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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1967 극작가 유치진의 동생. 경남 통영(충무) 생. 동래고보 수학. 연희전문 중퇴.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 등단. 1936년 [조선문단]에 <깃발>발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 이른바 생명파의 한 사람으로 동인지 [생리]를 간행, 그러나, [시인부락] 동인으로는 활동 하지 않음. 경향 : 허무를 극복하려는 남성적, 의지적인 시. - 사람의 삶 어디에나 있는 뉘우침, 외로움, 두려움, 번민 등의 일체로부터 벗어난 어떤 절대적인 경지를 갈구했으며, 그 해결의 길은 일체의 생명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자각에서 찾았다. - 곧, 강렬한 허무적 의지는 그 밑바닥에 생명의 뜨거운 꿈틀거림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간직한 것 때문임 1960년대에 부산에 정착, 부산고, 경남여고 등지에서 교사, 교장으로 근무 시집 : [청마시집](1940), [울릉도](1948), [보병과 더불어](1951) 등 유적지- 유치환시비 - 바위시비(부산진역앞 수정가로 공원, 영도남여자상업고등학교) - 깃발시비(에덴공원) - 그리움시비(용두산 공원 '시의 거리') ●생명파(生命派) : <시인부락>(1936) 동인과 <생리>(1937)를 발간한 유치환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 생명의 의지를 추구한 1930년대 문학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 '시문학파'의 기교주의와 '주지주의시파'의 문명에 대한 시에 반발하여 생겨났다. 생명파의 대표 작가로는 서정주, 유치환, 김동리 등이 꼽힌다. 청마 연혁 >> 청마가 태어나면서부터 생을 마감할때까지의 연혁입니다. 청마를 세세히 아는데 도움이 될듯합니다. 1908. 7. 14 (음력) 경남 통영시 태평동 552번지에서 유생인 진주 류씨 준수(焌秀)와 어머니 밀양 박씨 우수(又守)사이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남. 1918 외가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가 10세에 통영보통학교 입학. 1922 통영보통학교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풍산(豊山)중학교 입학. 1923 가형 동랑 류치진이 주도하는 「토성」지에 고향 문우들과 시를 발표 1926 풍산(豊山)중학교 4학년을 마치고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편입. 1927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 졸업(제4회)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28 연희전문학교 문과 중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학원에 다님. 10월,경성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 권씨 재순 여사와 결혼. 1929 귀국. 고향에서 가형 동랑과 함께 「소제부」라는 회람지 발간. 1930 「소제부 제일시집」발간.시「5월의 마음」외 25편 발표. 1931 『문예월간』\」제 2호에서 「정적」을 발표, 문단데뷔 1932 평양으로 이주, 사진관을 경영함. 곧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詩作)에 전념. 1934 부산으로 이주,화신백화점에서 1년간 근무. 1937 통영협성상업고등학교 교사 취임. 7월∼10월,동인지「생리」1,2집 발간. 1939 12월,『청마시초(靑馬詩초)』발간.「깃빨 1940 3월, 통영협성고등학교 교사 사임. 민주 빈강성 연수현으로 이주,농장 관리 및 정미소 경영. 1945 6월말 귀국. 부인이 통영문화유치원을 경영.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초대 회장 역임. 1947 6월, 시집『생명의 서』발간. 시「귀고(歸故)」외 59편 수록. 1948 3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 사임. 4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9월, 시집『울릉도』발간, 시「동백꽃」외 34편 수록. 1949 5월, 시집『청령일기』발간. 시「심산(深山)」외 65편 수록. 1950 6.25동란으로 부산으로 피난, 문인 구국대를 조직,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함. 1949년도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1951 9월, 시집『보병과 더불어』발간. 시 「호천」외 33편 수록. 1953 4월 통영으로 이주, 수상록『예루살렘의 닭』발간. 시『선한 나무』외 57편 수록 1954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피선.10월, 시집『청마시집』발간.시집『기도가』와『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합본, 시「낙화」외 111편 수록. 1955 1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 사임, 경주고등학교 교장 취임. 1956 3월, 제1회 경북문화상 수상. 1957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피선.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 12월, 시집『제9시집』발간, 시 「춘조(春朝)」외 38편 수록. 1958 2월, 1957년도 아세아재단 자유문학상 수상.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12월,『류치환시선』발간. 1959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 재 피선, 수상록『동방의 느티』발간. 4월, 경주중학교 교장 겸임. 9월, 경주고등학교 교장 사임. 12월, 자작시 해설 『구름에 그린다』발간 1960 4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재피선. 12월, 시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발간, 시「봄바람에 안긴 한반도」외 35편 수록. 1961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 취임.(1961년∼1962년) 1962 3월,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 취임.(1962년∼1964년) 7월, 예술원상 수상 1963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 피선, 수필집『나는 고독하지 않다발간. 7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취임.(1963년∼1965년) 1964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역임. 11월, 시집『미루나무와 남풍발간, 시「한 그루 백양나무」외 41편 수록. 12월, 부산시문화상 수상 1965 4월, 부산 남녀자상업고등학교 교장 전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 역임. 11월, 시선집『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발간 1967 2월13일 하오 9시 30분 부산시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 부산대학병원으로 후송 도중 사망. 17일 부산직할시 사하구 하단동 승학산 산록에 묻혔으나 경남 양산시 백운공원 묘지로 이장.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음 ------------------------------------------------------------------------------ ★문단의 조직화, 그 폐단은? 청년문학가협회 2대 회장 부산문인협회 회장 재임 청마 '예술계 조직화는 자유로운 예술발전 저해' 1984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부산여자전문학교(현 부산여자대학)에서 대학축제가 있었다. 그 축제에 김동리(호 東里,본명 始鍾)가 축제행사 가운데 문학강연의 강사로 초빙되어 왔다. 강연을 마치자 그 학교 정상구(鄭相九·시인) 이사장이 기장에 좋은 횟집이 있다고 동리를 그 횟집으로 모시는데 나도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게 기장으로 가기 위해 이사장의 차를 탄 동리는 차 속에서 계속 광복 후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조직 이야기에서 청마 유치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골자는 청마가 그 어려운 때 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을 승낙해 주더란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나온 동기는 여자전문대학에서 한 강연이 연장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동리가 그때로서도 35년 전쯤의 그 얘기를 하는 데는 그날의 감회가 새삼스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광복 후는 정치적 이념에 따른 갈등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문인들 또한 그 이데올로기의 와중에 휩싸였다. 1946년 2월 8,9일에 걸쳐 그동안 형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문학건설총본부와 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이 합쳐지면서 조선문학가동맹이 조직되었다. 서기장에 임화(林和)가 되고 안회남(安懷南·소설),김기림(金起林·시),이원조(李源朝·평론)가 주축 멤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민족주의적 우익계열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문학동맹이 생긴 지 두달 뒤인 46년 4월 4일에 조직되었다. 이 민족진영으로는 김동리,조연현(趙演鉉·평론),서정주(徐廷柱·시),조지훈(趙芝薰·시),최태응(崔泰應·소설) 등이었는데 초대회장에는 김동리,부회장에 유치환,김달진(金達鎭)으로 형성되었다. 동리의 말로는 청년문학가협회는 온건파들이 되어 표면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는 것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 불안한 때 동맹이냐 협회냐에 따라 자기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정치계도 아닌 문학계였다. 동리의 말로도 서로가 몸을 사렸다는 것이다. 청년문학가협회 초대회장은 동리 자신이 맡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동리가 다음 회장을 청마에게 권하니 의외로 승낙했다면서 '청마는 시에서 보인 줏대처럼 줏대가 있어' 하며 그 어려운 때 고생을 감내해 주더라면서 누구누구에게 교섭한 얘기까지 했다. 청마는 그랬다. 제 자신의 소신으로 옳다고 생각하면 제 자신을 던졌다. 1950년 6·25전쟁으로 청마는 또 한차례 부산으로 이사를 하고 문총구국대의 경남지대장으로 육군 제3사단에 종군한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그때 김봉룡(金鳳龍·시인)이 정훈장교로 청마를 모셨는데 참가대원이 한사람 두사람 빠져가는데도 마지막까지 군복차림으로 종군을 하며 법도를 지켜준 사람은 청마 혼자였다고 했다. 어느 한때는 쓴 원고를 잃고 탄환이 날아오는 가운데도 그 원고를 찾아 되돌아갔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잃은 원고는 상당량이 되었을 거라는 김봉룡의 말이었다. 그 문인 구국대로서 종군한 그때의 시를 모은 것이 51년에 펴낸 여섯번째 시집인 '보병과 더불어'가 된다. 청마는 63년에 부산문인협회 회장에 추대되고 65년에는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으로 추대되었다. 청마는 그렇게 부산의 문인과 예술단체의 수장(首長) 격이었지만 언제나 그 속의 일원(一員)에 지나지 않은 자세였다. 본인이 앞장서 의견을 내세우는 일 없이 회원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의논하고 그 결론도 회원들에게 내맡겼다. 그 논의가 빗나가거나 온당하지 않을 때야 자신의 의견을 펼치곤 했다. 그러한 격식에서 벗어난 부담없는 자리이다 보니 폭넓은 이야기가 되어 갔다. 그렇다고 느슨한 상태로 버려두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결론이 도출되면 사무국장이나 집행자에게 요점을 점검하고 그 집행을 지시했다. 그런데 청마는 어느 술자리에서 문학계나 예술계가 조직화 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문학도 예술도 개인작업이란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적 신장에서만이 개성적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조직으로 규범화하는 것은 자유로운 예술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었다. 광복 후 청년문학가협회 회장을 하고 여러 예술단체의 수장 노릇을 하는 가운데서 얻어진 그의 견해고 보면 귀담아 들을 만도 하다. 문화가 조직화로 정치형태를 닮고 사회적 구조를 띨 때는 문화예술이 가진 개성적 유연성에서 벗어나 경색해질 것은 사실이다. TOP ★청마와 소운(素雲) 정권비판 '소운' 괘씸죄로 동래고 교가 가사마저 불허 1966년 필자가 동래고등학교 교사로 있을 때 청마로 인해 난처한 입장이 된 때가 있었다. 문인협회 회의가 끝난 뒤 술자리가 벌어지기 직전 청마가 나를 한쪽으로 이끌어서는 동래고등학교 교가를 아직 자기 작사의 것을 부르고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하니 그게 옳지 않는 일이란 것이었다. 본래의 동래고등학교 교가 작사는 김소운(金素雲·본명 敎重)의 것이었는데 소운이 일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자 학무국에서 교가를 바꾸라 해서 자기가 지어준 것인데 이제 소운이 일본에서 돌아왔으니 본래의 소운의 것으로 되돌리도록 교장에게 얘기해 달란 것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학무국에서 교가의 작사자 또는 작곡가가 월북을 했거나 국가에 누를 끼친 그 당시의 반체제 인사의 것이면 사용을 금지하고 바꾸게 지시를 내렸다. 본래의 작사자 소운은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오늘날의 영도초등학교인 사립 옥성(玉成)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돌아와서는 서울의 신문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23년에는 시대일보에 시 '신조(信條)'를 발표하고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시보다 수필이 더 널리 알려졌는데 그의 수필집 '목근통신(木槿通信)''건망허망(健忘虛忘)''하늘끝에 살아도'가 유명하다. 그 소운은 1952년 베네치아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도쿄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이승만정권을 비판하는 말을 했다. 그 때문에 이승만 정부로부터 귀국금지를 당해 13년간이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했던 소운이니 학무당국이 그의 가사를 허용할 리 없었다. 학교에서는 청마에게 새 가사를 부탁했는데 청마는 본래의 김동진(金東振) 곡에 맞아들게 지었기 때문에 곡 자체는 본래 그대로였다. 소운이 65년에 귀국금지가 풀려서 돌아왔다. 그래서 청마는 본래의 가사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마가 나에게 말할 때도 나는 학생들이 오랜날을 두고 불러오던 교가를 그리 쉽게 바꿀 수 있겠느냐니 청마는 당국의 강권으로 바꾼 것보다는 본래의 교가가 전통과 의미가 있다며 되돌리는 것이 사리에 맞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청마의 말은 소운과 가까운 사이에서 오는 의리였다. 그 의리는 39년 발간된 청마의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는 소운의 적극 찬양으로 화가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인쇄소 '장문사'에서 낸 바도 있었다. 나는 청마의 말씀이라 그 뜻을 당시의 문인갑(文仁甲)교감에게 말했더니 문교감 역시 내 생각대로 학생들이 애창하고 있는데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더욱이나 청마는 이 학교의 대선배란 것이었다. 그 뒤 청마를 만나자 교가 얘기를 또 꺼냈다. 문교감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청마는 내가 교장에게 말할 테니 최선생도 교장에게 내 뜻을 전해 달라 했다. 나는 당시의 홍금술(洪金術)교장에게는 말해 보았자 퇴박만 맞을 일이라 말도 못하고 문교감에게 다시 청마와 소운의 관계를 말했더니 사와 공은 구별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일축하다시피했다. 그러다 청마는 67년 윤화(輪禍)로 타계했다. 청마를 유택으로 모신 3~4개월 뒤 소운이 부산에 강연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 중앙동에서 소운과 자리를 같이한 뒤 소운이 숙소를 동래온천장으로 정하고 있다 해서 나도 온천장으로 가는 길이라 통행금지 가까이의 직행버스를 타고 온천장으로 함께 갔다. 소운에게 청마와의 그 얘기를 했더니 '그래,됐더구만. 그 동안 내가 쓴 교가는 여러 학교 것이 있었는데 모두가 바뀌었더구만. 그 학교의 교가는 내 대신 청마가 썼다면 잘 한 일이지. 바꾸기는 왜 또 바꿔'하다가 새삼 생각이 났는지 '청마는 대인(大人)이야. 폭이 넓어. 그게 만주대륙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나는 좁은 일본에 오래 있다보니 소인이 되고 말야. 청마와 난 한살 차야. 하지만 그 청마는 잔잔한 의리 하나는 소인처럼 지키지' 하고는 손님이 별로 없는 버스 창가에서 나직하게 그가 지은 교가를 불렀다. 곡은 그대로이지만 가사가 달랐다. 대단한 기억력이었다. 그만큼 회심의 작이요 곡이었던지도 몰랐다. 하지만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은 청마의 가사에 김동진 작곡의 교가를 오늘날에도 부르고 있다. TOP ★불의의 청마 교통사고 건널목 건너다 버스 부딪혀 병원 가는 도중에 숨져 난데없는 연락을 받고 아침 이른 시간에 우하(朴文夏·수필가)와 함께 부산대학병원 영안실로 갔다. 청마는 이미 흰 천에 덮여 있었다. 우하가 머리짬의 천을 들어 보았다. 이마에 혈흔이 굳어 있을 뿐 잠자듯 조용한 얼굴이었다. '뇌진탕인가 봐' 의사인 우하의 한숨진 말이었다. 뒤이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모두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젯밤 함께 있었는데…' '술을 했어?' '아니오. 요즈음은 혈압이 높다고 술을 하지 않았어요.' 이 사람 저 사람에서 모아지는 말은 어젯밤 몇몇 사람들과 예총관계 얘기를 하다가 헤어졌다고 했다. 수정동 댁으로 가기 위해 수정동의 중앙로 건널목을 건너다가 직행버스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대학병원으로 오는 도중 이미 운명을 했다고 한다. '이럴 수가….' 그러나 현실이었다. 따지고 보면 67년 2월13일 오후 9시 30분 향년 60세의 아직 정정한 연세였다. 그렇다고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문인과 예술인들은 모여드는 사람들과 수습책을 의논하고 자리를 바꾸어 가며 유가족과 상의했다. 부산예총장으로 가닥을 잡았다. 5일장으로 정했다. 영결식은 교장으로 있었던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정으로 정하고 장지는 독지가가 내어준 하단의 승학산 산록으로 삼았다. 애도속에서도 장의절차는 순조로웠다. 관구를 장의차에 올리고 내리는 의식절차는 삼베완장에 삼베 상장의 문인들이 맡았다. 나도 그속의 한사람이었다. 형 동랑(東朗) 유치진(柳致眞)은 어이없는 일에 계속 말이 없었다. 경남여고에서 청마를 모셨던 조순(曺純·시인)과 예총사무국장 윤정규(尹正圭·소설)는 식전(式典) 준비와 진행 그리고 장의행렬의 소통에 정성과 배려를 다했다. 승학산 기슭 유택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명지였다. 그 유택에서 10년 넘게 지냈다. 때에 따른 경향(京鄕)의 참배객도 찾아들었다. 부산문인협회에서 마련한 비석도 섰다. 그런데 그곳에 대신동의 동아대학이 옮겨오면서 청마의 유택도 학교부지에 들게 되었다. 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부산시에 속해있는 기장군 정관면의 대정(大靜)공원묘지로 이장을 하게 되었다. 이장을 할 때는 몇몇 문인들이 참여했다. 동해바다가 멀리 바라보이는 위쪽 자리였다. 그때 요산(김정한)도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요산은 청마의 부인 권여사에게 위로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장한 유택은 우리들 가까이 있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 유택도 97년 4월 5일에는 선산이 있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지전당골로 또다시 이장을 했다. 청마는 유택마저 부산지역에서 떠나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일은 그 전에도 있었다. 청마가 세상을 뜬 뒤의 바로 그해 67년 5월 현대문학사 주관 한국문인협회 후원으로 청마시비건립기금을 모집했다. 그때 건립기금 조성의 위원장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였다. 그런데 70년대의 초로 여겨진다. 우하(박문하)가 좀 보자고 해서 갔더니 금강공원으로 오르면서 현대문학사에서 청마시비를 세울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말이 있었다면서 여기가 좋지 않느냐고 했다. 자리는 금강공원 위쪽에 위치한 독진대아문 곁이었다. 좋은 자리였다. 그랬던 그해 자주 가던 진주의 개천예술제에 갔더니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와서 있었다. 박노석도 자리에 있었다. 내가 그 얘기를 했더니 권여사는 경주에 좋은 자리가 있다고 청마가 불국사로 오르면 여기 자리가 좋다면서 항상 쉬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경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의 얘기인 것 같았다. 그랬던 시비건립의 자리가 불국사에서 토함산의 석굴암으로 걸어오르는 길가로 바뀌었다. 부산에 있는 청마의 시비는 부산의 청마시비건립위원회(위원장 손경하)가 에덴공원에 세운 게 있고,남여상과 수정가로공원에도 있지만 그때의 현대문학사 시비도 부산에 세워졌으면 하는 욕심도 없지 않다. 청마는 이곳 부산으로 네차례 옮겨와서 살았다. 그 처음은 동래고보 학생시절이고 두번째가 화신연쇄점 시절이고 세번째가 6·25한국전쟁 당시고 네번째가 경남여고,남여상 교장시절이 된다. 지금은 고향 통영에 청마문학관이 세워져 있다. 작가 최해군 나의 교유록에서...(부산일보에서 자료 얻음) TOP 장석주(시인) ▶시인이 아니였다면 천문학자였을 청마 유치환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 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 출입이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빛이 따뜻했던 그날 마루 끝에 걸터 앉은 허만하는 얘기 끝에 청마에게 "선생님,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라고 묻자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라고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면은 너는 오늘 이 시간까지를 진실로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며 또한 살아 있는지, 천길 벼랑 끝에 딛고 선 절망의 공허감에 시방 잇빨을 갈고 내닫는차 쇠바퀴에 반드시 두개골을 부딛고 말리라" 청마는 죽기 십여년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마치 시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글이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에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부산의 좌천동 앞길에서 버스에서 내려길을 건너다가 한 시내버스에 치였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청마는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유독 천년고도 경주를 사랑해서 주말이면 술집들이 늘어서 있던 "쪽샘"을 거쳐반월성이나 남산 기슭을 자주 거닐다가 돌아가던 청마는 그렇게 떠나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초간 삼간 짓고 할망구와 단둘이 살다가 뼈를 묻겠다"던 시인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청마는 부산시 서구 하단동의 산록에 묻혔다. TOP ▶통영과 우체국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년)을 생각하면 먼저 통영과 우체국을 떠올리게 된다.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유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청마는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권재순을 만나 누이, 오빠로 지내다가 결혼을 하기도 했다. 청마는 '우편국에서'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통영에 있는 한 작은 우체국일 것이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여기나 와서 기다리자/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갯비린내가 밀려 왔다. 아마도 시인은 거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 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의 '서문'에서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야 흔드는/永遠(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純情(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이념)의 標(표)ㅅ대 끝에 /哀愁(애수)는 白鷺(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旗빨'이다. 그 '기빨'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적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람을 남겼다. TOP ▶청마의 어린시절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통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의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 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 때 잔학한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가 바로 권재순이다. TOP ▶청마의 결혼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청마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 통영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詩作)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지용,이상 제씨가 기억에 남아 있을 뿐.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었다. 다방에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고 유치원에 있는 아내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유치원 보모이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TOP ▶청마시초 청마의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가 나온 것은 1939년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창문사에서 찍어냈는데,시집 표지에는 청색지사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혀 있다. 시집의 제호는 김소운의 의견을 따른 것이고,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했다. 청마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난 것은 1940년 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때여서 너나 할 것 없이 궁핍했던 시절이다. 하얼빈에서도 마차로 하룻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연수현이라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그 소도시의 네거리에는 효수당한 비적(匪賊)의 머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 걸려 있었는지 말라서 소년의 얼굴처럼 작고 검푸르렀다. 흑룡강에서부터 불어온 황량한 바람이 그 비적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곳에 가형인 동랑 유치진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다. 자금 융통이 필요했던 청마는 이듬해 귀국했지만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청마의 아들 겨울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베일 듯 추웠고,대기를 부옇게 지우며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청마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를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의 광막한 벌판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였다. 청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는데,그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었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달 뒤에 해방이 되었다. .. 이 글은 평론가이자 시인인 장석주님이 한국경제신문에 '한국문단비사'라는 기획기사로 실은 내용 중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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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곹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