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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인이다'
양(梁) 나라 무제(武帝)는 자기 친구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九曲山)에 은둔하자, 산중에 무엇이 있어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홍경이 시(詩)로 답했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뇨(山中何所有)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소이다(嶺上多白雲). 그러나 다만 스스로 즐길 뿐이며(只可自怡悅) 가져다 드릴 순 없소이다(不堪持贈君).' 요즘 TV에 자주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나는 30년 전에 20년간 모 회장 비서로 있다가 물러날 때 마음의 상처를 입어 한동안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일주일에 한 번 속초 모 대학 강의를 다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서울을 벗어나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서울 오면 스트레스가 살아나곤 했다. 속초 가느라고 이른 아침 양수리로 차를 몰고 가면 물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성화(聖畵)처럼 신비로웠다. 인제 상동리 고갯길도 좋았다. 거기 박인환의 시비가 있다. 그 앞에 차를 세우고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향기 맡으며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그의 시를 외곤 했다. 원통골 이름 모를 계곡도 좋았다. 차를 세우고 물 위로 점프하는 피라미의 싱싱한 생명력의 비상을 보면서 세상 스트레스를 잊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와 하늘을 덮은 스모그를 보면 자잘구레한 일상사와 스트레스가 살아났다. 그때 나는 자연이 마음을 치유해주는 최고의 명약임을 깨달았다. 자연은 우리 병을 고쳐주는 의사요, 간호사였다. 그 후 나는 꿈을 하나 가졌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 밤에 은하수 볼 수 있는 곳, 이슬 젖은 야생화 향기 맡을 수 있는 곳에 가서 사는 꿈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상 TV의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어느 날 아내가 나를 와싱톤 어빙의 소설 주인공 <립반 윙클>처럼 본다는 걸 깨달았다. 저 첨지가 저러다 언젠가 별거를 선언하고 지리산 설악산으로 갈란다고 우기지 않을까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 사전 예방 차원인지 모르지만 그때부터 내가 <자연인> 프로만 보면 사정없이 뉴스 본다면서 챈넬을 돌려버렸다. 그리곤 어느 날 엄숙하게 선언했다. 앞으론 자기 앞에서 절대 <자연인> 프로그램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할 일이 그리 없느냔 것이다. 아내는 명동에서 태어나 서울 밖이라곤 외가가 있는 부평 가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래 나는 오랜 시간 선택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박해의 시간을 가졌다. 그 끝에 드디어 어느 날 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하나의 계시를 받았다. 그건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코페르닉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나는 '내가 산에 갈 것이 아니라, 산을 내 옆에 끌어온다'는 지동설을 창시한 것이다. 그건 도시 살면서 전원생활 하는 혁신적인 발상의 전환이다. 이후 산을 내 옆으로 끌어오자 몇 개의 장점을 발견했다. 첫째로 토지 구입 부담이 없었다. 양수리나 여주에 전원주택 살 돈 필요 없었다. 나는 내가 사는 바로 그곳을 설악산 지리산으로 가정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5층을 험준한 산속의 바위굴이라 생각했다. 나는 타잔처럼 밧줄 타고 땅에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란 걸 타고 땅에 내려가면 된다. 땅에 도착하면 거긴 크나큰 밭이 있다. 나는 황무지에 밭과 화단 만든다고, 나무 베어내고 삽으로 땅을 갈아엎고 풀 베는 고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농약도 필요 없고 비료도 필요 없다. 그건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관이다. 수시로 찾아와 밭을 쑥대밭 만들어놓고 가는 멧돼지도 없다. 나는 내가 그 땅에 장미나 백합을 심는다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걸 발견했다. 그래 나는 그 땅을 지리산 설악산 같은 내 청산이라 생각했다. 봄에 백합 구근 스무 개 사와서 심었는데, 꽃대가 올라오고 꽃이 벌어져 향기 풍기자, 출근하던 젊은이는 '할아버지 수고하십니다' 깍듯이 인사 했고, 사진 찍으러 온 젊은 새댁은 공손히 목례를 던졌다. 아마 그들은 나를 아파트에서 가장 고상한 노인으로 보는듯 했다. 두 번째 장점은 사람은 어차피 먹어야 사는데, 건강한 먹거리를 수없이 찾아낸 것이다. 자연인이 공기 좋은 산속 바위틈에 흘러내려온 물 먹고, 무공해 산채 캐서 먹는다. 그 건 건강에 좋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먹거리 천지다. 마트에 가면, 제주도 화산 암반수 삼다수 있고, 백두산 천지에서 가져온 백산수 있고, 지리산 생수 아이시스 있고, 심지어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에비앙도 있다. 물이 너무나 다양해서 자연인 생수 부러워할 필요없다. 자연인이 산에서 장뇌나 도라지 몇 뿌리 캔다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전철 타고 경동시장 모란시장 가보라. 거긴 장뇌삼과 도라지, 황기, 당귀, 계피 같은 약초 천국이다. 운동 삼아 이 골짝 저 골짝처럼 골목 골목 헤매고 돌아댕기면, 점봉산 곰취나물과 홍천 눈개승마와 다래순 있고, 제천 도라지청, 인진 쑥청, 아로니아청 있다. 물론 온갖 생선과 육고기도 있다. 또 TV 틀면 속초 오징어, 부산 곰장어, 여수 먹갈치, 영광 굴비, 태안 꽃게, 산나물의 제왕 순창 참두릅, 울릉도 명이나물, 제주도 감귤, 고창 수박, 성주 참외, 영암 황토 고구마, 지리산 곶감, 의성 흑마늘 광고 나온다. 다 전화 한 통화로 가능하다. 요는 부지런하면 된다. 건강해질려면 많이 걸어다니고 소식하고 절제하면 된다. 그것만 지키면 밥 한 공기, 약초 두어 점이 보약이다. 세 번째 장점은,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모든 걸 내 손으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자, 뜻밖에 횡재가 따라왔다. 가장 중요한 게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그게 된 것이다. 자연인은 산속에 혼자 산다. 모든 걸 자기 손으로 해결한다. 나는 자연인이 산에서 그런 것처럼 마트에서 손수 먹거리 구해오고, 냉잇국 끓이고, 부추전 지진다. 그래 봤자 그 일은 어렵지 않다. 그 일은 겨울에 눈이 한 자나 쌓인 텃밭에 나가서 비닐로 덮은 배추 몇 포기 꺼내오는 일처럼 어렵지 않고, 한겨울에 목욕하려고 얼어붙은 계곡에 가서 얼음물 떠와서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며 아궁이에 불 붙이는 행위도 아니다. 길 없는 산에서 나무 베어오는 일도 아니고, 장작 패는 일도 아니다. 나는 내가 사는 아파트 5층 토굴이 매우 신통방통한 걸 발견했다. 여름엔 산이나 계곡 보다 더 시원한 바람이 에어컨 틀면 나오고, 겨울엔 쇠꼭지에서 온천수보다 뜨거운 물이 마냥 쏟아지는 것이다. 나는 암자에 혼자 사는 스님처럼 행동했다. 설거지와 청소를 전담했다. 그랬더니 처음엔 반신반의 하더니, 나중엔 아내가 봄바람이 되었다. 슬그머니 커피도 끓여주고, '파전엔 감자와 돼지고기 썰어 넣으면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좋다' 노하우도 전해준다. 나는 30년 된 바바리코트를 아껴가며 입는다. 백결(百結)선생은 누비옷을 백 번 기워입었다고 백결선생 이다. 내 바바리코트가 누비옷이 되자 아내는 새 옷 사주겠다고 통사정을 한다. 아침 산책길에 따라 나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냇물에 헤엄치는 오리를 보면서, 보온병에 넣어온 차도 따라주고 복숭아도 깎아서 손에 쥐어준다. 언제 우리 집에 이런 해빙무드가 왔는지 나는 모른다. 좌우간 아내는 3월 봄바람이 되었다. 이 모두가 내가 혼자 산속에 사는 자연인 사상을 실천한 덕이다. 그 바람에 요즘 나는 살만하다. 아내는 50년 전 내가 교정에서 그렇게 맘 설레며 바라보던 그 여학생이다. 그런데 나는 가화만사성, 전원의 꿈,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다. 그래 잠시 비법을 공개한다. |
첫댓글 김교수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것은 맛있는 먹거리 직접하는것
노력해보세
참 김교수 가족 머리스타일 멋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