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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스님 법문
“지계없이 마음정화 어렵지요”
부처님의 계율
우주의 질서 함축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덕률
생활속 가장 쉬운
수행법은 염불
부처님 명호
언제나 염하세요
“우리 중생들은 본래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제행무상이라, 모든 존재는 본래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 순간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변해갑니다. 만법유정이라, 모든 것은 그때 그때 태어나고 생겨납니다. 그러니 나라고 고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성 그 자리가 바로 순수생명자리입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임을 깨달은 분이 바로 성인입니다. 바른 신앙을 하기위해서는 모든 게 다 하나의 도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힌두교, 불교 다 마찬가집니다. 우주의 근원적 생명을 이름만 다르게 부르는 것 일뿐 모두 같습니다.
항상 명심하십시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것도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찬란한 생명이자, 광명입니다. 진여불성이 나의 근본생명이자 모든 것의 근본 생명임을 깨달으세요.”
법문을 마치고, 스님은 대웅전 앞마당에 선 불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법단을 내려오셨다. 깡마른 몸매에 형형한 눈빛과 자애로운 미소의 스님 모습 자체에서 많은 불자들은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받는 듯 했다.
성륜사신도회 부회장인 배광식 거사는 청화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85년인가, 제가 집사람과 스님을 뵙기 위해 태안사에 갔을 때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때 걸레로 마루바닥을 훔치고 계시다 저희를 맞으셨어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죠. 큰 스님이 마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직접 걸레질을 한다는 것을요. 그때 <금강경>에 ‘희유세존(希有世尊)’이라는 감탄사가 나오게 된 연유를 깨달았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스님의 자세, 행동 그대로가 바로 가르침이 되어 부단히 우리 불자들을 각성시키시는 걸요.”
스님을 곁에서 지켜본 불자들은 한결같이 항상 겸손하고, 자비하신 청화스님의 모습에 감복한다. 찾아온 불자들이 행여 불편할까 항상 편하게 앉으라 하고, 방석이라도 없이 앉은 이가 있으면 스님이 앉았던 방석을 내어주신다. 몇 해 전에는 당신이 평생 지니며 굴리면서 수행의 도반으로 삼아온 온 염주를 ‘우리는 선우’의 장학기금마련 자선 바자회에 내놓으시기도 하는 등 자비로운 스님의 면모는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일찍이 14살 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교과정을 마친 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고향 무안에 청운고등공민학교를 세워 후학을 지도했다. 그 학교가 지금도 남아있는 망운중학교다. 현대 물리학과 철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스님은 청년시절부터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궁극에도 풀리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의문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는데 금타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의문을 풀게 되었다 한다.
스님이 은사 금타스님의 유고들을 모아 펴낸 <금강심론>에는 근본불교의 핵심으로서 견성성불에 필수적인 근본선정인 구차제정의 역설과 각 경론의 모든 수행법과 수행의 위차를 종합 회통하여 해탈 16지로서 수행차서를 정립해 놓았는데, 특히 불교의 우주관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스님은 이같은 금타스님의 영향으로 현대물리학과 철학 등에도 매우 해박하고 법석에서도 이를 불교적으로 풀이한 법문도 자주 하신다. 세상의 모든 물체들은 물질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입자를 분석하면 핵전자의 소립자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의 세계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그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순수에너지가 바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양자론과 현대과학으로도 증명하지 못하는 순수 에너지의 실체를 설명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를 스스럼없이 펼쳐보이시는 것이다.
스님은 수행이 철저하셨던 은사스님을 따라 묵언과 장좌불와를 평생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오셨다. 상원, 백장암 등 여러 토굴에서 50여년간 늘 검소함과 부지런함으로 한치의 게으름도 용납없이 수행에 매진하셨다고 한다. 직접 끼니를 만들어 잡수시고, 의복 빨래도 직접 하셨다. 한 겨울에도 찬물에 목욕을 하는 등 철저히 정진했다. 스님은 지난 95년 미국으로 건너가 팜스프링 금강선원에서 3년간 하루 한끼 공양과 묵언, 장좌불와의 정진결사를 성취하셨다. 현재 청화스님은 80에 가까운 세수지만 참선과 묵언수행을 철저히 지키시는 등 여전히 엄격한 수행의 길을 걷고 계신다. 그런 스님이 불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가르침은 계율을 지키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 만큼 합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계율은 우리 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입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계명, 그러한 세계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의 계율에 들어있습니다.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도 편해집니다. 우리가 참선염불을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 뿐이지 마음이 정화가 안됩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 안되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 정화는 올 수가 없지요.”
혜운사에서 스님은 환한 미소로 기자를 비롯한 내방객들을 맞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우리에게 연신 편히 앉으라고 하셨다. 옆에 있던 한 분이 “편히 앉지 않으시면 스님께선 불편해서 말씀을 제대로 못하십니다. 편하게 앉으세요”라고 눈치를 준 후에야 무릎을 풀어 편한 자세를 취했다. 스님께 옛날 수행하던 시절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
“내가 수행은 잘못했거든요. 그래서 오늘날 이러고 있습니다. 수행을 잘 했으면 삼명육통을 다해서 신통자재할 것인데, 수행을 흉내만 내놔서 잘 못했어요. 그래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후회만 막심합니다. 당시에 계행도 훨씬 더 철저히 하고, 공부도 용맹정진을 거듭했으면 진작 생사대사를 끝내버렸을 터인데... 나는 지금도 생사대사를 다 끝내버리지를 못했거든요. 공부를 시원찮게 했다는 증거 아닙니까.”
언젠가 기자가 서울에 있는 책방 여시아문에서, 안거를 마치고 시자와 함께 책을 사러 오신 스님을 우연히 만나 뵙고, 안부를 여쭈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스님은 “나이가 들어서도 묵언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30~40대에 열심히 공부하고, 나이 들어서는 중생교화에 힘써야 마땅하나, 아직 공부가 덜 돼서 중생교화를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참된 수행에 이르기 위해 묵언수행은 필수입니다. 정평있는 수행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라며 겸손해 하셨다.
스님께 다시 여쭈었다.
“스님, 공부하다가 막힐 때는 어찌해야 하나요? 특히나 요즘엔 다양한 수행법이 유행해서 불자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어떻게 판단하고 수행에 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명상법이 다 좋기는 좋은데, 그런 법은 해탈의 법이 아닙니다. 이른바 생사대사를 해탈하고 성자가 되는 법이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로 말하면 유위법이라. 삶의 유한적인 공덕을 위해 하는 법이기 때문에 몸이 좋아진다든가, 머리가 맑아진다든가 하는 데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좋겠지요. 그러나 종교인으로서 정말로 생사윤회를 떠나서 부처가 되어야겠다, 성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겐 미흡합니다. 미흡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제시한 수행법으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 하는 데는 좋지요.
그러나 그것이 구경(究竟)의 경지라고 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부처님법과는 거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도 삼매에 들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위빠사나가 끝이 아니라 이 위빠사나를 통해서 삼매로 나아가면 좋지요. 그러나 보통은 위빠사나가 제일 수승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요.
부처님의 명상법이 제일 완벽하고, 가장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부처님 명상법은 바로 성인이 되고, 생사대사를 초월해서 영생으로 가는 법이기에 가장 완벽한 법입니다. 다른 법은 최상의 법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다른 법은 유한적인 공덕이 크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성을 알고 하면 좋습니다.”
하루 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생활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청했다.
“부처님 법은 쉽다고 하면 제일 쉽습니다. 어째서 쉽다고 하느냐면 우주의 원리를 보탬이 없이 그대로 정확히 말씀하신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은 염불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굉장히 소중한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체계가 복잡한 것만을 높은 줄 알고 염불은 너무 쉬우니까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명호부사의라! 그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음성 모든 형체 하나 하나에 다 의미가 있습니다. 최상의 개념이 담겨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 이름입니다. 제일 쉽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삼세제불이 모두 순수한 이름입니다. 우주의 자비가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이고, 우주 생명자체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님은 불자들에게 수행방법으로 어느 한 방법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화두선으로, 의지적인 사람에게는 묵조선으로, 각기 근기에 맞도록 이끌어주신다. 특히 스님은 지정의(知情意)를 조화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염불선(念佛禪) 제창하기도 하셨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현대인들에게 알맞은 행법이 인간의 근본을 되찾는 염불법이라 설하시는 스님은 염불에 화두를 붙여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 방법과 본래가 부처라는 확신을 갖고 부처님의 법신을 관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의 방법을 통해 깨달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가르침을 주셨다.
일채 존재는 한 생명체
부처와 나 둘 아님을 믿으세요
출·재가 막론하고 계율지켜야
기본적인 출가수행자의 계율이 오후불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취침할 때까지 눕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묵언하면서 하루 한끼니만 먹는 일종식으로 일체 눕지않고 참선하며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40여년 지켜온 선승 청화스님(곡성 성륜사 조실). 보통사람의 눈에는 고행으로 보이는 그 생활이 편해서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라는 스님은 이제는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원칙은 세워놓고 있으나 고집하지는 않고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안거와 포교로 3년을 보내고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만나 살아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물음인 생명의 실상과 우주과학시대 한국불교의 향방에 대해 들었다.
─21세기는 시간의 속도를 짐작하기 어렵고 과학만능의 치달음 속에서 무섭게 변한다는 고백을 하며 살게됩니다. 이같은 우주 과학시대의 참다운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이 말은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합리적인 도리에 입각하여 믿어야 하지, 불합리한데도 분별없이 전통적인 권위나 인습적인 법집(法執)을 답습한다면 참다운 종교가 못됩니다. 아집 법집을 여의는 것이 참다운 과학이요 진정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정신이 기본이 되어서 현대물리학이 나온 것 아닙니까. 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종교는 불교다. 또한 현대과학이 결(缺)하고 있는 것을 메꾸어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진정으로 아는 분이라고 봅니다. 우주 과학시대의 종교는 철학을 날줄로, 과학을 씨줄로 서로 보완하고 조화하는 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심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신심(信心)은 마음을 활짝 열고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반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물질은 곧 의식이요 생명이므로 지구도 태양도 다같은 생명이며 태양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요, 또 대세지보살과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이대로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조그마한 자기 생각으로 좁혀서는 안됩니다. 원융무애한 생명을 구분짓고 가로막는 망념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삼천대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5척남짓한 이 몸뚱이에 들어있는 의식만 생명이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한결같이 다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못 열려서 나로 보이고 너로 보이고 남으로 보이고, 그 무엇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기복불교의 폐단으로 우선 꼽는 것이 일신의 안위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불교적인 행태이기도 하지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모양(相)만 보기 때문에 그 모양만 실상 실제인 것이고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보세요. 남자같이 생기고, 또는 여자같이 생기고, 잘 나고 못나고 하는 그런 현상적인 상만 사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지혜로 볼 때는 사실 그런 상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상은 본래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봅니다. 현상적인 모든 것은 사실상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상대 유한적인 인간의 업장으로 갇혀있을 뿐입니다.
─종교는 생명의 문제에 직결된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참 생명은 어떤것입니까.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자취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자취가 없고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다른 동물의 생명도 자취가 없습니다. 나무 같은 상, 풀 같은 상만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러한 나무나 풀도 역시 생명 자체는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 생명 자체는 우리 인간의 몸 속의 신장에나 또는 뇌 속에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 생명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나 물이나 흙이나 모두가 다 생명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생명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 그 생명은 바로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무량 무변하게 충만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 우주라는 것은 사실 생명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박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똑 같은 생명입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업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생명은 우리의 마음이요 중생이요 부처입니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이나 중생이나 또는 부처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이것은 무슨 원리나 또는 가치나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럽니다. 따라서 천지 우주가 오직 동일한 생명이므로 성품은 모두 같은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불자이며 최상의 공덕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생명에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는 것은 손실을 떠나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되는데요.
▲우리 중생의 허물이 무엇인고 하면 모양 이것은 가짜이고 허망한데 그것을 구하다가 우리 소중한 인생이 다 판나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부자면 부자된 만큼, 감투가 높으면 높은 만큼 공부에는 손해입니다. 또 중생의 망상 가운데 주의할 것은 무슨 일을 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연이 합해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어느 개인의 개별적인 자기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관자는 있습니다. 인연이 합해지면 잠시간 무엇이 이루어지고 인연 화합이 안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뿐인 것이지요.
─생명은 모두를 갖추고 있고 무한한 것이라면 죽은 영가에 대해서도 궁금해집니다. 특히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동참하는 기도가 영가천도일 것입니다. 더구나 영가천도에 대해 교계에서는 ‘청화스님 신드롬’이 일 정도로 도력을 보여주시고 계신데요.
▲천도의식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부처이고 부처로 되어야합니다. 설사 어떤 상황이라도 부처가 됩니다. 그런데 극락세계 가는 것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저승길이 어두워 헤매게 됩니다. 금생 60~70년동안을 몸뚱이와 의식을 같이해 살았을 때 닦았으면, 본래적인 마음과 하나면 우주와 화합돼 극락에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미처 업을 못녹인 습관성으로 업식이 남아 있습니다. 업식이 당분간 존재하면 괴롭습니다. 개나 돼지 등 짐승처럼 생활하면 업식이 흘러 그대로 갑니다.
그래서 그 업식으로 헤매는 영혼을 타일러서 인도하는 것이 천도의식입니다. 금생에 못닦은 미혹된 영혼을 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귀신을 천도하는 데는 청정도량인 절에서 바른 계행으로 조심조심 청정히 하는 것이 의의가 큽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절에서 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고인의 위패를 적고 향을 피운뒤 업식을 소청해도 좋습니다.
“영가시여 부처님 가피력으로 나오라”고 해서 <반야심경><법성게> 등을 독송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가들에게 인연생으로 왔다가 인연생으로 간 것이고 따라서 누구도 원망해서는 갈 곳을 못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독경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선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이 공산화된 지금 우리나라는 선불교의 종주격임에도, 세계적 조류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에서 3년여 머무시기도 하셨는데요, 세계적 흐름에 부응키 위해 우리 불교가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승가 생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인간의 진정한 생활 표본입니다. 승가 생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아 무소유 생활 아니겠습니까. 달마스님 때부터 6조 혜능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선시대 이른바 순선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의 법문을 가장 중요한 권위로 의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심법문입니다. 이 가르침을 선양하고 진작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자기 문중이나 절 때문에 애쓰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승단이 바르게 서고 이 법향이 세계로 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수행도 한국불교 교단사를 돌아보면 교학을 가르쳐서 선(禪)의 갈래 즉 깊고 얕음을 안 후에 참선을 시켰습니다. 교에 따라 원만하고 합리적인 도리에 따라 실천했던 것입니다. 간화선만이 최고라는 바짝 마른 논리는 위험한 일입니다. 간화선이 한국불교에 수승한 위치로 훌륭한 참선수행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짚어보면, 임제종 간화선은 종파분별이 극에 달했던 중국 송나라때 분열상의 한 종파로서 고려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더 이상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채 오늘날까지 내려온 참선법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원나라를 거쳐 수백년을 각기 소견으로 분열되다가 마침내 명나라때 가서 하나의 도로 종합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 등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하는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달마스님때부터 6조까지는 이런 이름도 없이 오로지 마음공부만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범부소견으로 무엇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불교가 수행의 중요성을 찾고 회귀하고 있는 흐름 속에서 깊이 성숙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불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삼매에 못드는 것입니다. 이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에게 다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현실이 바쁘고 복잡하지만, 반드시 가야하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게 되는 것이 성불입니다.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꼭 성불하게 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전쟁 지진 등 별별 일이 다 일어나도 차츰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다다르게되는 성불의 길에 가장 지름길이 참선입니다. 유일한 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것은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야 욕계가 보이고 초월하게 됩니다. 탁수를 가만히 두면 맑은 물만 뜨는 이치와 같습니다. 고요히 맑히고 또 맑히라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이곳 조선당(祖禪堂) 법당은 아주 특이하게도 부처님 고행상을 모셔놓았습니다. 스님께서는 40여년 힘든 고행을 하신 선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듯한 형형한 눈빛이 수행의 무게를 짐작하게 합니다.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스님께서 하신 고행을 권하시는지요.
▲고행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이 마음닦기 알맞은 것이어서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오히려 제대로 못해서 안타깝지요.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데 몸을 그렁저렁 두면 게을러지기 십상입니다. 몸으로 계행 청정해야 하는데 남 눈에는 고행으로 보이는 모양이나 내게는 온몸이 시원스러울 정도로 편한 생활방식입니다. 장좌불와를 해보면 눕는 것보다 정삼각으로 앉는 자세가 가장 편합니다. 일체 여래의 상징적인 모습이 가부좌입니다. 망상이 일지않고 마구니가 봐도 피합니다. 그러나 어거지로 하면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개별적으로 알아서 해야할 일이지요. 다만, 부처님 계율만은 도덕적인 윤리로써재가 출가자 모두 지켜야 합니다. 출 재가자를 막론하고 계율을 지키면 선신이 북돋아주고 악신이 물러갑니다. 결코 ‘나는 혼자다’는 생각을 마시기 바랍니다.
-“계율 제대로 지키면 나도 이웃도 편해져”-
-“相을 떠난 도업 쌓으면 대자유의 길 열려”-
성자는 만물을 한생명으로 보고
중생은 천차만별로 나누어 생각
40년 장좌불와로 정진해오며 소탈한 대선지식의 면모를 보여주셨던 청화스님(76). 지난 95년 출국해 미국에서의 3년결사를 마친 스님은 3년만인 9일 일시 귀국했다. 청화스님은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열화와 같은 불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광주 성륜사(12일), 청평 반야사(14일), 변산 실상사(25일), 강릉 성원사(28일) 등에서 법문했다.
14일 반야사에서는 먼길도 마다않고 모여든 전국의 불자들이 오랜만에 듣는 감로수같은 스님의 가르침에 귀를 귀울였다. 청화스님의 이날 법문을 요약해 지상중계한다. 스님은 순회 법회를 마치고, 30일 미국으로 다시 출국한다. <편집자 주>
불교를 말할 때 우리는 그 교리가 주로 한문으로만 표현되고, 내용도 이래저래 갈래가 많아서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워 들어가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문에 몸담아 온 나는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법의 요체는 불자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는 바와 같이 청정한 계율, 참선염불하는 선정과 또 인간의 본질과 우주만유의 근본성품인 본체를 아는 지혜, 이 세가지입니다. 이 세가지야말로 우리 마음과 몸을 편하게 하고, 사람 사람과의 관계나 모든 것을 순탄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같이 합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계율은 우리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입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계명, 그러한 세계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의 계율에 들어 있습니다.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도 편해집니다. 우리가 참선 염불을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 뿐이지 마음이 정화가 안됩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 안되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정화는 올 수가 없지요.
참다운 지혜는 반야의 지혜입니다. 세속적인 분별지혜, 차별적인 지혜, 이런 것은 우리 인간 의식의 범위 내에서 분별하는 것이지, 초월적인 모든 존재 본질의 지혜는 못 됩니다. 따라서 좀 재주가 있고, 학문적인 수련이 깊어서 분별적인 지혜는 어느 정도 익힌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초월적인 문제를 통틀어서 제일의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른바 무위법입니다. 또는 무루법이라고도 합니다. 무위법은 인연사이의 모양이 아닌 그 모양을 지양한 생명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종교의 교조가 전혀 모른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부처님처럼 명확히 구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물질이라든가 여러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하지만 유위법의 범위내에서는 나라는 관념과 너라는 관념을 떠날 수가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다는 그러한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인간의 본래적인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합니다. 상을 떠나는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도업과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해서 쌓는 선업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업입니다. 욕계, 천상, 무색계와 같은 곳에 가는 것은 선업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선업만으로는 우리의 번뇌를 모조리 소멸시켜서 영생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욕계를 초월하고, 색계를 초월하고, 또 무색계를 초월하고, 천상도 다 초월해서 정말로 대 자유인, 참다운 자기인 대아, 진아의 존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업을 쌓아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해탈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 커녕, 아직 선업도 못 닦은 이가 많은 것을 볼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인간의 몸으로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의 불성 자체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대사와 같은 도인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만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불지에 오른 유마거사의 말씀을 모은 <유마경> 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불 목건련을 위시해서 32 아라한에게 유마거사가 설한 법문입니다.
둘이 아닌 그런 수승한 법에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둘이나 셋이나 이원론도 삼원론도 아니고 오직 일원론이라는 말입니다. 일원론은 나나 너나 달마 석가 우리 모두가 본체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현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아니 나같은 중생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왜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는 분도 계시겠지요. 차이가 있는 모양에서 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불교말로 구체화하면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수명이나 시간이 짧다고 하는 상을 다 떠나버린 경지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을 어떻게 여읠 것인가. 상을 여의는 법문이 바로 유마거사의 입불이법문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데, 중생들은 천차만별로, 모든 것을 업장이라는 안경을 쓰고 본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평생 분별합니다.
요즘같이 정보가 홍수처럼 몰려들때는 상당히 편리한 점도 있으나, 우리 불자들의 수행에는 걸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정보화시대의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는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없어 물질적인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 생명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인류가 차근차근 발전되어 간다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사는 모양은 좀 발달돼 가겠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 마음으로 봐서는 발달은 커녕 점점 퇴화한다고 봐야 합니다. 50억 인구가 사는 이 지구상에 참다운 성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불자들은 겉을 꾸미는 데 집착하지 말고, 속절있게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상에 끄달려 행하는 모든 것은 부처님 법을 자기 것으로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이른바 상을 떠나버린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의 본체인 불심(佛心)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상으로 보아서는 제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 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근본자리와 현상의 것을 물과 물결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근본자리는 물에, 현상적인 문제는 바람따라 일어나는 파도에 빗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채 업장의 현상만 볼 뿐 나의 본질도 너의 본질도 못보고, 만유의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뿐 아니라 식물 동물 모든 두두물물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고, 일체존재의 본질이기에 불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성, 실상, 도, 열반, 여래장 등도 같은 뜻입니다. 표현은 비록 다르더라도 근본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은 불심 자리 불성자리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자는 그 자리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아직 그자리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부처님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있기에 마음의 본질이 불심임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은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민도 많이 하고, 더러는 비극적인 일들도 많이 생깁니다. 나 또한 참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보시를 해주신 그런 분들에게는 더욱 더 가슴 아프고,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이 어디 있는 걸까요.
경제학자,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내놓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자기의 본바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도 알 턱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말로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 없습니다. 칸트, 니체 이런 것에 박식하다고 철학이 아닙니다. 일체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경을 통달할 정도로 외우더라도 그 본질 자리를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나라경제나 개인경제나 모두 거품을 걷으라고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그림자를 붙인 것입니다. 마음찾기에는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일체 물질이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왜 ‘색즉시공’ 이라 했을까요. 물질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체즉공이고, 삼계유심이라.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모든 세계인 삼계에 오직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순수 생명입니다. 순수 생명외에 다른 것은 모두가 헛것이라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도리가 모두 이런 도립니다.
초월적인 본래의 자리에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해탈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이 모두 공이라고 설했습니다.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아지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은 여실히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모두 비었거니, 내 집이나 재산도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맡아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죽어서도 가지고 갈 것 같이 집착을 보이지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세요. 그것처럼 편하고, 쉬운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순식간에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면 당체즉공이기 때문에 이 세계 그대로가 모두 공입니다. 공의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광명 찬란한 불성이 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지금은 모양으로 살지만 몇억겁 뒤에는 우주의 법에 따라 모두 파괴 소멸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참담한 재해를 입지않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해 그전에 해탈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은 대자대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차근차근 공부해서 모두 천상에 올라간 후에 파괴가 됩니다.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과 같이 비극적인 최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파괴가 된 다음에는 다 텅텅 빈 공무변이라. 거기에는 마음만 있는, 식만 존재하는 중생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주가 텅 빈 데서 모양이 이뤄집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위대한 철인도 학자도 결국에는 부처님법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도 점차로 증명해가고 있어요.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철학, 영생해탈의 종교입니다.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세간법을 지양하고 제법이 비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내 행복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의 웅비를 위해서나,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있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해서나 어렵고 힘들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지극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마음법 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제일 좋은 묘방입니다.
【수행한담】청화스님<성륜사 조실>
“삼매로 습기 녹여야 무량공덕 나옵니다”
‘나’라는 관념때문에 相이 생기고
삶이 무거워 지니 매일 업장 녹이다보면 치우침 없이 다 포함된 자리 이룹니다
재가불자도 한달에 여섯날은 출가한 셈치고 오계 수행하세요
몸도 정신도 맑아 환희심 얻습니다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
선근 깊지 못하면 자꾸 후퇴합니다
성자와 나의 근본성품 같으니
‘얼마만큼 닦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론없는 실천은 맹종…‘안심법문’ 따르세요”
번뇌의 뿌리 뽑히면 중도실상 생명 체험
내가 3년결사를 발원하고 미국에 건너와 이렇게 1년여 살고있자니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어떻게 미국에 오게됐냐는 겁니다. 달마스님께서는 공부가 다 성취된 뒤에 동토지방을 제도할 원력으로 동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도 많고 미숙한 채로 미국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아직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서고, 미국의 각국 불교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도 안되어 있는 것도 같아서 융합적인 차원에서 누군가가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또한 미국은 선진국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많이 모이고 문화교류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리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곳 미국도 그렇고 어느 사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분열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나 관념 심지어 대상물 모두가 실제가 아닙니다.
<반야심경>이 가르치는 대로 ‘오온개공(五溫皆空)’입니다. 오온에는 인간이라든가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데, 오온은 본래로 실존이 아니요 가상인 것이고 허망상인 것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생이 인식하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요, 잘못 보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닙니다.
진리는 반야바라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그래서 중도실상의 생명관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대화도 하고 행동해야 분열 갈등이 없어집니다. 또 모든 일을 진리의 조명아래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도실상은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 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이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의 실상자리가 바로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중도실상 자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사실상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도저히 자기 분상에서 납득이 안되니까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용하는 마음이 되면 납득하게 됩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은 가장 정직하고 총명하고 바로 깨달은 분인데 그 분들이 옳다고 했으니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전폭적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염불이나 주력이나 화두나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다른 생각을 않고서 지속적으로 공부하십시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하루 하루 한 만큼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중도실상의 경계가 점차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동 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넘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만났지요. 경전도 보고 불교입문서도 보면서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이랄까요, 겉을 잡았었습니다. 그 후 우리 집안의 6촌 동생이 절에 있으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 즉시 “아, 그러느냐?”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워낙 위대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미련없이 그대로 출가했습니다. 바로 은사이신 금타스님이셨습니다. 그 어른은 실로 모든 점에서 자기 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으셔서 진정 진리의 불덩이 같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의 법문에서 제가 기독교나 현대과학에 있어서 막혔던 문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다 풀리니까요.
오랜동안의 회의가 풀리니까 젊은 사람으로서는 환희용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행이 철저하셔서 ‘스님의 방법을 취하면 꼭 성불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서게되니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40년여년을 은사스님처럼 수행했습니다. 세상에서 얘기하는 일종식하고 장좌불와(長座不臥)의 방식이었지요. 젊어서는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한다고 했고 근 30년을 토굴생활도 했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철저한 셈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원칙을 그렇게 세우고 살았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 그렇게 편해요.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다 보니까 혼자 여러 끼니 해 먹기도 귀찮스럽고 하루 한 끼니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치 피순환이 잘된다는 것이고 또 피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못 침범하겠지요.
사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끼니 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승가생활에서 아침에 배고플 때는 죽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종식이지요. 저도 역시 원칙은 지켰으나 어디에 초청되면 애써 대접하는데 안 먹으면 미안스러우니까 더러 먹기도 했습니다.
또 젊어서는 어거지로 상을 내서 잠도 안자고 앉아서 버텼지요. 그러나 지금은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이제는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될수록 안 눕는 쪽으로 원칙은 세워놓고 고집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피로하면 눕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장좌불와는 아니지요.
이런 수행이 나에게는 다분히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조금도 몸에 부담이 없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맑아지니 말입니다. 혼침도 미처 참지 못하고 망상만 피우고 그럴 때는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지장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나같이 토굴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사람 근기에 따라서 수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기본적인 출가 수행자의 청규가 오후에는 먹지말아야 하고, 병자가 아닌 한에는 한 번 일어나면 취침시간까지 앉아서 공부할 것이지 자리에 눕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재가불자들도 적어도 한 달에 여섯 날은 오후불식하라고 권합니다. ‘6재일’이라 해서 한 달 가운데 스스로 정해서 여섯 날은 출가한 셈 치고 생활규범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날만은 내외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고기도 안 먹고 허튼 말도 않고 하루 한 끼만 먹고 오로지 부처님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루 한끼만 먹게 되면 사람들이 ‘컨디션’이라고 하는 몸 분위기가 대단히 좋아집니다. 가벼워지는 것이지요. 적게 먹으면 먹는 양에 비해서 체내 흡수가 많아지게 되고 피도 맑아집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니까 흡수하는 비율은 적어집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은 음식을 안 먹었습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였으니 광명은 불생불멸의 생명이기 때문에 먹을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 말씀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식식(識食)이라, 마음으로 음식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환희심나는 행복(法喜禪悅)을 음식으로 하고, 법(法)을 음식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에 대해서 환희심으로 충만하다면 그때는 안 먹어도 마음이 충만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막히고 남 미워할 때는 필요없이 자꾸 먹게되지 않습니까.
은사이신 금타스님은 번뇌를 녹여서 성자가 될 때 중도실상의 생명을 체험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른의 가르침을 잡고 선방에도 몇철 다녔습니다만, 워낙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신 터라 달리 스승을 찾을 생각을 내지 않고 토굴생활을 했습니다.
40대에는 모범적인 선방을 만들어 사람을 길러 보려고 토굴에서 나와봤지만 그것이 잘 안됩니다. 안되는 것은 내 역량 부족도 있고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였겠지요. 그래서 다시 토굴로 들어가고 또 나와보고 그러다가 60살 넘어서 온전히 나왔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생명자체를 중도실상의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금타스님께서 쓰신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의 육안은 번뇌에 때묻은 오염된 육안이기 때문에 금진의 세계를 알려고 할 때는 중생의 욕계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천안통이 나온다”
욕계번뇌의 뿌리를 뽑으면 천안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나도 번뇌의 뿌리가 뽑히려면 천리만리입니다. 평생동안 노력해야지요.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발이 하늘로 뜬다는 말씀이 경론에 있습니다. 전혀 무게를 못느낀다고 합니다.
실로 무게가 있지 않은 것인데 ‘나’라는 관념, 번뇌 때문에 상(相)을 내고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관념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되어있는 길 환한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억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상대적인 의심을 해서는 마음만 피곤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꿈같다고 했으면 분명히 꿈같다고 보려고 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여겨서 집착을 뿌리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쁜하고 공부가 잘풀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것과 이 몸뚱이가 본래 비었다고 여기며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 정통선을 익혀야만 참다운 선정의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도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통선으로 해서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까지 못나간다면 우리 자성이 갖추고 있는 무량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자성 가운데는 삼명육통(三明六通)등 무량 공덕이 갖춰져 있는데, 삼매로써 습기를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옵니다.
불교가 다시 옛날 도인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스스로 불을 내어 자기 몸을 태우는 정도의 도력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현대 물질사회에 젖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제도하기도 쉽습니다.
부처님 육성과도 같은 <아함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교란 결국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업장이 녹아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바른 깨달음, 바른 계시를 받으려면 꼭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누구나 성자가 되려면 깊은 삼매에 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 한계를 의식하며 자신없어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불법입니다. 달마조사와 내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겉에 형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지요.
다만 우리가 닦고 안 닦고, 또는 얼마만큼 닦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근이 깊지 못하면 자꾸만 후퇴합니다. 닦다가도 조금만 피로하면 ‘편히 살
것인데 괜시리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른 스님들은 편하게 승려생활을 잘하는데 무슨 필요로 그렇게 까다롭고 옹색하게 하느냐고 해요. 삼매정진을 무시한다면 옳은 말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또 제자들 가운데서는 내가 잘 돌봐주고 인자하다고 하면서도 너무 계행이 철저해서 시봉하고 싶어도 스스로 포기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해요.
그리고 ‘무애행(無碍行)’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걸림없네 하면서 짓는 파계는 무애행이 아닙니다. 수행의 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무애행은 법기에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고도 걸림이 없는것, 그것이 무애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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