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루카 10,25-37)
“Teacher,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Jesus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He said in reply,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being,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replie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다. 그 계명의 말씀은 고상하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말이나 행동에 어떤 마음가짐을 갖는지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매우 현실적인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찬미한다. 또한 십자가로써 하느님과 만물을 화해시키셨다고 강조한다(제2독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율법 교사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든지 자신이 먼저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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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청소년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보스코 성인과 함께 지냈던 청소년들 대부분은 ‘요한 보스코 신부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각각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신비스럽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단편 『세 가지 질문』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②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③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첫 번째의 물음에 대한 답은 ‘지금’이고, 두 번째의 답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세 번째의 답은 ‘그 사람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도 그렇게 살았기에 수많은 청소년들 각자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다고 느낀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 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완전하게 준비되었을 때야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순간은 오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족하나마 정성을 다하는 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신대원신부-
연중 제15주일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말한다. 그만큼 사랑은 사람살이에 있어서 핵심관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참된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람과 사람살이에 있어서 모든 책임과 의무 또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는 것 같다.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허무하기 그지없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욕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교사와 주님 사이의 질의응답이 사뭇 가슴을 찌른다. 율법교사는 주님을 시험해보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라고 애매하게 질문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총인데, 이 과정 안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따지는 물음이다.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하고 되물으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한다고 하였습니다"(루카 10,27)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고 말씀하신다.
사실 사랑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나라 사랑, 친구 사랑, 일 사랑, 부모자식 사랑, 이웃 사랑, 가족 사랑, 하느님 사랑, 이성 간의 사랑 등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드러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은 결국 하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그 자체로 무한성과 영원성을 담보로 하는 지워질 수 없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남녀 간의 사랑일지라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진실한 것이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이며, 자유로운 내적충동으로 말미암은 참된 고백이기에 그 자체로 숭고하고 거룩하게 된다. 누가 만일 사랑한다고 약속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쟁이고 진실을 쉽게 왜곡하는 사기꾼이 된다.
사랑의 형태는 삶의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드러날 수 있지만, 모든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듯 사랑도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1요한 4,16)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하는 것"(1요한 4,21)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그 사랑은 믿음에서 출발하고, 그 믿음은 사랑을 낳으며, 사랑은 정의와 평화를 낳고, 정의와 평화는 사람을 살리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원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5)로 사랑의 삶을 사는 이들 삶의 태도를 가르쳐주신다. 사랑이신 분의 말씀에 따르면 사랑의 삶은 이웃, 그중에서도 특히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삶이다. 그리고 사랑의 삶은 이웃에 대해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도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도 않는 삶이다. 또 사랑의 삶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뎌내는 삶이다(1코린 13,4-7).
주님께서는 율법교사와의 대화에서 평소 성경을 통해 주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우리에게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자세하게 들려주신다. 율법교사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주님의 물으심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고 말씀하신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리를 보고 기뻐"(1코린 13,6)하는가? 진리 혹은 진실이 없다면 사랑은 단순히 즉흥적 감상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러므로 진리 안의 사랑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는 것이고, 당신 계획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라는 부르심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 진리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핑계 없이 바로 지금 실천하세요!
-전영준 신부-
옛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엇을 잘못해 놓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무슨 일이든지 핑계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따 먹지 말라는 그 나무 열매를 어찌하여 따 먹었느냐고 질문을 하셨을 때, 아담은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여자 때문이라고 핑계를 댑니다. 계속해서 여자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뱀이 자신을 꾀어 따 먹게 되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결국 남자와 여자 그리고 뱀은 하느님으로부터 각각 벌을 받게 됩니다.(창세 3 참조)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율법서에 쓰인 하느님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잘 지킬 것을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터인데.”(신명 30,12) 결국 조건을 말한다는 것은 하기 싫은 마음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핑계를 댈 필요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수석 사제들도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여기서도 유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조건을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마음을 핑계를 통해 완곡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강도에게 얻어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왜 피해 갈 수밖에 없었는지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길거리에 방치된 시체와 접촉하였을 때는 죄를 짓고 부정한 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 한동안 격리되어 참회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종교 행사를 주관할지도 모르는 종교 지도자로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레위 21,1.11; 22,4-6 참조)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왜 어떤 사마리아인을 진정한 이웃으로 소개하고 싶으셨을까요? 그것은 사마리아인이 주저하지 않고 즉시도움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농담을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농담이 발전해서 ‘머리가 나쁘면 당장 고생한다.’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적합한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에서든지 ‘바로 지금’(right now)이 시급한 문제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각양각색의 핑계를 대면서 하느님 계명의 실천을 늦추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또한 계명을 들은 그 즉시 바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 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6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사업을 지체할 그 떤 핑계거리도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피는 마음을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 있다. 그가 ‘일어선’ 모습은 공식적인 가르침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어찌되었건 그는 예수님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 예수님을 낮추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복음은 ‘시험하려는’ 것이라 밝힌다.
율법 교사들은 원래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시기에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성전을 잃고, 어떠한 희망도, 미래도 존재치 않던 시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이 바로 율법 안에 있음을 강하게 설파한다. 이스라엘을 흥하게 하려 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 했던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던 율법 교사가 지금은 예수님을 시험한다. ‘시험하다’라는 말은 본디 그 대상을 파멸로 이끄는 말이다.(루카 4,2 참조) 그래서 죽음을 불러오는 말마디다. 상대와 관계를 단절하고 짐짓 자신만이 옳음을 드러내고 싶은 말인 것이다.(10,29 참조)
이제 율법 교사의 질문을 보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한다. 예수님을 파멸로 이끌면서,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 죽음과 생명의 대비가 율법 교사의 겉과 속의 대비와 연결된다. 속으로는 죽음을, 겉으로는 생명을 말하고 있다. 위선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율법 교사의 생각은 ‘인간적 행위’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교사들은 자신의 행위로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고자 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은 곧 이승의 삶을 연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기엔 하느님의 의지, 그분의 뜻이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의 행위로 절대 의롭게 될 수 없음에도, 구원받을 수 없음에도 말이다.(갈라 3,6-20 참조)
율법 교사는 듣지 못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는 있어도, 그 말씀을 제대로 듣지는 못한다. 입으로는 ‘쉐마 이스라엘’(신명 6,4-5)을 답하고 있으면서도, 진정으로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오만에 묶여 있다. 하느님께 닫혀 있는 이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레위 19,18 참조)
율법 교사한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열린 자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그분을 시험하기 전에 예수님 말씀을 온전히 들으려는 자세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시험하려 한 율법 교사의 오만함이 오히려 시험받아야 하는 자리가 된다.
묵상(Meditatio) 교회에는 다양한 모임, 다양한 활동이 있다. 모두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것이다. 가끔씩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교회 담장 너머 저 세상을 생각해 본다. 막상 담 하나만 넘어가면 우리가 그토록 외치는 신앙의 진리가 뭇사람에겐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이 참 막막하다. 하느님에 대해 수많은 말을 늘어놓아도, 또 그 말들을 붙들고 이런저런 논쟁을 펼쳐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세상 안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세상 안에 오셔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셨는데, 교회는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모여서 우리가 활동했지, 세상을 위해 모여서 세상과 더불어 활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는 참으로 필요하지만 위험할 수 있다. 세상 구원을 위해 긴요한 것이지만, 세상과의 차별성 때문에 세상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담장 너머 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실천임을 기억하자.
기도(Oratio)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들을.(시편 96,3)
이웃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
- 홍승모 신부-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율법주의적 사고를 넘어서서 공동체 안에 힘없는 작은 이들을 향해 항상 열려있는 주님 사랑을 체험합니다. 경직된 율법주의적 사고는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은 율법을 넘어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게 인도합니다. 어떤 경우에 주님 사랑의 깊이는 너무 커서 우리가 그렇다고 늘 믿어왔던 사고의 경계선을 허물어 버리기도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런 깊은 생각과 행동은 주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늠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길에 휩싸여 주님의 뜻을 올바로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사제와 레위는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길 반대쪽으로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예루살렘은 주님 현존을 상징하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에 비해 예리코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제와 레위는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똑같은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현존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거기에 맛 들여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져 자신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주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도 나오듯이 주님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를 더 깊은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님에게서 멀어졌든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끼든지, 주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주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법정 스님이 만남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할 것을 거듭거듭 다짐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웃에게서 받은 따뜻함과 친절을 내 안에 묵혀 둔다면 그 또한 빚이 될 것이다. 그리고 뭣보다도 내 괴팍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서운함과 상처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나를 만난 다음에는 사는 일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을 만난 내 삶도 그만큼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과는 무관하고 다른 부류라고 여기던 사람이 오히려 참된 이웃이 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착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이유에서든 사제와 레위가 방관하고 외면했던 이웃의 고통, 엄격히 말하면 그들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순례 여정을 계속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사제와 레위의 여정과는 반대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우리는 세상의 죄와 악을 짊어지고 가시는 주님의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 교사에게 명확하게 요청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교회 공동체는 말만이 난무하는 새로운 천년기의 꿈을 표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실행이 결여된 말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가 답변했던 지식이 그저 말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4). 결국 누가 우리 이웃이냐는 율법 교사의 질문은 누가 우리를 사랑하느냐는 사랑의 실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처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행동이 없이는 결코 행복한 세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행복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에게 힘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행복과 희망의 빛이 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우리는 바로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초주검이 돼 세상에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박동호신부-
복음은 서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길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습니다. 게다가 ‘초주검이 된 사람’을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사제나 레위인 같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성이 그처럼 모질거나 악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어하며, 설령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말 못할 딱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강도도 있고, 사제와 레위인도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으며, 그리고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에 대해 비난하고, 감동하며, 불쌍히 여깁니다. 적어도 한 개인으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개인들’ 사이의 사건에서 ‘사회’ 혹은 ‘세계’의 범위로 확장하여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사회나 집단에 태어나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그 사회는 개인으로서 나의 의식과 행동을 형성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회칙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을 통해서 ‘사회의 주체성’과 ‘사회의 소외’란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비록 인간과 동일한 성격은 아니지만, 한 사회 역시 그 자체로 마치 생명을 갖고 있는 유기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기회만 되면 ‘세계화’, ‘지구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강도와 같은, 레위인과 사제와 같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죽어가는 사회 혹은 집단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빈민촌(비위생적인 거주지역)에는 전 세계 인구의 40%가 밀집해 살고 있습니다. ‘이 빈민촌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우리의 이웃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레위인과 사제의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이 빈민촌을 외면하면서 자기들만의 풍요와 품위를 향유하기 위해 반대쪽 길을 가는 이른바 선진 사회는 아닐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빈민촌의 상처를 싸맨 다음 자기의 노새와 돈 써가면서 돌보아주는 착한 사마리아의 사회는 없을까?’ 하는 물음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장 큰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가르치시면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남(다른 사회)을 죽이지 말며, 혼자(우리 사회만) 살려 하지 말며,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다른 사회)을 돌보는 것, 그것이 삶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처에서 ‘주님’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탐욕을 자유로, 무자비한 침탈을 경쟁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의 ‘일류선진국’이란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속한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면, 그 안의 개인이 건강한 선택을 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초주검이 된 이웃(사회)을 일부러 외면할 수도, 아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위해 선의의 뜻을 가진 이들과 연대할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다
-손용환신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파 화가입니다. 그는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네 아들도 모두 화가였습니다. 그가 그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루카복음서 10장 25-37절이 그 배경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그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되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루카 10,37) 그래서 이 성화는 누가 참 이웃인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 성화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그중 두 사람은 전면에 크게 묘사되어 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후면에 작게 뒷모습만 그려져 있습니다. 크게 그려진 두 사람이 바로 중심인물입니다. 한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알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의 머리와 발에는 피가 흐릅니다. 그는 머리에 천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빛을 가장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처 입은 사람이 바로 우리 곁에 계시는 예수님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알몸에 수건만 걸치고 있고, 머리에 감은 천의 모양도 가시관 같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부축하는 사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관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강도를 만난 유다인을 도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라아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옷 색깔은 사랑을 상징하는 붉은색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제자처럼 강도를 당한 사람을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상처 입은 사람을 여관에 모실 작정입니다. 그런데 왜 그의 허리에는 단검이 있을까요? 그것은 원수관계였던 유다인을 칼이 아닌 사랑으로 대접하는 그의 행동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로써 착한 사마리아인은 참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동족인 후면의 두 사람은 그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그 두 사람은 가장 거룩해야 할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두루마리 성경을 품에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성경만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제와 레위인은 이슬처럼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옷 색깔 역시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입니다.
그런데 후각이 발달된 개 두 마리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피를 핥고 있고, 노새 한 마리가 그를 실어 나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를 빨아 먹는 개 두 마리가 유다인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노새 한 마리가 사마리아인임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쳐지나간 유다인은 이슬처럼 사라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웃이 되어 준 이방인들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이 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세례 때 쓰이는 기름병이 눈에 띄게 놓여 있습니다. 기름은 상처를 싸매 주기도 하고, 구원을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우리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누가 이웃일까요?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새로운 교회의 주인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 삶이 당신 자비를 넘쳐흐르게 하는 당신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독서 오늘 복음은 율법 교사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룹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두 가지를 질문합니다. 첫째, 율법 교사의 ‘영원한 생명’(25 – 28절)에 대한 질문은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수명 연장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체험하며 살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에 대한 모든 지식을 섭렵했다고 자신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닌 내적 불안을 보여줍니다.
둘째, 율법 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 인지 묻습니다.(29 – 37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이웃이 되어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살펴 주는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들어 보여주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길에 버려진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 을 느낍니다. 그리스어 splagcni,zomai라는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나병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깊이 연민을 느끼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루카 7, 13; 15, 20), 이제 예수님의 깊은 연민이 길가에서 죽어가던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 주는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던 이 사마리아인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중에 있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인물일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느끼는 ‘가엾은 마음’ 은 다른 사람을 향해 전적으로 열린 마음과 자신의 시간과 능력, 나아가 삶 전체를 내주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의 행동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고도 반대쪽으로 가버리는 사제나 레위인과는 극적으로 대조됩니다. ‘가엾은 마음’ 에서 비롯된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단 한 번 관심을 보여주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이 완전히 혼자서 자기 길을 갈 때까지 계속되는 도움의 행위로 이어집니다. (34 – 35절)이것은 율법 교사의 입에서 스스로 표현한 ‘자비’ 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37절) ‘자비’ 는 지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 을 상속받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당시 유다 문화에서 사마리아인이 율법 스승의 모범으로 소개되는 것은 역설적입니다.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율법 교사와 달리, 사마리아 사람은 즉시 그를 알아보고, 그에게 자비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는 예수님의 초대는 이 이름 없는 사마리아 사람이 단지 유다인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계속 중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제자의 모범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너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고별 설교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 13, 34)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비로운 행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넘치는 자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자비를 실천하면서 지상에서 이미 영원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죄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자비’ 를 베푸는 삶은 이미 그가 질적으로 다른 삶, ‘그리스도 안의 삶’, 지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았다는 표지입니다.
성찰 누군가한테서 자비로운 행위를 받는 것은 늘 은총의 체험이기에, 자비로움의 원천이신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길에 쓰러졌을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시간과 능력과 사랑, 모든 것을 내준 사람들 때문에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안에서 제 가난한 인생에 넘치는 하느님, 당신 자비와 아름다움,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제가 받은 당신 자비 체험이 다른 사람들한테 끊임없이 흘러들어 지상에서 이미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삶을 맛보게 해주십시오.
기도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시편 19, 8)
교구청에 들어온 지 벌써 3주가 되어갑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필요한 것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그래서 지난 3주 동안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지만, 근처 대형 할인 매장을 찾아가 많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제도 쉬는 날이고 해서, 대형 할인 매장을 찾아갔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더군요. 힘들게 차를 주차한 뒤 매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구에서 마이크를 대고 인사하는 직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직원은 한 명 한 명 지나갈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어서 오십시오. **마트입니다. 즐거운 쇼핑 되십시오.”라는 말을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정성을 다해 인사하는 그 직원들과는 달리, 인사를 받는 고객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사람, 같이 온 일행과 말하면서 무시하며 지나가는 사람,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 등등.
만약 내가 그 직원의 위치라면 어떨까요? 내가 정성을 다해 인사를 했는데도 그 인사를 무시하면 기분이 과연 좋을까요? 나만이라도 저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큰소리로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그 직원 역시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며 밝게 웃더군요.
기분이 더 좋아졌습니다. 그러면서 기분 좋은 일은 항상 나로부터 쉽게 시작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우리들은 좋은 일을 내가 아닌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종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고, 그러한 조건이 채워지지 않음을 운이 없다는 이유로 변명합니다. 이렇게 주변에서만 기분 좋은 일들이 오길 바란다면 아마 평생 동안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해주시지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피해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들이 아니라, 그를 위해 큰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즉,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진정으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쉽게 착각에 빠집니다. 외부의 조건들을 채운 사람만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지 않는다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라고 힘 있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역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만물 중 으뜸이신 하느님께 돌아가야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과거 율법교사에게 하신 그 말씀을 이제 우리들에게도 해 주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당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삶, 이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한 마음도 없게 된다(벽암록).
영원한 생명
-신효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정성을 다해서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소신자인 안나 할머니는 혼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자녀들은 모두 도시에 나가 삽니다. 그렇지만 안나 할머니는 외롭거나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시니까요. 할머니는 시부모를 모시듯 하느님을 모신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시아버지께 문안드리듯 하느님께 기도하고 식사 때는 밥 한 그릇 먼저 올리는 마음으로 인사를 합니다. 들에 나갈 때도 여쭙고 일을 할 때는 수시로 그분과 대화를 합니다. 잠들기 전에는 편안히 주무시라며 감사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안나 할머니는 그 속에 보화를 간직한 사람처럼 늘 행복해 보였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기에 집안도 늘 청결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대했습니다.정성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첫자리에 하느님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말씀을 되새기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그분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나보다 남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웃이란?
-김찬선신부-
“오늘 내가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오늘 신명기의 말씀은 주님이 멀리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멀리 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멀리 해서 우리가 당신과 멀리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멀리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정말 그리고 이미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멀리 느껴지는 것도 거리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D.C 바로 근처에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 강의를 하러 뉴욕에 갔습니다. 한 번은 기차를 타고 가는데 필라델피아에서 사람들이 탔습니다. 옆에 누가 타건 상관하지 않고 저는 책을 보며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차 간 저 앞에서 얘기하는 한국말이 들렸습니다. 거리상으로 15m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들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도 아닌데 가까이서 하는 영어 소리는 들리지 않고 신기하게도 멀리 떨어진 한국말은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깝고 멀고는 마음의 문제, 사랑의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소리는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소리는 미국에서도 결코 멀지 않아 잘 들리고 이웃의 소리는 가까이 있어도 소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씀하십니다. 이웃이어서 이웃이 아니라 사랑해야 이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들리고 그들의 마음이 전달되며 그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고 다가가 손을 잡아줄 때 이웃이라고 하십니다.
제가 당신의 이웃이 되어드릴게요
-전삼용신부-
제가 이태리어를 로마에 와 학원에서 처음 배울 때 저희 반 선생님은 약간은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에게 대하는 것과 동양 사람에게 대하는 것이 눈에 띄게 차이가 났습니다. 단 두 달만 그 학원에 다니면 되었지만 그 선생님 때문인지 언어 배우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아일랜드 와서 방학동안 영어를 배웠는데, 그 때의 선생님은 모든 사람에게 매우 편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저에게 조금 나쁜 감정을 가졌는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것을 물어보고 조금 틀려도 너무 세세하게 교정해 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또 뭘 잘못했지?’ 하며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은 이태리어를 배울 때처럼 선생님과 관계가 좋지 않아 힘들지 않기 위해서 제 스스로 지나치게 영어 선생님에게도 잘 보이고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 좋지 않았던 기억이 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힘들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어가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여쭈어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생각하면 율법학자의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지 누가 나의 이웃인지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지 생각하는 것은 주위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주위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그 사람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나를 싫어할 지라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학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하지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먼저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만약 전성기 때의 타이슨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경기하는 상대는 아마추어 권투선수들이라고 합시다. 타이슨은 그저 링 위에 올라가 즐기다 내려오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타이슨이 아니라 비슷한 수준의 선수라면, 겁을 먹고 상대의 약점을 검토하고 소심한 경기를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다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피고 있다면 내 안의 사랑이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참 사랑이란 아무 두려움 없이, 아무 상대나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고 강도를 당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우리 각자이기도 하고, 또 크게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이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상대가 누군지 가리지 않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골고타 언덕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우리 영혼은 사탄과 육신과 세상의 횡포로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야 할 운명을 지녔습니다. 성모님을 제외하고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건강한 사람이 인간을 치료해 주고 구원해 주어야 하는데 사제와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사제와 레위사람은 성전에서 일하는 이스라엘의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식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건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건드렸다가는 자신들이 부정하여져서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례의 목적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모르고 헛된 방법으로 인간을 구원하려는 모든 종교와 사상들을 가리킵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이고 나머지는 그 사랑의 증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도와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란 성전의 전례에도 참여하지 않는 이방인 중의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사실 유다인들로부터 사마리아 사람으로 불리시고 그렇게 부정한 인간으로 박해당하고 버림당하신 분입니다. 그 분만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주셨습니다.
왜 하필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발라주었을까요? 술과 기름은 상처를 씻고 살균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보면 포도주는 자신을 으깨어서 나오는 인간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 미사 때 포도주가 무엇으로 바뀝니까? 그리스도의 피로 바뀝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으깨어 나오는 희생의 피로 인간의 상처를 씻어주었습니다.
기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루카 4,18절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장면만을 읽어도 기름이 성령님을 의미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즉 성령님을 받은 자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에게 성령의 기름을 바름으로써 또 다른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성령의 도유를 받고 새로 태어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골고타 언덕에서 그대로 일어납니다. 역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상처받은 인간은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요한의 상처를 닦으시고 치유해주십니다. 비유에서의 포도주는 여기서 피를 상징하고 기름은 여기에서 물을 상징합니다. 피가 죄의 상처를 씻는 것이고 물이 성령님을 상징한다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대표하는 요한은 골고타 언덕에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인 예수님 덕분으로 다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돈을 주면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맡기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일이 있어 잠깐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올 약속을 하면서 여관주인에게 치료와 회복을 부탁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관주인으로 상징되는 성모님께 요한을 맡기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신 뒤에도 성모님은 항상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강림이 있을 때도 사도행전은 성모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떠나신 지금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어 꾸준히 치료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분은 성모님 외엔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 세례를 받은 모든 이들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성모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아 계속 보살펴 주십니다.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내어 주시고 요한을 아들로 만들어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성모님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성모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물론 성령님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리아 인이 돈을 여관 주인에게 주고 떠났듯이 성령님은 언제나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모님을 통하여 교회에 성령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하면 좋은데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성모님을 통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기적을 청하는 성모님께 “이것이 당신과 나에게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십니다. 그것은 “은총을 성모님의 청으로 교회에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들은 성모님은 교회의 사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은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성사를 집행하며 교회에 새로운 포도주인 성령님을 공급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성모님의 청이 있었음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이 아니었으면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을 것처럼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청해주시는 성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꾸준한 치료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의 당신의 삶을 우리에게 똑 같이 실천하며 살도록 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던 자신의 희생으로 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성령님을 부어주며 성모님께 그 사람을 맡기는 일입니다. 이것이 곧 선교입니다. 따라서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지 않는 것이고 착한 사마리아 인이 아닙니다. 반대로 상처받은 영혼을 성모님께 데려오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치료해 주기 위해서는 포도주와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작은 희생과 성령님이 계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착한 사마리아 인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누구를 만나든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어머니께 데려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새벽을 열며
지난 번 인터넷 방송 중에 이러한 글을 하나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할머니가 아침 일찍 백화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팡파르가 울리며 폭죽이 터졌습니다. 할머니는 깜짝 놀라 영문을 몰라 하고 있는데, 백화점 사장과 직원들이 몰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할머님! 축하드립니다. 저희 백화점 100만 번째 고객님이십니다. 여기 축하금 100만원을 드리겠습니다.”
할머니는 엉겁결에 봉투를 받았는데, 백화점 사장이 할머니에게 웃으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지요. “그런데 할머니 뭘 사러 오셨나요?”
이 말에 할머니께서는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응! 이 물건 무르러 왔어.”
사실 백화점 사장이 할머니가 무엇을 구매하러 오셨는지 물을 필요는 없었지요. 단지 100만 번째로 백화점에 들어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면서 축하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괜한 질문을 던져서 기분만 안 좋았겠지요.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생활하면서 쓸데없는 질문을 던져서 스스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인데, 괜한 궁금증으로 인해서 결국 자신의 그 궁금증이 스스로를 곤란함 안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 몰라도 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몰라도 되는 것은 꼭 알려고 하고 대신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은 또다른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법칙으로, 우리들이 알아서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어떤 분은 이렇게 핀잔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또 지겨운 소리를 하려고 하는군.”
사랑이라는 말이 아주 흔한 말처럼 되어서 그럴까요?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말에 아주 흔한 말, 지겨운 말, 그리고 이제는 듣기 싫은 말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본인의 죽음도 좋고, 다른 이의 죽음도 좋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죽음도 좋고, 미래에 있을 죽음을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광경에서 어떤 모습이 좋을까요? 혼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좋은가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사랑을 보여주는 장면이 좋을까요? 바로 죽은 순간 인간으로서 어느 정도 과분한 일생을 살았는가는 얼마만큼 깊이 사랑하고 사랑받았는가로 판단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제, 레위인보다도 더 하느님의 마음에 든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배격 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임을 말씀하시지요. 즉,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알려고 하고, 무엇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중요한 것 하나뿐. 바로 사랑입니다.
빠다킹신부
지나친 친절
-남상근 신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지나치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강도 만난 이를 치료한 것으로도 충분할 법한데,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 두 데나리온을 들여 돌보아주고, 그 이후도 책임지겠다고 약속합니다. 생전 모르는 이에게 그는 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을 베풀어줍니다. 적당히 친절해도 내가 이용당하기 쉽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하면 바보 취급 당하기 일쑤입니다. 마음속으로 ‘딱 이만큼만이야’ 하고 제한적으로만 마음을 여는 것이 피차 서로 편안한 것인데, 그는 지나치게 친절합니다. 이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해야 얻겠느냐는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연상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굶주린 누군가가, 목마른 누군가가, 나그네인 누군가가, 헐벗은 누군가가, 병든 누군가가, 감옥에 갇힌 누군가가, 곧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친절하십시오. 넘치도록 베푸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이 만난 그 사람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께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계명과 율법의 완성인 사랑
-배광하 신부-
이런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할머니 답,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로!” 할머니 대답, “평생 웬수!”???
우리가 안고 있는 슬픔은 저 멀리 외계의 것도 아니오, 타지방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나 집안 식구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아픔이요, 상처인 것입니다. 너무 자주 부딪치며 살아야 하기에 그 상처에 대한 치유가 그토록 어렵고 슬픈 것입니다. 특별히 집안 식구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 36)고 하셨을까요.
성 요한 베르크만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같이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수도 생활에서 가장 큰 극기는 형제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성인조차도, 그것도 일생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약속한 수도자들이 수도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토록 어려웠다는 고백이 됩니다. 때문에 사랑의 사도인 성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 20~21)
유다인의 오랜 경전인 탈무드에는 사랑에 대한 이 같은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열두 가지 강한 것이 있다. 그 첫째는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에 의해 잘려지고, 쇠는 불에 녹아 버린다.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하고 구름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불어 날리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은 공포에 의해 비참하게 위축된다. 그 공포는 술에 의해 사라진다. 술은 잠을 자면 깨어 버린다.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 않다. 그런데 그 죽음조차도 ‘사랑’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모든 율법과 계명의 완성인 위대한 사랑에 대하여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1코린 13, 7~8)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사랑
7살 짜리 장애아가 이모 집에 놀러 갔습니다. 이모가 뜨거운 차를 타오려다 그만 컵을 깨뜨렸습니다. 그 바람에 이모는 손을 데어 아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모부는 깨진 잔을 쓸어모으고 걸레로 닦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애인 조카가 이모부에게 “이모부, 이제는 이모 손을 만져 주세요. 이모가 손을 데었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무엇이 중요하고 급한지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인이고 어른인 우리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이모부는 무엇보다 먼저 달려가 아내의 손을 붙잡고 “여보, 어디 다치지 않았어?”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가족이, 이웃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피는 것,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는 것, 그렇게 큰일은 아니어도 작은 배려의 마음에서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너무 크고 부담스럽게만 생각하기 때문에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 14)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갈 곳이 있는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분명 은총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본 고향,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지상에서 끊임없는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들만이 꿈꿀 수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심판’ 가르침에서 이렇게 단호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한정된 시간에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가 떠나는 이들은 반드시 살아남은 이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살아보니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일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을 속담으로 대신한다면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더 낫다"는 표현이 그중 어울릴 것 같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은 그 첫 대목만 듣고서도 끝까지 환히 내용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리코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재산은 모두 빼앗기고 초주검이 돼 버려졌습니다. 이때 마침 사제와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더구나 성전에서 봉사까지 하는 그들이었지만 그 상황을 피해 지나가 버리지요. 뒤를 이어 지나던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난 자와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자,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돼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물론 사마리아인이지요. 당연한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사제나 레위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께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여기며 자신들을 특별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민족들과 혼인해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을 오염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하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는 사마리아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로 단정 지으며 멸시하고 살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뽑혔다고 자부했던 사제나 레위인들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인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지 죽어 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친 그들의 행위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고 사제와 레위인들의 이기심을 비난하지만 정작 실생활은 사제나 레위인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처럼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싶어 하고, 홀몸노인을 돕는다든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 빠듯하고 바쁜 일상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실행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제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빈첸시오 회원이나 사회복지회 회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돕기 단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수 천원, 수 만원을 모아서 어려운 이들을 직접 찾아가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할 수 없으면 이런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웃 사랑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은 배움이나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언어'에 있습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말은 우리 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수단입니다.
두 사람이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얼마나 크게 싸웠던지 둘 다 전치 5주의 상처를 입고 자리에 눕게 됐습니다. 깨지고 터졌는가 하면 심한 피멍이 들어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됐지요.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흉했던 상처는 원상 복구가 돼 아물고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싸우면서 주고받았던 거친 말들은 하나도 잊혀 지지 않고 그대로 다 기억됐습니다. 잊혀지기는커녕 독기어린 말들은 안에서 응어리가 돼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심으로 자라나게 됐지요.
그렇습니다. 터지고 부러진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그때 주고받은 말을 통한 상처는 복수심으로 자라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비난의 말입니다.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한 순간에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만 한 순간에 쓰러뜨려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에 있어서 핵심 중 하나가 언어 사용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무서우냐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또 같은 사람들에게 밤길에 무엇이 제일 반갑냐고 물으면 똑같이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강도를 맞은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도 사람이요 제일 고마운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과의 따뜻한 관계는 예수님 가르침대로 서로를 도우며 살 때 가능해집니다. 격려하는 말, 칭찬하는 말, 또 희망을 주는 말들이 이웃 사랑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가슴에 담고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홍금표 신부 -
"이웃을 의도적으로 바라보자"
얼마 전 저희 복지관은 예수님 통장을 가진 한 자매님으로부터 거금을 후원받았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횡성 복지관에도 도움을 준 자매님입니다만 이 분은 장사를 하면서 일정부분을 예수님 이름으로 만든 통장에 저축하여 필요한 곳에 희사하는 자매였습니다.
물론 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입니다만 그 자매를 보면서 존경과 함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따뜻한 인간미를 간직할 수 있는 것도, 또 예수님의 구원 역사가 계속될 수 있는 것도 이웃이 되어 주고자 하는 이러한 고마운 분들의 덕택이라 생각되면서 「스스로 이웃이 되기보다는」 나의 이웃을 되어 줄 것을 강요하는 이기적인 나의 모습에 많은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의 극적인 반전을 위해 이 사람을 유다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복음은 「어떤 사람」이라고 막연히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국적과 종교 등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처한 「현재의 고통」이 문제의 중심임을 강조하는 것이 인물의 익명성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인물은 사제와 레위인입니다. 사제는 제사와 예절의 집행 등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 시대에는 약 8400명 정도의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하급 성직자들」로서 당시 제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노래와 제물 준비 그리고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고 성전의 경비와 청소가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상징하는 바는 거룩하고 경건한 이들, 하느님 백성의 대표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그 동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요, 다만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지위와 권위가 중요한 점은 아니라는 너무나 소박한 사실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중부 지역인 사마리아에 사는 혼혈 인종과 여러 종족을 말합니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의 수도 세켐에 있는 가리짐 성전을 파괴한 사건과, 사마리아인들이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사람의 뼈를 던져 성전을 모독한 사건으로 이들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경건한 이들의 대표로 보면서 인사와 만남 자체도 거부하고 살던 것이 예수님 시대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관계에서 배제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그럴듯한 이유도 사랑의 실천을 유보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비유가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이 비유의 초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문제로 시작한 주제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바뀌고 여기에 대한 대답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끝날 것을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반전은 우선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은 지역적 민족적 종교적 정의를 넘어서는 문제이기에, 이론적으로 정의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하는 실존적인 문제란 사실을 보여주면서, 사랑의 실천만이 이웃을 정의하는 기준임을 명확히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웃사랑!」 하느님 사랑과 더불어 신약의 가장 위대한 계명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 상태에서(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임) 인간의 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처지에 골몰하여 이웃의 고통과 처지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을 의도적으로 이웃을 향해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 오늘의 강도 만난 사람들을 향해 우리가 의식적으로 눈을 돌릴 때만이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주 구체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을 나누려고 노력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최선을 다 합시다.
-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이야기입니다. 율법교사는 유대교 문화권에서 기득권층에 속합니다. 남에게서 무엇을 배울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율법교사의 질문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질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서에 어떻게 되어 있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그 율법교사는 구약성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가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레위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드디어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강도 맞아 반쯤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간호를 부탁하였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다음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는 율법 교사의 말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사랑해야 하는 대상인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고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제는 성전에서 소위 성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사제를 도와서 역시 성전의 성무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율법이 중요합니다. 원래 성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건물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인간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지침 조항들입니다. 성전과 율법은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 하느님’(출애 33,19)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의 일을 실천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고 하느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그들 상상의 산물입니다. 이 세상의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이 자기 뜻을 존중해 주고 자기에게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층인 율사와 제관들도 하느님이 엄하게 벌하신다고 가르치면서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으며, 선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사제와 레위가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주지도 않고 가엾이 여기지도 않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의 사마리아 사람은 성전과 율법에 대해 모릅니다. 그는 강도 맞아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는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전과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유대교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초적 체험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원초적 체험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 시대의 성전과 율법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자비롭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하느님의 생명을 삶 안에 실천하신 예수님입니다.
초기 교회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셨듯이 우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35절).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 해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부모는 최선을 다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문자의 계약이 아니라 영의 계약입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립니다.”(2고린 3,6). 사랑은 문자인 율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입니다.
문자는 죽입니다. 성전과 율법에 충실한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는 초주검이 된 사람을 버려두고 갔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고 살리라는 말은 율법의 문자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문자는 죽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외면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보자 그를 가엾이 여겼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율법이나 신심행위와 같은 우리의 계획 안에 살아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웃에게 자비롭고 이웃을 가엾이 여기는 선한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자비와 가엾이 여김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신명기는 말합니다. ‘말씀은 하늘에 있지 않다...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다.’ 불쌍히 여김과 가엾이 여김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에도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면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는 자녀입니다..........◆
참된 이웃 사랑
-조욱현 신부- 제1독서: 신명 30,10-14 하느님의 법전은 하느님의 계명과 규정을 지킬 것과 항상 하느님께 나아오고 그분 안에 남아 있으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 그 법은 우리와 항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만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즉 이웃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법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셨다(요한 12,1-8: 향유를 부은 마리아).
복음: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웃 사랑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강조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여기에 율법학자는 그러면 이웃이 누구냐고 다시 묻고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신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지나쳐 갔던 사제와 레위인의 부정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들에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율법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성전에서 일을 맡아 하는 자들로서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피를 만지고 부정을 탄다는 것은 안되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에 그가 죽었다면, 시체를 대하는 것 자체도 부정을 타기 때문에 성전에서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보다는 율법에 매인 형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부상을 당한 그에게 달려가서 즉시 응급처치를 하고 끝까지 보살펴 주는 자선을 베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 각자가 강도를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강도일 수도 있고, 사제나, 레위인일 수 있고, 착한 사마리아인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중에서 과연 누구일까?
제2독서 : 골로 1,15-20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나왔다가 그분을 통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그러기에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로 평화를 이룩하시었다고 바울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창조되었다. 아담의 죄로 잃었던 그 형상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하였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회복한 그 형상을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는 닮아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다면, 인간의 모습도 사랑이어야 할 것이며, 이 사랑으로 우리는 이 모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즉 사마리아인과 같은 정신을 삶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도 사랑을 실천하는데 인간적 사고나 기준에 얽매여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척도로 재어서는 안될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영원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바로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했으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다.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 1) 어느 아주머니의 이야기-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전액 장학금을 받았는데, 자신이 자기 자녀를 위해 준비한 등록금은 진정 어려운 학생을 위해 쓰겠다고 했다.
2) 마더 데레사-기도 속에서도, 많은 활동 속에서도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였다.
3)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 숨어서 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가 하느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으며, 그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연 만물은 새로이 변화되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심 없는 관심이다.
-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구원을 얻는 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예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사심 없는 관심으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1. 과잉인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엄마는 빚에 쪼들려 집나가고, 동생하고 사는 소년가장(중3)은 사람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하는 세상... 자녀들이 많지만 마음 편히 가 있을 곳이 없어 자살하는 노인들이 급증하는 시대.... 이러한 신문의 기사들은 하나같이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인간의 모습들이다. 시내버스 속에서 서로 마주치는 시선은 밝고 반가운 표정보다는 “야! 나도 먹고살기 힘든데, 너는 또 뭐 한다고 세상에 나왔냐?”하는 눈초리들이다.
어디 그 뿐이랴. 수 십(백) : 1을 상회하는 취직시험장에 가보면,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를 밀어내고 내가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만, 모여 온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 행복의 방해꾼’이 되어버린다. 경쟁사회인 우리 사회의 구조 자체가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게 내몰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길거리에 쌓인 ‘땡 처리’ 상품처럼 “사람이 너무 많다.”(과잉인간)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렇게 사람을 귀하게 느끼기가 힘든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증가하면 이러한 각박함은 한층 심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는 진정한 관심이 아쉽기만 하다.
2. 사랑은 관심이다.
우리는 ‘사랑’과 정 반대되는 것이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을 잘 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래도 나에게 어떤 관심이 있지만,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미워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벽 하나가 천리(千里)’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벽 하나를 두고 바로 옆집에 살지만 누가 죽는지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이사 온 이웃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다 보면 잘못하다가는 “저 사람이 왜 저러나?”하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출퇴근길에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실려 가는 시내버스나 전철 안에서도 나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때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 ‘익명성(匿名性)에서 오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이 ‘익명성’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나뿐 아니라, 집안 내력까지 다 알고 있던 고향에서는 행동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자유스러웠던가? 그러나 ‘익명성(匿名性)에서 오는 해방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도록 괴로워도 누구 하나 찾아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 ‘립스틱 짙게 바르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지만, 마음의 뚜껑을 열고 보면 모두가 철저하게 외롭고, 뭔가에 쫓기며, 두려움에 떨고 있음이 사실이다. 모두가 마음 깊은 데서부터 기쁨과 어려움, 걱정과 희망을 나눌 진정한 관심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그 사랑은 곧 관심임을 알아야 한다.
3.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10,29)하며 묻는 율법교사에게 비유를 통해 참된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혹시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부정한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의 규정 때문이었을까?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그냥 지나쳐버린다. 그러나 이단자로 취급되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맞은 사람에게 갖은 정성을 다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셨다. 지상 생애동안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병환자도 태생소경도 앉은뱅이도 중풍병자도 하혈하던 부인도 치유를 받았고, 율법학자도 백인대장도 혁명당원도 어부도 강도도 세리도 창녀도 배척하지 않으셨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겐 하나같이 큰 사랑으로 다가가셨다. 그리고 끝내는 당신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리고 오늘도 성체성사로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관심을 기울이며 나에게 다가오기를 마음 속 깊은데서 갈망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이웃으로 다가가는 것,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성체성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라, 밥이 되어 주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이웃으로 다가갈 때, 모든 이는 내게 이웃으로 다가올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어 줘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법정의 ‘오두막 편지’ 중에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세계화’란 용어도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이웃에서 일어난 것처럼 신속하게 아는 반면, 아파트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모르는 이때 ‘누가 내 이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새삼스레 들려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는데, 오늘은 한 율법교사가 찾아옵니다. 그의 숨은 의도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 예수께서는 또 시험대에 오르십니다. 주객이 전도됩니다. “주님, 저를 시험하시고 살펴보시며 제 속과 마음을 달구어 보소서.”(시편 26,2)라고 해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도.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늘도 승-승의 길을 이끌어 내십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께서는 ‘이러이러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또는 ‘네 이웃은 이런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들 안에 내재해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고 스스로 답을 도출하게 합니다. 우문을 현답으로 이끌어 냅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며 그의 생각과 의견을 물으십니다. 그때그때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대답으로 판정을 받습니다. 두 사람 모두 승자가 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 말씀은 그들이 마음에 새기고 자자손손 들려주어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이고,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율법교사답게 막연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말씀도 놓치지 않았기에 예수께 “옳게 대답하였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쯤하면 알아듣고 이야기가 끝날 것 같은데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 내심으로 ‘율법 규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경제적인 능력이 있기에 자선도 많이 하는 사람, 단식과 기도를 많이 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들이 내 이웃이지요? 당신이 어울리는 창녀나 세리 같은 죄인들은 율법도 모르고, 자선도 하지 않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하느님도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족속이 아닌가요? 그러니 내가 맞고, 예수 당신이 틀렸소.’라며 정당성을 유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십니다. 거룩한 성직자 부류는 부정을 타면 하느님 대전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보고는 멀찍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지나간 사람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여운 마음을 품은 사마리아 사람은 우선 응급처치를 한 뒤 나그네를 자기 노새에 태우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다고. 마음에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루카 6,38) 베풀었습니다(‘베푼다’는 용어도 그에게는 맞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언제 자기가 병든 주님을 돌보아 드렸는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마태 25,34). 이야기를 마친 예수께서는 “자, 이제 너의 이웃이 누구이냐?”가 아니라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라고 물으십니다. 이웃을 결정하는 기준이 나(율법교사)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중심입니다. 그 이웃은 내가 정한 범주에 속하는 고정된 이웃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과 대상도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이웃입니다. 율법교사는 언급하기 어색한지 ‘사마리아인’이라 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10,37ㄱ)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그 대답이 훨씬 현명하긴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꼭 사마리아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말입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학자보다 말씀을 사는 사람이 더 신앙인답듯이 율법을 공부하는 학자보다 율법도 잘 모르는 사마리아인이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ㄴ) 과연 그가 가서 그렇게 하였을지 궁금합니다. 그가 의지해 왔던 관념을 뒤집어엎고, 그가 누렸던 안전지대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적·종교적 관습이 쌓아놓은 장벽을 허문다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가는 것이요, 도전과 시련과 박해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타인들의 요구에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며 좋은 뜻만으로도 부족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선의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비난과 시기 질투로 인해 상처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루카 6,32-34)
보답을 바라지 않는 '풀코스 서비스'
-평화신문-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고 계시는 작가 한분을 만나 뵌 적이 있습니다. 황혼의 나이에도 열정적 삶을 꾸려 가시느라 식사마저 자주 건너뛰던 그분 앞에서 제 인생은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분이 언제나 들고 다니시는 작은 수첩은 하루에도 몇 건씩 무료 강좌 및 봉사활동을 위주로 한 일정-주로 힘들고 돈 안 되는, 그래서 남들이 보면 이해하지 못할 일정-으로 빼곡했습니다.
젊은이도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의 강행군에도 전혀 끄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얼굴은 미소와 활기로 언제나 가득 차 있었기에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건강의 비결? 우스운 대답이겠지만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건강에 신경 쓰고 말고 할 시간이 없어요. 한 가지 비결이 있다면 늘 감사하면서, 또 늘 봉사하면서 사는 겁니다. 이제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고 떠나야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떠한 일이든 무조건 부딪쳐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 사랑의 실천, 참된 봉사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적금 탄 돈을 모조리 빼앗기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안 빼앗기려고 저항하다가 얼마나 두들겨 맞았던지 초죽음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오락가락하던 그 절박한 순간 한 사제가 지나갑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사랑! 사랑!' 외쳐대던 사제였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자리를 떠납니다. 잠시 후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사람 역시 빨리 시장을 봐야 한다며 황급히 길을 가고 맙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더러운 족속, 기분 나쁜 족속, 만나면 일진이 안 좋은 것으로 여기고 외면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멈춥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 앞에서 6단계에 걸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데, 이 봉사는 모든 봉사자들,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눈여겨볼 봉사의 전형입니다.
①발견(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②다가섬(가까이 가서)-③치료(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④후송(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⑤간호(간호해 주었다)-⑥애프터서비스(돈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봉사 중의 봉사, 모든 봉사활동의 전형이라는 것입니다. 치료뿐만 아니라, 회복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의 행동 하나 하나는 참된 봉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에게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위험에 처한 어려운 인간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봉사 대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종교, 당파는 사마리아 사람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 그 누구든 생명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우리가 가끔씩 하는 또는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봉사, 겉치레뿐인 봉사, 생색내기 위한 봉사, 적당히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봉사, 점수 따기 위한 봉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봉사는 참된 봉사였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봉사,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봉사, 그러나 결코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 봉사, 보답을 바라지 않는 풀코스 서비스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봉사를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진정한 인간은 봉사하는 인간입니다."
"이웃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 쓰러진다 하더라도 기쁘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이웃
-홍승모신부-
오늘 복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우리가 적개심을 품고 바라볼 수 있는 이웃에 대한 온갖 편견과 쓸데없는 상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힘들지만 우리가 고정된 사고방식을 벗어 버린다면 내가 증오하던 이웃이 오히려 나에게 사랑을 베풀고 생명을 주는 은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먼저 율법 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가 10,29). 율법 교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 속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면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 입니까?”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마치 베드로의 질문처럼 말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마태 18,21)
이제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사제와 레위 사람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해서 지나가 버립니다. 아마도 사제와 레위인은 죽은 듯 보이는 사마리아 사람을 보면서 시체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하다는 규정(이스라엘 법 전승인 미쉬나 규정)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이런 행동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로마 7,9-11 신약성서 새 번역). 율법을 준수하는 사제와 레위는 부정에서 벗어나 정결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히려 한계에 부딪히고 결국 하느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반면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무너지게 합니다. 증오하던 적이 참된 이웃이 되어 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늘 믿어 왔던 사고의 경계선이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명확하게 요청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가 10,37). 율법 교사의 답변이 그저 아는 지식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만 한다면 언제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5-16).
이웃이 되기
-김영국신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내가 누구와 ‘이웃’인가는 나의 구체적인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가에 버려집니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제는 그를 보고도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립니다(루카 10,31).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길 반대쪽으로” 가 버립니다(루카 10,32).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잡상스러운 사람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 불쌍한 사람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 주고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줍니다(루카 10,34). 사제와 레위인은 길 반대쪽으로 가버림으로써 그와 ‘이웃’이 되기를 포기했던 반면,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과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론이 아닙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보고 닮아야 할 하느님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의 가까이 다가오심은 육화의 신비를 통해 그 절정에 도달했고, 하느님과 인간은 특별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교회의 성사들을 통해서 온갖 악습과 죄에 떨어져 길가에 힘겹게 쓰러져 있는 우리들을 돌보아 주시고 치유하시고 책임지고 계십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고민에 빠져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이고, 가장 중요한 사안은 무엇이며 결단을 내려야 할 가장 적절한 시간은 언제인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왕은 홀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은수자에게 찾아가 의견을 듣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은수자는 자신을 찾아온 왕을 본 척도 하지 않고 하던 일만 계속하였습니다. 왕은 그가 일을 빨리 마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일을 거들었습니다. 숲 속에서 부상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나왔습니다. 왕은 그를 돌보아 주었고 다음날 그 부상자가 자신의 정적임을 알게 되자 화해하였습니다. 수도자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라는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은 일을 하라고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신명 30,11).
1. 성서이야기
제1독서 신명기 30,10-14는 모압 지방에서 모세가 행한 설교의 한 단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후 시나이 산에서 체류한 후 광야생활을 거쳐 요르단강 동편 모압지역에 도달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친 내용이 신명기에 담겨 있습니다. 모세는 토라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과 심판을 받는다고 하면서 이 가르침은 결코 지키기 어려운 법이 아니라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지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2독서 골로사이서 1,15-20은 그리스도 찬가로서 '모상가(模相歌)'라고 불립니다. 골로사이서 필자는 예수께서 이룩하신 속량, 곧 죄의 용서를 언급하면서 그 당시 전례에서 읊어지던 찬가인 모상가를 인용합니다. 예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만물을 화해시키고 평화롭게 하는 분으로 노래합니다. 이 모상가는 우주창조와 우주구원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루가 10,25-37은 사랑의 이중계명(25-28절)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29-37절)로 짜여 있습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묻자 예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예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들어 참다운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해 반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관과 제관 보조원인 레위 사람은 그를 보고도 피해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과 사이가 나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보고는 측은히 여겨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예화를 마치신 후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은 율사에게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를 만난 사람의 성분과 신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의 신분이 복음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유다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사이가 나쁜 점으로 미루어 이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가히 파격적이라 하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 신분 성분 따지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신속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는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라는 교훈이 들어있다 하겠습니다. 저 율사처럼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따지지 말고 먼저 내가 남의 이웃이 되어 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어느 본당에 출석하는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따지지 말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신속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오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저 율사처럼 인식의 차원보다는 사마리아인처럼 실천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주보-
복음선포의 첫걸음 : 진정한 이웃사랑
-박상대신부-
지난 연중 제14주일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루가 10,1-12.17-20)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로서 선교의 결과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음을 묵상하였다. 아울러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선 파견되어 간 곳에 ‘하느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음을 전하는 일임을 알았다. 병자치유와 구마(驅魔)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이 바로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직접적인 표징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갈수록 병자의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좀처럼 우리들 안에 없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복음선포는 모든 신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에게 병자치유도 구마의 능력도 없는 것일까? 필자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적이나 이변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의 결과만 보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원인과 과정 없이 결과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기적적인 결과는 통상 그 원인이 아주 평범한 원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병자를 치유하고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어 하느님나라를 세우고 그분의 평화를 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병자의 치유는 병자를 돌보는 데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은 내가 악을 근절하는 데서 시작하기 않겠는가.
그러므로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38-42),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이웃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모든 시작을 볼 수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가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가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대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요,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심는 것이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