딱딱한 목소리에서 촉촉한 슬픔이 느껴진다.
검을 치켜드는 기사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흐릿하게 풀려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내려 보고 있는 저 군주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지켜내지 않았지만 좋아해주고 있는 것이다. 울어주지 않지만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믿어주지 않지만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설핏 웃음기를 띄우며 눈을 감는 그를 보며 멈칫했던 기사는 손에 힘을 주어 검을 들어올렸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연이어 흘렀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아이. 누구보다도 먼저 행하던 아이. 책임을 알고 배려를 아는 아이.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의 마지막을, 모두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고 하얀 목에 붉은 혈선이 그러지고 반짝이는 대리석 위로 점점이 꽃잎이 떨어짐과 동시에 적막을 가르며 지독한 혈향이 가득한 공기에 죽은 이의 음성이 울린다.
-왕위 따윈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린 아이 달래듯 다정하면서도 차분한. 하지만 슬픔과 분노, 실망이 깃든 목소리.
-어머니…저를 생각해주시는 마음은 잘 알지만…….
잠시 끊어졌던 목소리가 이어진다. 가는 떨림을 가득 담아.
-형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어머니, 저는 절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요.
-카류…….
-대업엔, 희생이 따르는 법이잖아요. 형은 성군이 될 수 있어요.
충격에 빠진 귀족들의 귓가로 마지막 말이 닿았다.
-왕위는 형의 몫입니다.
“누, 누구냐!!”
트로이 후작의 노성에 귀족들의 틈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화려한 금발과 눈물에 젖은 흑청빛 눈동자를 가진 굳은 표정의 소년과 붉은 머리칼을 낮게 묶은 냉막한 표정의 여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모두들.”
평소의 다정함을 벗어버린 듯 차가운 목소리.
“로…웰……?”
“카, 카이님!”
딜티의 외침에 카이야, 붉은 머리의 카이는 로웰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팬던트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로웰의 금발이 검게 물들었다.
무언의 비명이 홀을 매우고 로웰을 제외한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로웰의 일거수일투족에 고정되고, 로웰은 그런 노골적인 시선에도 한곳을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제 이름은, 로이웰르 드 크레티야 아르윈. 아르윈의 일곱 번째 왕자입니다.”
카류의 시신 옆에 선 로웰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닥에 쓰러진 카류의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카류의 머리를 끌어안는다.
“여기 카류리드의 쌍둥이 동생이지요.”
자신의 것과 같은 흑청빛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올리며 슬프게 웃었다.
-쾅!
기사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연회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가녀린 그림자의 여성이 뛰어 들어왔다. 잠시 멈춰 섰던 그녀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단상 아래로 다가갔다. 그녀의 걸음이 멈춘 것은 흩뿌려진 붉은 혈흔들이 남은 대리석 위였다.
“아아……!”
슬프게 절규하는 여인의 모습에 로웰은 카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카류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랑받고 싶어 했던 어머니, 아스트라한이었다.
“카류…내가, 이 어미가 잘못했다! 어서…어서 일어나렴…….”
갓난아기를 안듯 카류의 시신을 보듬어 안은 아스트라한은 힘없이 늘어진 카류의 손을 잡아 올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다, 아가. 내가 잘못했어…….”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카류만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로웰은 눈물고인 눈을 들어 단상위의 형제들에게 고정한다.
“그 소리들은, ‘이것’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로웰의 손에는 카류의 것임이 분명한 핏방울이 아롱진 투명한 구슬이 놓여있었다.
“카류를 지켜주시던 화룡 카뮤르 ․ 카이야님의 도움으로 생명의 궁에서 빼내 올 수 있었습니다.”
넋이 나간 듯 로웰의 손 위에 놓인 구슬만을 바라보던 루브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로웰의 손을 잡고 주저앉았다. 고고한 기품이 어린 붉은 눈동자가 습기로 번들거린다.
“무엄한 자로다! 화룡이라는 거짓된 술수로 태자전하의 눈을 어지럽히지 말라!”
당황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트로이 후작이 뒤늦게 호통을 쳤지만 로웰은 입 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조소를 날렸다.
“그대야 말로 거짓된 증거로 왕족을 모함했지 않은가? 그뿐인가? 이 나라를 지배하시는 국왕폐하를 협박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줄 아는가?!”
차분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싸늘하게 일갈한 로웰은 오열하고 있는 아스트라한을 끌어안았다. 울다 지쳐 쓰러져버린 그녀를 카류로부터 떼어놓은 로웰은 서늘한 눈으로 루브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믿어주지 못한 겁니까? 누구보다도 당신들을 사랑했던 아이었습니다. 자신을 믿어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들에게 검을 들이밀면서도 한없이 울었던 아이입니다. 당신들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이 그 아이 덕분임을 어째서 깨닫지 못하신 겁니까?”
“…어찌 몰랐겠는가. 어떻게 모를 수 있었겠는가……. 다만 태자의 신분으로 그를 감싸 안을 만한 힘이 없었을 따름이네. 배신감에 상처 입은 형제들을 감싸 안는 것만으로 나는 버거웠다. 그의 무죄를 입증한 세력조차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면서도 어찌 태자라 할 수 있겠는가. 알고 있었다. 나보다 카류의 그릇이 크다는 것 정도는. 아스트라한이 카류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란을 획책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알 것 같았다. 모든 정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카류는 내게 그렇게 웃어주지 않았겠지. 진심과 거짓을 구분하기에…내 나이는 결코 어리지 않았으니까.”
자조적인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말에 굳어버린 것은 귀족들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웃어주던 카류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교수대에 서서도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주던 그 얼굴을…….”
처형식에 참석했던 왕족은 하만국왕과 태자뿐이었다. 한계치까지 쌓인 눈물이 왼쪽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떻게 용서를 빌겠는가.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겠나. 모든 것이 내가 불민한 탓이거늘…….”
소리 없는 흐느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나름의 사정으로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죽음으로 몰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눈물.
“무엇을 원하는가?”
“무엇으로도 그의 죽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무엇으로도 너희들의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카류를 짓누르고 있는 ‘폐륜아’란 거짓된 껍질을 벗겨다오. 그를 달랠 두 재물을 다오.”
한 서린 목소리가 고압적인 태도로 요구한다.
“감히 어린 왕자를, 이 아르윈을 강국으로 만들 재목을 불태운 그들을 벌하라.”
“…누구를 말하는 건가.”
붉은 눈동자가 살의로 번뜩인다.
“트로이 후작. 그리고 마법사 유넨.”
두 얼굴들이 침중해진다.
“카류를 죽였다. 아들을 버렸다. 그의 호의를 왜곡했다. 거짓된 죄를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이 그들의 죄.”
반발은 없었다. 고고한 자세로 굳게 선 일곱 번째 왕자도, 그의 뒤에 무심한 표정으로 선 붉은 드래곤도, 고귀한 자로써 살의를 불태우는 태자도…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존재들이었다.
“처단하라.”
말이 검으로 변한다면, 대륙마저도 갈라낼 수 있을 법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반발은 없었다. 그는 고귀한 자리에 오를 태자. 대상은 구족을 멸할 죄인.
카류를 처형할 때와는 달랐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기사의 검. 슬픔보다는 분노가 서린 목소리.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혈선만 그어졌던 어린 소년의 시신과 달리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구는 불쾌한 모양새에도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으로 만족 하는가……?”
짙은 살의를 지워낸 붉은 태자가 목걸이를 주워드는 로웰에게 물었다. 끊어진 가죽끈을 무성의하게 묶어 목에 걸면서 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앞으론 어떻게 할 생각인가?”
“나는 하르트가의 후계자다.”
단호한 답에 루브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필로그
“카류, 내 아가……!”
아스트라한은 자신의 앞에 선 아이를 소중하게 보듬어 안았다. 조금 길어진 머리카락도, 더 이상 밤하늘과 같지 않은 태양빛 머리칼도 그녀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아가, 어디 가있었니…….”
금방 이라도 깨질 듯 약한 유리컵을 매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로웰은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아스트라한은 옅은 미소를 짓는다.
“졸리니? 자장가 불러줄게…….”
말라서 갈라진 붉은 입술이 열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언제까지 저러실까…….”
“…너무 힘들었던 거야.”
방문을 닫고 나서는 로웰을 보며 딜티가 한탄조로 중얼거리자 답변이 없을 것 같았던 로웰이 입을 열었다.
“카류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족의 사랑을 그리워했어. 어머니는 품을 떠나보낸 어린 아들을 떠올리며, 카류에게 애정표시 하는데 죄책감을 가졌던 거야. 그래서 카류에겐 냉정할 수밖에 없었지.”
묵묵히 귀 기울이는 딜티를 보며 로웰은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어긋난 거야. 처음부터.”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로웰을 뒤쫓아 가려던 딜티는 로웰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나 혼자 갈게, 오늘은.”
로웰의 걸음이 머문 곳은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곧게 선 비석이었다.
‘하만대의 마지막 왕자. 여기에 잠들다.’
흘려 쓴 필기체의 문장을 손끝으로 문지르던 그의 입이 열렸다. 너무 작아서 아무도 듣지 못할, 죽은 이를 향한 목소리.
“…미안해, 로웰.”
-외전
“저, 저기 잠깐만!!”
“응?”
그들이 처음 만나던 날. 침실에서 나가려는 로웰을, 카류가 붙잡았다.
“저기…부탁이 있어.”
“뭔데?”
우물쭈물 하던 카류가 로웰의 미소에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바꾸자!”
“응?”
“나, 네가 되보고 싶어.”
잠시 당황하던 로웰의 눈동자에 반짝-하고 장난기가 스친다. 그 눈빛을 포착한 카류도 긴장을 풀고 살짝 웃었다.
“바꾼다-라, 내가 왕자, 네가 귀족?”
“응, 일명 왕자와 거지놀이.”
“왕자와…거지?”
“아하하. 그런 게 있어.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
고개를 갸웃하는 로웰을 보며 카류는 빙긋 웃었다.
“그럼, 일주일 뒤에 봐요, 내 사랑♥"
금발을 한 카류가 흑청발의 로웰의 뺨에 가볍게 뽀뽀하며 생긋 웃었다. 이미 익숙해 질대로 익숙해진 로웰도 함께 웃으며 카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유적지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로웰은 카류로서 유적지에 가고, 카류는 로웰로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들뜬 듯 보이는 로웰을 보며 카류는 생긋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이로써 자신은 궁 밖에서 수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로웰은 성을 벗어나 고대하던 유적지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허나 예정일을 넘어섰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로웰을 기다리며 카류는 초조함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로웰로서 어머니, 아스트라한의 곁에 머물면서 그녀가 자신을, 카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친하게 지내고 있음에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그를 향한 질투도 이제 필요 없어 졌다. 남은 것은 그의 무사귀환 뿐.
눈을 떴다.
어둡다. 아니, 밝다.
아니다……. 소란스럽다. 여긴…어디?
카류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연회장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오른쪽에 서서 팔을 잡고 부축하고 있는 이를 눈만 돌려 확인한 그는 안심하고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옆에 선 사람은 카이였다.
동그랗고 순진한 눈동자가 돌연 커지며 눈물이 아롱진다.
단상 위에 있는 형제들.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서 이 많은 귀족들이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서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그걸로 만족했다.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형제들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눈물이 떨어진다.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에는 익숙한 흑청빛이 담겨있었다.
‘로웰……!!’
크게 소리 질렀지만,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발도, 팔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카류의 오른팔을 잡고 있던 카이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무어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건만,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만 카류의 귀에 닿았다. 온화한 미소와 덜어지는 핏방울. 모드 상황이 끝났을 때 카이의 다른 손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울리는 음성은 그의 것.
단 한 번도 끝까지 들리지 않았던 말들이 쏟아졌다. 누구도 믿지 않았던 그의 결백이 증명되었다. 경악하는 그들 틈에서 카류는 걸음을 옮겼다. 카류의 모습을 한 로웰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 카류는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전날 밤, 로웰이 자신에게 한 말을.
-“왕자와 거지 놀이, 한 번 더 하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카류는 로웰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로웰의 뜻.
힘껏 입술을 물며 ‘로웰’의 말을 읊는다.
‘카류’를 안고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는 주먹을 꾹 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로웰.
끝내 너를 지워서 미안하다…….
다음엔…다음엔…….
+
앞뒤가 안맞는 부분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실 바래요^^;
첫댓글 완결을 축하드려요 !
감사해요;ㅁ;
재밌는 걸요~~~~ 꺄....... 로웰..... 불쌍시러워요..;
다시 읽어도 여전히 슬프군요.......................................[<]
아, 안습ㅠㅠ 울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