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오는 존재들
곽 흥 렬
굴다리를 따라 신천新川 둔치로 들어선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 훤히 시야가 트인다. 폐부 깊숙이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내쉬어 본다. 상큼하게 전해져 오는 물 냄새, 바람 냄새……, 답답했던 가슴이 활짝 열리면서 폐활량이 저절로 늘어나는 기분이다.
시골 고향을 떠나 이 대구라는 도시로 와 타관살이를 한 지도 어언 서른 몇 해가 되어 간다. 그 세월 사이 신천은 몰라보게 달라진 얼굴을 하고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등․하굣길에 꼬박 삼 년 동안이나 내처 지나다니며 눈 속에 익혀 왔던 이곳을 여태껏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가지런히 정비가 잘 된 냇둑, 물길 따라 평평하게 닦여진 잔디마당, 군데군데 놓인 간이 운동시설, 드문드문 조는 듯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다.
언제, 누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 꾸며 놓은 것일까. 몇 해 전 서울 나들잇길에 보았던 한강시민공원 못지않게 산뜻한 모습이다. 절로 ‘우와!’ 하고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잠시, 이 근사한 휴식공간을 가꾸느라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뙤약볕 아래서 비지땀을 흘렸을 인부들의 노고를 떠올리며 이름 모를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늦여름 밤의 신천 둔치는 막바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다. 물길 가장자리로 나 있는 산책길을 부지런히 걷는 사람,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 편을 갈라 공놀이에 열중해 있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앉아 정겹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 안개에 잠긴 듯 희뿌연 우윳빛 수은등 아래서 저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중이다.
비어 있는 벤치를 찾아 가만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川〕를 사이하고서, 휘움히 멀어지는 철길처럼 길게 평행선을 그으며 남북으로 이어진 신천대로와 동안도로를 따라 쏜살같이 오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환하게 전조등을 밝히고서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하는 차량들, 모두들 방향은 같아도 제각각 다른 사연들을 싣고 달리는 저 육중한 쇠뭉치들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젖는다. 저들은 대체 무슨 일로 저리도 바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 저렇게 달려서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것은 또 무엇일까. 부질없는 상념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이윽고 멈춘 듯 찬찬한 물길에 눈길이 가닿는다. 신천의 물줄기가, 도도하리만치 우람한 덩치를 뽐내는 백화점과 가로를 따라 열 지어 늘어선 상점들과 총총히 들어앉은 고층 아파트에서 뿜어내는 휘황한 불빛을 머금은 채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이며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다.
흐르는 것은 비단 물뿐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죄 나름의 걸음으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움직인다. 하늘 아래, 땅 위의 형상 가진 존재들 가운데 지금 흐르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흐르고, 자동차가 흐르고, 사람들이 또 흐른다. 그리고 이 순간, 무형한 존재인 시간마저도 그냥 한자리에 멈춰 서 있지는 아니할 것이다. 제각기 하나씩의 사연들을 안은 채 부지런히 제 갈 길로 내닫지만, 궁극엔 절대자가 마련해 놓은, 그 어딘지를 알 수 없는 깊고 아득한 어둠의 세계로 귀착하고 마는 것은 아닐는지…….
이 모든 현상의 주재자는 결국 ‘세월’이리라. 경기장의 관중이 찼다가 비워지듯, 극장 안의 관객들이 자리를 갈마들 듯 세월의 수레에 실려 오늘의 존재자들은 원래의 본향으로 떠나가고, 내일이면 새로운 주인공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대우주의 이 엄숙한 질서가 가슴에 싸한 바람을 일으킨다.
벤치의 등받이에 몸을 맡기고서 고개를 젖힌다.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 떼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둥실둥실 떠 흐른다. 그 광경에 눈길을 주고 있노라니, 문득 불가佛家의 가르침대로 우리들 인생도 허공중에 잠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고 마는 한 조각의 구름 같은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올려다본 하늘 저편에 정체불명의 비행물체 하나가 반디처럼 꽁무니에 불빛 한 점을 깜빡이면서 아득히 멀어져 간다. 아마도 캄캄한 어둠 속을 헤치며 어디에론가로 향하고 있는 여객기인가 보다.
어느 미지의 지점으로 방향을 잡고서 떠나는 것일까. 저 비행물체도 얼마간 저렇게 허공을 유영하다 결국엔 안착해야만 하는 시간이 도래할 테지. 온 곳이 있으면 필연 가는 곳도 있는 법,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마냥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으리라. 다만 영원불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저 가없이 광막한 하늘과 우리가 딛고 선 이 육중한 땅덩어리 정도가 아닐까. 아니, 이것들마저도 억겁의 세월 뒤에는 또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누가 아는가. 까닭에 영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어쩐지 망설여진다.
초가을 기운을 머금은 선들바람 한 줄기가 휘익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살갗을 간질이는 무형한 존재인 바람의 쓰적거림. 머지않아 스러지고 말 가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중임을 그새 달라진 바람살로 감지한다. 정녕 계절은 바뀌어 들고 있는 것이다.
*곽흥렬 약력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문단에 나와 그동안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칠팔월에 내린 눈』 등의 수필집과 수필 선집 『여자와 함께 장 보는 남자』, 산문집 『에세이로 풀어낸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세태비평집 『사랑은 있어도 사랑이 없다』, 수필 쓰기 지침서 『곽흥렬의 명품수필 쓰기를 위한 길라잡이』, 『수필 쓰기의 모든 것』, 서평집 『곽흥렬의 수필 깊이 읽기』, 제자들과의 공동수필집 『한 그루 나무, 서른 송이 꽃들』 등 총 12권의 책을 내었고,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코스미안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12년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창작기금을 받았다.
첫댓글 이 아침 맑은바람과 같은글 감사합니다 ㆍ
저도 소시절 신천길따라 등하교했던 추억이 있어 더 글속에 빠져들었습니다 ㆍ
건강하십시요 ㆍ
추소리가 무슨 뜻인지 퍽 궁금해집니다.
선생님께서도 신천 길 따라 등하교를 하셨다니 아마도 대구가 고향인가 봅니다.
생각해 보면 참 아련하게 그리운 시절이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부모님 뵈러 가끔 갔던 대구의 풍경이 그려집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대구에서 고교 대학 졸업하셨고 서울서 공직에 계시다가 말년에 대구 북쪽에
국우터널 감리단장으로 잠시 대구에 계셨거든요.^^
반갑습니다.
부모님께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셨다니 안태고향이 대구인 모양이지요.
@곽흥렬 부모님 고향은 청도 입니다.대구아래 있죠.
무심한 세월을 따라
무심히 흐르는 주위의 모든 것이
무한한 듯 흐릅니다.
삶의 기운과 흐르는 역사 속에
변천을 거듭하며 엮어 온,
대구 시민의 눈으로
곽흥렬님의 가고 오는 글을 따라 가 봅니다.
오늘을 힘껏 살며
여태 지나온 것 보다는
미래를 향하여 흘러가는,
대한민국의 모든 곳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거듭나기를 바래 봅니다.
우리네 인생이 이슬 같고 번갯불 같으며 꿈 같고 그림자 같다는 금강경 구절을 되새길 때마다 생의 변전무상함을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가르친 것인가 봅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의 귀한 글을 같은 글마당에서 읽게되니 그 감회가 남 다릅니다. 진작 말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낯선 반가움일 수도 있겠다 싶어 참고 지냈습니다. (난 예전 우리 기수 동창 카페에서 글 쓰던 김규익이야. 반갑다~ 앞으로도 글로 종종 만나자.)
동기님의 글을 보니 세상이 참 넓고도 좁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네.
어떻게 죽 글과 인연을 맺고서 살아왔는지 모르겠누나.
이제 생의 저물녘으로 가는 열차에 편승했으니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부디 건승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