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사랑받는 제자 요한복음은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이 요한만 사랑하셨을까? 당신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은 미워하셨을까? 예수님 마음은 곧 하느님 마음이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 5,45)” 하느님 마음이다. 예수님이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과 언쟁을 벌이시거나 그들을 꾸짖으신 것도 또한 그분의 사랑이다. 그들이 마음을 바꿔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이 요한을 특별히 더 사랑하신 게 아니라, 요한이 하느님 사랑을 믿은 거다. 마치 세상에서 자신만 사랑하시는 거처럼, 스승 예수님을 그렇게 가깝게 느낀 거다. 요한 사도의 그 표현은 우리 모두 그렇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과 나 사이 관계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이다. 혼인 관계처럼 말이다. 하느님과 나 사이 대화와 관계 안에는 다른 어떤 이도 끼어들어 올 수 없다. 나도 너도 각각 하느님과 그런 관계이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빈 무덤에 도착했는데, 요한은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을 확인하게 기다렸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라고(마태 16,18) 말씀하셨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사랑은 그런 거다. 내 좋을 대로 하는 게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다. 그래서 먼저 도착했어도 예수님 말씀을 따라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 확인하게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요한 20,8).” 베드로와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서야 믿었고, 토마스 사도는 그분의 상처에 손을 대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요한은 빈 무덤만 보고 믿었다. 사랑의 힘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믿으니, 이 지상 세계 너머에 있는 것과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을 실재 사실로 알아듣게 되는 거다. 비록 상상력의 도움이지만 아버지 하느님과 그 오른쪽에 계신 예수님 얼굴, 하늘나라 풍경 등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그 상상은 내게 점점 현실이 되어 간다. 실재 하느님이 내가 상상했던 그 그림과 같을 거라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하느님은 더 이상 상상 속 존재가 아니라 친구 배우자 가족처럼 내게 가까운 존재가 되어 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안에서 당신이 다른 누구와 비교되는 걸 참지 못하실 거다. 부모나 자식보다도 내게 더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신다. 사실 이 세상 누구도, 부모도 나 자신도 나를 잘 알지 못하고, 완전한 위로와 기쁨이 되어주지 못한다. 나도 너에게, 너도 나에게 그렇다. 그런데도 그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니 실망하고 때론 그 실망이 미움으로 바뀌기도 하는 거다. 외로운 인생길에 참되고 여기를 떠나는 그 순간 그리고 그다음에 계속 나와 함께 계실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그분을 자주 부르고, 그분과 별별 이야기에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고, 때로는 그분과 하나가 되는 깊은 친밀감을 느낀다. 이것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그리스도인이 이 거친 세상을 살아 가는 방식이다.
예수님, 요즘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미워하다가도 바로 주님께 송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니 제 믿음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불편한 사람을 이해하고 인내하려고 노력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데레사 성인은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를 향한 저의 존경과 사랑을 주님께 전해주소서. 아멘. |