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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출 12: 1-14
2001년 4월 1일 새벽 동지나 상공의 국제 영공에서 비행기의 충돌이 있었다.
정찰을 하고 있던 미국 해군의 비무장 정찰기가 중국의 전투기에 의해 충돌을 당하여 중국 하이난 섬의 공군 기지에 비상착륙 하게 되었다. 푸로펠라가 깨어지는 바람에 거의 곤두박질을 하면서 겨우 살아난 미군들은 중국군의 삼엄한 경비와 잠을 재우지 않는 고통스런 심문 속에서도 계속 기도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기도를 인도하기도 하고, 성경을 소지하지 않았던 관계로 그들은 기억나는 성경구절들과 찬송가 가사를 기록하여,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하며 예배도 하였다. 마침내 4월 11일 그곳에서 석방되어, 4월 14일 귀국 환영식에서 당시 해군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했던 세인 오스본 대위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오늘 저희 승무원들과 저를 이곳에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23명의 승무원 전원이 기립박수를 쳤다.
오스본 대위는 이렇게 고백한다.
"무서운 공중 사고와 고장난 비행기의 불가능한 착륙, 길고 두려웠던 억류기간, 이 모두에서 우리를 확실히 인도하셔서 마침내 우리가 자랑스레 조국이라 부르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신 그 분께 드리는 박수였다"
이 순간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케스팅되어 삶의 현장이라는 무대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역할이 끝나면 다른 출연자들에게 무대를 비워주고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삶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삶의 현장을 갖게 된다. 이 때 우리가 사라질 때 그 동안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지난 삶의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그 날에 무슨 말로 인생의 한 매듭을 지으려고 하는가?
오스본 대위처럼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가?
"나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오늘 이처럼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면 그 다음의 삶은 은총 안에서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12장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소중한 신앙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야곱의 아들들이 가금과 가난을 피하여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 땅으로 이주한지 430년만에 애굽을 탈출하는 감격을 경험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건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은 기적의 출애굽이 이루어지는 이 때 우물쭈물 대충 지난날의 삶을 정리하고 새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의 결정적인 의미를 경험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우기가 시작되는 9월 중순부터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는 아빕월에 한해의 출발이 되게 하라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3월 중순에서 4월초가 되는 것이다. 계절적으로 보면 이 때는 건기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이 아빕월이 한해의 시작이 되게 하라는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사건 속에서 믿음의 위대한 고백 속에서 삶의 한 때를 접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월절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비월 10일에 한 가족에 양 한 마리씩 준비하였다. 그것은 1년 생의 깨끗한 수양이어야 했다. 14일 저녁에 잡아 그 피는 집 문 인방과 문설주에 바랐다. 그 밤에 고기는 불에 구워 급히 먹되 누룩 넣지 않은 떡과 함께 쓴 나물을 먹어야 했다. 구운 고기를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먹어야 했다.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리하면 그 날 밤 애굽의 전역에 하나님의 죽음의 사자가 휩쓸고 지나면서 처음 난 아들과, 짐승의 첫 새끼들을 모조리 죽일 때에 문에 피가 있는 집은 넘어서 지나가리라. 이 사건으로 애굽의 바로 왕은 완전히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주었다. 하나님은 이 날의 사건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하셨다. 그들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유월절 절기를 지킨다. 그 날밤의 일들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오늘 그들이 존재함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였음을 다시 고백하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곤 한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의 성경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아 감사하는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한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진정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
첫째, 어린양 예수이다.(3-5)
성경적으로 애굽은 죄악세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 하는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육신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에베소서2:2,3)
하나님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의 사는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다. 노아의 시대가 그러했다.(창세기6:5-7)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이 그러헸다.(창세기1918:32, 19:32) 예레미야시 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예레미야5:1)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에게 더 나은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대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아래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로마서3:9,10)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세상에 오셨다.
요한복음1:29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3:16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5:12의 말씀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심령 속에 있으면 영생이 있는 자이다.
요한계시록7:10의 말씀에 천국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큰 소리로 외쳐 찬양하고 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대속하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게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히4:14-16)
다음은, 어린양 예수의 피이다.(7)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양의 피를 반드시 그 집의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야만 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집의 바깥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피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믿음은 공개적인 것이다. 구원도 공개적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 분명하게 고백해야 했다. 많은 대중 속에 묻혀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살던 사람들이 적당히 자신의 신앙적인 입지를 숨긴 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신앙은 공동체적인 성격을 띤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철저히 개인적인 고백이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표현되지 않는 신앙은 아직도 신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고백되지 않는 믿음은 아직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은 고백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의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이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게 하실 것과,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사람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인정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기생 라합의 가정이 구원을 약속 받는 장면이 여호수아2:18-21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로 들어올 때 창문에 붉은 줄을 그 창문에 매어두면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다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 했다. 이것은 약속이다. 이 약속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라합의 집안의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약속하는 상징이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그 가슴에 흐르고 있어야 한다. 그 피가 흘러 넘쳐서 삶에 분명한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의 위력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해져야할 이유이다.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 순간 우리는 익명의 크리스챤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출애굽기12:13을 보면 그 날밤에 죽음의 사자가 모든 집을 휩쓸 때에 그 집의 문에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하셨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넘어 가리라"
"너희 수고의 흔적을 보고 넘어가리라"
"너희 믿음의 연조를 보고 넘어 가리라"
"사람들에게 어떤 평을 받았는가를 보고 넘어가리라"
이런 말이 없다.
다른 길이 없다. 오직 하나의 길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이것은 광대처럼 믿음을 떠버리고 돌아다니라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에 살든지 그곳에서 믿음의 흔적을 분명히 남기라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인 것과 오늘 되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잠잠하여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내가 다 받아 가로챈다면 그것은 죄이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고난의 삶이다.(8)
독일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가 기억에 남아있다.
그들이 즐겨 먹는 빵 가운데 껍질이 아주 딱딱하게 바싹 구워진 맛없는 보리 빵이 있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 빵을 즐겨 먹지만,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딱딱하고 맛없는 빵은 전쟁을 거치면서 고생했던 지난날의 삶을 되새기며 먹는 빵이라 했다.
유월절에는 반드시 구운 고기와 함께 누룩이 들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함께 먹어야 했다. 이것은 둘 다 고난을 상기시키는 음식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후에 구원을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행복을 누리며 살 때에도 애굽의 고난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해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에 반드시 이 절기를 지키어 고난의 때를 잊지 않고 하나님은 은혜를 기억하고 겸손한 미음으로 살도록 했던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마다 반드시 덧붙이는 말씀이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사실로 인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1.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2. 어떤 성취 앞에서도 교만하지 않는다.
이루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3 모든 일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예견한다.
하나님의 구원도 양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은혜에 잠겨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고난의 때를 대비하며 산다.
쓴 나물과 딱딱한 빵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빵만을 즐기는 세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교훈을 새겨야 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되새기며 성찬을 받았다.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마음에 새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참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멘.
구원의 밤, 심판의 밤
출 12: 1-14
1)한밤중에 울려 퍼진 호곡의 눈물
사람의 눈물을 분석한 과학자는 눈물이 99퍼센트의 수분에 약 1퍼센트 정도의 염화 나트륨이 함유되어 있음을 밝혀 냈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정확한 분석일지 모르지만 과학은 그 눈물 속에 얼마나 큰 아픔과 슬픔이 녹아 있는지 조금도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에는 뼈아픈 아픔과 절망, 처절한 상처의 고통이 녹아 있습니다.
3조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지나간 태풍 루사, 그 흔적은 너무나 처참하였습니다. 김천 조마면에서 어떤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미니 버스를 타고 운행하다가 갑자기 물이 들이 닥쳐 남편은 뛰어나왔으나 아내와 아이들을 차와 함께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도 구조할 수 없어 애통하는 정경이 있었습니다. 지난 4일 수요일 친구 동역자들과 智禮면에 있는 지례교회와 대덕면에 있는 대덕교회를 방문하려고 갔습니다. 아직까지 대덕은 교통이 차단되어 가보지 못하고 지례와 그 주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물이 지나간 곳은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침수된 논밭 그리고 가옥에는 하나도 사용할 수가 없는 가제도구들이 쓰레기로 변하여 길가에나 빈터에 산더미처럼 쌓여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는 곳은 언제 루사가 지나갔느냐 하듯이 흔적도 없고 파란 하늘 만이 무정스러워 보였습니다. 참상을 당하고 울고있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을 보면서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 아내를 잃은 젊은 남편의 눈물,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 딸의 눈물 속에 어찌 수분만 있겠으며, 소량의 소금기만 있겠습니까?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보았던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통곡은 처절하기만 했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통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들불(野火)과 같이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그리고 또 다른 집으로 계속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온 마을이 곡소리로 어두움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그 집안의 기둥과 같은 장남들이 죽어 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온 동네가 통곡하며 어두움을 밝히고 있을 때, 그곳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한 동네는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한 집도 통곡하는 집이 없었습니다. 한쪽은 자식을 잃은 슬픔, 남편이나 아버지를 잃은 아픔에 울고 있을 때 한쪽은 평온하게 단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갈라놓았겠습니까?
2)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
400년이 넘어가는 오랜 노예 생활에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민족의 어두운 밤, 그 암담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역사의 주인이며,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두움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 주셔서 민족 해방의 엄청난 역사들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430년의 사슬을 끊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홉 차례나 엄청난 재앙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셨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풀어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숨통을 조이는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등 9가지의 재앙들이 덮쳐 왔습니다. 그러나 숨통이 트이고 나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요구사항을 거절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재앙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장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굽 사람들의 그 장자를 치심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재앙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임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 들어가리니 애굽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이라"(출 11:4-5)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그 밤, 欠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이 그들을 건너갈 것이며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것을 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단순히 순종했던 사람들은 그 밤 모두 살았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그들을 이기지 못한 것은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 의 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볼 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그 사망의 밤에 새 생명을 가져다 준 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3)어린 양의 피, 예수님의 피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다고 해서 죽지 않고, 어린 양의 피가 없다고 죽게 되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까? 이 무슨 小說같은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출애굽의 어린양의 피는 에수님의 피를 예표합니다. 우리 역시 어린양의 피가 있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고, 어린양의 피가 없는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던 우리에게 예수님의 보혈이 쏟아짐으로써 흰눈과 같이 되어지고 저주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죄로 물들여진 우리의 심령을 깨끗케 할 방법이 없지만 예수님의 보혈이 떨어지면 죄로 물든 우리의 심령은 흰눈보다도 더 깨끗해집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가 묻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아무도 우리를 정죄(定罪)할 수 없습니다. 애굽 땅에서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가 필요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붙들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너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너는 죄인이기 때문에, 너는 인간성이 덜 되었기 때문에, 너는 가난하기 때문에, 너는 과거가 있기 때문에, 너는 못 배웠기 때문에, 너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피에 적셔진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4) 그냥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살 길이 열렸지만 그냥 열려진 것은 아닙니다. 그 심판의 밤에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뿌려야 했고, 어린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절대로 그냥 저절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의 생명을 죽이고 그 죽음으로 가족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최고점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님은 죽으셔야 했으며, 우리의 심장에 어린 양의 보혈을 뿌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심장은 찢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젖어든 심령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고, 지옥의 권세도 어쩔 수 없으며 죽음의 권세도 흔들지 못합니다.
5) 어떻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피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단순히 아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만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사건인데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주관적 사건으로 만들어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속에 보혈의 샘이 흐르게 됩니다. 믿고 뛰어들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이 마음 흰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었네/ 주의 보혈 흐르는데 믿고 뛰어 나아가 주의 은혜 내가 입어 깨끗하게 되었네"(찬송가 213장)
보혈의 힘
출 12: 1-14
I. 피의 책, 피의 종교
성도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파우워 - 그 힘이 무엇인가? 신자들이 세상을 정복하는 그 힘이 무엇인가? 파우워 시리즈 오늘은 그 여덟번째 시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제목은 「보혈의 힘」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 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을 짜면 어린양의 피가,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성경은 피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피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마자 하나님은 피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부끄러워 나무 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나무그늘 밑에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나무밑에 숨었나이다." "네가 벗었느냐 안벗었느냐를 물었더냐.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네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하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아담 하와를 내리치는 겁니다. 아담은 이제 죽었구나 눈을 감았다 떠 보니 옆에 자신도 하와도 살아있어요. 그 대신 양 한 마리가 음메~ 음메~ 울고 있습니다. 두 눈이 쑥 빠지고 네 다리가 뚝 부러졌고 머리가 박살이 나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습니다. 양은 울부짖습니다. "선악과는 네 눈이 보고 왜 내 눈이 빠져야 되느냐고. 네 혀로 선악과를 먹고 왜 내 혀가 빠져야 되느냐고. 네 손으로 선악과를 따놓고 왜 내 다리가 부러져야 되느냐고. 네 발로 기어올라가 선악과를 따먹고 왜 내 다리가 부러져야 되느냐고. 네 피 속에 죄가 흐르고 있는데 왜 내 몸이 터져야 되느냐고" 양은 울부짖고 있는 겁니다. 울부짖는 양을 잡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래서 우리기독교는 자기가 딴 무화과 앞사귀로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양을 잡아 그 피로 아담의 하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피의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내가 만든 무화과 앞사귀 종교가 아니라 피의 종교입니다.
창세기 3:15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성경상 최초의 예언입니다. 여기 상하게 한다는 말은 피를 흘린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가 성경 첫번째 책이라면 성경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 7:14절에 마지막 환란에서 구원얻은 백성들이 나옵니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마지막날 피로 씻김 받은자들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보십시요. 성경은 피의 책이요.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II. 피의 신비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을까? 머리에 숨어 있을까 가슴에 숨어 있을까?
의학은 지금부터 100년전에 생명이 피 속에 있다는 것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기록된 성경 레위기서에 보니까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레위기 17:11)
몸 속에 있는 피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생명의 신비가 피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얀 쌀 밥을 먹고 파란 상추쌈을 먹었는데 왜 피가 빨개질까?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머리가 좋고 잘생긴 사람을 복제해 낸다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까불어도 생명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 속에 있는 생명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living soul -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 피 속에 생명의 신비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얼굴 색깔이 까만 깜둥이들도 있고 하얀 흰둥이들도 있고 노란 노란둥이들도 있는데 피는 똑같습니다. 나는 까만 사람들의 혈관엔 피가 까만게 흘러서 피부가 까만 줄 알았습니다. 하얀 흰둥이들은 몸 속에 흰 피가 흐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빨간 피가 흐릅니다. 혈액형만 다르지 않다면 깜둥이 피를 흰둥이에게 넣거나, 흰둥이 피를 노랑둥이에게 넣거나, 노랑둥이 피를 흰둥이에게 넣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피를 많이 흘리면 죽습니다. 우리 몸에 적당량의 피가 있어야 되는데 피가 모자라면 죽는 겁니다. 이 피가 원활하게 잘 돌면 건강한 것이고, 피가 원활하게 돌지 않으면 병든 겁니다.
그러나 사람 피의 신비에 비할 바가 못되는 엄청난 피의 신비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실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피의 순결을 하나님은 보장하고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방법이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피의 신비 때문에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탄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정자나 여자의 몸에 있는 난자는 피가 없습니다. 이 두 세포가 나팔관에서 결합되어질 때에 비로소 피가 생기는 겁니다. 이때 혈액형이 형성되어집니다. 그리고 혈액형이 결정되고 나면 그 이후에는 막이 씌어져서 어머니의 피가 절대로 아이 몸 속에 파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동정녀 잉태라는 것은 성령의 정자와 마리아의 난자가 결합된게 아니예요. 성자 예수님의 생명이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입니다. 때문에 전혀 마리아의 피가 예수님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성경은 이것을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예요. 마리아의 몸 속에 있는 죄의 피가 예수님께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동정녀 탄생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 값이 얼마나 될까? 제가 계산을 한번 해봤습니다. 솔로몬이 한번 기도하는데 양 1천 마리를 잡아 드렸어요. 열왕기상 8장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화목제물을 드리는데 소가 2만 2천마리, 양이 12만마리, 그것도 이등품, 흠이 있는 것, 저는 것, 눈먼 것, 상처있는 것은 안돼요. 깨끗해야 돼요. 매년 유월절마다 가족수대로 15명당 1마리씩 양을 잡았어요. 출애굽할 때는 2백 5십만 정도 되니까 16만 마리, 솔로몬 당시에 인구가 6백만 정도 되니까 4십만 마리, 평균 매년 유월절에만 잡았던 양이 5십만 마리만 된다할지라도 2천년동안이면 10억만 마리입니다. 그 외에도 제사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보혈의 값이 아닙니다. 구약에 잡았던 수많은 양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림자 값에 불과합니다. 왜 그러면 긴긴 세월 수천년동안 그렇게 수많은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야 됐던가? 예수님의 피의 가치는 돈이나 양으로 계산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값은 주판알을 굴려서 계산할 수 있는게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값은 이 땅에 있는 달러나 돈, 물질을 가지고 계산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 모든 양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는 것인데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왜 쓰지 않습니까? 이 값비싼 무기를 우리는 장롱속에 운전면허증처럼 사용하지 않는 겁니다.
사용하면 사단은 무너집니다. 사용하면 견고한 진은 파해집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질병은 떠나갑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악한 영들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하늘의 신비하고 넉넉하고 부요로운 것들이 여러분의 몫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많이 사용할수록 힘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III. 유월절 어린야의 피
오늘 본문은 해방과 구원의 책 출애굽기의 절정입니다. 성도를 묶고 있는 사단을 상징하는 바로를 굴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중 본문은 그 마지막 재앙 - 장자의 죽음 재앙입니다. 이날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그 가족이 다 죽은 것입니다. 여기 장자는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족이 한번에 먹을 수 있는 어린양을 한 마리씩 준비해야 했습니다. 본문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4일 전에 준비해 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은 불에 구워 먹어야 했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됩니다. 아침까지 남는 경우엔 즉시 불에 태워 없애버려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린 양 고기를 먹기 전에 그 피를 문설주에 뿌려야 했습니다. 뿌려진 피는 그들을 애굽인과 구별시키며 멸망의 천사의 칼날로부터 그들의 첫 태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그날 밤에 이집트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이나 가축의 모든 첫 태생이 죽임을 당하고 애굽의 모든 신들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희생 제물이 필요했듯이 인간도 죄와 죽음과 심판의 노예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자주 예수님에 대하여 "보좌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사야서 53장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유월절 어린 양은 흠 없고 점 없는 양이어야 했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입니다. 유전적입니다. 그러나 흠은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상처나 실수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즉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는 순결하신 분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은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양은 아빕월 10일에 준비해 두었다가 14일 저녁에 잡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4일전에 준비되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분내키는 대로 한 마리 좋은 것을 골라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4일 전에 미리 예비된 양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세 전에 이미 준비된 양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유월절 희생이 되기 4일전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성경의 예언과 성취입니까?
또한 그 양의 뼈는 하나도 꺾어서는 안된다고 명령받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을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3, 34절은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6절은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십자가 형에 의하면 죄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빨리 죽게 하는 방법으로 죄수의 뼈를 꺾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 전에 이미 별세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피는 반드시 문에 발라야 했습니다.(7절) 놀라운 사실은 좌우 설주와 인방에는 바르지만 문지방엔 바르지 않았습니다.(히10:29) 이것은 계약의 피를 짓밟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약속의 피를 짓밟는 자는 망합니다. 그것은 귀중한 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 가슴에 발라야 합니다. 마음에 발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뿌림을 받아 그 마음이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 피의 약속을 버리면 멸망합니다.
또한 피는 문 안에서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다니며 문 밖에서 볼 수 있도록 발라야 했습니다.(13절) 그것은 누가 보아도 피 뿌리는 집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보혈로 구원얻었음을 남이 알게 해야 합니다. 공적인 고백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로마서 10장 9,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 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엄숙하게 우리 주님께서 선언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실 만일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군가가 밖에 벌겋게 피를 바르는 것이 남보기 창피하다거나, 살려고 피를 바르는 것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고 집 안에다 몰래 발랐다고 합시다. 그 집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이집트인과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부끄러워하고, 체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아무리 피를 발랐다고 해도 피는 문 안에 있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22절)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그 피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만이 구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 때는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질 때는 붉은 줄이 늘어뜨려진 라합의 집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피 아래로 모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서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샛길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는 데는 샛길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길만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고속도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 다른 전략은 없습니다.
13절을 보십시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무엇을 보고 넘어가리라고 했습니까?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착한지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얼마나 너희가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단지 문설주에 바른 피가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뿐입니다.
피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안전합니다. 피 밖에 있으면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감정이나 느낌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피 안에서 찬송하며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모두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이집트인의 집에서 무서운 사망의 신음 소리와 곡성이 들려올 때 그들은 몇 번이나 몸을 떨며 자기네들의 맏아들을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게 밤을 새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느낌이 어떻든 간에 피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안전했습니다. 모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새벽이 되었을 때 밤새 초조하게 염려한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어휴, 괜히 밤새껏 걱정했지." 그들은 퀭해진 눈을 뜨고 억울한 웃음을 웃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 비해서 피를 바르면 안전하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은 사람은 그 사망의 음침한 밤이지만 얼마나 즐겁게 찬양하며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안심과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과연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인가? 나는 과연 천국에 갈 것인가?" 무슨 일이나 질문이 제기 될 때마다 가슴 철렁하며 불안해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피 안에 있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믿으십시요. 의심하지 마십시요. 이것이 피의 힘입니다.
오늘 우리신앙인들 중에도 피의 권세등 전혀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 늘 실패만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의 능력을 믿고 누리며 날마다 승리하는 능력의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할렐루야.
IV. 예수님의 보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면 양을 잡아 그 머리에 안수하고 제사장을 채찍질하여 광야로 몰아 갑니다. 이 양을 아사셀 양이라고 하는데 이 양은 채찍 맞으실 예수님의 그림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대략 세 시간 가량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 가량 피를 흘리신 것 같습니다. 로마인들이 쓰던 채찍은 보통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길이가 약 5m 정도가 되었는데 그 채찍의 끝에는 납덩어리나 짐승의 뼈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때리면 이 긴 채찍이 온 몸을 휘감으면서 고통을 주며 나중에는 채찍의 끝에 달려있는 납덩이가 살을 파고 들어갑니다. 짐승의 날카로운 뼈가 살을 찟어 놓습니다. 그때 다시 채찍을 당기면 살 속에 들어가 있던 납덩이가 살점을 파헤치면서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의 뼈에 살점이 묻어서 온 몸이 파헤쳐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채찍에 맞고 납덩이에 살점이 찢겨 나와 등허리가 밭고랑처럼 패여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린 피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질병을 치유해 주는 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육체의 고통을 대신했습니다. 나의 질병의 아픔도 대신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신유의 바람을 일으키는 "래리 리"라는 목사님은 39살에 귀가 들리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2시가 되었을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목사님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리야, 나가서 전해라. 고쳐줄께."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리 목사님은 "하나님, 저는 지금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합니까?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가서 전하라. 고쳐줄께." "먼저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 밤새도록 이 문제로 병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출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사가 리 목사님이 있는 병실에 들어오는 순간 리 목사님의 귀에는 이사야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리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의사에게 말합니다. "저를 퇴원시켜 주십시오." 의사가 말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수술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원으로부터 퇴원하면 당신은 귀가 먹을 것입니다."하고 종이에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리 목사님은 "나는 당신의 말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하고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마침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리 목사님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순간 귀가 뻥! 뚫어졌습니다. 그 길로 리 목사님은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위대한 치유와 능력의 사역자 레리 리 목사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시관을 쓰시므로 한없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강도들은 가시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왜 예수님만 가시관을 쓰셨습니까? 가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가시가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바로 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심으로 인류를 가시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흘리신 피는 바로 인간의 저주를 씻어주는 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진홍 가슴새라는 새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 새는 온통 몸이 쟂빛이었습니다. 이름만 진홍가슴새였지 몸은 쟂빛뿐이었습니다. 새끼를 낳아도 여전히 잿빛뿐이었습니다. 이 잿빛 새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은 이 새가 갈보리 산 위를 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산 위를 날고 있는 이 잿빛 새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세 명의 죄수들을 못박혀 십자가 형틀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는가!" 이 말을 들은 잿빛 새는 그 예수님이란 이름에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죄도 없으신 데 왜 십자가에서 죽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측은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가시 면류관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가시가 온통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 잿빛 새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다.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데, 어떻게 내가 좋은 일을 좀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잿빛 새는 예수님의 머리쪽으로 가까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부리로 머리에 박힌 가시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뒤로 날개짓을 하면서 힘껏 뽑아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머리 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뽑혀 나오면서 한줄기의 핏방울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핏방울은 잿빛 새의 가슴에 빨간 색으로 묻어버렸습니다. 그 잿빛 새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했다는 기쁨으로 가득찼습니다. 새는 자신의 가슴에 묻는 빨간 피를 씻기 위해서 냇가로 내려갔습니다. 물가에 앉아서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 안으로 들어가서 날갯짓을하면서 자신의 가슴에 묻힌 피를 씻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새의 몸에 묻혀진 빨간 피는 씻겨지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씻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잿빛 새는 자신의 모습을 물위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색깔이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습니다. 이 잿빛 새는 나중에 알에서 깨어나는 새끼들의 가슴에도 빨간 색을 지니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잿빛 새는 오랫동안의 바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던 삶이 축복의 삶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름 그대로 진홍 가슴새가 된 것입니다.
그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새 - 예수님께서 이 새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 심장에 피가 묻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가시 면류관에서 흘러내리는 보혈은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혈통에 흐르는 죄를 차단하십니다. 우리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 엄청난 보혈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십시요. 당신의 삶속에 바르고 적용하십시요. 그 능력을 선포하십시요.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므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발과 양손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손과 발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못이 박혀 흐르는 피가 땅을 적셨습니다. 우리의 발은 걷는 걸음마다 죄악입니다.
발로 짓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 대신 손과 발에 못을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 흘린 보혈은 우리의 손과 발이 지은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그 창을 받으신 곳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에 창을 받으실 때에 예수님은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로마의 군병은 예수님께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까? 후일에 예수님께서 덮었던 세마포를 조사해 보니까 예수님께서 창을 받으신 곳은 왼쪽 가슴 셋째 갈비뼈와 넷째 갈비뼈 사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병은 바로 이 부분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늘고 긴 창으로 찔렀습니다. 로마인들의 창은 가늘고 길었는데 이 창으로 갈비뼈 사이를 찌르면 그 곳이 바로 심장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것을 확인하고도 바로 이 심장을 찔러버린 것입니다. 보통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사람은 신체에 있는 모든 피를 다 쏟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심장에 약간의 피가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바로 예수님의 심장에 마지막 조금 남아 있는 그 피까지 다 쫓아내도록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서 쏟아 내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나를 위해서 다 흘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당신의 피와 물 단 한방울도 남기길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아낌없이 우리에게 나눠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이제, 이 피의 권세가 바로 당신의 권세입니다. 이 보혈의 능력이 바로 당신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피 아래 있는 당신! 모든 죄는 사해졌습니다. 모든 저주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보혈 아래로 던져 버리십시요. 어린양의 보혈로 당신의 가정에 바르십시요.
당신에게, 가족에게 바르십시요. 모든 사단의 저주는 떠납니다.
하늘 문은 열려집니다. 당신은 능력의 사역자가 됩니다.
당신은 그 보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됩니다.
기다림과 서두름
출 12: 1-14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문자 그대로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초대 교회는 바로 이 “기다림의 공동체”였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란 말인 “마라타나!”란 말을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외침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그들의 자세를 늘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기다리고자 한 자세가 초대교회를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밑바탕이 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다림에 대해서 그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에 집착하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렸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기다림은 이들로 하여금 아무 일도 안 하는, 이른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바람에 교회를 크게 어지럽히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제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구태여 우리가 우리의 생활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경고를 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먹으라 하노라”(살후 5:11-12).
이렇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림에 있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기다림은 결국 공동체에 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난 2000년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기다릴 필요가 무엇이냐 하면서 기다림 자체를 거부해 버린다면 이러한 모습 역시 결국 세상에 빠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기다리고자 하는 자세를 우리는 “기다림과 서두름”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이러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델을 오늘 본문인 출 12장의 유월절 사건에서 발견하고 싶습니다. 이와 덧붙여서 저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이 지키는 크리스마스 역시 이러한 유월절의 성격을 띨 수 있는 모습이 된다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크리스마스라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절기를 바르게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까지 이 유월절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사건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 자기들 집의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우리를 구해주는 ‘구원의 피’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의 처음 시작이라고 하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절,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유월절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주님의 성탄과도 깊은 연관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의 기다림의 자세 뿐 아니라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맞이하고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 스스로 느끼는 성탄절은 그 고유한 의미가 상실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지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보면 기다림의 의미를 상실한 채 기다림이란 말을 사용하는 모습과 다른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이 유월절 예식은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던 날 밤에 있었던 사건에서 비롯된 예식입니다. 그날 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나의 기이한 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기이한 일이란 애굽 땅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동식물의 첫 번째 자손 - 사람이면 장남, 동물이면 처음 새끼, 식물이면 처음 난 싹을 말하는데 - 이러한 처음 자손을 다 죽이시겠다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히브리 민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 히브리 민족에겐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흠이 없고 일 년 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죽여서 그 양이나 염소의 피를 대문의 문설주에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하나님이 보시고 그 집은 건너 뛰어(pass over, 逾越) 그 집의 모든 맏배는 죽음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양의 피를 바른 그 문의 집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모습이 8-11절의 말씀입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불에 태우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여기서 특히 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일을 기다리면서 해야 할 일과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곧 “서둘러서 먹으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어떤 조급함을 의미하는 말씀이 아니라 긴박함을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라는 표현은 금방 어디를 향하여 갈 채비를 갖춘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면서 다른 한편으론 음식을 급히 먹는 이러한 모습은 한마디로 “기다림과 서두름”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이 기다림 속에 채워 넣어야 할 내용을 바로 이렇게 서두르는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을 향한 서두름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보면 그것은 그동안 종살이하던 애굽땅을 탈출하는 일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서두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되 서둘러 나아갈 수 있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일을 기다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그러한 움직임 없이 기다리는 유월절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서두르는 모습이 없이 주님을 기다리겠다고 하는 자세나, 또 그러한 모습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의 사치요 게으름이요 나아가서는 안일한 하나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운동성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기다린다는 정체성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각 신앙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생명력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서두름이 없는 기다림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막연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서두름을 지닌 기다림은 히브리 민족에게 있어서 유월절의 사건이 그들로 하여금 종살이 하던 애굽을 탈출함과 동시에 가나안 땅을 향한 출발의 원동력이 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죄의 권세를 뿌리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는 강한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기다림의 모습으로 지녀야 할 서두름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를 그날 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급히 (서둘러) 먹으라’ 한 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다 소화하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5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반드시 태워 먹으라.
2. 무교병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먹으라.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4. 다 먹으라.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우리는 이러한 명령에 대한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이러한 의미를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에서 채워야 할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고자 서두르는 모습에 결부시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의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를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셨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그의 오심으로 완성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우리는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1. “피를 문에 바른 그 양의 고기를 먹되 날로나 삶아 먹지 말고 태워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른 이해를 지녀야 한다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히브리 민족에게 그 양의 고기를 다 먹으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양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양이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양을 먹듯이” 체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먹는다는 그 체험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죽음처럼 눈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 죽음을 먹어 소화시키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삶에 진정한 영양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4:16).우리들도 이처럼 나의 삶의 근본적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도록 하라는 이 점을 우리는 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를 날 것으로나 물에 삼지 말고 반드시 불에 태워 먹으라는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심판을 대신한 심판적 죽음이라는 사실을 간직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그 분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내 대신 죽으신 분은 내가 받아야 할 불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누룩(이스트)를 넣어 부풀린 빵이 아니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우리의 삶을 허황된 것으로 부풀려서 들뜬 삶을 살지 말고 순수하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과장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순수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과장해서 살게 되면, 결과적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삶을 과장해서 표현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모습을 본 다른 사람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왜 나는 저러지 못할까?”라고 자기 자신을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과장되게 포장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담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막 8:15).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렇게 과장되어 포장된 모습을 겁내지도 말고 우리 스스로 이러한 모습을 거절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 앞에 진실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희생 외에 다른 희생을 나타내려 하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삶을 부풀리게 되면, 이러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외식적인 사람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10계명의 10가지 조항을 252개 조항으로 부풀려서 사람들을 무척이나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많은 조항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 마음대로 부풀려서 사람들 앞에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나아가서 이러한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이 모습이 포장된 모습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할 때 속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그럴듯하게 포장되기 쉽습니까? 우리는 이를 분별하고 또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
이는 고난의 삶을 함께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웃을 돌아보아 고난 받는 자가 없는지 염두에 두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참된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빠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행복이라는 병의 중독자들”이라고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는 말했습니다. 이러한 행복이라는 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공허함(emptiness)’라는 더 심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인생의 귀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져다주는 유익은 이러한 고난의 삶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려 하는 삶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하지만 낮아지려 할 때에는 행복이 주어진다는 이 소박한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4. “다 먹으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것을 삼을 수 있도록 하라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철저한 삶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습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인생의 귀한 가치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보충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향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받음에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이 게재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에 대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잘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5. “혹 남은 것이 있으면 다 불에 태우라.”
혹 우리가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역시 다 심판의 대상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유보해 둔 것이 있지나 않은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현재적 임재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내일로 미루거나 다른 날로 유보해 둘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체면 때문에,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기타 등등으로 우리는 현재적 결단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결단하지 못하여 남겨둔 것이 있다면 그 역시 불타는 심판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눅 17:32).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결단을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번 성탄절을 이러한 서두름 속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기다림의 공동체로서 우리의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체험하기에 서둘러야 합니다.
순수하고도 단순한 삶을 서둘러야 합니다.
고난 받는 삶에 동참하기를, 낮아지는 삶에 힘쓰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으로만 만족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남김없이 온전히 결단하기를 서둘러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여 서두르는 모습을 지닌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을 온전케 해 나가도록 하십시다.
<기도>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어린 양처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대강절 둘째주일을 맞이하여 저희들의 기다림의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던 마지막 날 밤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다림의 모습이 어떠함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우리를 위해 어린양처럼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전개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모든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게 하시옵고, 이러한 모습의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 순수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하시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모습을 간직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심으로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가운데에서 늘 주님 안에서 자라가기를 애쓰는 주님의 자녀들과 저희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보혈
출 12: 1-14
I. 피의 책, 피의 종교
구약 성경의 기적사건들을 통한「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네번째 시간 오늘은「보혈 경험하기」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 보아라 그러면 피가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을 짜면 어린양의 피가, 신약을 짜면 예수님의 피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자 마자 하나님은 피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와 함께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그리고는 부끄러워 나무잎사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나무 그늘 밑에 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벗었으므로 부끄러워 나무밑에 숨었나이다" "네가 벗었느냐 안벗었느냐를 물었더냐.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네가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하지 않았더냐."
하나님께서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고 아담과 하와를 내리치는 겁니다. 아담은 "이제 죽었구나"하고 눈을 감았다 떠보니 자신도 하와도 살아있는 겁니다. 그 대신 양 한 마리가 음메~ 음메~ 울고 있습니다. 두 눈이 쑥 빠지고 네 다리가 뚝 부러졌고 머리는 박살이 나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습니다. 양은 울부짖습니다. "선악과는 네 눈으로 보고 따먹었는데 왜 내 눈이 빠져야 되느냐.
네 혀로 선악과를 맛보았는데 왜 내 혀가 빠져야 되느냐. 네 손으로 선악과를 땄는데 왜 내 손이 부러져야 되느냐. 네 발로 기어올라가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왜 내 다리가 부러져야 되느냐. 네 피 속에 죄가 흐르고 있는데 왜 내 몸이 터져야 되느냐." 양은 울부짖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양을 잡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자기가 딴 무화과 앞사귀로 부끄러움을 덮을 수 있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양을 잡아 그 피로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피의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내가 만든 무화과 앞사귀 종교가 아니라 피의 종교입니다.
피의 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이 말씀은 뱀, 사단을 저주하신 말씀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성경상 최초의 예언입니다. 여기 상하게 한다는 말은 피를 흘린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피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피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습니다. 창세기가 성경 첫번째 책이라면 성경 마지막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 7:14절에 마지막 환란에서 구원얻은 백성들이 나옵니다.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마지막날 피로 씻김 받은자들만이 구원을 얻습니다.
보십시요. 성경은 피의 책이요. 기독교는 피의 종교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보혈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II. 피의 신비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 있을까? 머리 안에 있을까 가슴 속에 있을까?
의학은 지금부터 120년전에 생명이 피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기록된 성경 레위기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레17:11)
몸 속에 있는 피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생명의 신비가 피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모든 질병은 울화로 인하여 피가 뭉치고 피가 썩고 염증이 생겨 일어나는 것입니다. 건강한 피가 몸 안에서 잘 만들어지면 건강한 겁니다. 하얀 쌀 밥을 먹고 파란 상추쌈을 먹었는데 피는 왜 빨갈까?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머리가 좋고 잘생긴 사람을 복제해 낸다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까불어도 생명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피 속에 있는 생명을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living soul' -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하나님께서 피 속에 생명의 신비를 불어넣은 것입니다.
얼굴 색깔이 까만 사람도 있고 흰사람 노란 사람이 있는데 피는 똑같습니다. 나는 까만 사람들의 혈관엔 검은 피가 흘러서 피부가 까만 줄 알았습니다. 백인들은 몸 속에 흰 피가 흐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빨간 피가 흐릅니다. 혈액형만 다르지 않다면 흑인의 피를 백인에게 넣거나, 백인의 피를 흑인에게 넣거나, 황색인의 피를 백인에게 넣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피를 많이 흘리면 죽습니다. 우리 몸에 적당량의 피가 있어야 되는데 피가 모자라면 죽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 피의 신비에 비할 바가 못되는 엄청난 피의 신비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의 순결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방법이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순결한 피를 위해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탄생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동정녀 잉태라는 것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된 잉태가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의 생명이 마리아의 몸을 빌린 것입니다. 때문에 전혀 마리아의 피가 예수님에게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성경은 이를 두고 '한 몸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히10:5) 왜냐하면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예요. 마리아의 몸 속에 있는 죄의 피가 예수님께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정상적인 부부관계가 아닌 동정녀 탄생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순결 - 바로 여기에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 피는 보배로운 피(벧전1:19)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피 값이 얼마나 될까? 제가 계산을 한번 해봤습니다. 솔로몬이 한번 기도하는데 양 1천 마리를 잡아 드렸어요. 열왕기상 8장 63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화목제물을 드리는데 소가 2만 2천마리, 양이 12만마리, 그것도 이등품, 흠이 있는 것, 저는 것, 눈먼 것, 상처있는 것은 안돼요. 일등품이어야 모든 제사에 희생된 양이나 소를 다 계산할 수는 없고 오늘 본문 유월절에 희생된 양의 수만 계산해 봅시다. 매년 유월절마다 가족수대로 15명당 1마리씩 양을 잡았어요. 출애굽할 때는 2백 5십만 정도 되니까 16만 마리, 솔로몬 당시에 인구가 6백만 정도 되니까 사십만 마리, 평균 매년 유월절에만 잡았던 양이 오십만 마리만 된다할지라도 2천년동안이면 10억만 마리입니다. 그 외에도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제사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제물의 값을 다 더해도 보혈의 값에 견줄 순 없었습니다. 구약에 잡았던 수많은 양들은 예수님의 보혈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가치는 돈이나 우양으로 계산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의 값은 주판알을 굴려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값은 이 땅에 있는 달러나 돈, 물질을 가지고 계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그 모든 우양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있는 예수님의 보혈을 왜 사용하지 않습니까? 왜 쓰지 않습니까? 이 값비싼 무기를 우리는 장롱 속에 운전면허증처럼 넣어두고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피의 능력이 넘칠지어다!
사용하면 사탄은 물러갑니다. 사용하면 견고한 진은 파해집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질병은 떠나갑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악한 영들이 여러분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용하기만 하면 하늘의 신비하고 넉넉하고 부요한 것들이 여러분의 몫으로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아무리 많이 사용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많이 사용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하는 우리는 힘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왜요? 보혈의 힘은 모든 죄를 소멸하고 사탄을 파하고 모든 질병과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III. 유월절 어린양의 피
오늘 본문은 해방과 구원의 책 출애굽기의 절정입니다. 성도를 묶고 있는 사탄을 상징하는 바로를 굴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10가지 재앙 중 본문은 그 마지막 재앙 - 장자의 죽음 재앙입니다. 이날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그 가족이 다 죽은 것입니다. 여기 장자는 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어린양을 한 마리씩 준비해야 했습니다.
1) 중요한 것은 그 어린 양 고기를 먹기 전에 그 피를 문설주에 뿌린 것입니다. 뿌려진 피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과 구별하여 심판의 칼날로부터 그들의 첫 태생을 보호하기 위한 표시였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 그날 밤에 이집트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이나 가축의 모든 첫 태생이 죽임을 당하고 애굽의 모든 신들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희생 제물이 필요했듯이 인간이 죄와 죽음과 심판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 피의 힘은 곧 해방의 힘, 자유케 하는 힘, 속죄의 능력입니다.
2)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 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성경은 자주 예수님에 대하여 "보좌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성경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3) 유월절 어린 양은 흠 없고 점 없는 양이어야 했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것입니다. 유전적입니다. 그러나 흠은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상처나 실수로 인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즉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는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4) 그리고 이 양은 아빕월 10일에 준비해 두었다가 14일 저녁에 잡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4일전에 준비되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분내키는 대로 한 마리 좋은 것을 골라 잡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4일 전에 미리 예비된 양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세 전에 이미 준비된 양이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유월절 희생이 되기 4일전에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성경의 예언과 성취입니까?
5) 또한 그 양의 뼈는 하나도 꺾어서는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46절을 보면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한19:33,34,36).
6) 또한 피는 반드시 문에 발라야 했습니다(7절). 놀라운 사실은 좌우 설주와 인방에는 바르지만 문지방엔 바르지 않았습니다(히10:29). 이것은 계약의 피를 짓밟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약속의 피를 짓밟는 자는 망합니다. 약속의 피는 귀중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 가슴에 발라야 합니다. 마음에 발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뿌림을 받아 그 마음이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피를 짓밟으면 안됩니다. 그 피의 약속을 버리면 멸망합니다.
7) 또한 피는 문 안에서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다니며 문 밖에서 볼 수 있도록 발라야 했습니다(13절). 그것은 누가 보아도 피 뿌린 집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보혈로 구원얻었음을 남이 알게 해야 합니다. 공적인 고백이 필요합니다. 피의 능력은 사람들 앞에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선포될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10:32-33) 엄숙한 주님의 선언입니다.
사실 만일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군가가 밖에 벌건 피를 바르는 것이 남보기 창피하다거나, 살려고 피를 바르는 것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고 집 안에다 안보이게 발랐다고 합시다. 그 집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이집트인과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기 부끄러워하고, 체면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8) 또한 아무리 피를 발랐다고 해도 피는 문 안에 있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22절).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그 피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만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인류를 다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만이 구원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홍수 심판 때는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리고가 무너질 때는 붉은 줄이 늘어뜨려진 라합의 집 안에 있는 사람만 구원을 얻었습니다. 피 아래로 모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서는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는 데는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길만이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고속도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방법, 다른 전략은 없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3절).
여러분, 무엇을 보고 넘어가리라고 했습니까?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착한지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얼마나 너희가 열심히 노력하는지 보고 넘어가리라"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단지 문설주에 바른 피가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임을 믿고 피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뿐입니다.
피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안전합니다. 그러나 피 밖에 있으면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감정이나 느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피 안에서 찬송하며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들이 모두 확신과 자신을 가지고 밤을 새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이집트인의 집에서 무서운 사망의 신음 소리와 곡성이 들려올 때 그들은 몇 번이나 몸을 떨며 자기네들의 맏아들을 보았겠습니까?
얼마나 불안하게 밤을 새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느낌이 어떻든 간에 피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안전했습니다. 모두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새벽이 되었을 때 밤새 초조하게 염려한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어휴, 괜히 밤새껏 걱정했지." 그들은 퀭해진 눈을 뜨고 씁쓸한 웃음을 웃으며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반면 피를 바르면 안전하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은 사람은 그 사망의 음침한 밤에도 얼마나 즐겁게 찬양하며 지낼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안심과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과연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인가? 나는 과연 천국에 갈 것인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가슴 철렁하며 불안해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피 안에 있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믿으십시요. 의심하지 마십시요. 이것이 피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피의 권세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사람들, 늘 실패만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의 능력을 믿고 누리며 날마다 승리하는 능력의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할렐루야.
IV. 예수님의 보혈
1) 채찍에 맞아 흘리신 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면 양을 잡아 그 머리에 안수하고 제사장은 그 양을 채찍질하여 광야로 몰아냅니다. 이 양을 아사셀 양이라고 하는데 이 양은 채찍 맞으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대략 세 시간 가량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 가량 피를 흘리신 것 같습니다.
주께서 왜 채찍에 맞으셨나요?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아 흘린 피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질병을 치유해 주는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나의 육체의 고통을 대신하셨습니다. 나의 질병의 아픔도 대신하셨습니다.
미국에서 신유의 바람을 일으키는 "래리 리"라는 목사님은 39살에 귀가 들리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 2시가 되었을 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목사님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리야, 나가서 전해라. 고쳐줄께."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때 리 목사님은 "하나님, 저는 지금 듣지 못합니다.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합니까?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먼저 가서 전하라. 고쳐 줄께." "먼저 고쳐주시면 나가서 전하겠습니다." 밤새도록 이 문제로 병원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출근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사가 리 목사님이 있는 병실에 들어오는 순간 리 목사님의 귀에는 이사야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리 목사님은 확신을 가지고 의사에게 말합니다. "저를 퇴원시켜 주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수술을 받지 않고 그대로 병원으로부터 퇴원하면 당신은 귀가 먹을 것입니다."하고 의사가 종이에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도 리 목사님은 "나는 당신의 말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하고는 병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공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마침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리 목사님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순간 귀가 뻥! 뚫렸습니다. 그 후 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위대한 치유와 능력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2) 가시관에 찔려 흘리신 피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가시관을 쓰시므로 한없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강도들은 가시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왜 예수님만 가시관을 쓰셨습니까? 가시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가시가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바로 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심으로 인류를 가시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흘리신 피는 바로 인간의 저주를 씻어주는 피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당신의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닐스의 신기한 모험」이란 책으로 최초 여성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였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깊은 생각에 잠긴 후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름을 '진홍가슴 새'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가슴 새'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진홍가슴 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 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진홍가슴 새'는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든지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어져
있는데 그 가시가 박힌 상처에서 검불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자신의 자그마한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들을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은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습니다.
그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묻은 새, 예수님께서 이 새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내 심장에 예수의 피가 묻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가시 면류관에서 흘러내리는 보혈은 우리에게 주어진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혈통에 흐르는 죄를 차단하십니다. 이 엄청난 보혈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십시요. 당신의 삶속에 바르고 적용하십시요. 그 능력을 선포하십시요.
3) 못과 창에 찔려 흘리신 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므로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발과 양손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손과 발이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옆구리에 창을 받으시고 그 창을 받으신 곳에서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로마의 군병들은 바로 예수님의 심장에 조금 남아 있는 마지막 피까지 다 쏟아내도록 창으로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서 쏟아 내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할렐루야.
주님께서는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도 나를 위해 다 흘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당신의 피와 물 한방울까지도 남기길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아낌없이 우리에게 나눠주시길 원하셨습니다. 때문에 그 보혈의 능력을 우리가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주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믿으십시오!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십시요. 많이 경험하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V. 결 론
이제, 이 피의 권세가 바로 당신의 권세입니다. 이 보혈의 능력이 바로 당신의 능력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피 아래 있는 당신! 모든 죄는 사함받았습니다. 이제 저주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보혈 아래로 던져 버리십시요. 어린양의 보혈로 당신의 가정에 바르십시요.
당신에게, 가족에게 바르십시요. 모든 사탄의 저주는 떠납니다.
하늘 문은 열려집니다. 당신은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됩니다.
당신은 그 보혈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기지 못하는 유혹이 여러분 앞에 있습니까? 주님 보혈의 피를 바르십시오.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까?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보혈의 피로 너를 쫓는다, 떠나라. 이 시간에 떠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마다 주님의 보혈의 피를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새살이 돋아 상처가 아물고 건강한 가슴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는 능력있는 사역자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여러분 자신에게 질병이 있습니까? 주님 보혈의 피를 바르십시요.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떠나지 않는 저주가 있습니까? 예수님 보혈의 피를 바르십시오.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십시오. 모든 저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떠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유월절의 진정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당신에겐 보혈의 힘이 있습니다. 보혈의 권세가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