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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100주년을 기대하며
2023년 10월 4일(수) 오후 5시에 동기들이 종각 근처의 중식당에서 만난다.
오늘 이 자리의 모임은 1964년도에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을 하고 1968년도에 졸업을 한 동기들이다.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한 동기들은 모두가 대한민국 1류 2류인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이다.
그중에 딱 한녀석만이 4류이자 똥통고를 졸업한 몸이리라.그 녀석이 누구인가는 자존심 관계로 생략이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동기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을터이니까.
" 강주수 김병선 서정식 이명언 이성연 임재명 차기봉 최정남 "등으로 자랑스런 대한민국 약사들이다.
저 태평양 너울 너머 날아온 서정식 동기와 " 금은숙 " 아내가 함께 한 순간이다.
정식이는 1970년대 초에 낯설고 물설은 미국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이 당시에는 동기들 뿐 아니라 선후배들도 이름만 듣던 미국으로 유행처럼 이민길로 들어선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선 후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인권도 자유도 총칼 앞엔 그림의 떡이 아니랴.
이런 상황도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이 조국을 등지게 된 이유이기도 할것이다.
이 노객도 마찬가지로 자식들이 한살 세살이던 세월이다.
모든 수속을 마치고 떠나려던 순간이다. " 네레 정말 미국으로 갈거가 " 이 한마디의 내 오마니 말씀이
삶을 송두리째 바뀌는 명령이 아니던가. 이미 출근하던 미국 업존이라는 제약사에 사표도 던진 것이다.
방법은 딱 한가지만이 아닌가. 청계천4가 다섯평도 안되는 곳에 약국을 개설을 하련다.
중구보건소 담당약사가 약국개설할 곳을 측정한다. 그 당시 약사법 시행령에는 실평수가 네평 반 이상이 되어야
허가가 될때이다. 미리 측정을 하지도 못한 나의 불찰인가.
조금 평수가 모자란다며 담당약사는 고개를 갸우뚱이다. 그것도 개설비용을 누님들에게 차용한 처지이다.
미국으로 향하려고 자그마한 주택도 이미 동생에게 넘겨준 상태이다.
어찌할까. 여러 동기들도 생각은 마찬가지이리라. 약국은 이미 계약을 한 상태이라 물러서기도 어렵다.
할말은 아니지만 담당자도 약사이다 보니 인지상정으로 개설허가를 받는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제대로 감사인사도 못한 미물이렸다. 지금도 그 약국 그 장소 앞을 지날 때면 추억이 새롭다.
집도 절도 없는 막막한 현실에 포기는 없다. 약국의 다락이 바로 나와 아내의 침실이며 주방이다.
자녀 둘과 오마니는 동생집에 맡길 밖에 없다. 그 당시 약국은 새벽 여섯시부터 밤 12시까지가 근무시간 이다.
그 바로 근처 골목에는 술집들로 매춘도 하던 곳이다. 항생제와 콘돔이 주고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여기 약국이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주문이 많은 약국입니다 " 콘돔을 취급하는 도매상 주인의 한마디이다.
술집 웨이터들이 저녁이면 콘돔을 몇박스씩 매일 팔아주곤 한다.
12개 들이 콘돔을 300원에 사입하여 400원이 그들에게 주는 판매가이다. 그들은 낱개로 1,000원 받는단다.
한통만 팔아도 드링크 백병을 파는 약사보다 거금이다.
주객들이 술자리에서 옆에 끼고 앉아있는 숫처녀(?)들에게 즉석 거품을 뿌리려니 콘돔은 필요악이 아닌가.
" 약사님 ! 어제 두박스 모두 팔았어요, 약사님 감사합니다 " 원가는 800원으로 24,000에 팔았으니 웨이터들이 노상 하는 한마디이다. 젊은 20대 청소년들이니 고생하는 모습이 항상 안타까움으로 거의 원가로 제공한 것이다.
하루 속히 집 한채를 가슴에 안아야 할 처지이다. 한달에 일요일도 두번만 약국휴무이다.
토요일 밤 12시에 약국문을 닫고 택시로 강동구 천호동 동생집으로 달려간다.
유아원을 다니는 두살 네살배기 여리디 여린 아들 딸이다.
월요일 아침 청계천에 있는 청계약국으로 가려고 대문을 나선다. 아들녀석이 절대로 엄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놓아주지를 않는다. 계속 울어제끼곤 한다. 여리디 여린 자식들을 억지로 떼여놓고 돌아서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리까.
지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다.
약국에 가까운 충무로 4가 근처에 전세방을 얻는다. 내 오마니는 네살배기 손자는 업고 두살배기 손녀는 손을 잡고 걷곤 한다.
" 아이고 ~~~ 할머니는 큰 애는 업고 막내는 걸리우곤 하네요 " 동네 아주머니들의 하는 소리들이란다.
오롯이 남자만이 우선으로 남성 우월주의가 몸에 배인 내 오마니의 습관이렸다.
5년후에야 강동구 암사동에 생애 첫 집을 매입이다. 2층 양옥집으로 친구가 직접 지은 집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4,000만원 즈음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들이 일곱살로 사립유치원에 입학한 때이리라.
지금은 쨍쨍한 정형외과 전문의사이며 오십살이다. 딸내미도 사회복지사로 현역 근무중인 마흔 여덟이 아닌가.
이렇게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은 오롯이 내 아내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도 흩으러짐이 없이 철두철미한 성격 그대로 자식들을 교육시킨 덕분이다.
애비는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한 내 아내에게 평생 미안함뿐이다. 1977년부터 2017년까지 40여년동안 삶의 전부를 약국에
쏟아부은 세월이다. 의약품 사입과 대금 지불등 조금도 틀림이 없는 아내가 모든 것을 관리한 것이다.
이 몸은 근무약사가 출근하면 언제나 근처의 산으로 향하곤 한다. 광진구에 거주할때는 아차산이요 강남구에 살때는 대모산을 항상 가슴에 품곤 한다. 비가 오나 눈이 몰아쳐도 산행은 거침이 없다. 약국을 접은 2017년 이후로는 매일 아침 일찍 한강가를 두시간 정도 걷고 있다. 고교동기들의 등산대장으로 20여년 동안 대한민국의 이름이 있는 산들은 거의 섭렵도 한다.
60대 중반 이후로는 그토록 고교동기들과 함께 즐기며 오르내리던 산행도 물거품이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산행은 금물이라며 둘레길이 전부이다.
방법은 오로지 단독 홀로 산행을 한달에 두번을 하고 있다. 홀로 오르고 내리는 산행 그 맛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리라.
부담없이 산입구에 들어서면 머리는 맑아지고 몸은 가볍게 날고 있는 느낌이다.
4년여 동안 코로나ㅡ19로 해외여행은 저 높은 먹구름속에 박혀놓을 밖에 방법이 없다.
며칠전에 추석때 뉴욕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서정식이가 조국 땅을 밟은 것이다.
임시 거주지는 남동생이 살고 있는 송파구 서울종합운동장 맞은편에 있는 아세아선수촌 아파트이다.
2023년 10월 4일이 마침 서정식동기가 아내를 가슴에 품은지 딱 50년의 세월이 흐른 기념일이란다.
동기들 모두가 자신만의 기념일이 있을테지만 이 순간은 서정식동기 부부를 축하하는 축하연인 모습이다.
차기봉동기도 모처럼 " 이은경 " 아내를 동반한 것이다. 차기봉과 서정식은 호남뿐 아니라 한국의 명소인
유달산의 혼과 정기를 받은 후예들이다. 목포고등학교의 동문으로 차기봉이가 1년 선배라고 한다.
선배이지만 사랑찾아 첫 여인을 가슴에 품은 혼인식은 후배 정식이가 이틀 먼저 거행했다고 한다.
태여나는 순서는 있어도 앞날의 운명은 하늘에 맡겨야 하리라.
기봉이와 정식이는 목포고 재학시에 전교 수석이라는 월계관도 받은 수재들이 아니랴.
선후배 두녀석들과 이곳에 함께 술잔을 부딫치고 있는 동기들도 모두가 수재일 터이다.
한국의 고등학교중에서도 KK, SEOUL, KB, 고교가 최고 1류의 명문고이리라.
2류 3류 그리고 4류는 한마디로 똥통고교가 틀림없을 그 당시 상황이다.
1951년 14후퇴 피난으로 이녀석의 나이는 일곱살이다. 먹을 것도 갱엿 한덩이가 전부이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기차의 화물칸에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옴짝달싹도 못한다.
그리고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석탄 열차에는 지붕위에도 피난민이 하얗게 덮고 있다.
하늘은 눈보라로 앞을 가리우고 어디로 가야하나. 낮설고 물설고 집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다.
일주일인가 열흘정도 지나서 충청도 계룡산 근처 두계라는 시골 산골이다. 주인도 떠난 빈집이 남한에서 첫 정착지이다.
추수하고 버려진 꽁꽁 얼어붙어 있는 야채 떡닢을 겉보리와 죽을 만들어 놓는다.
이것이나마 내 오마니 덕분이다. 맏아들 장남인 나에게는 듬쁙이다. 두분의 누님들의 눈살이 부라리기도 했으리다.
대전 성남동 피난민 마을을 거쳐서 1956년도 국민학교 5학년 2학기에 서울로 상경이다.
지금의 중부시장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곳이다. 30여개의 피난민들의 판잣집들이다.
맨 땅에 가마니를 깔고 여섯식구의 보금자리이다.
화장실도 판자로 얼기설기 설치한 공중화장실이다. 웅크리고 쭈그려 앉으면 불안키도 하다.
발을 지탱하고 있는 석가래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똥통속으로 직행이다. 밑에는 허옇게 꿈틀대고 있는 회충도 징그럽기도
무섭기도 하다.
아침이면 대여섯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곤 한다. 을지로 4가의 영희국민학교가 모교이다.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도 없다. 하루 세끼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다.
중학교 시험 1차는 경동중학교이다. 낙방은 당연한 결과물이 아닌가. 2차도 광희중인데 말할것도 없이 결과는 뻔하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국민학교에서 배운것이 아무것도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위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원서를 써주신 선생님이 무슨 까닭이던가.
1개월 지나사야 동북중으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교무실로 들어선다. 시험은커녕 두말도 없이 입학이다.
이북출신인 이사장 교장 교감등이 기꺼이 피난민 자식을 환대가 아닐까.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든다.
" 반드시 공부를 열심히 하여 2류정도 고교에는 입학시험에 합격할 것입니다"라며 정월 보름달을 바라보며 굳게 다짐도 한다.
이때부터가 밤잠을 마다하고 열심히 공부에 매달린다.
" 정남아 ~~~ 이렇게 잠도 안자고 공부하면 안돼 알겠지 " 오죽하면 내 아버지께서 읍소를 하셨을까.
180여명 중에 최상위권에 올라선 것이다.
고교입학원서는 한국의 고등학교중에서도 KK, SEOUL, KB, 고교가 최고 1류의 명문고뿐이란다.
2류 3류 그리고 4류는 한마디로 똥통고교가 틀림없을 그 당시 상황이다.
동북이라는 중학교에서 아무리 톱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현실이 아닌가. 1류중에 한곳에 응시를 하지만 역시 고배를 마신다.
나중에 졸업 20주년 행사를 남이섬에서 갖는다. 그 당시 3개반의 담임선생님 화학 선생님 교감선생님을 모신것이다.
축구도 하며 술도 함께 마시면서 신나게 즐긴다.
" 선생님들께 한마디 엿줍겠습니다, 어찌하여 고교입학시험 원서를 1류고교에만 응시토록 한 것입니까 "라고 돌아오는 버스속에서 마이크를 잡고 한마디 안할 수가 없다. 버스속에서는 한마디 말씀이 없다. 며칠후에 천호동 약국으로 3개반 담임선생님들이
각자 찾아오신다.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소주도 빠질 수가 없다.
" 그 당시에는 너희들이 실력이 가장 좋은 때이라 학교에서 절대로 경기 서울 경복 이외는 원서를 써주지 말라고 했다. 그래야 다시 동북고로 돌아올 수가 있다는 것이 학교 당국의 지침이었다 " 두서너병을 흡입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그 이후로 장학금도 거머쥐고 또 다시 공부에 매진한 것이다.
고3때 대학입시원서로 서울공대 원서도 거침없이 써준다. 연달아 두번 암흑의 골짜기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대학 자체를 모두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도 품어본다. 눈이 엄청 퍼붓고 있는 날이다. 한강다리 난간을 바라본다.
시퍼런 강물이 유혹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순간 오마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 정남아 ~ 야~ 네래 배가 고프겠구나, 어찌 집으로 안오는 거가 ~~~ "이 한마디의 말씀이 발길을 잡은 것이다.
"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이 서울공대보다도 더 좋은 곳이야, 거기에 원서를 꼭 쓰거라 "큰 누님의 간곡한 말씀으로 어쩔 수는 없다. 성대가 어드메에 있는지 관심밖이었다.
묻고 찾아서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에 원서를 접수한 것이다. 60명 모집에 1000여명이 넘게 지원한 것이다.
앞에 앉은 수험생은 시간도 되기전에 시험지를 내고 나간다. " 아이고 , 이게 뭐야, 여기도 또 떨어지겠구나 "
합격자 발표날에 오마니도 첫 동행이시다. 합격자 발표 명단을 찾느라고 많은 사람이 안달복달이다.
" 433최정남 " 합격이다. " 오마니 합격했어요" 그토록 환한 모습으로 웃는 오마니는 처음이다.
" 그래, 어서 아버지 한테 가자꾸나 야 ~~~ " 손을 잡는 내 오마니이시다.
약대가 어떤 곳이며 약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아무 관심도 없다. 이순간 약사도 아니되었다면 지금 이몸은 무엇하며 살아온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서울공대 떨어진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갖곤한다. 제약회사를 7년 정도 근무하고 약국 경영을 40여년 치른 약사이다. 2017년 약국을 모두 접는다. 이제는 정말 편히 쉬면서 해외여행이라도 아내를 함께 할것이다.
이런 다짐도 순간적이다.
" 아버지 저희 병원으로 오세요 " 아들의 이 한마디에 넋을 놓는다. SVRH에서 정형외과 교수로 며느리도 SVRH의 암병원 마취과 전문의로 근무를 하던 당시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이 실감도 난다. 아들이 개원한 모병원의 약사로 5년간 근무이다.
이곳도 후배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금년 2월에 새로 자신만의 정형외과 FOOT & ANKLE을 전문으로 개원을 한다.
서초구 사당역 11번 출구 바로 근처이다.
예약을 받은 환자만 진료를 하고 입원 수술도 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애비로서 약제실에 근무를 하고 있는 현재이다.
평생 약사면허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운명이 아니랴.
오늘 이곳에 모인 동기들도 사오십여년간 약국에 전념하던 동기들이다.
현재는 거개가 약국을 접은 현실이다. 매월 세번째 토요일이면 저 멀리 부산에도 주수, 명언이도 빠짐이 없다.
졸업 당시 A반에만 60여명이 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타대학으로 다시 입학한 친구들도 있다.
74001번 서정식이의 학번이다. 74002(김공자), 74003, 74005(정낙소). 74006(강주수) 74014(임재명) 74028(강성혜) 74029(최정남) 74030(김영한) 74032(김양자) 이와같이 학번이 맞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기억에 남은 것이다. 기타 동기들 학번은 가물가물이다. 실험실에서의 플라트가 자꾸 그리워짐은 무슨 까닭일까. 이주혁 , 임문혁, 유경한, 이종환, 김공자, 한정숙, 금현숙, 오승홍,
강창수, 최우애, 김진해 그리고 서정식등이 미국 동부와 서부에 정착하여 KOMERICAN의 꿈을 이룬 동기들이다.
나이탓으로 치부는 아니지만 혹여 이름을 생략한 벗들은 양해를 바란다.
수십년만에 동기들과 함께한 아내들은 여전히 숫처녀 그 당시의 어여쁜 모습 그대로이다.
50여년을 이 못난 남편인 동기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서러움을 받았는가.
당사자인 아내만이 가슴 깊숙히 간직하고 있을터이다.
남편의 아내이며 자식들의 오마니의 절절한 사연을 상상도 못하리라고 본다.
그저 자식들의 오마니이자 남편의 아내는 그러한 삶의 계곡과 절벽은 당연한 나날로 생각했으리다.
여기 참석한 동기들도 예외는 아니리라. 앞으로 얼마나 이어지려는지 여명의 세월일랑 짐작키도 어렵다.
10년 또는 30년이련가 아니면 오늘일런지 며칠 후가 되려는지 아무도 알수는 없으리라.
그 순간이 다가오는 그날까지만이라도 " 여보 ~~~ 사랑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으며 미안할뿐이라오 "라며 옆에 계신
아내를 가슴에 꼭 품어주면 어떠시려는가. 평생 약사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무엇을 했는가. 절체절명의 환자의 손을 잡고 따스한 한마디를 뱉은 적이 있는가. " 약사선~상~님 ~~~ 오늘은 2만원을 벌었습네다, " 빈 박스와 빈병을 수거하며 글썽이는 할아버지 노인네이다. 리어카 뒤를 밀어주며 따라가곤 하는 꺼부정한 아낙네도 환한 웃음을 지으신다.
수년전에 결혼한 아들이 이혼을 한다. 며느리는 간곳도 모른다. 술로 하루하루를 헤매던 아들이 세상을 뜬다.
두살배기 손자를 어찌할까.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몫이다. 지하실 단칸방을 월세로 이어가고 있는 생활이다.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다. 오롯이 손자 한녀석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두분이다.
지금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며 계실까.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가기라도 하실까. 답답한 마음뿐이다.
두분 노인네의 삶과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다른가.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청원약국을 하던 그 당시의 추억이 가슴을 저리곤 한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서산에 지곤한다. 봄이면 진달래 꽃이 산과 들을 휘덮곤 한다. 가을이면 추풍낙엽으로 흩어져 버리고 짓밟히는 순간을 피할 수도 없다. 인간의 하루하루가 바로 이런 삶이리라.
당연한 하루하루가 어느날 갑자기 컴컴한 나락으로 사라지고 말리다.
끝으로 벌써 저 머나먼 하늘나라로 날아간 동기들 이름도 거명해 보리라.
김영한 유경한 계충의 정낙소 이효령 신충의 이외에도 더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모두가 그곳에서나마 성대약대 12회동기회를 매월 세번째 토요일에 개최함도 좋으리다.
어느날엔가 이곳 동기들도 결혼 50주년을 훌쩍 뛰여넘어서 결혼100주년을 서로 축하를 하면서 그곳에 오를게다.
" 온누리 가장 오랜 배움의 마을 600년 쌓고 쌓은 드높은 학통 일사나 어지러랴 우리의 학통 일보나 물러서랴
우리의 정진 배움만이 보배 아닌 성균관대학 인의예지 그 자랑인 우리 대학교 ~" 교가를 모두 함께 목청이 터지도록
불러봄도 좋으리다.
"옆에 계신 아내와 함께 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하루이기를 두손 모아 기원드리나이다."
2023년 10월 4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