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8
5월17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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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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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BO14qRDDfo (배한욱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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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당신의 복음 선포 사명은 고스란히 사도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사도들의 활약상은 그야말로 요즘 잘 나가는 손흥민 선수 저리가라였습니다. 종횡무진 그 자체였습니다.
사도들이 가는 곳마다 승천하신 주님의 대리자이자 협조자이신 성령의 은총과 축복이 흘러넘쳤습니다. 사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 한 마디에 지긋지긋한 악령들이 뒤로 넘어졌습니다. 평생토록 괴롭혔던 병마도 순식간에 빠져나갔습니다. 이미 숨이 끊어져 사방에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가 다시금 생기를 되찾고 벌떡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의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는 사도들이 받았던 냉대와 박해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방인들의 전도 여행길에 나섰던 바오로 사도가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던 중에,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몰려온 동족 유다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라 살상용으로 사용되던 큼지막한 돌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작정하고 합심해서 던지는 큼지막한 돌을 방패도 없이 온 몸을로 견뎌야 했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지독한 돌팔매질을 견디다 못해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혼절을 한 것입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의 모습에 소원성취를 한 유다인들은 희희낙락했습니다. 드디어 눈엣가시 같은 바오로 사도가 죽었다며 그를 멍석에 둘둘 말아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미동도 하지 않던 바오로 사도를 보고 제자들은 스승님이 죽었구나, 장례식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바오로 사도의 눈이 열리고, 입이 열리고, 스스로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제가 바오로 사도 같았으면, 그토록 많은 돌팔매를 맞았겠다, 그동안 쌓인 여독도 만만치 않겠다, 넘어졌을 때 쉬어간다고, 한 일 주일 푹 쉬면서 안정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를 보십시오. 바로 그 다음 날 아침, 아직도 여기저기 쑤시고 몸도 성치 않았을 텐데, 억지로 억지로 몸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며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운 바오로 사도는 또 다른 도시 데르베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리스트라와 이코이온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습니다.
온몸과 마음이 혹독한 돌팔매질과 매질,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너덜너덜한 상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초기 교회 공동체 교우들을 따뜻한 어조로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우리 사목자들도 이 시대 교우들에게 틈만 나면 되풀이해서 외쳐야 할 소중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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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XZiWpNGS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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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자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모범 두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을 세상이 꼭 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당신의 삶을 꼭 보여주어야 하신다고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이 당신을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을 교육하기를 원하십니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3가지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즉 첫째도 본보기, 둘째도 본보기, 셋째도 본보기라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나타내기를 원하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가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자녀가 몸이 튼튼하기를 원하면 부모가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것입니다.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어째서 그런 비뚤어진 걸음걸이로 걷느냐. 똑바로 걸어라.” 그러자 아기 게가 말했습니다. “엄마, 제게 걷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아이가 비뚜로 걷고 있다면 그건 엄마가 비뚜로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이는 그저 보고 따라 하며 배울 뿐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모범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왜 가르침이 모범을 넘을 수 없을까요? 모범에는 ‘피 흘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피 흘림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희생을 통해 흐릅니다. 누구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닮고 싶어 합니다. 지시하는 사람에게는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자기 편해지자고 말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취객이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것을 보고 아무도 돕지 않으려 하자 우리나라 청년 이수현 씨가 뛰어들어 그를 구하다가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그렇게 선로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신문에 많은 사람이 선로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지식은 피와 함께 전해져야 합니다. 학교에서 아무리 가르쳐도 그 사람을 닮고 싶게 만드는 사랑이 섞여서 오지 않으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진리와 은총이 항상 함께 와야 합니다. 은총이 피입니다.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의 제자 47명이 이미 의사가 되었거나 의대생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톤즈는 시골이고 수단에서도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공부를 굉장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다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태석 신부가 의사의 모범으로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시지 않고 말로만 의사가 되라고 했다면 몇 명이 그분의 말을 따랐을까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선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범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범으로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분께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상에 이 두 가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거의 필요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본받게 하고 싶어서 가르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법과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고 비난하고 순종하는 모습도 없다면, 자녀가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고 말을 잘 따라줄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모범도 없고 피 흘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말 안 듣는 자녀를 고치는 수많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고쳐질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그런 자녀를 자신이 직접 혼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해야 합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십시오. 현대에도 가능합니다. 신앙의 힘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모습과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겠습니까?
‘금쪽같은 내새끼’의 ‘폭언하는 두 얼굴의 아들’에서 무조건 화를 내고 부모에게 반항하고 막말하고 말이 도저히 통하지 않는 중학생 남자아이가 나옵니다. 게임머니로 부모 몰래 600만 원을 결재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부모와 누나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차분하고 착해 보입니다. 이런 아이에게 손이 올라갈 만도 한데 그런 기미가 전혀 안 보입니다. 어린데도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냥 죽겠다고도 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상해를 입혀 합의금으로 받아서 갚겠다고도 합니다. 심지어 학교다 나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착한 가족에게서 어떻게 저런 아이가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부모가 돈 버느라 너무 바빠서 금쪽이는 할머니에게 키워졌습니다. 할머니도 금쪽이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줍니다. 아이는 할머니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귀찮아합니다. 할머니를 쫓아내고는 마음이 안쓰러워 자기를 탓하기도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사람은 모범을 보고 성장하지, 지시받고 성장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모범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자기를 키워주는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엄마입니다. 하지만 금쪽이에게는 할머니였습니다. 문제는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도 순종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금쪽이는 할머니를 통해 윗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모범을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에서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둘이 돈을 벌기 위해 아이를 거의 전적으로 할머니에게 키워지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금쪽이가 어머니를 통해 윗사람에 대한 사랑과 순종의 모범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과 순종을 보고 배우도록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사제가 주교님을 사랑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신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해주고 자기 말을 따라 달라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신자들이 그 사제를 사랑하고 순종하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잘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또 그 중간에 총회장이나 간부들이 있다면 그 간부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나의 모범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것 안에서 모든 조직이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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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7-31ㄱ :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절) 평화는 내적인 조화이고 영적인 평온이며 마음의 순박함이고 사랑의 유대이며 자애로운 친교라고 할 수 있다. 평화는 미움을 없애며 전쟁을 그치게 하고 분노를 억제하며 교만을 없애고 인간애를 실천하고 불화를 잠재우며 원수와도 화해하게 한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평화를 실천할 때, 그 평화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그러기에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평화라고 우리가 믿을 때나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1요한 3,2) 때나 우리의 평화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28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슬퍼하기보다 기뻐해야 함을 설명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위대하시다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당신이 인간으로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시므로 더 위대하시고, 아들을 낳으신 분으로 위대하시고,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스럽게 해주십사고 기도하시므로 위대하신, 아버지로서 더 위대하신 분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근원을 두고 있다는 말씀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29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분께서 살아 계시고 당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유대인들이나 로마민족만이 아니라,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주님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파괴하실 것이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될 것이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 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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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예수님의 평화’는 ‘영혼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 ‘구원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1) ‘영혼의 평화’ -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몸만 편안하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평화는 ‘영혼의 평화’입니다. 영혼의 평화는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이루어집니다. 죄 속에서는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2) ‘공동체의 평화’ -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은 남이야 어떤 고통을 겪든지 말든지 관심 없이 ‘나만 편안하면’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혼자서만 누릴 수는 없고, 공동체가 ‘함께’ 누려야 합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웃들과 자기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아 놓고서 그 안에서 혼자 살면서, 혼자서만 평화를 누린다면? 그것은 그냥 감옥 생활입니다.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성당 안에 숨어서 자신을 위한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부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 5,1.4) 하느님을 안 믿는 무신론자들이라고 해도 본성적으로 ‘심판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그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참된 평화는 참 사랑으로만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3) ‘구원의 기쁨과 행복’ - ‘예수님의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 행복’과 하나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상태가 곧 평화이고, 바로 그 평화를 누리는 모습이 곧 기쁨과 행복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행복’은 예수님을 믿을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참된 평화’는 아직 미완성이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하게 완성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4-17) <‘예수님의 참된 평화’를 누리려면 하느님과 화해해야 하고, 이웃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 라는 말을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완전한 단계에 도달할 때, 그때 우리는 완전하고 영원하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시는데, ‘평화’ 라는 것이 무슨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를 주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내 평화’입니다. ‘내 평화’는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참된 평화’입니다. 그래서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내가 누리고 있는 평화를 너희도 누리기를 바란다.”이고, 좀 더 길게 표현하면, “너희는 나를 믿고, 믿는 대로 살면서, 내가 누리고 있는 참된 평화에 참여하여라.”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은, “평화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믿음으로’ 극복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은, 가난, 질병, 죽음에 대한 두려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 여러 가지 욕심들, 욕망과 집착들, 미움, 원한 등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인간 세상을 보면, 남의 평화를 짓밟는 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평화를 짓밟는 그자들 자신들은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남의 평화를 빼앗는 것은 그 자신의 평화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삶으로 실천하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극복하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이 말씀은, 부활 후의 현존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승천과 재림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슬픈 이별’이 아닙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고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세상살이와 신앙생활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의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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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엠이 주발 발표를 앞두고 리쿠르트(주말 체험 홍보 및 체험자 모집)를 다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하면서 엠이 주말을 홍보하고, 체험자들을 모집하는 일입니다. 롱아일랜드, 부르클린, 버지니아, 워싱턴 DC, 우드사이드, 베이사이드, 펠리사이드, 퀸즈, 메이플우드, 데마레스트, 필라델피아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부르클린과 워싱턴 DC를 다녀왔지만 다른 발표부부들은 대부분의 본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거리가 먼 곳은 전날 미리 가서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홍보를 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열정에 불타올라 복음을 전하던 사도들처럼 엠이 주말을 사랑하는 마음에 힘든 줄 모르고 홍보를 다니는 부부들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홍보를 열심히 다녔으니 제78차 동북부 엠이 주말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 잘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1993년 용산성당에 보좌신부로 있을 때입니다. 재개발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아파트로 전입오는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본당신부님과 나누어서 집 축복 및 가정방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듯이, 가정방문을 하면서 본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하실 수 있는 보석 같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는 주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레지오, 성서공부, 빈첸시오, 청년연합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힘든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고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무거워서 건질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30년 전의 가정방문은 마치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졌던 것처럼 풍성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전도여행을 다녀온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선입견과 질투라는 장벽을 거두어야 합니다. 날선 토론과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유 없이 배척당하고, 매 맞기도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장애가 사도들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그 위로 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듯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씨앗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사도들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켰습니다.
2022년 5월 17일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본과 물질은 욕망과 탐욕을 만나서 우리들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제 앞에 놓인 현실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종이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출하는 교우들은 늘어나는데 전입오는 교우들은 거의 없는 성당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30년 넘게 가톨릭평화신문을 애독하시는 구독자들이 계시기에 힘이 납니다. 오직 믿음으로 35년 넘게 본당을 지켜오는 교우들이 있기에 오늘도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평화는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피어나는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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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인사유명(人死留名), 호사유피(虎死留皮)>
‘황산벌’이라는 영화의 결말 부분을 보면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기 전에 사랑하는 부인과 핏덩이 같은 어린 자식들에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을 하면서 사약을 먹고 먼저 죽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고,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는 것이여.”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계백 장군이 명예라든지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가족을 몰살시키면서까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 테고, 만일 호랑이 가죽이 별로 귀한 물건이 아니라고 평가된다면, 호랑이는 죽음을 면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계백이라는 인물은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고, 호랑이의 가죽도 주가를 올리면서 팔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계백과 같은 웅지를 꿈꾸고 있고, 호랑이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평화를 남기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보면 고난과 죽음도 피할 수 있었고, 남들이야 어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아도 될 법했는데, 그분은 친히 인류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타에 오르셨으니 말입니다.
인류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것도 모자라 당신의 생명과 평화까지도 내주셨으니 말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나중에 죽어서 무엇을 남기게 될까요? 아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죽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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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비오 비오 신부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이 주는 평화와 세상이 주는 평화는 어떻게 다릅니까?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첫 번째 건넨 말씀이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이었습니다. 어느 선생님은 이 장면을 두고 일컫기를, “예수님이 참 생뚱맞다”고 표현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나타나셔서 “깍꿍, 놀랬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셨는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그렇게 생뚱맞게 느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1. 일반 사람들은 ‘평화’라는 단어를 ‘전쟁이나 다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로 사용하지만, 예수께서는 ‘고통 가운데서도 누리는 기쁨이나 자유로움’을 지칭할 때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어머니께서 자녀를 위해 빨래하고 밥할 때 힘들지만 흐뭇해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가정을 위해 야근할 때 힘들지만 가족의 행복을 생각하며 뿌듯해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때때로 고통을 동반하지만, 기쁨을 선사합니다. 나아가 순교자들의 증언을 생각해 보면, 고통 중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을 초월하는 길을 가르쳐주신 게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평화의 길’이 있음을 가르쳐주셨다고 봅니다.
2. 또 일반 사람들은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평화를 누립니다. 시험을 잘 쳤다거나, 사업에 성공했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나갈 때 크게 기뻐하지요. 물론, 이런 기쁨과 평화는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이 느낍니다만, 다른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하고 나서 무척 평온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앞서 나가지 않아도, 때때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기뻐할 줄 압니다.
그것은 자신의 결점과 화해했기 때문인데, 이런 화해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할 때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해 알려주셔서 우리가 비록 결함이 많지만 그 자체로 사랑받고 있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 뛰놀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요.
3. 끝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했을 때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때 주어지는 당당함. 비록 산이 가로막고 강이 펼쳐져 있어서 제 갈 길을 못 간다 하더라도 의기소침해하지 않는..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그런 당당함과 편안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는 찰나적이고 소수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항구적이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 길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활 시초부터 부활하고 나서도 한결같이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셨습니다.
미사 때마다 주고받는 평화의 인사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하시고, 고통 가운데서도 평화롭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시고,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미사 중에 사제와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교우분들과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평화’의 의미를 되새겨보시고, 생뚱맞다는 생각보다는 참으로 그러하기를 기원해 봅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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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고 가실 유산 중에서 평화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당신의 행방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당신의 선물인 "평화"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는, 도피적인 평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주는 평화란, 우리를 어려운 문제들에서부터 도피시켜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란, 어려운 문제들을, 영원을 내다보며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는 데서 가질 수 있는 평화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화는, 세상의 어떠한 그 무엇도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거나 빼앗을 수 없는 성질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슬픔이나 박해나 외적인 어떠한 것에도 좌우되지 아니하는 평화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앞으로 가실 행방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고자 말씀하십니다. 또한, 만일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을 기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시려고 하셨고, 당신의 영광으로 부활하시는 길을 빨리 걷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바램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되었을 때, 진정한 기쁨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이가 하느님 곁으로 갔을 때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슴을 찌르는 이별의 슬픔을 느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독을 가지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현세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하느님 곁에서 영광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앙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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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평화>
요한 14,27-31ㄱ (성령을 약속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 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그분의 평화>
메마른 이들에게
기꺼이 스며드시니
그분의 평화는
스미는 평화
어두운 이들을
환하게 밝히시니
그분의 평화는
밝히는 평화
갈라진 이들을
정성껏 이으시니
그분의 평화는
잇는 평화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시니
그분의 평화는
모으는 평화
버려진 이들을
애틋이 돌보시니
그분의 평화는
돌보는 평화
쓰러진 이들을
힘차게 일으키시니
그분의 평화는
일으키는 평화
길 잃은 이들을
바르게 이끄시니
그분의 평화는
이끄는 평화
굶주린 이들을
든든하게 먹이시니
그분의 평화는
먹이는 평화
작고 여린 이들을
오롯이 섬기시니
그분의 평화는
섬기는 평화
죽어가는 이들을
새로 나게 하시니
그분의 평화는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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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 평화를 갈망하라>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시킵니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내가 마음의 평온 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시대에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로마의 평화’를 널리 선전하였습니다. 이 평화는 힘으로 얻은 평화, 약한 이를 굴복시킴으로써 얻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 ‘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강한 힘으로 누르는 데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당신의 것을 몽땅 내어주는 사랑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예수님께서는 협조자 성령께 당신의 것을 모두 내어주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신이 먼저 평온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평화는 죽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랑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세상은 권력이나 힘으로 다툼과 소란을 억압해서 평화를 이루고자 합니다.
북한의 핵실험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억압하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을 보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랑을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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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평화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평화는 아마도 전쟁이나 갈등, 분쟁과 싸움이 없는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가식적이고 꾸며진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고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넘쳐 나는데도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문제들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어떻게든 포장되고 가려진 문제 위에 세워진 평화는 우리를 기만합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가 평화라는 가식의 탈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아들이 아버지와 맞서고,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는 아픔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치고 얻은 평화가 아니라면 그 또한 거짓 평화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평화를 바라시나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인가요? 아니면 세상이 주는 평화인가요? 권정생 작가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책 속의 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평화는 고요히 소리 없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나누고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괴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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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요한14,27-31)은 '평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14,27)
'평화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성경 안에서 보면 평화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기쁨과는 다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먼저 감각적이고 감정적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평화이고, 내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적인 평화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이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어떤 풍랑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채워지기보다는 내 것이 비워지는 것으로부터 오는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서처럼,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를 구하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을 구하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는 힘이며, 모든 이들과 자연의 피조물들까지도 사랑하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14,22)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이 설교 말씀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화이신 주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참평화'는 역설적이게도 환난과 고통과 죽음 뒤에 찾아옵니다.
오늘도 세상이 주는 평화만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환난과 죽음 뒤에 찾아오는 평화를 얻으려고도 애쓰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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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수출입 회사에서 비서직을 구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취업이 급했던 어느 청년도 공고를 보고서 이력서를 제출했지요. 그런데 서류 면접에 떨어졌다는 메시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비서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학도 잘하지 못하고, 이력서에는 온통 오타로 가득합니다. 이런 비서를 저희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청년은 너무 화가 났습니다. 서류만 보고 자신을 함부로 판단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항의와 욕설이 가득 담긴 문자 메시지를 작성했습니다. 발송하려는 순간, 이렇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뛴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습니다. 이런 항의와 욕설의 메시지를 보고서 회사에서 합격 통지서를 보낼 리가 없고, 또 자신의 화도 풀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중하게 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기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해줘서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이 청년은 뜻밖의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비서 일은 지금 상태에서는 도저히 힘들겠지만, 열려 있는 마음을 보니 행정 부처에서 먼저 경력을 쌓으면 훌륭한 비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처음의 마음대로 복수의 메시지를 보냈다면 여전히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충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연 물리적인 힘일까요? 관계 개선은 물리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졌고, 삶의 기쁨을 주는 주님의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힘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안에서 서로의 마음이 좋아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을 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을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주시면서 평화를 이뤄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평화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폭력의 관계가 아닌 평화의 관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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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어제는 어려운 환경중에도 하루하루 힘껏 노년을 살아가는 분의 편지를 보면서, 또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남의 여정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살아갈수록 힘든 나이들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늘 좋고 새롭고 아름답게 살다가, 넉넉하고 초연한 단풍 아름다운 가을같은 노년을 맞이한다면, 또 일출日出같은 찬란한 젊음을 살다가 일몰日沒같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노년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지요!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펼쳐지는 인생들입니다. 노욕老慾, 노추老醜란 말도 있듯이 대부분 힘들게 살다보면 가난과 걱정, 치매, 병고로 인해 초라하고 존재감 없는 노년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얼마전 손주를 돌보는 자매의 ‘아이는 늘 봐도 예쁘고 귀엽고 향기롭다’는 말을 듣고 ‘왜 사람은 세월 흘러 늙어 가면서 아이처럼 예쁘고 귀엽고 향기롭지 못할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떠남의 여정중에도 늘 새로운 시작에, 늘 새롭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참 이상적인 떠남의 모습을 배웁니다. 봄이 떠나면 여름이요 여름이 떠나면 가을이요 가을이 떠나면 겨울이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늘 좋고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사계절의 흐름처럼 우리 인생 역시 세월의 흐름중에도 늘 좋고 새롭고 아름다울 수 없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런 산같은 정주의 수도생활이라면 참 멋지겠다 싶었습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신록의 기쁨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새롭고 좋고 놀랍고 아름다운 산이다“”-2006.5
시를 썼던 16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결같이 좋고 새로운 정주의 불암산입니다. 과연 어떻게 산처럼 날마다 떠남의 여정중에도 늘 새롭고 좋고 놀랍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육신에 끌려가는 영혼이 아니라, 영혼이 육신을 끌고가는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을까요. 참으로 중요한 인생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읽은 사람에 관한 평이 재미있었습니다. 인물과 속물과 괴물로 나누어 살펴본 삶이었습니다. 참으로 세파속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는 인물人物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세속에 때묻어 오염된 속물俗物들이요, 부끄러움도 모르는 후안무치, 적반하장의 괴물怪物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괴물에서 더 추락하면 좀비같은 폐인일 것입니다.
예전에 자주 썼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거칠고 험한 인생 광야 여정,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이요 잘못 미쳐 중독되면 폐인廢人이다.” 했던 말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참 좋은 인물로 살 수 있을까요. 답은 하나 하루하루의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이렇듯 눈부신 신록의 아름다움이라면 죽음후 천국문이 열렸을 때의 아름다움은 정말 놀라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가 떠남의 여정에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참 좋은 평화의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참 아름다운 예수님이요, 부활후 발현했을 때 제자들에게 주신 선물 역시 평화였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참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고통이 없는 평화가 아니라 고통중에도 누릴 수 있는 참 평화입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런 평화의 선물을 남기고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같은 죽음이겠는지요! 사실 유산 문제로 인해 자손들에게 불화와 분열을 남기고 떠나는 죽음도 많지만 간혹 드물게 신앙 유산 덕분에 일치와 평화를 남기고 떠나는 아름다운 죽음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정말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며 잘 살았는지는 축제같은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의 마무리도 참 성공적이요 아름답습니다. 사도행전 13장부터 오늘 14장까지,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던 두 사도의 아름다운 선교여행을 보여줍니다. 떠날 때 마다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믿음에 충실하라 격려하면서 교회마다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과 기도한 뒤에 이들이 믿게 된 주님께 의탁합니다. 마지막으로 안티오키아 교회에 도착하여 성공적 선교여행을 보고하니 말그대로 해피엔딩입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참 좋은 선물이 됩니다. 요즘 수도원 경내에는 아카시아 꽃향기가 그윽합니다. 향기맡고 뒤돌아 바라보는 꽃처럼, 향기로운 떠남의 추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처럼, 두 사도처럼 늘 새롭고 좋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을까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선교사로서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우정입니다. 참으로 날로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이. 영원한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늘 새로운 시작의 가슴 설레는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이것은 제가 2014년 산티아고 순례 때도 체험한 진리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가장 좋았던 시간은 새벽 미사후 배낭을 싸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길을 떠날 때 였습니다. 정말 어디서나 하루만 지나면 곧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참 신비하게도 목적지 산티아고에 가까워질수록 발걸음도 가볍고 빨라졌던 추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때 가장 많이 끊임없는 기도로 바쳤던 성구는 약식성무일도서 3시경 후렴,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였습니다.
참으로 가슴 설레는 늘 새로운 시작의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육신은 저절로 영혼에 순종하여 영혼을 따라가게 됩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우정을 날로 깊이 해 주면서 우리 모두 성공적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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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oO3b77Ox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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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마태 14, 27)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새로운 삶
평화이다.
평화는
지혜의
결집이며
평등과
화합의 가치를
끝까지 따르는
인간 존중의
참된 실천이다.
예수님의
존재방식이
평화이다.
모든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평화이다.
주님의 길이
평화의 길이다.
평화는
우리의
욕심과
폭력을
생명으로
되돌려놓는다.
참된 생명은
고통이 아닌
치유와 해방을
추구한다.
생명의 참된
가치가 바로
평화이다.
믿음을 통한
가치의 탄생이
평화이다.
평화는 실천을
필요로 한다.
분열과 증오를
멈추게 하는
십자가의
평화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평화를 가로막는
갈등과 대립을
함께 하는
올바른 관계로
되돌려놓는다.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 평화는
공동체를
희망한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평화를
실천하는
공동체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실천 없는
평화는
무기력하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삶의 본질을
삶의 가치를
당신 삶으로
바꾸어 놓는
가장 좋은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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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 27)
대신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참평화입니다.
자녀들이
진정 원하는
평화를
예수님께서는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는
평화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평화입니다.
소멸될 수 없는
평화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평화입니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평화를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향할 때 만나게 되는
살아있는 평화입니다.
그 기쁜 평화를
예수님께서 먼저
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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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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