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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을 다시 생각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것은 그것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그만큼 생명은 소중하고 고귀하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어떠한 것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가장 어렵고 숭고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한 인간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더 높은 가치와 질서를 위한 것일 때는 한없이 존귀하다.
이러한 예에 드는 것이 순교와 순국이라 생각된다. 한말로 순교는 인간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단에 바치는 성스러운 죽음이고, 순국은 국가와 민족을 구제하기 위하여 제단에 바치는 성스러운 죽음이다. 그 모두가 범인(凡人)은 행할 수 없는 지극히 높은 영역에 속하는 숭엄한 것이다. 그런 길을 간 분들은 모두가 겉모양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사실 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사람이 아닌 화신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순교자 몇 분을 찾아보자.
순교라 하면 누구나 먼저 기독교를 떠올릴 것이다. 교주인 예수부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과 베드로다.
바울은 본명이 사울인데 3회의 대전도 여행을 하며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교 최대의 전도자였고 최대의 신학자였다.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있게 한 것은 그의 노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 곧 로마인, 고린도인, 갈라디아인, 에베소인, 필립보인, 골로세인, 데살로니카인, 히브리인 등 자기가 전도한 지역의 사람들과, 디모데, 디도, 빌레몬 등 개인에게 조언이나 충고의 말을 적어 보낸 13 통의 편지가, 우리가 흔히 일컫는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등으로 일컫는 신약성서에 쓰인 경이다. 신약 27 편 중에 그가 쓴 것이 거의 절반인 13 편을 차지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흔히 듣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유명한 말은 데살로니카 전서에 씌어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에서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로마시민권을 가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처음에는 열렬한 바리새파로서 그리스도 교도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다메색으로 가던 어는 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출현을 경험하고, 그 놀라운 빛에 3일간이나 실명 상태가 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전도 과정에서 옥에 갇히는 등 많은 시련을 겪은 끝에,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지금 가톨릭교에서 제일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베드로 역시 열렬한 전도 끝에 순교한 예수의 제자다. 로마에서 전도하던 중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Agrippa)로부터 박해를 받은 베드로는, 신도들의 권유에 따라 로마를 떠나려고 길을 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예수를 만났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리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불교는 각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을 수용하는 특성을 가졌으므로 기독교처럼 많은 순교자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작은 마찰이나마 없을 수는 없었다. 그 중 석가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부루나(富樓那)의 순교는 널리 회자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사왓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문안을 올리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서방 수로나로 가서 법을 전하고자 하나이다.”
“부루나야, 서방 수로나 사람들은 성질이 사납고 거칠다. 만약 그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고 욕하면 어쩌겠느냐?”
“세존이시여, 만약 수로나 사람들이 면전에서 헐뜯고 욕하더라도 저는 고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착해서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나를 때리지는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수로나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린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수로나 사람들이 비록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하지마는, 그래도 착한 데가 있어 칼로 찌르지는 않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칼로 찌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비록 칼로 찌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착한 데가 있어 나를 죽이지는 않으니 고맙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루나야, 만약 그들이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세존이시여 그때엔 저들이 현명하고 인정이 많으므로, 언젠가는 무너져야 할 육신을 죽임으로써 저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케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겠습니다.”
“장하구나, 부루나야, 너는 인욕을 성취하였으니 수로나의 난폭한 사람들 속에서도 머물 수가 있으리라. 너는 수로나로 가서 제도 받지 못한 자를 제도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며, 열반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열반에 들게 하라.”
부루나 존자는 수로나에 가서 500명의 재가신자를 얻고, 500개의 가람을 세우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케 한다. 비신도들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여도 그것을 “언젠가는 무너져야 할 육신을 죽임으로써 저를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케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겠다.”고 하는 말을 대하면 짐짓 오싹해지기까지 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새로운 외래 사상이 들어올 때는 기존의 토착 신앙과 마찰이 있기 마련이다. 신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도 역시 그러했다.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지금의 선산)에 들어와 포교하고자 했으나, 박해가 심하여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그를 자신의 집 굴방에 숨겨 주었다는 이야기도 그러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 후 미추왕의 왕녀가 병을 앓자, 왕은 묵호자를 불러 향을 피워 제를 올리게 하여 왕녀의 병을 고쳤다. 왕은 이를 매우 기뻐하여 흥륜사를 지어 주고 불법을 펼치게 하였다. 그러나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이 그를 해치려 하므로, 모례의 집에 돌아가 굴을 파고 문을 봉하고 영영 나오지 않았다 한다. 이처럼 불교는 이질적인 것으로 배척되었다.
신라는 초기부터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제사가 성행했고, 지증왕 때에는 아예 신국(神國)을 선포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곧 기존 집권 세력의 자기보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새롭게 들어오는 불교는 민간신앙과 그 격을 달리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어, 기존 세력의 경계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거문고 갑을 쏘다[射琴匣]’란 설화도 사실은 불교와 토착신앙과의 갈등을 알려 주는 이야기다.
이는 비처왕이 행차하는 도중에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로 서출지(書出池)라는 못의 지명전설이기도 하다.
소지왕이 정월보름에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서 돼지싸움을 구경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쳐버렸다. 이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쓴 봉투를 주기에 받아보니, 겉봉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이상히 여겨 그 봉투를 왕에게 바쳤더니,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열어보지 않으려 하였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니 열어보셔야 합니다.”하고 아뢰므로, 왕이 열어보니 “거문고갑(琴匣)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이 있었다. 장차 왕을 해치려고 숨어 있던 차였다.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하여 매년 정월 첫 해일(亥日)․첫 자일(子日)․첫 오일(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금갑 설화에는 향을 살라 복을 기원하는 승려가 등장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금갑 설화의 시간적 배경은 신라에서 불교 공인의 결정적 계기가 된 이차돈의 순교가 있기 40년 전으로, 당대 신라 왕실 내에서 비록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암암리에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암시받을 수가 있다.
이 설화에서 승려를 죽이고 왕을 살리는 데 기여한 것은 일관과 노인, 그리고 쥐, 까마귀, 돼지 등이다. 여기서의 승려는 물론 불교를 대변한다. 그를 제외한 일관과 노인, 쥐, 까마귀, 돼지는 토속적인 신앙을 대변한다. 쥐, 까마귀, 돼지는 일종의 토템이고, 못에서 나온 노인은 용왕의 다른 이름으로, 이 역시 토착신이다. 일관은 고대 사회에서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으로, 전래의 기존 규범과 의례를 정치 영역에 반영하는 존재다
사금갑 설화는 신라 전통 사상과 신흥 종교인 불교 사이의 충돌이라는 내용을 비유담의 형식으로 내비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승려의 간통은 궁중 세력과 불교 세력 간의 야합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하며, 이러한 궁중 불교 세력과 노인, 일관, 까마귀, 쥐 등으로 대변되는 토속 신앙 세력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긴 갈등 속에서 빚어진 큰 사건이 이차돈의 순교다. 이차돈의 순교는 법흥왕의 불교 공인과 괸련되어 이루어진 사건이다. 법흥왕은 왜 불교를 비호하고 공인하려고 했을까?
그 답은 한말로 왕권 강화에 있다. 법흥왕은 보다 강력한 통치체제를 만들어 기존의 귀족세력보다 큰 힘을 행사하려 했다. 새로운 통치 질서를 구축하려면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 불교라는 종교는 그에 발맞추어 새로운 이념을 제공해 주기에 족했다.
왕족을 부처님의 일족으로 격상시키며 신성한 권력을 만들어 나가는 데는, 불교가 말 그대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그런 포부를 실현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불교를 공식종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왕은 부처의 신성성을 얻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권위로 신하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법흥왕의 불교 공인에는 이와 같은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길에는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가로막고 있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신하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왕의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앞선 사람이 스물여섯 살의 젊은 관료 이차돈이었다. 그는 시쳇말로 새로운 개혁세력이었으며 진보파였다. 이차돈은 왕을 찾아가 자신이 목숨을 바쳐 불교가 공인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그 계략을 꾸몄다. 그 계략은 자신이 왕명을 사칭해서 절을 지을 테니 귀족들이 물으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워 죽이라는 것이었다. 이차돈은 공적으로는 왕의 비서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그의 조카였다.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법흥왕과, 그것을 뒷받침하려는 충신 이차돈과의 비밀 약정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 오고간 이야기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고,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된 말을 전한 죄로 신을 형벌에 처하여 목을 베시면, 만백성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하교를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왕이 말하였다.
“살을 베이고 몸이 고문당해도 새 한 마리를 살리려 하였고, 피 뿌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짐승 일곱 마리를 불쌍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과인의 뜻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함인데 어찌 죄 없는 자를 죽이겠는가?”
“버리기 어려운 것은 모든 것들 중에서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부처님의 해는 다시 중천에 떠오르고 성스런 임금님께서는 영원토록 평안할 것입니다.”
이 같이 이차돈의 순교는 미리 짠 시나리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전 회의에서, 불교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이차돈과 그에 반대하는 다른 신하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을 때, 법흥왕은 모르는 척하고 이차돈에게 형벌을 주는 쪽으로 명을 내렸다. 죄명은 왕명을 잘못 전해 절을 세운 죄로 참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이 죽은 후 이번엔 귀족들에게, 아끼던 신하를 죽게 하였으니 자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은근히 말함으로써 귀족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이리하여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전제 왕권을 확립하여 신라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이 같은 이차돈의 순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형리가 그의 목을 베자 흰 피가 한 길이나 솟았고, 잘린 머리는 멀리 경주의 북쪽 산으로 날아가 떨어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이차돈의 순교는 다른 순교자와 조금 다른 점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여타 순교자는 순교 그 자체뿐이지만, 이차돈의 순교는 위에서 본 것처럼 거기에다 순국을 더했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이차돈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첫댓글 부루나 존자는 굉장한 분이셨군요. 단계적인 예시가 참 재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