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력을 파악하고 취약한 점들을 보강하여 위하여 테스트한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싫다고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성적은 자랄 수 없습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의 수준을 알며, 성적이 자란 것입니다.
세상 속성도 삶에 대한 주제(2:11-4:11)를 마친 저자는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 자체에 집중합니다. 5:11까지 진행됩니다. 이 부분은 성도 개인에 대한 권면입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12-16절로 고난에 관련한 일련의 명령들을 전달합니다. 둘째, 17-18절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내용을 통해 고난과 관련한 명령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셋째, 19절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결론적 권면을 전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에게 : 개인적 명령들(12-16)
세상에는 숱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것은 치욕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즐거워 할입니다. 그것인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2-16)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으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동일하게 고난당하는 독자들 상태에 대한 것이지만, 이전과 초점이 약간 다릅니다. 앞부분은 세상 속 신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했다면, 이 부분은 독자들의 고난 상황 자체에 대해서입니다. 세 가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첫째, 불 시련(프뤼시스)입니다.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독자의 고난을 처음 언급한 1:6 묘사보다 심각합니다. 거기서는 단순히 여러 시험으로 근심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불 시련이라고 합니다.
둘째, 시험이란 표현입니다. 1:6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난의 본질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과 관련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창세기 3장)로 모든 피조 세계가 죄와 죽음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8:19-22). 모든 이가 병에 걸릴 수 있고, 까닭 모를 고통을 경험할 수 있으며, 결국엔 죽습니다.
하나님의 현재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로마서 1:28-31).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불 시련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신앙과 진리에 대한 세상의 압박입니다. 더 나아가 이 어려움은 신자가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들을 더 순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혹이 아닌 시험(test)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너희에게’ 표현의 반복입니다. 12절에서만 세 번 사용합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인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과 관련한 시험과 고통이 독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난과 관련해 일련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이상한 것인 양 당황하지 말고(12)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13). 얼핏 보면, 이전 내용과 비교해 약간 어색한 느낌이 있습니다. 1:6-8에서 시험과 기쁨 표현을 사용해 독자들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편지 뒷부분에서 그런 독자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저자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잘 버티고 있음을 칭찬함과 동시에 그런 삶을 지속해 가라는 마음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초점의 차이입니다. 1:6-8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초점이라면, 이 부분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믿음으로 견디는 것을 넘어 그 고난을 경험하는 것 자체를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의 증거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고난에는 미래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난 가운데 기뻐하는 삶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인지 요소의 준비입니다. ‘왜’와 ‘무엇을 위해’라는 신자 삶의 근거와 방향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전 설명에 의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 세상에서 언약 백성으로 존재하는 이유와 소명, 미래에 대한 소망이 포함됩니다.
13절도 그 고난을 단순히 고통 자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미래 소망, 곧 주의 심판을 근거로 지금 상황에 대한 반전의 보상을 생각하고 기대하라고 합니다. 둘째,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힘입니다. 저자의 명령을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 기뻐하며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반드시 함께 갑니다. 사람인 신자가 이행하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신적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만일’ 조건문을 사용해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예를 듭니다(14-16). 조건절은 고난 상황이고 주절은 그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첫째 상황은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욕당하는 것입니다(14-15). 3:14과 같은 내용이며, 예수의 팔복 가르침 마지막 부분(마태복음 5:10-11)을 반영합니다. ‘메시아의 이름으로’란 예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란 말입니다. 15절처럼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복된 것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독자(너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전도자들에게 임해서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도울 뿐 아니라(1:12),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 과정의 일을 합니다(1:2). 하지만 이 부분의 초점은 정체성 보증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하는 것은 성도가 그분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증거입니다(참조, 로마서 8:15-16;갈라디아 4:6). 이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얻는 고난을 성도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확증으로 여기고 복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 표지는 장차 심판에서 구원받을 은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참조. 17-18).
둘째 상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 권위자를 주(主)로 여기지 않고, 메시아 예수만을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깁니다. 하지만 3:18-22처럼 예수는 부활과 승천으로 원래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고, 장차 모든 권세들이 무릎 꿇어야 하는 온 우주의 주입니다. 그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명령의 이유(17-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으로 고난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17-18)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일차적으로는 16절과 연결되지만, 보다 넓게 12절부터 언급한 것들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주의 재림 때 있을 심판입니다. 성도(1:3-5,7,17.21; 4:7,13)나 세상(4:5)의 현재 모습을 설명하는 근거로 언급했던 주제입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성도의 상황과 세상 불신자의 상황을 비교함으로 제시합니다. 두 가지 견제로 시작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적 완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세상 반역의 통치 영역에 남아 있는 것 사이의 확연한 갈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은 그 미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역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는 그분의 심판이 완성되어 그 결과를 모두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심판의 공평성과 보편성입니다. 이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평가 기준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 것이며(1:17) 공정하게 진행될 것입니다(참조. 로마서 2:6-11).
흥미롭게도 저자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구약의 개념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집, 곧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교회(2:5)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시작될 것입니다. 다만 그의 십자가 피로 멸망의 판결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보험 증권 받은 듯 생각하고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예수의 은혜로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더 집중하는 것은 불신자의 운명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그분의 백성과 자녀가 된 사람들도 평가 받는다면, 그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겠습니까? 의인이 예수의 피를 통해 은혜로 어렵게(몰리스) 구원받았다면, 그것을 거절한 자들의 운명은 어떻겠습니까? 독자 스스로 대답하게 해서 세상의 위협에 기죽지 말고 계속 주님께 신실하게 살라는 말을 하고픈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19)
우리 힘으로 고난을 감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 영혼을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받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생명이 될 것입니다.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 곧 선행을 하는 자들은 모든 것의 평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라고 합니다. 고난을 피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다 잘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 고난을 당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신자 삶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은 신자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역시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기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고난을 수용하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악을 미워하여 당하는 고난이요 의를 추구하여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