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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 우리는 '가정의 달' 이라 하여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되새겨 보게 합니다.
이 5월에 그간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후회하며 '부모님에게 바치는 글' 을 몇 차례 나누어
올리며 용서를 빌어 보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 (Prologue)
언제부터 인가 토요일이면 '황금 연못' 시간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이 있기 때문이고 저는 어김없이 그 프로를 보며 눈시울을 적십니다.
울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를 보며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을 기리며, 부모님께 지은
죄를 마음으로 나마 용서 받기 위함이고 부모님 영정 사진이라도 앞에 놓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당신의 세월"을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먼저 아버님께 드리는 용서의 글입니다.
어쩌다 이 불효 자식 어언 8 순을 넘기고 살아온 세월 뒤로 하고 앞으로 살아갈 세월 세면서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되니, 부모님께 지은 죄 한 없이 죄스럽고 용서 받고 싶은 생각만 가득한데, 이미 아버지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니 한으로 밖에 남으니 가슴이 메어옵니다.
세상 어느 누가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때, 태어나고 싶은 곳에서 태어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 일제 강점이 시작된 다음 해 1911년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제 나이 29세 때 제가 군대까지 마치고 귀가하던 그 해 1967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곳이니 얼마나 오지인지
짐작이 되리라 여깁니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신 아버지,
비록 어느 정도 사시는 집에서 태어나셨지만 큰 자식만 위하던 시절이라 아버지는 17세에 동갑내기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31세에 동네에서 가장 허름한 집으로 분가 하실 때 가지고 나오신 것은 아무것도 없으셨답니다.
아버지!
14년 간을 큰 댁에서 머슴으로 살았어도 그렇게 는 나오시지는 안 했겠지요. 큰 댁에 사시면서 19세에 첫 아기를
낳으시기 시작하여 6 남매를 낳으셨지만, 6 남매 중 두 살도 안 되어 4 남매는 저 세상으로 보내실 때, 부모 님
가슴에 박힌 한은 어떠셨으리라 짐작하기도 서럽습니다.
아버지, 다 쓰러져가는 집으로 이사 오셔 가난 벗어나려 해 뜨기 전에 일터에 나가셔 달 보고 집으로 오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항상 지게를 업고 지게는 아버지를 보듬고 사셨습니다. 그런 고생 끝에 새집을 지어 이사하신
아버지 어머니의 기쁨은 제가 어려서 짐작하기 어렵지만 하늘을 나는 아버지 어머니 이셨겠지요.
아버지,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날만 세면 지게 짊어지고 산으로 가셔 등걸(나무 베어내고 남은 밑 둥)을 캐서 장작을 만들어 장에 나가
파셨지요. 그런데 이 자식 철 없이 아버지를 따라 나섰고 그 높은 산 오르시기도 힘드시고 등걸 캐기도 힘드셨을
터인데, 산에 도착하면 칡 뿌리 캐 먹이고 산 딸기, 머루, 다래 따 먹이고 심지어 소나무 가지 벗겨 속을 훑어 먹게
하고요. 그것이 일에 바쁘신 아버지 시간을 빼앗고 아버지를 힘들게 하였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하며 가슴을 칩니다.
그 뿐인가요.
날만 세면 집에서 먹는 보리밥 싫다고 큰 댁으로 쪼르르 올라가 쌀밥을 얻어먹고 했네요. 그것이 얼마나 아버지
어머니 마음을 힘들게 한 일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옵니다.
아버지!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때는 문맹이 100%였던 시절이라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시는 동네 어른들을 모셔 놓고 동네 사랑방에 모여서
낮의 피로함도 잊은 채, 춘향 전, 장화홍련 전, 심청 전 등을 읽어주시던 아버지, 그 목소리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싶고 감탄하며 눈시울 적시시던 그 어머니들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 또 기억합니다.
아버지 마음이 여리셔서 남의 아픔 보지 못하시는 아버지라 걸핏하면 보증 서서 그 뒷감당을 하시며 힘들어
하시던 착한 아버지.
구장(지금의 이장) 일 하시면서 온 동네 일 다 맡아하시고, 밤늦게 찾아오시는 지서(지금의 파출소) 순경 님 들,
때 구분 없이 밥 해드리던 우리 아버지. 어찌 6개 리(里)가 있었는데, 그 순경들은 꼭 우리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하셨던 지 그것은 아버지의 덕이었을 겁니다!
한 번은 동네 어느 어른이 남의 벼를 훔치는 것을 보시고도 말씀을 안 하셔서 넘어간 일도 있으셨지요. 먼 훗날
그분의 아들이 저에게 고마움을 표하셔서 알았습니다. 그렇게 선하게 사셨기 때문에 6.25 후 빨갱이 세상이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무사히 넘기실 수 있었던 아버지셨지요
사랑합니다. 당신의 선한 삶을.
아버지!
일제 강점기, 때가 때인 지라 아버지 결국 징용으로 끌려가서 군산 비행장 취사 반에 근무하실 때 가끔 집에 오셨다
가셨지요. 오실 때마다 바나나, 미루크(사탕), 미깡(귤), 껌 등을 가져오셨고. 그것을 들고 동네에 나가면 아이들
그 맛 한 번 보려고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니었어요. 그때 우쭐대던 이 아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징용으로 끌려가서
일본 어느 탄광에나 가셨던 지 아니면 남태평양 어느 열대 섬에 가셨다면 아버지 운명 우리 가정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그 세월 입니다.
아버지!
이 불효자 해방 이듬해 9살이 되어 초등학교 입학을 하라고 권할 때 이미 4 남매나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셨기에
언제 어떻게 될까 노심초사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는 냉큼 허락도 안 하셨지요. 다른 친구들은 서당에도 다니던
그 때, 아버지는 이 자식을 품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시며, 물가에 가지 말라, 높은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
만 하시지 안 하셨던 가요.
결국 해방의 덕으로 이 자식 겨우 초등학교를 들어갔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때 6년 간 양복 한 벌 얻어 입지
못했고, 운동화 한 켤레 신지 못하고 졸업했고요. 도시락도 싸가지 못해서 학교 갈 때에 고구마 한두 개 가지고
가서 산 어느 나무 밑에 숨겨두었다가 돌아올 때 찾아 먹던 그 기억 아련한 추억입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은 이 자식의 중학교 입학을 막았지요.
기약 없이 쉬는 동안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한다고 군산공설운동장에 진을 치고 있던 부대에 사촌 형님의 덕택으로
김 달수 중대장 님의 전령이 되어 얻어먹고 살던 그때 그것도 복이라고 부대가 철수하는 바람에 몇 개월 못 있다가
다시 집으로 왔지요.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든 이듬해에는 중학교에 가겠다고 날만 세면 어머니와 솔방울 따러 다녔고, 딴 솔방울은
20 리(8킬로미터)가 넘는 대야 장에 가서 팔아 그 돈으로 중학교에 가려할 때, 아버지는 가정 형편을 고려해 가까운
임피 중학교에 가라 하시고 이 자식은 군산 중학교에 가겠다고 하였을 때, 그 먼 거리 어떻게 다니려 하느냐며 말리
시던 아버지.
결국 이 자식 '넣어 만 주시면 걸어서 다닐 것이며 좋은 학교 나와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믿으시고
허락하셨지요.
그 결정을 하시고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걱정을 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 합니다.
그렇게 3 년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80 리 길을 걸어서 다닐 때, 별 보고 집을 나서 달 보고 집에 오는 자식이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시고 집에 올 때면 창감 재라는 고개를 넘어 혼자 올 때,
들짐승 날 짐승에 놀라 땀 범벅이 되어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리시던 아버지 어머니.
그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돌아올 때 이 자식 어디로 오나 몰라 호롱 불 들고 기다리시던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 휘파람 소리 듣고 저리 오는구나
하시며 호롱 불 흔들며 달려오시던 아버지 어머니.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다니던 3학년 말쯤 11월 어느 날, 비가 오는 것을 맞고 집에 왔을 때, 어머님 '옷을 벗어 들고 오지 그 비
다 맞고 왔느냐?" 한마디에 그간 가슴에 쌓인 한을 다 토해내듯 통곡하던 그 일이 아버지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아픔이었을까요. 결국 그 가난 속에서 아버지는 다음 날 학교 근처에 집을 사셔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제일 가까이 다니는 아들이 되었지요.
그러나 그 일이 가난한 아버지 어머니께 가난을 벗어나려는 삶을 얼마나 더디게 했고 그때 진 빚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가슴을 적십니다.
그 보답으로 죽도록 열심히 공부하여 아버지 어머니께 약속을 지키려던 이 아들이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시 포기해야만 했지요. 군산 집을 다시 팔고 집으로 짐 싸서 돌아온 아들 결국 세상에 다시 없는 큰 죄를
지었지요. 우울증에 걸려 세상을 하직 하려는 끔찍한 불효를 저질렀지요. 결국 목숨은 건졌지만 그 죄 어디에서
갚을 수 있으리오.
겨우 병원에서 퇴원한 아들, 무작정 가방 하나 둘러메고 집을 나선 이 아들, 천운(天運)이 있었던가, 무작정 상경이
운명을 바꾼 외출이 되었고, 그간 초조함과 불안으로 날을 보내시던 아버지 어머니께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 서울에서 가정교사 자리 얻었어요. 이제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하는
소식이 왔으니 그때 아버지 어머니 가슴을 쓸어 내리시고 두 분 엉켜 울었으리라 생각 됩니다.
다음 해 대학에 입학했지요. 5년 간 비록 가정교사, 장학금 받으며 대학을 다녔지만 아버지 이 아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두 번째 새로 지어 이사하신 집은 결국 파시고 남의 헌 집 헐어다가 새로 집을 지어 노후까지 보내셨지요.
대학교 1학년 때 영장이 나왔었지요. 9 살에 초등학교 입학하여 중학교 갈 때, 대학에 갈 때 한 해씩 쉬어 남들보다
4년이나 늦었으니 그랬지요. 그러나 어떻게 잡은 대학인데 그 가정교사 자리 놓치면 대학도 또 포기해야 하는데 그래서
기피 한 것이 4학년 여름 때 기피자로 몰려 잡혀가 형무소 생활을 하였지요.
다행히 검사 님 제 형편 들으시고 졸업하면 군대에 가기로 한 약속을 믿으시고 열흘 만에 풀려났고, 졸업하자 마자
군 자원 입대 28 연대에서 6주 훈련 받는 사이 CID에 차출 되어 기뻐하던 이 아들 신원 조회에 기피자로 몰려 다시
후반기 교육을 받았네요.
그나마 기관총(LMG) 사수가 되어 4주를 받고 최 일선 7 사단 전방 부대에 배치 거기에서 또 4주 훈련을 받았지요.
신장마저 작아 기관총 훈련 받는 동안 어깨에 피가 맺히는 고된 훈련만 4개월이나 받는 고통의 세월이었네요.
아 끔찍한 추억이지요. 31개월의 군대 생활을 마치는 동안 이 아들이 지은 천추의 한이 된 이야기를 쓰려니 벌써
가슴이 조여 옵니다.
상병 때 휴가 나왔다가 벌어진 일이지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못 가서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가 겨우 생명을
구하였을 때, 고등학교 때 사귀던 지향이 보고 싶다는 말에 아버지는 이 자식을 살리겠다는 심정으로 돛 단배 전세
내어 충청도까지 건너가셨다가 거절 당하고 돌아오신 아버지.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그런데 그녀는 이미 가난한 저를 버리고 부잣집으로 정혼 했다는 것을 먼 훗날에야 알았지요. 그 지향이가 제가
휴가 나왔을 때 이혼을 전제로 집에 왔다는 소리에 첫 정이 무엇이었던지 그렇게 내 자식 살려 달라며 찾아간
아버지 말씀을 거역한 그 여인을 맞기로 했지요.
1966년 4월 10일.
그녀는 5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강원도 화천 저 북방 사방 거리 부대까지 왔지요.
그날부터 사병이 영외 살림을 시작하였고(물론 나는 부대에 있고) 운명이었던지 5년이나 아기가 생기지 않았던
지향이 우리 큰 딸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드리겠다고 말씀 한 번 못 드리고, 제대 얼마 앞둔 그 해
12월 말쯤 먼저 집에 보냈으니 부모님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큰 아픔이었겠지요.
하필 제대가 1967년 1월 15 일이라 직장을 구하려면 또 한 해를 기다려야 하니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는
아픔이었겠습니까? 그 와중에 정말 부모님께 용서 받지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내가 이혼 협의서 만 받고 저에게 급히 오는 바람에 이혼 신고서도 접수하지 않고 왔고, 저도 최전방에 근무
하느라고 일 처리를 할 사이가 없었기에 매듭을 짓지 못한 사이, 아이 아빠가 아기를 데리고 가면서 그 사실을
알고 간통으로 고소를 하였으니 아버지 어머니께 이 보다 더 큰 청천벽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행히 이혼 협의서 때문에 문제 없이 끝났지만 큰일은 그해 여름에 일어났습니다. 남의 대 밭에서 대나무 베다가
자구로 잘못해서 제 다리를 살짝 찍혔는데 피가 많이 나는 바람에 제가 기절을 하고 말았지요.
29세 때 첫 딸까지 낳은 아들이 겨우 법원 일이 끝나서 후유 하고 숨 쉬려는 데, 어떻게 키워온 자식인데 그 자식이
죽어 자빠지니 아버지는 혼비 백산 하시는 지경이었지요.
그 못난 자식이 살아나 숨을 쉬자 지금까지 참고 참았던 아버지께서 폭발하셨지요.
"에라 이놈 뒤져버려라"하고.
평생 이 자식에게 '저리 가라' 한 번 안 하신 아버지셨는데...
아버지!
6 남매 낳아 두 살도 안 되어 4 남매 저 세상으로 보내고 금지옥엽 키운 이 자식이, 29세에 애기 아빠까지 된 자식이,
성공해서 부모님께 효도 하겠다던 그 자식이,
아직 취직도 못한 처지에 죽어 자빠지니 그 놀램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다음 해 다행히 직장을 잡아 아내도 아기도 서울로 데려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직장을 구하다 보니 좋은 직장을 얻기 힘들었지요. 그러나 열심히 살았습니다.
아끼고 저축하여 큰 새집으로 이사한 후 대학 졸업식에도 오시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를 모셨을 때 많이 기뻐하셨지요.
그런데 3일 만에 아버지는 내려가시겠다고 하셨고 더 계시다 가시라며 말렸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내려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가 서울 집의 화장실이 불편해서
그러셨다는 것을 먼 훗날에야 어머니한테 들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시골 화장실 생활에 젖으신 아버지이셨기에
서울 화장실이 부담스러우셨다니 그것을 알지 못한 이 아들이 부끄럽습니다.
아버지는 그 길로 내려가셔 얼마 되지 않은 후 중풍으로 쓰러져 7년이나 고생하시다가 영면하셨지요. 7년 중 남은
2년은 식물인간으로 사시다가 가셨잖아요.
그런데 그 7년 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 병 수발에 열녀 소리 들을 만큼 헌신하셨습니다. 그 은혜 기억하려 그러셨던지
아버지는 어머니 생신 다음 날 영면하셨습니다.
그 7년 동안 아버지 문병 드리지 못한 한 천추의 한으로 남습니다.
아버지!
일생을 두고 용서를 빈들 이 아들이 지은 죄 용서되리오. 이 아들 죽을 고비에서 보고 싶은 사람 있다 하시자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 죽어가는 내 자식이 너를 보고 싶다 하니, 내 자식 살려 달라시며 한 번만 만나주지 않겠느냐
하셨을 때, 거절하고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갔던 그 처녀, 먼 훗날 며느리라며 아버지 어머니 앞에 나타났을 때
용서하신 아버지.
그 며느리가 바람이 나 이 아들 버리고 나갔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까요!
하늘 아래 이 아들이 지은 죄 중 그보다 큰 죄 있으리오. 두고두고 한이 되고 아버지 어머니 가슴에 비수를 꽂는
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한평생 삶다운 삶 한 번 사시지 못하고 이 불효자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소천 하신 날 1980년 1월 28일.
그날은 어머니 생신 다음 날이었습니다.
식물인간으로 의식도 없이 사신 아버지가 어머니 생신 다음 날 소천 하심은 어머님께 은혜를 갚으시려는 마음이셨을
거라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왜 그리도 눈이 많이 내리고 추웠던가요.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높이가 너무 높았고 영정을 들고 가던 손이 꽁꽁
얼고 땅은 얼어 산소일 마저 마무리를 못하고 날씨가 풀린 후 마무리 하였지요.
아 돌아보니 이 모든 불효자의 삶이 한이옵니다.
그 한을 갚을 길도 없어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봅니다.
세상에 저 같은 자식 두려면 무엇 하러 아들 딸 낳으리오.
불면 꺼질세라 놓으면 깨질세라 가슴 졸이며 키운 자식
6남매 중 못난이 우리 누나 그리고 저만 살았다는데
바꾸어 살았다면 우리 부모 그 아픈 삶은 살지 안 했을 텐데.
아 보고 싶습니다.
아 사랑합니다, 아버지 삶의 세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