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장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계속해서 애굽과 동맹을 맺고 그들을 의지한 사실을 책망하고 심판을 선언합니다. 애굽과의 동맹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애굽과의 동맹 체결이 철저한 비신앙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유익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애굽에 내려갈 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비밀히 이 일을 진행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굽에 그늘에 피하여 숨으려 했는데 3절에 보시면 도리어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수욕이 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고 하십니다. 애굽은 한 때는 온 바다를 혼돈으로 빠뜨릴만한 세력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가만히 앉은 라합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서 제외하고 다른 것을 의지할 때 우리의 판단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경고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서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9절에 말한 대로 이 백성은 패역한 백성이고 거짓말 하는 자식이고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에게 죄악을 선포하는 말은 하지 말고 그들이 들을 수 있는 부드러운 이야기, 축복의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죄가 계속된다면 높은 담이 갑자기 무너지듯이 무너지며 훼파되는 심판의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18절부터 26절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멸망이 아니라 돌이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18절에는 여호와께서 기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7-33에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당대 강대국으로 북이스라엘도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앗수르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징계의 도구인 이 앗수르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빽빽한 연기”와 같이 아주 맹렬하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토록 의지하려 하는 제2의 애굽은 어떤 것입니까? 이제 그 애굽은 우리에게 수치만 가져다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곤고한 때입니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기다리는 하나님을 의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